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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에 대하는 우리의 각오
함석헌
비상시
지금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에게 무조건 복종을 명령하고 있다. 말로는 무조건이라 하지 않고 “무책임한 안보론”이라든지 “최악의 경우 자유의 일부”라든지, 복종이라 하지 않고 “협력”이라든지 하는, 둥그스럼한 말을 쓰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체제에 맞추기 위해서 하는 것 뿐이요, 실지에 있어서는 정부의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반대는 커녕 비평조차도 못하게 하자는 방침이다. 동아일보의 사건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그 논설이 반드시 정부의 방침에 대한 강한 반대도 아니요, 결코 무책임한 말이라 할 수도 없다. 그만 정도의 말도 못한다면 무엇을 민주주의의 나라라 하겠는가? 그런데 그 때문에 사장이 불려가고 중요 간부와 기자가 쫓겨나지 않았나? 형식은 사면이지만, 까놓고 말하면 쫓겨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발표하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라면 단순한 장사 기관만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일제 밑에서 나라를 위해 싸워 온 민족 양심의 한 상징이다. 혹시 얼마쯤의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그 역사적 지위를 보아서 감히 그냥 두느냐 없애느냐 하는 문제는 경솔히 들고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 바른말 하자는 정신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동아일보에 대해 그렇듯 심할진대 다른 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우리는 민주 국민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부는 정부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믿는 바가 있어야할 것이다. 좀더 옳게 말한다면, 우리의 믿는 바가 뚜렷해져서 정부가 그것을 따라 그 정책을 세우도록 돼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체요, 정부는 우리의 결정을 실행하는 실행기관이기 때문이다. 기계를 사람이 만들었지만 잘 부리지 못하면 제 만든 기계에 말려 들어가 저와 기계가 다 망하게 된다. 정부는 하나의 기계다. 나라가 옳게 되려면 국민이 깊은 주의와 민첩한 용기를 가지고 정부를 잘 감시하고 지도해야 한다. 위험 중에도 조절기에 고장이 나서 지나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가 가장 무섭지. 지금은 바로 그러한 경우 아닐까?
솔직 용감하자
우선 우리가 서로 솔직하고 용감하도록 하자! 비상사태가 선포됐을 때 잘한다 하고 환영한 사람은 별로 없지 않았나? 그런데 왜 말로는 다 지지 한다 하는가? 진심으로 지지한다면 좋다. 그러나 마음에는 잘못이 있다 하면서도 매맞고 감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그런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정부를 대접하고 아끼는 도리가 아니다. 강도가 침입해서 칼을 들고 위협할 때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그놈과의 이에는 전혀 이해의 길이 없고, 그놈에게서는 있는 재산을 다 주고라도 한 목숨을 건지는 것이 가장 어진 일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와 정부 사이는 그럴 수는 없다. 나라함은 결코 장사도 아니요 공업도 아니다. 사람노릇 함이요, 우주에 뚫린 진리에 따라 어떤 보람진 것을 실현하자는 일이다. 그러므로 피차 서로 바로 잡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마치 제 만든 기계가 고장이 나서 미쳐 돌아갈 때, 거기 죽을 위험이 있는 줄 알면서도, 책임을 느끼고, 고치도록 힘써야하는 모양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정부의 잘못이 미친 기계 같이 위험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고쳐주려 애를 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설혹 죽어도 나라는 살지만, 그렇지 않고 목숨을 구차히 아껴 서서 보고만 있으면 비록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아니요, 나라도 아니다.
나는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정부 사람들 귀에 매우 거슬릴 줄을 잘 안다. 나는 이 정부가 성립되던 때부터 줄곧 싸워 온다. 허지만 결코 미워서 만은 아니다. 나는 서 파키스탄이 아 무리 비인도적으로 동 파키스탄을 압박해도 분개는 할지언정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없다. 내딴으로는, 아무리 무식하고 덕이 없긴 해도, 이 나라를 지키고 여기에 도리를 살리는 것이 내 책임이요,이 정부는 잘못이 많기는 해도 말을 하면 그래도 들을 수 있을거다 믿는 점이 아직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잘못이 아무리 많아도, 정부가 서있는 날까지는, 그것을 바로 잡으려 애써 있는대로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정부를 아끼는 국민의 의무다. 정부도 사람이다. 어찌 萬能萬善이겠나? 그럼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지, 정부는 설혹 잘못되어 끝내 듣지 않고 국민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은 절대로 정부를 버려서는 아니 된다. 버리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정부가 물러나도 새 정부를 세울 수 있지만,한 정부를 사랑할 줄 몰라 잘못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정부와 함께 영원히 멸망해 버리고 나라가 영 다시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의태자 하나라도 못냈다면 신라는 고려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요, 정포은 하나가 없었더라면 이성계는 짐승 나라의 대가리일지언정 이조의 태조노릇은 못했을 것이다. 제발 이 나라의 장래와 자유의 성장을 위해 삼천오백만 국민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이정부를 아껴 싸우는 사람이 있게 하라!
너무 늦고도 이른 선포
비상사태 선포하는 것을 찬성은 아니 하지만 비상시(非常時)가 아니란 말은 아니다. 아침에 동북새가 서면 그날 소나기 올 줄을 어찌 모르며, 저녁에 서편에 놀이 서면 내일 날이 갤 줄을 어찌 모를까? 보통 지각을 가지는 인간이면 천기를 분별할 줄을 알듯이 보통 상식을 가지는 국민이면 이 시대를 보고 비상시인줄을 모를 리 없다. 비상시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 아니라 그 선포의 동기와 시기에 다시 생각할 점이 있다 해서 하는 말이다.
그 선포하는 시기가 적당치 못하다. 이르다면 너무 이르고 늦다면 너무 늦다. 참 의미에서 삶은 본래 비상이다. 막막한 우주안에 생명이라는 눈에도 뵈지 않는 한 꿈틀거림이 억만고의 고요를 처음 깨쳤을 때 벌써 비상이었다. “늘”이 없다. 순간마다 오직 하나의 삶이다. 그러므로 삶은 쉼 없는 생사의 싸움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문의 國자가 그것을 잘 증명한다. 口는 사람이요 一은 땅 인데 그 위에 무기를 의미하는 戈을 더 하고 그 밖에 울타리 를 표시 하는 口을 둘러서 끊임없이 지켜서만 나라는 서 있을 수 있는 것을 표했다. 나라에는 언제나 비상시지 비상시가 따로 있지 않다. 소위 비상시란 것은 정말 비상시를 지키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현상뿐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는 이 비상시 선포는 너무 늦었다, 이제 중공이 유엔 가입하는 것을 보고야 시국이 절박했다. 당황하니 그럼 그동안은 맘 놓고 놀았던가? 그것도 정치하고 국방했다 하겠나? 지금와서야 김일성이 온다고 야단을 치니 이 10년을 무엇했단 말인가?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유의 제한을 당하면서도 참았는데 이제 와서야 새삼 발견 한듯 다급한 소리를 하니 우리 기대를 너무 저버린 것 아닌가? 정치한다면 중공이 국제 무대에 큰 소리 치고 나올 날쯤 미리 짐작했어야 할 것이요, 국방이라면 10년 동안에 그 준비는 벌써 됐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혹시 미국 정책의 급변을 들어 말할지 모르나 거기가 근본 잘못이 있는 곳이다. 자주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러기에 한일 회담 때 반대하고 월남 참전 때 반대해 주지 않았나? 왜 그때에 아니 듣고 이제 와서야 떠드나? 그 의미로는 늦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너무 서둔다. 보통 비상시라면 당장 전쟁이라도 터지게 돼서 선택의 여유가 없어진 때에 하는 것이다. 그때는 테니슨의 말대로 “왜냐고 이유를 따질 것 아 니라, 다만 (받은 명령대로)하고 죽을 따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대적과 이마를 부딪친 순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의심도 반대도 하지 않고 국민이 스스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긴축 생활을 해야 할 줄을 안다. 각별히 지지해라 협력해라 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으로 안다. 숨김없이 말해서, 지금 국민은 어리둥절 한다. 아직 그 순간은 아니기 때문이 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비상시냐고 묻는다. 타임지의 평같이 “망상적 비상시(Imaginary Emergeney)”는 아니라 하더라도 국민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그것도 모르리 만큼 소경이요 귀머거리냐 책망할지 모르지만, 대체 누가 그렇게 국민을 소경, 귀머거리로 만들었나? 정부가 신문 잡지의 자유 보도를 제한했기 때문 아닌가? 대체 국민이 무엇으로 이북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중공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나? 국민을 소경 귀먹어리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큰일 났으니 꺽 소리말고 우리 하라는 대로만 해라? 어디로 가잔 말인가? 죽을 길인가? 살 길인가? 주객이 바뀌어도 너무하지 않은가?
그러기 때문에 국민이 자진하는 결심이 일어나기 보다는 의심만 품게 된다. 이것이 정말 큰일이다. 정말 비상사태는 여기 있다. 국민이 정부의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데.
질못된 동기
그러면 그다음은 당연한 억측이 그 선포의 동기로 향하게 된다. 미리하는 정책으로는 너무 늦었고 시기에 맞춰하는 조처로는 너무 이르게 서두는 이 비상사태 선포의 정말 동기는 무엇이냐? 글쎄 이렇게 어두운데 주먹식으로 갑자기 국민의 자유를 구속하자 드는 것을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그 “무책임한 안보론”이라는 말과 “최악의 경우에는 자유의 일부”라도 희생해야 된다는 그 말의 뜻을 다시 깊이 씹어볼 필요가 있다.
선포령이 내린 다음 몇 사람이 나 보고 “그 무책임한 안보론이란 선생님의 중립 평화론을 가르키는 것 아닐까요?”했다. 한 둘만 아니고 여러 사람이 그랬다. 질문을 받기 전 내게도 직감적으로 온 것이 있었지만, 듣고 나니 과연 그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밝히 말하지만 나는 결코 허튼 잡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두고 두고 생각 끝에 이 밖엔 다른 길이 없다 믿어졌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말 때문이라면 목이라도 잘리울 각 오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무책임이라 하겠는가? 그러면 내가 말한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맞았나 아니맞았나가 아니라,이심전심으로 민중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그 사회 공기다. 그렇게 질문하는 거리의 민중들 가슴 속에는 어쩐지 모르게 정부에서는 자기네 주장 밖에는 다른 모든 국민의 말은 무책임한 것으로 규정하려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그 책임은 뉘게 있느냐 하면 대체로 일을 맡아하는 정부 측에 있다 할 수밖에 없다. 이날껏 언론을 열어놓려 하지 않고 억누르고 가리려만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들이다. 나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인 다음에는 10년을 두고 내가 “무책임”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것쯤은 알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묻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 사회의 민심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단정해서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미루어볼 때 정부가 갑자기 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은, 물론 비상한 국제관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때까지 잡아온 정책이 크게 빗나간 점이 있으므로, 이 위기를 직 면하고 스스로의 안에 힘의 부족을 느꼈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어진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동아일보 사건 같은 신경 과민적인 처사가 나오지 않나? 그것 은 확실히 침착을 잃은 과민한 심리의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과민한 심리란 언제나 확신이 없는데서 나온다. 큰 인물은 노하기를 더디한다.
총화에 이르는 길
이렇게 볼 때 정말 큰일 초비상시다. 이런, 아마 우리 민족 있은 이래의 가장 위급한, 시국을 당하고서 정부에서 실력의 부족을 느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아마 강력을 발동시켜 묶으려 하겠지만, 힘이 어찌 묶어서 나오겠나? 그렇다. 생명이 없는 나무나 쇠라면 묶으면 묶는 것 만큼 힘이 나지만 산 생물은 그렇지 않다. 묶으면 묶을수록 죽는다. 정신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시체가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죽은 히틀러, 거꾸로 매달려 죽은 무솔리니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나? 스탈린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제 눈으로 제 동상의 모가지가 헝가리의 길거리에 개똥처럼 구는 것을 보았으니, 그만하면 증명이 족하지 않은가?
우리는 정부의 선언대로 그 목적이 정부와 국민이 하나로 단결하여 총화를 이루자는 데 있는 것을 안다. 그 말 옳고도 또 옳다. 그러나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옳아야 하지, 옳지 않 은 수단으로도 옳은 목적을 실현하면 그만이라는 것은 무식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둑놈의 말이다. 和는 和로만 이루어진다. 和를 돌이나 칼로 표시하지 않고 口 곧 입으로 표시한 옛 사람의 거룩한 지혜를 주의해 배울 필요가 있다. 화폭은 마음의 일이지 몸의 일이 아니다. 말이 서로 통치 못하는데 어떻게 화목이 있겠나? 사랑은 사랑으로만 얻는 것이요, 참은 참으로만 받는다. 어떻게 속이고 팔을 비틀어서 사랑과 참을 얻을 수 있겠나? 개인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의 단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아파도 아프단 말을 못하게 하고 사람이 죽어도 죽는다는 소문을 못 내게 하면서 “친애하는 국민” 이란 너무도 잔혹한 말 아닌가? 그것으로는 절대 국민총화 못 얻는다. 국민총화 없이는 공산당의 침입 절대 못 이긴다. 또 설혹 이겼다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국민의 자유를 뺏고 나무나 돌 같은 물질을 만들어 그것으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압박자의 쾌락을 누리잔 것이 공산당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잔 것이 우리 목적인데, 우리 자신이 먼저 그런 자유없는 목석이 돼버린다면 또 하나의 공산국가를 만들었을 뿐이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국민을 믿으라
국론이 분열돼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또 국민 중에 더러 그런 분자가 있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도둑을 막기 위해 내 친척도 막아서 어찌 될 수 있나? 천하의 도둑 을 정부가 어찌 다 막을 수 있겠나? 도둑을 법이나 칼로 막았다는 나라가 어디 있던가? 도둑은 국민 전체만이 막을 수 있다. 국민에게 도둑의 원인이 없어져야 막아지는 것이다. 이점을 무시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매양 빠지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정치인만으로 되는 것 아니라 충고를 해주는 학자도 종교가도 평민도 있어야 하는 것이며,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사람보다도 잘못한다 책망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국민총화 이루는데 제일 요긴한 것은 당국자의 겸손이다. 교만한 정치가는 저도 망하고 나라도 망치고야 마는 법이다. 그래서 정치하려거든 먼저 역사를 읽으라는 것 아닌가? 5.16 이후의 이러한 언론 정치 가지고는 절대로 비상시를 이겨 낼 비상한 국민 총력은 나오지 못한다. 오늘 이 사태는 그 결과를 벌써 거두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못 믿는 정부가 무엇을 하겠나? 국민더러 정부를 믿지 않는다 책망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누가 주인인데? 힘이 어디 있고 지혜가 어디 있는데? 먼저 정부가 국민을 믿으려 해야 국민이 또 정부를 믿어 나라를 맡긴다. 국민을 못 믿는 정부로서 오래 서 나간 예가 어디 있는가? 국민더러 믿어주지 않는다 나무라지 말고, 더구나도 어리석게 믿으라고 팔 비틀지 말고, 내가 왜 국민의 신임을 못얻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배자는 실패하면 도망갈 곳이 있어도 국민은 전쟁에 지면 도망갈 곳이 없다.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다면 지배자지 국민일 수는 없다. 국민 본래 천성이 믿으려 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국민에 묻고 국민에 들어야 한다. 이젠 봉건시대는 지나간 것을 모르나? 아, 답답해라. 너와 내가 무슨 운명으로 서로 못믿고 이 고난을 당하느냐? 아니다. 운명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 정치가들의 잘못으로 우리는 이 부끄럼의 길을 걷는다. 어려움을 느끼거든 제발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에 물으라, 그리하여 지혜로 하여금 나오게 하라, 고집이 결코 지혜 아니요 지나친 주관이 결코 확신 아니다.
비상사태의 근본원인
우리로 하여금 있는대로를 말하게 하라. 이 비상시를 당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어디 있나? 적어도 셋이 있다.
그 첫째는 해방 후에 통일 정부를 세우는데 실패한데 있다. 미국이 정책을 갑자기 바꾼 것이나, 중공이 점점 강해져서 국제적 세력의 균형을 깨뜨리고 일어서는 것이나,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 오늘 이 시국이 이렇게 어렵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아닌 것은 아니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가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된 정부를 세워 힘있게 자랐더라면 오늘같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만일 통일 정부를 세우고 그때에 물결처럼 일어나던 민족의 감격을 올바른 방향으로 내몰았더라면 얼마나한 발전을 이루었겠나? 그때 일본은 아직 전쟁범으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던 때요, 중공은 아직 기초가 채 서지 않은 때요, 러시아는 장차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다투려 하는 때니, 그때에 만일 안으로는 긴 세월 일본에 눌렸던 설움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나는 분과 밖으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동정을 잘 이용해서 활동했더라면, 우리 선조의 뼈가 묻혔고 동포의 피 땀이 많이 들어 개척이 되기 시작했던 만주, 그때는 정치적 공백 상태에 놓였던 그 만주를, 영토로 까진 몰라도, 적어도 그리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은 반드시 허망한 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6.25가 왜 있었겠나? 소련 미국 두나라의 간섭이 왜 있었겠나? 다음에 우리 불행의 틈을 타서 일본이 얻는 그 경제 발전을 우리가 먼저 할 수 있었을 것이요, 일본조차도 비웃는 명분 없는 월남 참전같은 것은 아니하고도 됐을 것이다. 6.25 때문에 잃은 인적 물적 정신적 손실이 얼마인가 생각해 보라, 월남전 때문에 떨어진 국민적 위신 신용이 얼만가 생각해 보라, 미국의 식민지라는 모욕적인 부름이 어디서 나왔나? 잔인한 민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중상이 어째서 나왔나? 세계의 외교 무대에 나가 같은 민족이면서도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못하는 어색, 거북, 서로 원수같이 아는 창피한 꼴이 다 어디서 나왔나? 다만 하나 이 민족적 분열이라는 일 때문이다.
그런데 그 큰 잘못의 책임이 뉘게 있느냐 하면 소위 정치가라는 사람들게 있다. 물론 크게 말하면 민족 전체에 있다 할 것이지만 책임은 그 따질 곳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 책임을 물을 곳은 역시 누가 시킨 것 없이 스스로 나라 일 한다고 나셨던 그들 정치가 밖에 없다. 첨에 이 당파 저 당파로 갈라져 싸우던 사람은 물론이요 그 후 오늘까지 그 갈라진 정권을 이어 받아가지고 통일의 노력을 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다. 그들의 잘못은 그 야심에 있다. 나라 민족의 운명 보다 정권욕에 더 마음을 썼던 데 있다. 한 사람의 드골이 우리게 아쉽다.
오늘의 이 비상사태를 극복하려면 그것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 이해의 부족
둘째는 민주주의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이북은 막혀서 그 사실 형편을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당초부터 무력으로 남쪽을 정복하여 공산체제 아래 통일하려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거기 대해 우리는 어떻게 했나?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를 택했으니 민주주의로 실력을 길렀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생명보다 더 존중하는 우리는 그들의 하는 수법대로 남을 강제로 다스리려 해도 아니되고 그러한 다스림에 굴복해도 아니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은 자유에 의한 통일이어야 한다. 그것은 물론 어느 의미로나 폭력에 의한 지배의 통일보 다는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자유 이외에 또 다른 인간 살림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게는 그 밖의 다른 길이 없다. 그럼으로 폭력보다 더 강한 정신의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은 첨부터 우리게 주어진 과제였다. 이것은 이 시대의 우리게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첨부터 주어진 영원한 과제라 해야 할 것이다. 역사란 다른 것 아니고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폭력에서 차차 해방 되어 가는 길이다. 폭력에서 자유로와졌으니만큼 그 만큼 인간적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북의 군비가 강하다는 것을 듣고 겁을 내는 것은 민중의 속에 아무 힘도 기른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다. 군대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전렬 뒤에 모진 귀신같은 독전대가 서서 싸움을 시켜 남을 정복하자던 것은 야만시대의 일이요, 이제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그런 식으로는 추진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무기의 부족이 우리 걱정이 아니요 우리 사회에 철저한 민주 정신이 없는 것이 걱정이다. 정말 강한 군대는 무서운 무기와 강력한 통솔자를 가진 군대가 아니요 각 사람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정신이 철저한 군대다. 세계에 아마 무기를 가장 바로 쓸줄 알고 작은 수면서도 가장 강한 군대는 스위스 국민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세계에 서 가장 자유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게 그러한 철저한 민주 정신이 결핍된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역시 정치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四半세기 동안 우리는 이름이 민주주의지 실지로 실천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매양 서양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느니, 후진국이기 때문에 아직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느니, 그것만 방패처럼 내세워 자기네의 시대에 떨어진 케케묵은 정치 사상을 변명이나 하려 들었지, 조금도 민중을 민주주의로 성의 있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보다도 민중은 도리어 민주주의적으로 나가려하는데 정치인들이 그것을 방해했을 뿐이다. 사실 바로 말한다면 오늘에는 정치가가 이미 민중을 가르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다. 지금은 도리어 민중에게 겸손히 듣고 배워서만 정직한 정치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정치인들은 이날껏 하나도 민중에 들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속이고 꾀이고 압박할 뿐이었다. 그러니 공산 침략에 대해 약할 것은 뻔할 일이다. 공산주의도 모르고 민주주의도 모르니 이야말로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니다. 이날껏 보고 들은 것이 억압과 매수와 모략뿐이니 설혹 무기가 있다손 무엇으로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을까? 무기가 부족하고 말이 많아서 걱정이 아니라, 산 민중이 없어 걱정이다. 의기가 있어야 민중 아닌가?
경제정책의 실패
셋째는 경제적 발전을 옳게 하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 실력의 충실없이 모든 싸움은 다 빈 말 뿐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 책임이 어디 있냐 하면 정치에 있다. 한마디로 이 10년 동안의 정치는 서민을 외면한 정치였다. 지나치게 도시 중심, 특권 계급 중심, 선전 효과를 노리는 겉치레의 경제지 알속 있게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길러 내잔 경제가 아니었다. 그중에도 가장 나쁜 것은 농업정책이었다. 그 결과 농촌은 파산됐고 식량은 사들이게 됐다. 최근 통계를 보면 농민이 전 인구의 45퍼센트라는데 그럼 그 외의 남은 인구는 다 어디 들었냐 하면 소수의 공무원이니 기업인이니 하는 것을 제외해 놓고는 허공에 든 숫자가 필시 많을 것이다. 그 만큼 거지를 냈다는 말이다.
그 결과 계급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른 바 부익부 빈익빈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렇게 계급의 대립이 심해지고 튼튼한 나라 없다. 먹을 것과 향락의 차이는 곧 정신의 차이를 말한 다. 공산주의에 대할 때에 이것이 가장 큰 약점인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오늘 우리 사회상을 말할 때는 누구나 불정 불안 불신을 말하지만 이 三不의 원인은 주로 잘못된 경제정책에서 나왔다. 빚을 얻어다가 생산적인 산업에 쓰지 않고 정치 선전과 부정 사업가들의 가로챔에 내맡겨 두었기 때문에 외양으로는 건설이 된듯하나 속으로는 비게 됐다. 이러한 헛점이 있고 사회가 튼튼할 리가 없다. 미국의 국책 변경이란 돌풍을 맞자 걷잡을 수없이 흔들리게 됐다. 갑자기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되는 데는, 사실은 이런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이 10년이래의 정치는 옛날의 문둥이나 폐병쟁이같이 감추고 숨기는 것만을 일로 삼았기 때문에 일을 저지르는 자신들 밖에는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죽는 날은 갑자기 혼자 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밉고 아무리 부끄러워도 역시 구해줄 것은 내 가족밖에 없는데, 거기 일찍부터 이야기를 했어야 할 것인데, 아니했으니 하는 수 없다. 다 죽게 된 다음에 살려달라 애걸 호소 위협을 해도 소용이 없다. 오늘날 비상사태는 이런 것 아닌가? 아니 아픈 척 속일 생각을 말고 왜 솔직히 말할 용기와 도량을 못가졌던가? 있는 빚을 없다 하면 없어지겠나? 밑진 것을 숫자로만이 남았다 한들 먹을 것이 생기겠나? 눈은 속여도 배는 못속인다. 허기진 민중을 몰고 무슨 싸움을 싸우겠단 말인가? 이제라도 어리석은 특권 계급의 곡간을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평등 경제를 세워라, 그 밖에는 살 길이 없을 것이다. 사자는 우리에 가둘 수 있어도 불평등에 노한 군중은 가뒤둘 수가 없는 줄을 모르나? 그 아우성을 들을 때는 이미 늦다. 강아지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발로차지 말라.
소장지쟁(蕭墻之爭)
이와 같이 오늘의 이 비상사태는 결코 우연히 온 것이 아니요, 쌓이고 쌓인 원인이 있어서 온 것이다. 떳떳한 도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온 비상이다. 그 비상한 사태에 눌려서 비명을 올린 것이 이번 선포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강한듯 하나 사실 내용을 살펴보면 빈 구멍이 많다.
이런 말을 감히 내놓고 하는 것은 결코 정부를 무시해서도 아니요 미워해서도 아니며 책임을 추궁해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도 아니다. 소장지쟁(蕭墻之爭) 이란 말이 있고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있지 않나? 형제가 제 담 안에서는 서로 싸워도 밖에 대해서는 하나가 되어 막는 법이요, 吳나라 사람 越나라 사람이 서로 평시에는 원수지간이라도 한배를 타고 풍랑을 만난 담에는 싸워서는 아니된다. 왜? 너도 나도 다 망하기 때문이다. 잘됐거나 못됐거나 간에 서로 이 국민 말고 딴 나라가 있는 것 아니요, 이 정부 말고 또 딴 정부가 있는 것 아닌데 대적을 눈앞에 두고 서로 시비를 하면 어떻게 되나? 죽는 것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책임의 있는 곳을 따져 잘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지, 결코 시비를 위한 시비가 아니다. 하나 됨을 얻기 위해 하는 말이다. 고치는 힘은 역시 민중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아니된다. 침을 꽂는 것은 한 혈 뿐이지만 아픔은 전체의 아픔이요 나음도 전체의 나음이다. 정부의 잘못을 따지고는 그 짐을 제가 지잔 것이 민중이다. 정부를 남으로 알아 미워하고 내버렸다가는 너도 나도 다 망하고 말것이다. 이것이 내가 상비사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묻는 까닭이다.
문제는 피치에 성의가 있나 없나, 진심으로 같이 살잔 생각에서 하나, 서로 비난조로 하나하는데 있다. 나는 일찍이 다 죽게 된 폐병 환자를 고쳐 본 일이 있다. 인사조로 어루만지는 위로 보다도 내 안타까운 마음을 기우려 “죽어 버리라”고 욕을 했을 때 도리어 기사회생적으로 살아났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진심으로 그를 위하는 맘으로 했기 때문이다. 말이 고우냐 미우냐가 문제 아니라. 저쪽의 폐부(肺腑)를 뚫고 영기(靈基)를 흔드는 성의가 있나 없나가 문제다. 만일 빌어서 고치겠다면 나는 청와대를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이라도 빌고픈 마음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분명 천지 고금의 도리에 비추어서 아닌 것을 어떻게 참아 기라고 그 아첨하는 무리들 처럼이야 할 수 있느냐? 아, 하나님 이 나라들 버리지 맙소서!
국가지상주의의 해
우리라 하니 우리가 누군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한국 민족이요, 둘째 우리는 민주 국민이요, 셋째 우리는 정신으로서의 사람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하되 이 세 가지 자격으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첫째와 둘째에 관하여는 위에서 한 말속에 이미 들어 있으니 다시 되풀이 말 할 필요가 없고, 마지막의 가장 높은 지경인 정신으로서의 사람에 관해서만 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세상을 그릇치는 말 중에 국가지상 이라는 말처럼 심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 제때에 제뜻을 가지지만,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면 그 뜻을 잃게 되는 것이요, 그래도 계속해 그 권리를 주장하면 그만 역사의 나가는 길을 방해하는 죄악이 돼버린다. 국가도 그렇다. 국가지상이라, 나라 밖에 없다는 사상이 한 때 우리를 이끌어 주었다. 그것으로 우리는 짐승의지경을 빗어날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 인간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자각 없는 이기적인 본능 속에 아직 갇혀있던 때다. 그때에 나라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동물의 지경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요. 겨우 깨기 시작한 자아의식 때문에 서로 싸워 모든 정력을 다 써버리고 인류는 멸종이 됐을 지도 모른다. 그때에 생각의 앞선 사람들이 나서서 엄격한 조직 속에 전체를 보여주며 거기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인간 사회는 구원이 됐다. 그러므로 국가는 우리의 고마운 소학선생이 됐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은 자라서 이제 그 소학시대를 지나게 됐다. 그리고 보면 이제는 그 국가에 무조건 복종만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이 자란 증거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 구조에서 나오는 일이다. 우리의 인격은 세 층의 구조로 돼 있다. 맨 밑에는 생물적인 것이 있고 그 위에 인간적인 층이 있고 또 그 위에 인문에게는 초인간적 으로 되는 층이 있다. 이 담에 그 위에 또 더 높은 층이 나타나겠는지 모르나 (반드시 또 있으리라 나는 믿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한으로는 이른바 이 정신이란 것이 가장 높은 지경 이다. 국가지상주의는 이 둘째 층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던 길잡이다.
지금 인류는 그 둘째 단계에서 거의 벗어나려는 상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물적인 단계에서 인간은 그 본능이 아니었더라면 살 수가 없었겠지만, 살아서 자란 결과 인간적이 되 어 이성의 활동을 할 줄 알고 본즉 본능만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옛날의 모든 인류의 어진 교사들의 가르침은 다 한결같이 이 본능을 다스리고 거기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해서 그 가르침에 따른 결과 사람은 이기적인 충동을 이기고 질서 있고 목적 의식을 갖는 역사적 사회적 살림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최근의 6, 7천년의 인간의 살림은 이성의 발달을 폭넓게 이룬 시기다.
그러나 이성은 이상하게도 자체 모순에 부딪쳤다. 이성적이면 이성적 일수록 이성 이상의 어떤 것이 자기 머리 위에 늘 아물거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요. 알갱이 속에 후일에 아름드리 거목이 될 가능성이 첨부터 들어있는 모양으로 인간이 짐승의 지경을 아직 완전히 벗지 못한 동굴 속의 살림 시대에 이미 그 싹이 나타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본능의 강한 껍질에 쌓여 있을 때 그것은 자유로운 자람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성에 의해 그 본능의 캄캄한 껍질이 베껴졌을 때 이성은 그 활동을 점점 더 날카롭게 할 수 있었고, 그럼에 따라 이성은 그 본성대로 정직하게 자기의 한계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위에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는 없으나 그리로 올라가고야 말겠다는 충동을 금할 수 없는 더 높은 층이 있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이 2천년 내지 3천년 동안에 종교가 크게 발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원시시대를 본능과 이성의 갈등 시대라면 이 역사시대 이후의 인간의 역사는 이성과 정신 혹은 영성의 싸움이라고 할 것이다. 다른 말로 정치와 종교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동안 인간은 고민하는 가운데 이성을 무시하는 중교가 어떻게 미신적이 되기 쉬운 것과 영성을 무시하는 정치가 어떻게 야만적이 되기 쉬운 것을 보여주었다. 긴 싸움 끝에 차차 앞이 좀 더 자세히 뵈기 시작했다. 마치 평지에서 떠나 설선 위에 솟는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 밑. 초원에서는 먹을 것은 많았으나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중턱에 올라 삼림지대게 들면 놀라운 것이 많았다. 그러나 거기도 지나 설선을 벗어나고 본즉 모양이 일변해서 장엄하면서도 거기 거룩한 공포가 있다. 국가적 생활의 훈련을 하는 시내산에서 빵과 고기가 그리워 다시 애굽으로 가자던 인간들이 있었듯이 이 뼈에 스며드는 찬기운이 뻗치는 영계(靈界)를 보고는 상당히 많은 이성의 사람이 발길을 돌려 내려가려하고 있다. 오늘 이 시대를 그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는 종교가 약해지는 듯하나, 역사에서 일찍이 지금처럼 높은 종교적인 영감에 의해서 볼 때 인간의 존망의 위기를 느끼는 때는 없다. 긴 세월의 인류적인 체험에 의해 볼 때 묘한 법칙이 하나 있다. 사람은 이성 이상의 것을 진실히 추구하면 이성적임을 유지할 수 있으나, 그 올라가려는 생각을 그치는 순간 이성에 머물지도 못하고 이성 이하로 떨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모든 현실주의,국가주의가 그것을 보여준다.
하청부 전쟁
그 의미에서 인류는 지금 초비상시에 들어 있다. 인간 이상인 것을 향해 순교의 정신으로 돌진해서 인간적인 것을 건지느냐, 빈틈없이 인간적이려 하다가 짐승도 못되고 멸망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갈라지는 점에 섰다. 제2차 대전 이후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아프게 느끼고 있다.
역사의 대세로 볼 때는 2차대전 후 국가지상주의가 점점 더 늘어가는 것은 한때 거꾸로 가는 현상이다. 많은 정치인들은 이것을 긍정적인 태도로 취해서 더욱 더 현실적인 것이 살 길인 것같이 생각하지만 만일 인류가 정말 그 길로만 나간다면 그 앞은 암담하다 할 수 밖에 없다. 다행이 최근의 경향으로는 걷잡을 수 없는 대세 같은 그 속에서도 차차 그 위험을 깨닫고 돌아서려는 경향이 뵈기 시작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 때문에 이제라도 강한 국가주의로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빠지기가 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나려면 우리야말로 이 대세의 앞장을 서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에 희생이 되어 역사의 제단에 받혀진 제물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악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살고 세계도 산다. 그것은 남이 다 써먹고 내버리는 국가지상주의를 뒤늦게 따라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번 죽기로 각오하고 그것을 용감히 부정하고 그 결박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앞차의 엎어진 바퀴 자리를 밟지 말란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오늘 시국이란 것이 무엇이냐? 강대국들이 자기네가 스스로 지기 어려운 자기네 몸을 벗어나기 위해 그 짐을 우리게 떠미는 것 아닌가? 우리가 절대로 그것을 받아서는 아니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강대국의 짐을 받아지는 것인가? 6.25,월남 전쟁, 동 파키스탄의 싸움이 그것이다. 오늘 소위 신생국가라는 나라들의 애국자라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 없다. 그런 따위 강대국의 하청부 전쟁에 민족의 정력을 소모하지 말고 인간다운, 초인간전인 것을 목표로 삼는 인간다운 정치를 새로 창안해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 이점이 가장 아쉰 점이라고 생각한다.
제 살림을 스스로 세울 생각을 못 하고 소위 선진국이라는 도둑들의 쓰레기를 뒤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
국가지상주의가 범하고 있는 죄악의 촛점은 그것이 개인의 양심을 지배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역사를 창조할 사명을 지고 있는 민중이 비상시에 있어서 할 일은 죽음으로 써 제 양심을 지키는 일이다. 나라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우리의 모든 것을 독재로 주관할 수 있었으나, 이제 이 인간의 성년기에 있어서는 이미 그럴 권리가 없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적이게 하라. 이제 가장 어진 정부는 개인의 양심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 정부다.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적인 죄악이 정부가 나라의 이름을 도둑하여 가지고 개인 양심을 지배하는데서 나왔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지 정말 나라를 건진 것은 칼을 들고 전쟁을 한 군인보다도 목숨을 바치면서도 양심을 살린 사람들이었다. 전쟁에는 이기고도 로마는 망한 것을 보면 잘 알수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양심은 개인 속에 있지만, 개인 아니고는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전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가 현실의 어려운 생활을 통해 얻은 정신적 유산의 결정된 것이 곧 개인의 양심이다. 생물학적인 유전인자 속에 전 종족의 특성이 살아 있듯이 양심 속에 전 종족의 정신적 유산의 알갱이가 들어 있다. 양심이 마비된 억만 사람 보다 양심을 지키는 한 사람 속에 나라는 살아 있다.
양심이 뭐냐?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사람인 담에는 제 속에 양심이 있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양심은 내것이면서 내것이 아니라 전체의 것이요, 인간 속에 있으면서 인간 이상의 것이 깃드리는 지성소다. 양심도 그자체가 완전한 것 아니지만, 인간 속에는 양심 내놓고 다른 길로 정신적인 것 초인간적인 것에 접할 수가 없다. 그 의미에서 이것이 정신의 알갱이다. 농사군은 굶어 죽으면서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참 사람이라면 죽음으로써 양심을 살려 그것을 남아 있는 사회에 뿌려야 한다. 양심은 양심으로만 살릴 수 있지 그 밖의 다른 길이 없다. 그리므로 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사람이 산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겁하던 민중이라도 한 사람 이 죽음으로써 외치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그 양심이 깨어난다. 양심이 깨어나면 아직 압박의 사슬에 매여 있더라도 이미 속에 하늘 명령, 역사의 부름을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싹트는 날이 오고야 만다. 겨울에 싹이 틀수는 없지, 허지만 그 알갱이를 죽지 않도록 차디 찬 암흑 속에서도 지킬 필요는 있다. 그리면 봄이 올 때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일어난다. “패연(沛然)을 숙능어지(孰能禦之)리오?” 쏟아지는 폭풍 우를 막을 놈이 없듯이 새시대의 봄을 타서 일어나는 민중의 양심의 큰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
비상사태라 하지만 그것은 중간의 인간적인 층에서 하는 말이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그 정신의 세계에는 비상이란 것이 없다. 그 자체가 비상이다. 그러므로 참을 사랑하는 양심의 사람은 언제나 비상 명령 속에 산다. 반드시 잊어서 아니되는 것은 비슷하고도 아닌 이 세속주의의 비상을 가지고 참 의미의 비상명령을 가리워서는 아니되는 일이다. 바른 말 을 하면 죽은 것같이 뵈는 그 사태가 곧 우리더러 양심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죽느냐 사느냐기 때문에 비상이 아니라, 짐승이냐 양심이냐 하는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운 선 아닌 선을 타야 하기 때문에 비상이다.
위정자에 하는 호소
마지막으로 정권을 쥐고 이 난국에 당하는 정치인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은 것은 제발 마음을 겸손히 하여 사실의 참 모습을 보아내도록해 달라는 말이다. 사람은 아무리 잘났어도 그 보는 시야에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이 다 볼 수가 없다. 제 자리에 충실해야지만 까딱하다가는 제자리에 충실하려다가 대국의 모습을 놓쳐 버리기가 쉽다.
이 시대는 정치의 시대지만 결코 정말 문제점은 정치적인 데만 있지 않다. 정치는 물론 현실이지만, 현실은 현실을 드려다 봄으로만은 해결 아니 된다. 인간은 생을 버리면서라도 의 를 취하는데 인간된 점이 있다. 의는 생에 반대가 아니요 보다 높은 생이다. 이 시대의 정말 긴급한 문제는 네 정권이냐 내 정권이냐 하는 데 있는 것만도 아니요, 네 사상이냐 내 사상이냐 하는 데 있는 것만도 아니요, 실로 인류 전체의 사느냐 망하느냐 하는 데 있다. 그만 아니라 생명의 씨가 남느냐 없어지느냐 하는 데까지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이 사는 것도 결코 정치적인 활동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심을 지킬 필요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발 병을 고치려다가 아기를 죽이는 일이 없도록! 인간은 물론 어느 정도의 강제가 필요하다. 뜻이 있는 선비라는 사람도 한거(閑居)에 위불선(爲不善)이라, 제 맘대로 놔두면 잘못되는 수가 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의 모임인 민중에 있어서겠나? 민중 민중 한다고 덮어놓고 민중에 눈감고 따르자는 말도, 이용해서 어떤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아첨하는 말도 아니다. 이 민족의 실정을 드려다보는 데서 하는 말이다.
한 마디로 해서 우리 민족은 허구한 세월 나쁜 정치에 시달려서 그 기운이 쭈그러지고 그 성격이 많이 비뚜러지고 그 자람이 제대로 되지못한 민족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지고 세계역사의 일선에 서야하는 중대한 지위에 놓여 있으니 어찌 쉽게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그 죽은 기운을 살리고 그 서로 찢어지는 정신을 하나로 불러 일으켜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일을 보면 매양 겉을 꾸미고 결과를 속히 얻자는 욕심에서 정치가 가뜩이나 잘못된 민족의 성격을 점점 더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보기 때문에 감히 쓴 말을 하는 것이다. 제발 활을 너무 당기다가 줄을 끊지 말도록! 비상시라고 긴장을 강요하다가 민족의 생명의 줄이 그만 끊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뉘우쳐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민족의 생명줄이 어디 있나? 양심 아닌가? 양심을 스스로 죽인담에 그따위 학자들로 무엇을 할 것이며 그 따위 사업가로 무엇을 기대하며 양심 없는 군인에게 어떻게 나라를 막아달 라 무기를 맡기겠나?
생각이 여기 이르면 실로 앉았을 수도 섰을 수도 없다. 아무래도 우리 형편으로는 정치가 사회 모든 방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넓은 가슴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모처 럼 주어진 역사적 시기를 그르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국민더러 정부를 믿으라 말로 선전하고 법령으로 강요하기 전에 국민이 믿을 수 있도록 성의를 보이라. 믿음은 믿으라 해서 생기는 것 아니라 미덥게 해서만 된다. 일시의 눈가림으로 무사히 지내려 말고 도리어 정말 걱정스런 실속을 터 내놓고 그 협력을 구하라. 그러면 국민은 도리어 의협심을 내서 일어난다. 인간의 본성에 환란을 같이하려는 의협적인 것이 들어 있다. 국민을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는 것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가장 가깝고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민중을 과소평가해서는 아니된다. 민중에게는 지나친 과대평 가란 것이 없다. 대접하면 해준것 보다 더 돌려주는 것이 민중이다. 인간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예수는 갈보 망나니들까지도 믿어주었다. 믿어준단 말은, 오해하지 말라. 그 말을 다 곧이 듣는단 말 아니다. 그들의 부족을 다 알고, 거기 보조를 같이는 아니하면서도, 그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무한히 알아준단 말이다. 그러려면 수단 책략을 써서는 아니된다.참새도 한번 속은 담엔 다시 아니 속는 책략을 나라의 주인에게 써서 되겠는가?
나는 타임지 12월 20일 자에 난 기사를 읽고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물론 하나의 외국 잡지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언론지 아닌가? 남이 우리 사정 어찌 알 수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지금 세계의 동향은,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운 국민에게는 가리울 수 있어도 세계의 전문가는 속일 수 없지 않은가?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전문 정치가로서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은 줄면 줄었지 더해진 것은 없다고 해놓고, 이것은 장기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해서 세계에 퍼뜨렸으니, 이제 그것을 무엇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국민의 대부분이 물론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비상시 기분에 있느니만큼 이런 말은 더 빨리 사실 보다는 더 큰 힘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에 있다. 비상사태는 국내만 아니라 세계에 향한 선포다. 이렇게 안팎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볼 때 국민이 어떻게 당황하고 의아해 하지 않겠는가? 천하의 입과 귀를 어떻게 칼로 다 가리울 수 있겠는가? 답답만 하다!
아, 하나님 이 민족의 나갈 길이 어디입니까? 그 진 고난의 짐이 이미 과하지 않습니까? 지다가 길 위에서 혼이 떠나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씨알의소리 1971. 12월,
저작집30; 4-207
전집20; 14-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