전라도관찰사 문의공(文懿公)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1531-1604)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원종(인조의 생부)의 국구(國舅)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팔곡 구사맹의 묘소다. 부친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구순, 조부는 영유현령을 지낸 구희경, 증조부는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판의금부사를 지낸 구수영이다. 공은 지중추부사를 지낸 구치홍의 현손이며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충렬공 구치관의 종현손이고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와 혼인한 능양위 구문경의 종손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태종의 왕자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이며 의신군 이징원의 딸이고 공은 형제 중 차남으로 효순공주와 결혼하여 중종의 부마가 된 능원위 구사안과 동기간이다. 부인은 두 명인데 초배는 청주한씨로 별좌를 지낸 한극공의 딸이고 계배는 평산신씨로 이조판서를 지낸 문절공 위암 신상의 손녀이며 신화국의 딸이고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를 지낸 충장공 신립과 동기간이다. 공은 계배 평산신씨와의 사이에서 4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임진왜란 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충숙공 초당 구성, 차남은 일찍 요절한 구홍, 다음은 금화현감을 지낸 구용, 막내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를 지낸 충목공 군산 구굉이다. 5녀는 정원군 이부와 혼인하여 군부인이 되고 반정으로 아들인 능양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될 때 함께 추존된 인헌왕후다.
조부 구수영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되었지만 연산군과 사돈이었고 연산군의 총애로 높은 벼슬을 지냈기에 반정 이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몇년 후 8살 위의 백형(伯兄) 구사안이 부인이었던 효숙공주가 죽자 국법을 어기고 재혼하여 관작이 해소되는 등 집안이 어수선한 시기에 구사맹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당대 영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던 미암 유희춘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19세의 어린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8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를 차례로 역임했다. 33세에는 서장관에 제수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고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당상관의 반열에 올라 39세에 황해도 관찰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부모의 봉양을 위해 남원부사, 충청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경주부윤, 강원도 관찰사 등의 외직을 주로 지내고 60세에 승차하여 병조참판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이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이후 공조판서,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며 71세에는 종1품인 의정부에서 우찬성과 좌찬성에까지 올랐다. 이듬해 장남 구성이 유배길에 오르자 그도 벼슬을 사임하고 근신하였으며 다시 조정에 나와 판중추부사와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나 1604년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조정에서는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20여 년이 지난 후 외손자 능양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사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어 그 역시 국구로 능안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또한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팔곡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가문은 대대로 왕실과의 혼인으로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구사맹은 늘 부를 경계하였고 왕실의 부마로 호사를 누렸던 종조부 구문경과 형 구사안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일가가 왕실의 인척으로 모두 부유하였으나 그는 한번도 큰 집에 살아본 적이 없으며 부리는 노복들조차 늘 부족하였다. 오로지 녹봉만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검소함과 부지런함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웠다. 당색으로 분류하면 서인에 속하지만 구사맹은 평생 권세가와는 거리를 두었고 학문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일생을 살고자 했던 인물이다.
묘소는 원래 인근에 있었으나 경춘선 철로 확장으로 현재 금곡동에 자리잡고 있다. 아들 구굉의 묘소 바로 위쪽에 조성되어 있는 묘역에는 두 명의 부인과 합장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 앞쪽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놓여 있으며 이장하는 과정에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순서로 놓여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망주석, 문인석 순으로 배치하는 것과는 달리 문인석, 망주석의 순으로 놓여 있다. 봉분 우측에는 꽤 크게 조성된 월두형 묘표가 놓여 있고 앞면에는 해서로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綾安府院君諡文懿具公之墓 라고 적혀 있어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팔곡 구사맹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소 아래쪽에는 세 기의 신도비가 놓여 있는데 앞에서 볼 때 좌측에 있는 것이 구사맹, 가운데 있는 것이 아들 구굉, 우측에 있는 것이 손자 구인기의 비석이다. 신도비는 이수 문양의 머릿돌과 비신으로 되어 있으나 받침돌이 없어져 비신이 땅에 박혀 있는 모습이다. 비석은 崇禎八年三月(1635년 3월)에 외손자 인조의 명에 의해 국비로 만들어졌고 상부에는 贈領議政諡文懿具公神道碑 라고 전액되어 있으며 비문은 有明朝鮮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綾安府院君諡文懿具公神道碑銘幷序 라고 시작하고 있어 팔곡 구사맹의 것임을 알 수 있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비문의 글씨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 편이고 관직생활과 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명은 아들 군산 구굉의 부탁으로 조선 중기 한문 4대문장가 중 한 명인 문정공 택당 이식(1584-1647)이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고 있을 때 지었으며 글씨는 조선 중기 서예가로 현재에도 글씨가 많이 남아 있는 죽남 오준(1587-1666)이 병조참판으로 있으면서 해서로 썼고 전액은 전서에 매우 뛰어났던 선원 김상용의 아들 수북 김광현(1584-1647)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하였다.
* 능성구씨는 지금의 전남 화순의 옛지명인 능성을 관향으로 하고 고려 중기 상장군을 지낸 구존유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가문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더욱 번성하여 의정부 영의정 구치관, 의정부 좌의정 구인후 등 2명의 정승과 55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특히 가문은 조선 중기 이후 평산신씨와 함께 양대 무인 가문을 형성하며 많은 무과급제자와 훈련대장, 포도대장 등의 무관들을 배출하였고 현재에도 13만명 가량의 후손들이 가문의 인물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