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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장
1. 복음의 정신(1-6)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외치시는 예수님을 보면, 참으로 거침이 없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이라고도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부하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으로까지 말씀하기도 합니다.
듣는 자의 입장이나 기분은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은 듣는 자의 몫이었을 뿐, 예수님은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말씀을 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부당하고 배척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들의 반응에 조심스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기에 연연하거나, 세상에 머리 둘 곳을 만들기 위해, 힘 있는 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전혀 없이, 말씀을 외치신 것입니다.
왜 꼭 그렇게 하셔야 한 것입니까? 굳이 상대방을 자극하고 분노를 일으킬 말보다는,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취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리는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설득하여 끌어가는 작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인간의 대화이고 설득이 필요한 일이라면, 우호적인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말을 해야 하고, 자극하는 말도 삼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대화도 설득도 아니라 일방적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듣고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설득을 당하거나, 말하는 자에게 감동되어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 29:2-4절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도 몸소 체험했습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사와 이적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고,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한 것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이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설득으로 하나님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적과 기사보다 더 효과 있는 설득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보고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과 눈과 귀를 주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말씀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여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특성이 죄에 있으면서도, 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의에 붙들려 있는 인간을 책망하면서, 저주와 멸망과 영원한 죽음이 자신의 본질임을 보게 하고, 참된 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특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안고 있는 특성 또한 그대로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 성도가 할 일입니다.
이 말을 설교자는 성도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거나,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든 말든, 내 말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의식했을 때, 진리는 진리 그대로 드러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전하는 자는, 참으로 어려운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복음을 위탁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탁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사람의 입장과 기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의 죄와 악함을 드러내는 말은 주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말은 5-6절의 말씀대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환심을 사고, 사람의 마음을 얻음으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항상 인간의 욕망과 충돌하면서, 죄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아첨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이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 성도의 말에,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싫어하는 말, 기뻐하는 말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무슨 말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가를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설령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고 해도, 직접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설교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한 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복이 된다는 말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올 복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3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소위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에 대해 바울과 같은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설교를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나거나, 속임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광을 위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간사함과 부정에서 난 것이고, 속임수일 뿐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복음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위탁받은 복음만을 가지고 갔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라면, 내게 기쁨으로 다가와야 하고, 평안과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왜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하느냐며 복음이 아니라고 밀쳐 냅니다. 참된 복음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충돌과 갈등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에 빛이 무엇이고, 죽음의 땅에 임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선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신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사람의 반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 복음을 위탁받은 것이 사도이기 때문에, 사도 또한 사람을 염두에 두거나 의식하지 않고, 위탁 받은 복음만을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신 아들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아들을 보내신 분을 알려면, 필히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죽었음을 외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로 다가왔는가를 말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입니다.
만약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말한다면, 분명 사람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 상실된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봅니까? 죽은 자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는 것일까요? 사업을 번성하게 하고, 자식을 잘되게 하는 것으로요? 건강하게 하고, 여러 가지 사고에서 지켜주시는 것으로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특정한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상관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자기 백성을 생명이신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가시는 모든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면,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인간에게, 갈등과 충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신 택한 백성들은, 복음에서 자신의 죽음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감사의 마음으로 교회를 찾게 됩니다. 성도는 이런 마음으로 만나고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정신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7-12)
사랑의 관계는 어떤 약속된 장소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고 먹는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오랜 세월을 한 공간에서 어울리고 함께 했다면, 친분관계는 이뤄질 수 있고, 인간의 정이라는 것도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닙니다.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너무 과장된 말처럼 들리지는 않습니까?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겨우 3주간 복음을 전하고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로 인해서 그곳에서 도망치다시피 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로 다시 방문 하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과 많은 시간을 교제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3주의 기간으로, 누군가와 아주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사교성이 있거나 3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과, 3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수련회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자기들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날과 시간에 회당으로 모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친분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단지 보고 싶다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도 너희를 위해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성도와 이런 관계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 하여 친분관계를 이뤘다고 해도, 결국은 남남이라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친한 관계라고 해도,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타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는 것도 기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바울이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에게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곧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사랑의 관계를 알게 되면, 형제를 위해 목숨을 주는 것도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러한 말에 대해 부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사도와 같은 말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는 과연 갈보리교회 성도들에게, 목숨을 주기를 기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면,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우리와 달라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지만, 바울은 믿음이 우리보다 더 강해서, 목숨을 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실제로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준 일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은 말만 했을 뿐, 실제로 행동되어진 것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목숨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준다고 해도, 그 대상은 오직 한 사람일 뿐입니다. 목숨을 내어 준 후에 다시 부활해서, 또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면, 바울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는, 단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바울의 말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바울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제 목숨까지도 여러분에게 주기를 기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고, 바울이 아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울이라는 인간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바울의 믿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곧 바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것을 대신 죽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런 식의 죽음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끝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는, 자기 자신감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순간의 자기 느낌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주기를 기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사랑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곧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가 이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이 사랑으로 형제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를 위해 한 것이 없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실행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실행을 해야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사도는 형제를 위해, 실제로 목숨을 준 일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그런 말을 할 때도, 바울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실제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이 없는데도,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자기 믿음으로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믿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말합니다. 그 믿음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 않고,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를 보게 하는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자기 생존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생명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랑의 관계에 있는 성도의 영혼을 바라보는 바울이었습니다.
7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이처럼 바울은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성도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성도를 대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의 성품으로 보지 마십시오. 바울의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그 사랑을 내어 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권위는 없습니다. 성도는 다만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만날 뿐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면, 항상 자기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리고 받을 자격과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의 실상입니다. 목사라는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을 상대하려고 합니다. 권위를 주장하면서, 그에 합당한 대접을 요구합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심판을 받아야 할 자신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접하셨는가를 알 것이고, 저주의 자식인 자신을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으로 대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결코 목사라는 권위를 앞세우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장할 어떤 권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봉사의 직무이지, 권위를 주장하라는 지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지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는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를 위해, 목숨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9-10절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사도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도는 교회를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곧 돈 문제가 개입되지 않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교회로부터 쓸 것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빌 4:16절을 보면, 빌립보교회가 사도의 쓸 것을 보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헌금을 모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곧 사도는 사도가 교회로부터 쓸 것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자신을 위해,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간 것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갔을 뿐이고, 그 사랑에 의해서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복음만을 내어 놓았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성도의 관계입니다.
목사와 성도가 돈이 개입된 관계로 만나게 되면, 성도는 목사의 생활비가 부담스러워지고, 목사는 받는 생활비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1-12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를 사랑할 자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그 사랑을 내어놓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부터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형제를 여러분이 받은 그것을 내어 놓아야 할, 지체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형제에게 목숨을 주기를 기뻐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3. 동일한 고난(13-16)
목사가 교인들에게 많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설교를 듣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본문으로 13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곧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목사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말씀이 성도에게 역사하여 큰 능력을 이루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13절의 말씀 그대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바울이 하는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역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을 곡해함으로써, 목사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역하면 안되고, 무조건 받고 순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교회의 폐해는 참으로 심각하다 할 정도입니다.
본문은 목사의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가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목사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목사가 하는 말이라고 해도, 복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안받고는, 설교를 듣는 사람의 판단에 달린 문제가 됩니다. ‘내가 들어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판단되면 받겠다’는 식이 됩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까? 그러면 어떤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까? 제 설교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이고, 반감을 가지지 않고 옳다고 하며,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까?
그런데 반감을 갖든 복음으로 인정을 하든, 그것은 자기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제 설교를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인간의 판단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사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에게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곧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사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고, 또 말미에서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여러 가지 요소가 개입됩니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나 수준, 자신과의 관계 등등 많은 요소가 개입되어서, 누구의 말은 듣고, 누구의 말은 듣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지혜에 놀랐으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예수님의 신분이나 출신이 별볼일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대단한 집안의 출신이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시골 작은 교회의 볼품없이 보이는 목사의 말보다는, 도시의 큰 대형교회의 박사 학위를 가진 유명한 목사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받지 않고는, 개인의 결단과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데살로니가교회가 사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을 두고, 그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받음을 유대에 있는 교회가 받았던 동일한 고난으로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동족으로부터의 고난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상상할 수 없는 박해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민족으로부터 단절되는 일이고, 고난과 상상할 수 없는 박해가 예상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죄를 깨닫게 되고,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한 메시아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믿음에 붙들리는 것이고, 어떤 고난과 박해가 예상된다고 해도, 믿음의 길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순종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 의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였고, 말씀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이러한 믿음의 역사, 순종은 끊어지지 않고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가 유대에 있는 교회와 동일하게, 동족들로부터 받는 고난의 길을 갑니다. 사도는 이것을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언급하는 ‘본받음’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본받아 실천하는 의미라기보다는, 동일한 말씀의 역사와 동일한 믿음 아래서,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성도라면, 같은 믿음의 모습이 나오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십자가에 죽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은 믿음의 길이었고, 성령이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믿음의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에서의 편안과 복을 이뤄주는 것이 믿음의 일이고, 또 믿음의 인도일까요? 하지만 과연 성경에 누가 그러한 믿음의 인도를 받았습니까? 사도들 중 누가 그러한 인도를 받았습니까?
예수님도, 사도도 전혀 가지 않은 믿음의 길을 우리가 간다면, 그것은 사도들의 믿음과 다르다고 해야 합니다. 곧 사도와 동일한 믿음이라면, 사도가 간 고난과 동일한 고난의 본받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사도에게 역사했던 말씀과 동일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유대 교회와 동일한 믿음이 역사함으로 인해서, 동족에게 고난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게 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사람의 말로 받은 것이라면, 자신에게 고난이 되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 그 길로 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면, 말씀의 역사로 인해서 육신에 이로운 길보다는, 영혼이 사는 생명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목사의 설교를 복음으로 인정하고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개인적 생각과 판단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에게는 말씀이 역사하게 되고, 말씀의 역사는 성도로 하여금,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고난과 박해의 길이라고 해도, 영혼이 사는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역사함으로써 성도는 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사랑이 능력이 되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유대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했고, 데살로니가교회도 유대 교회와 동일한 고난의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동일한 주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좁은 길도, 고난의 길도 기꺼이 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동일한 말씀의 역사 아래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17-20)
성도들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하늘나라에 가서 면류관을 받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이 마무리 된다고 생각합니다.
딤후 4:7-8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하늘나라에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소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소망한 의의 면류관은, 머리에 씌워지는 뭔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강림하시게 되면, 예수님의 백성들은 영원토록, 예수님과 영원한 의와 생명의 관계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미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에게는 장차 받을, 영광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처럼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의 소문을 퍼지게 함으로써,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사도의 업적이 부각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웠고, 사도의 열심과 가르침으로 인해서, 교회가 믿음의 소문이 퍼진 것이라면, 바울의 업적은 자랑할 만합니다.
‘바울이 했다’는 것은, 바울의 능력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단 한시도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자신이 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이만큼 키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위해 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사도에게는 큰 기쁨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선 그들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워 역사하셨다는 것과,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진심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에게서,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나올 수 없고, 탐심의 탈을 쓴 말 역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도의 이런 마음은 빌 4:1절의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도, 데살로니가교회와 동일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사도의 사랑은 특정 지역과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사도의 사랑은 사람을 바라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선택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동일한 관계 안에서 나타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도의 심정이기 때문에, 사도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해주는 것에 마음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선 데살로니가 교인은, 이미 그것으로 바울에게 기쁨이요 소망이며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따로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도의 마음 앞에 목사인 저로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동안 목사로서 봉사해 왔다는 말도, 감히 할 수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동일한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목사는 성도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성도는 목사에게서 그리고 다른 성도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사랑을 받음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합니다. 그런데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목사가 사랑이 없다고 하고, 교회가 사랑이 없다면서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를 보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받고 싶은 것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사도에게 예비되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이며 사랑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성도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은, 세상 누구로부터도 받을 수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또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처럼 존귀한 것을 받은 성도라면, 사람에게서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들, 그 사랑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겠습니까? 또한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이겠습니까? 수시로 변하고 변덕을 부리는 것이 인간의 사랑인데, 그런 사랑을 고대하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대한다고 해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으로 주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주어진 성도에게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도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주는 것도, 기뻐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있었다면 바울은 일찌감치 죽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일까요?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신의 결단과 의지를 믿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는 자기감정, 자기 사랑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20:35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까? 받는 것보다 주는 행위가, 더 신앙적이고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윤리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받은 것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바울이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고자 했던 것은, 그에게는 받아서 넘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에서나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을 내어 놓는 일에만 힘을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줄 수 없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히 복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준다는 선한 행위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받은 것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로부터 받고자 하는 탐심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도, 사도는 이미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받은 그것으로 기뻐했기에, 교회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도에게 데살로니가 교인은,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처럼 성도는 서로에게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과 용서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관계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17-18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가는 것을 왜 막았겠습니까? 이미 복음이 전해졌는데, 사도를 막는다고 해서, 전해진 복음이 없어지기라도 하겠습니까? 사탄이 바울을 막는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의 관계로 세워져 가는 것을, 훼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탄의 이런 훼방 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인간관계로만 만나게 하면서, 한 몸의 관계를 훼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를 보게 되면, 우리가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함께 천국으로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한 몸으로써 주님을 나타내고 자랑하면서 재림을 기다리며,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관계입니다. 내가 연약해지고 흔들릴 때면, 다른 형제의 믿음을 보면서, 그에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고, 나에게도 함께 하시고 역사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서로의 믿음을 돕는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에게 기쁨이고 소망이며 자랑의 면류관이 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은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서 형제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