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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석 달이나 달라붙어서 판 사건을 포기하라고요?!”
대머리 과장의 전화를 받던 오인구의 표정이 깨진 거울처럼 일그러졌다. 자기
도 모르게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손잡이에서 부서질 듯 뿌드득 소
리가 났다. 일주일 안에 정리하라니, 사건을 덮으라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국장님 전화도 왔는데, 이번 건은 여기서 접는 게 어때? 정황만 있고 증거
도, 증인도 없는데, 더 파서 뭘 어쩌겠어? 간신히 잠잠해졌는데, 계속 건드려 봐
야 우리만 피곤해진다고.”
팀장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여기까지 왔으면 할 만큼 한 거야. 사건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여기서 접자. 응?”
2개월 전 유치원 여러 곳에서 동시에 식중독 사고가 발생했다.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구토와 설사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증상이 심한 아이는 고열로
인해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는데, 인지 능력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
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사회적 파장이 큰 만큼 매스컴에서는 경쟁적으로 사건 보도에 열을 올렸다. 그
러나 식중독의 원인을 밝혀 줄 보존식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역학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 전국적으로 비슷한 고발이
여러 건 접수됐다. 대형 육류 가공식품 업체인 동양식품의 제품군을 섭취하고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결국 조사
팀이 업체를 방문해 조사하고 주의를 주는 정도로 민원이 무마되었다.
한 달 뒤 사건이 잠잠해질 무렵 이번에는 익명의 제보가 수사팀에 입수됐다.
동양식품에서 유통 기한이 지난 가공식품을 폐기하지 않고 정상 제품에 섞어서
단체 급식 장소나 식당, 마트에 식재료로 납품했다는 제보였다. 내용은 범죄 수
법과 제품명이 특정되어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유통 기한 위조 작업은 한
밤중에 몰래 이루어지니 단속은 저녁 시간을 노리라는 조언도 함께였다. 제품이
학교로 많이 납품되는 특성상 개학을 앞둔 시점에는 물량이 딸리기에 반드시 야
간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동양식품의 제품이 해당 유치원들에도 납품됐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날,
수사3팀의 오인구는 급하게 단속 팀을 꾸려 현장을 덮쳤다. 때마침 다른 팀들이
새로 맡은 사건들로 분주했기에, 모처럼 그에게 짭짤한 건이 배당된 것이다. 오
랜 경험에 의한 촉으로는 전혀 까다로울 일이 없었다. 제보자도 분명 내부 직원
일 것이고, 개인 정보만 잘 보호해 주면 증거와 진술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범행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작업을 하려다가
그만둔 것 같은 낌새였다. 하지만 직원들이 야간작업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범
죄의 증거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황만으로는 부족했다. CCTV에는 전날
밤 녹화된 영상만이 남아 있었다. 담당 직원은 저장 장치 고장으로 이전 기록은
지워졌다고 진술했다. 고의로 삭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오래된
포장과 새 포장을 바꿔치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화질이
좋진 않았지만, 포장지의 색깔이나 디자인이 분명히 달랐다.
영상에 나온 십여 명의 생산직 직원들 진술에 따르면 노란색 포장은 예전에
사용하던 것이고 파란색 포장이 새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전 포장지로 포장
했던 제품들을 다시 새 포장으로 바꾸었을 뿐 유통 기한을 바꾸기 위한 작업은
전혀 한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중년 여성들이 대부분인 단순 작업자
들이었기에 추궁한다고 해서 딱히 더 나올 것은 없었다.
사장인 김규태는 두꺼비같이 불룩 튀어나온 배와 퉁퉁한 볼살에 어울리지 않
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수사관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모범업체상을 여러 번 수상한 곳입니다. 십 년이 넘게 매출 1위를 달성하고 있
고요. 우리 회사를 질투하는 타 업체에서 음해를 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의 등 뒤에 우뚝 솟아 있는 고급 원목 진열장 안은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해
얻은 표창장과 상패들로 빼곡했다. 해마다 고아원과 노인요양원에 기부를 하면
서 제작한 기념사진 액자들도 수십 개가 넘었기에, 고등학교 동창회 사진 따위
는 맨 뒤쪽에 처박혀 있었다. 오인구는 그것들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
다.
“사장님은 이렇게 사회 활동이 바쁘시니, 회사 업무를 보기 어려우시겠는데
요?
김규태는 거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대외 업무만 맡고 김한상 상무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상무인 김한상은 김규태의 아들이었는데, 그에게서도 별다른 혐의점을 밝혀낼
수 없었다. 야간 제품 포장 작업이 납품 일자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진술은
누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장 아쉬운 건 결정적 증거들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찌 된 일인지
단속반이 들이닥치기 전에 유통 기한이 인쇄된 포장지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이다. 누군가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건 아닌지 의심이 가긴 했으나, 추측일 뿐
이었다. 신빙성 있는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세부 내용을 알 만한 참
고인이 필요했다. 현재 일하고 있는 공장장 이하 직원들은 사장을 무척이나 두
려워하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일 년 전 회사를 그만둔 전임 공장장 박정기는 말수가 적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어서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게다가 일을 너무 철
저하게 챙기는 바람에 사장과 다툼이 잦았다. 다만 아르바이트생으로 반 년 정
도 일한 김성철과는 친분이 있었다. 아마도 김성철이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식품가공 공장을 찾아온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
을 거라는 게 다른 직원들의 추측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한상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정보통신법 때문에 육 개월이 넘으면 퇴직자 개인 정보는 모두 파기한다고 진술
했다. 주먹이 올라갈 정도로 얄미운 말투이긴 했지만, 맞긴 맞는 말이었다.
다음 날 오인구는 잔소리에 잔뜩 시달릴 것을 각오하고 결과 보고 회의석상
에 앉았다. 그러나 대머리 과장은 다른 신경 쓸 문제가 있어서인지 별 말이 없
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회의실을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1팀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자네도 이번에 승진해야 되는데, 거 참……. 골치 아프겠는걸.”
오인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 어차피 사건이야 해결이 되
든 안 되든 욕을 먹어도 내가 먹는 건데, 무슨 이유로 걱정을 해 주는 걸까? 기
분이 묘했다. 그냥 한번 떠보는 걸 테지. 혹시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해서 사건
을 망치길 바라고 있을 테니까. 오인구는 오기로라도 사건을 포기할 수 없었다.
수십 권의 제품 원재료 수불부와 폐기대장까지 일일이 맞춰 보며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별다른 소득도 없이 또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
저녁이 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온다
더니 제법 빗줄기도 굵었다. 오인구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심란한 마
음을 달랬다. 하루 종일 골머리를 싸매다 보니 몇 년 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
나 입이 근질거렸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
겨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같은 팀의 후배 여홍철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
른 사건 때문에 이번 건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공개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다른 직원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근처 조그만 국밥집 안에 들어서자 여홍철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오인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숨 좀 돌리세요.”
여홍철이 오인구 앞에 놓인 컵에 찬물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CCTV에 나온 직원들을 수소문해서 그만둔 공장장하고 친했던 아르바이트생
연락처까지는 알아봤는데…….”
“알아봤는데?”
“동종 업계라 그런지 많이 껄끄러워하던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동양식품 김 사장이 공공연히 보복 운운한다는 소문도 있고…….”
“뭘 보복한다는 거야?”
오인구는 인상을 쓰며 소주 한 잔을 따라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자기에 대해서 불리한 진술이나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은 다시 이 업계에 발
을 못 붙이게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데요. 삼십 년 넘게 이쪽에서 잔뼈가 굵
은 업체고, 육가공식품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니까 무서워할 만도 하죠. 밥줄이 끊
어지는 건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오인구가 뿌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휴, 그게 아니에요. 회사에서야 선배 눈치 보느라고 앞에서 말해 주는 사
람이 없겠지만, 국회의원 쪽도 줄이 닿아 있다는 소문인데, 지금 똥 밟으신 거라
고…….”
“뭐? 똥?”
오인구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 제 말뜻은 그게 아니고…….”
여홍철이 손사래를 치며 흥분한 오인구를 달랬다.
“휴…….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우리한테 뒤에서 말 많은 거…….”
“…….”
오인구는 입을 꾹 다문 채 곰 같은 손으로 조용히 술잔을 따랐다. 여홍철도 답
답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더니 잔을 들이켰다. 잠시 오인구의 눈치를 살
피던 여홍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냥 혐의 없음, 아니 증거 불충분으로 하시죠.”
오인구는 홍철을 쏘아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가 무서워서?”
“그게 아니고, 사실은 1팀 제 동기 김강우한테서 들은 말이 있어요.”
“강우? 뭐라고 그랬는데?”
“이 사건, 실은 1팀에 먼저 떨어졌던 건이에요.”
순간 오인구의 머릿속에 1팀장의 원숭이 같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뭔
가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어쩐지 마주칠 때마다 내 눈을 피하는 것 같더라니.
동기 중에 승진이 가장 빠르긴 했지만, 어려운 건은 절대 맡지 않고 골라서 피
해 가는 녀석이었다.
여홍철은 작심한 듯 말을 쏟아 냈다.
“왜 이걸 우리한테 미뤘겠어요? 당연히 똥파리 낄 줄 알고 그런 거죠. 증거
확보해서 간신히 기소한다고 쳐도, 결정적인 게 아니라면 검찰에서 무혐의로 떨
어질 텐데……. 괜히 고생하고 욕만 먹는 거죠. 솔직히 쌓인 게 사건이잖아요.
다른 건도 많은데 굳이 이걸 들고 팔 필요가…….”
“…….”
오인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무안한 홍철이 고개를 돌리
자 오인구는 익살스런 말투로 잔을 건넸다.
“아이고, 여 수사관님 바쁘신데, 귀찮게 부탁해서 미안합니다.”
홍철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휴, 전 진짜 걱정돼서 그래요.”
“너한테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연락처나 내놔.”
오인구가 손을 불쑥 앞에 들이대고 어서 내놓으라는 시늉을 하자 홍철은 마지
못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냈다. 오인구는 얼른 그것을 낚아채 주머니에
넣고 남은 소주잔을 마저 들이켰다.
“수고했다. 역시 홍철이 능력 있어. 흐흐흐.”
홍철은 설득을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이 번호 주인이에요. 전화번호 바꾼 지 반 년 정도 됐다
고 하니까 김성철이 동양식품에서 퇴직한 시점하고 일치하고요. 급히 전화번호
를 바꾼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감출 만한 게 있어서였겠죠.”
“수고했다. 여기서부턴 내가 맡지.”
“진짜 조심하셔야 돼요.”
“알았어. 인마.”
오인구는 걱정하는 그를 뒤로하고 국밥집을 나왔다.
어쩐지 이런 고급 떡밥이 나한테까지 흘러들어 온다 싶더라니……. 결국 1팀에
서 미룬 탓에 3팀에 떨어진 건이다. 어차피 똥 같은 사건이니 내가 맡으면 어울
리겠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파고들지 못할 거라고 믿은 건가? 그
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 보자. 오인구는 사무실로 돌아와 간이침대에
몸을 눕힌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능팀의 허경아는 아침 일찍부터 오인구가 찾아와 자신을 기다린 걸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아, 오랜만이네. 요즘 얼굴 보기 힘든데, 많이 바쁜가 봐?”
“네, 선배,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아침부터…….”
“부탁할 게 좀 있어서.”
“…….”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오인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그 건 맞아. 소문이 파다하게 났으니 잘 알겠지.”
“그게 아니라…….”
“곤란하게는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도와주라. 알다시피 내가 컴퓨터는 잘 몰
라서 말이야.”
“휴, 그럼 제가 도와드렸다는 말씀은 좀…….”
“아, 당연하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이 전화번호 원래 주인을 좀 찾고 싶어서. 이름이 김성철인데, 어떻게 연락
할 방법이 없을까?”
“음. 젊은 사람인가요?”
“이십대 중반?”
“그럼 SNS 같은 거 많이 할 나이네요. 뒤져 볼게요.”
반나절 뒤 오인구는 김성철의 전 여자 친구인 한경애가 근무하는 백화점 여성
복 매장에 서 있었다. 다행히 김성철은 직접 찍은 사진을 꽤나 많이 개인 블로
그와 SNS에 올려놓았다. 여자 친구나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사진이 대부분
이었는데, 옷 가게에서 찍은 사진이 많은 점을 허경아가 이상하게 여겼고, 배경
에 나온 매장 로고의 브랜드가 입점된 백화점 몇 군데를 뒤진 것이다.
“누구신데 성철이 연락처를 물으세요?”
오인구의 거칠어 보이는 외모 탓에 한경애는 경계심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오인구가 신분증을 제시하자 그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걔가 무슨 큰 사고를 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사건 참고인이라 사실관계를 좀 물어보려는 겁니다.”
“…….”
“사진에 보니 다른 친구들하고 찍은 것도 많던데, 어차피 연락처는 다 알게
될 겁니다. 급해서 그러니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오인구가 담담하게 설득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김성철의 연락처와 직
장을 알려 주었다. 오인구는 바로 연락을 하지 않고, 그가 일하고 있는 커피숍으
로 직접 찾아갔다.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카운터를 살펴보자 김성철
이 주문받은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진동 벨이 울리자 오인구는 자연스럽게 그
에게 다가갔다.
“김성철 씨,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절 어떻게 아시죠?”
오인구에게 커피를 건네던 김성철이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였다.
“놀라실 필요는 없고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럽니다.”
오인구가 신분증을 제시하자 그는 뭔가 눈치를 챈 듯 말투가 바뀌었다.
“전 아는 게 없어요. 시키는 대로만 일했지, 자세한 건 몰라요.”
“그러니까 그 시키는 대로 한 것만 사실대로 진술해 주세요. 6시에 교대죠?
요 앞 호프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두 시간쯤 지난 후, 오인구의 앞에 앉은 김성철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
다. 오인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김성철 씨는 참고인일 뿐이지, 내가 진짜 듣고 싶
은 건 공장장 박정기 씨 이야기니까.”
“형사님. 전 진짜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김성철은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시킨 거죠?”
“그러니까…….”
김성철은 영업상무인 김한상의 지시로 공장장과 함께 재포장 작업을 한 경위
를 진술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 포장과 제품 적재만을 담당했기에 자세한 과정
은 공장장인 박정기가 아니면 알 수 없었다. 유통 기한을 어떻게 허위 표시했는
지는 아르바이트생이 증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공장장님은 참 좋은 분인데……. 제가 알기로는 부인과 사별하시고, 혼자 키
우시던 따님이 병에 걸렸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직장에서 해고당하면 당장 생계
가 곤란한 지경이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음, 모든 지시는 김한상 상무가 했다는 건데……. 김규태 사장은 전혀 몰랐
나요?”
김성철은 고개를 저었다.
“지시는 김한상 상무가 했지만, 사장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해요. 김규태 사장
은 아주 꼼꼼한 성격이에요. 본인한테 모든 일을 보고하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내
며,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 할 정도인걸요. 심지어 아르바이트생으로 잠깐 일한
저에게도 일일이 업무 지시를 하는 사람인데, 김한상 상무가 자기 마음대로 그
런 일을 벌일 수는 없죠.”
역시 오인구의 추측대로였다.
“김성철 씨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불법인 걸 알면
서도 이 일을 도운 건 아니겠죠?”
“휴……. 당장 등록금이 급하고, 시급이 센 편이어서 동양식품에서 일하긴 했
지만, 범죄인 줄 알면서도 일을 도운 건 아니에요. 몇 개월 동안은 몰랐는데, 그
건 때문에 공장장님이 사장님하고 크게 다투고 나서 저에게 얘기해 주셨어요.
지금 불법적인 일을 돕는 거니까 이제라도 잘 생각하라고……. 다음 날 공장장
님은 회사를 그만두셨고요. 저도 제가 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
서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겁이 나 전화번호도 바꿨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모르고 한 일인 데다 단순 작업을 보조한 정도라 참고인 조사로 끝낼 겁니
다. 그건 그렇고, 박정기 공장장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나요?”
“공장장님 연락처는 지워졌지만, 따님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을 알아요. 지나
가다 얼핏 들은 적이 있어서…….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한강병원이에요.”
“음, 협조 고맙습니다. 김성철 씨, 이제 좋은 일자리를 찾은 것 같으니 열심히
근무하도록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앞으론 절대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지 않겠습니다.”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는 오인구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강병원 902호실로 찾아간 오인구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소아암 병동이기에 소란을 피우기 싫었다. 박정기의 딸은 간병인으로 보이는 중
년 여자와 함께 있었다. ‘박혜린, 여아, 만 8세’라고 또박또박 적힌 이름표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간병인이 물었다.
“아, 혜린이 아빠 친굽니다. 한 번도 찾아오질 못해서 문병도 할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세요? 제가 간병한지 일 년이 넘도록 아무도 문병 오는 사람이 없어서
별일이다 했는데……. 혜린이 아빠는 저녁 늦게 와요. 연락은 해 보셨나요?”
“아니요. 그냥 왔습니다. 괜히 신경 쓸 것 같아서요. 혜린이하고 놀아 주면서
기다리면 되죠.”
“그러세요? 마침 잘됐네요. 저도 잠깐 자리를 비울 수 있으니.”
그녀는 잠시 개인 용무를 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오인구는 혹시 아이
가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혜린아, 아저씨는 멀리 사는 아빠 친구야. 아빠는 요즘에 많이 바쁘시니?”
“네, 저 때문에 밤에도 일하시느라 바쁘세요.”
조그만 곰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이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오늘도 늦게 오시는 거야?”
“네, 일하셔야 된대요.”
“휴, 힘드시겠구나.”
“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그래, 혜린이는 뭐 갖고 싶은 거 없니? 아저씨가 다음에 올 때 꼭 사 올
게.”
“음, 곰 인형. 이거보다 훨씬 커다란 거요.”
“알았어. 아저씨가 제일 큰 걸로 사 올게.”
오인구는 파리한 얼굴빛의 아이가 안쓰러워 머리카락이 없는 조그마한 머리를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동화책을 내밀었다.
“이거 읽어 주세요.”
“응? 아저씨는 동화책 잘 못 읽는데.”
오인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참…….”
“처음부터 읽어 주세요.”
“음…….”
오인구는 더듬더듬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가 조그만 병실에 깔
리자 아이는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인구가 간신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눈을 들어 보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그때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한 왜소한 몸집의 박정기가 병실로 들어섰다. 그는 덩치 큰
낯선 남자를 보고 흠칫 놀라 문 앞에 멈춰 섰다. 오인구는 활짝 웃으며 그를 맞
이했다.
“야, 정기야. 오랜만이다!”
오인구는 얼떨떨해하는 그를 껴안고는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박정기 씨,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따님은 막 잠들었으니까 걱정하
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인구가 슬쩍 신분증을 내밀자 박정기는 체념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순
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병원 복도 끝 벤치에서 오인구가 내민 캔 커피를 한참 동안 손에 꼭 쥐고 있
던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말씀하십시오.”
“부끄럽지만 딸아이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때를 봐서 직접 말해
주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얻은 자식이라, 몸이 아프기는 해도 저한테는
금쪽같은 딸입니다. 아빠가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몸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서 수사에 협조하겠습니다. 유통 기한을 인쇄
하는 기계는 제가 직접 조작했습니다. 직원들에게는 단순 작업만 시키고 그 일
은 저 혼자 했습니다. 그 대가로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고요. 아마 직원들
은 모를 겁니다. 단순 포장만 하고 배송만 했으니……. 제가 저지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공장장님의 증언이 김규태 사장의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겁니다. 만약 제보를 하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몰래 범죄를 저지르면서 큰 이
익을 보고 있었겠죠.”
오인구는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해 준 박정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
러나 그의 얼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요. 저는 제보를 한 적이 없습니다만…….”
“……?!”
오인구의 머릿속이 팽이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직원이 아
니면 제품명이나 범행 과정을 특정할 수 없을 텐데……. 제보자는 사건과 밀접
하게 관련되어 싫든 좋은 그 내용을 알 수밖에 없는 자다. 은밀히 저질러진 범
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정기가 제보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회사에서 일어
나는 일을 속속들이 알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사장이나 상무, 공장장만큼 혹은
그 이상.
“박정기 씨……!”
오인구는 무언가 집히는 데가 있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어둠에 가려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오인구의 얼굴은 확신에 찬 표정이
었다.
수사의 마무리 시한인 금요일 아침, 오인구의 발걸음은 대머리 과장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보고서를 읽고 있던 과장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좀 있다가 회의니까 나중에 해.”
과장은 오인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과장님, 명진고 27회 졸업생이시더군요.”
오인구는 그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식품 김규태 사장과 고교 동기시고요.”
과장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오인구를 노려봤다.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오인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
다.
“신문고에 올라온 민원을 무마해 주는 대가가 너무 적어서 제보를 하신 건가
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과장의 대머리가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붉어졌다.
“그동안 뒤를 봐주는 대가를 꼬박꼬박 상납해 오던 김규태 사장이 금액을 올
려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겁을 주려고 제보를 했고, 다른 팀들은 이런 내막을
알고 손을 못 대니 이거저거 안 가리는 저한테 떠넘긴 거겠죠. 그런데 제가 생
각보다 일을 너무 빨리 진행시키자 다시 급하게 귀띔해 줘서 단속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준 거 아닙니까? 원래 겁만 주려고 했던 건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
를 죽여선 곤란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감히…….”
과장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오인구는 품속에서 녹
음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는 곧 단속 팀이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
을 김규태에게 알려 주는 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장은 자리에 털썩 주
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 체포조가 도착할 겁니다.”
오인구는 녹음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망연자실한 표정의 과장을 그대로 남
겨 둔 채 돌아섰다. 곧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 오후, 오인구와 여홍철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번 사건 때문
에 감찰반에서 하루 종일 조사를 받고 난 직후였다. 여홍철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선배님, 어떻게 과장하고 김규태 사장이 고교 동창이란 걸 아셨나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학연이나 지연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이 크지.
처음에 김규태 사장 방에 들어갔을 때 동창회 사진부터 찾아봤어. 사람이 많다
고 해도 대머리는 눈에 띄니까.”
“음, 그럼 과장이 익명의 제보자인 건 어떻게……?”
“제보자는 반드시 내용을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박정기가 아니라면 그 정
도로 상세히 범행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동양식품 관련 식중독 사고
민원은 과장 지시로 업체에 주의만 주고 무마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처리해 놓고 한 달 뒤 출처도 알 수 없는 익명 제보가 들어왔다고 해서 불시 단
속에 쉽게 동의하다니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어. 김규태의 뒷배를 보면
엄청나게 귀찮아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야. 게다가 단속 결과가 좋지 않았는
데 아무 말 없이 넘어간 건 더 이상했지.”
“녹취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김규태는 아르바이트생에게도 일일이 직접 업무를 지시할 만큼 꼼꼼한 사람
이야. 당연히 과장한테서 오는 전화를 모두 녹취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사장이 순순히 녹취본을 내준 건가요?”
“아니. 박정기 공장장이 김규태 사장보다도 더 꼼꼼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던
가? 공장장은 마지못해 사장의 지시를 따르긴 했지만, CCTV 녹화본과 유통 기
한이 변조된 포장지를 일 년 치나 보관하고 있었어. 그리고 자신에게 강압적으
로 불법행위를 지시하는 사장의 목소리도 녹취해 놓았고. 그걸 김규태 사장에게
들이대자 그도 이판사판으로 과장의 금품 요구와 단속 정보 사전 유출 녹취본을
내놓은 거야.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다 드러난 마당에 뭣 때문에 비리 공무원을
보호해 주겠어?”
“음, 그나저나 윗선까지 조사가 들어간다고 하니까 일이 꽤 커지겠네요.”
“당분간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부패에 중독되긴 쉬워도 끊는 건 수백 배
고통스러운 법이야. 불법이란 게 처음엔 달콤해도 끝은 씁쓸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냐? 휴, 그건 그렇고, 지금 갈 때가 있으니까 내 대신 이야기 좀 잘해
줘.”
“예? 또 어딜 가시려고요?”
“약속을 해 놔서 꼭 가 봐야 할 데가 있어.”
홍철은 총총히 사라지는 오인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시내로 접어든 오인구의 차는 한강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통통한 얼
굴에 배시시 웃고 있는 커다란 곰 인형과 함께였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려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곽에 도로 넣어 구겨 버렸다. 입맛은
씁쓸했지만 다시 꺼낼 일은 없을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햇살이 가득한 오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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