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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16. [역경의 열매] 홍수환 <1-19>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6·25전쟁 중 교회서 태어나
초등학생 때 앞집에 복싱선수 이사… 관심 많던 아버지 따라 경기 관람
홍수환 장로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홍수환스타복싱체육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나는 챔피언이다. 복싱으로 한국·동양·세계 챔피언을 다 해봤다.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과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등 두 체급을 한국인 최초로 석권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15회 판정으로 이기고 어머니에게 전한 이 말이 한동안 회자됐다. 어머니는 그때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감격했다.
‘4전5기’의 주인공.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결정전에서 상대를 3회 KO로 눌렀다. 4번 다운되고 일어나 이겼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고백하지만 내가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긴 경기들이었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나는 1950년 7월 11일 6·25전쟁 때 지금 서울 장충동 신광교회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나보고 ‘전쟁통에 폭격이 심한 날 교회에서 너를 낳았지’라고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독실했다. 돋보기를 내려쓰고 성경을 읽던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는 ‘제2교회’를 섬기셨다. 그 교회를 지을 때 못을 박으며 같이 지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후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의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34세 때였다. 할머니는 홀로 큰고모,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작은 고모 이렇게 넷을 키우셨다.
어릴 때 내가 복싱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복싱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관심이 많았다. 우리 동네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87번지였다. 지금 서울경찰청 맞은편이다. 나는 수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앞집에 복싱 선수가 이사를 왔다. 바로 김준호 선수였다. 아버지는 그의 엄청난 팬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김 선수의 복싱 시합을 보러가곤 했다. 김 선수가 1974년 남아공에서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김 선수와 호형호제하던 아버지는 복싱을 사랑했다. 김 선수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던 날 섭섭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김 선수의 아들은 수송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 친구와의 작별도 참 아쉬웠다.
아버지는 1964년 8월 4일 아주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와 같이 마루에서 주무셨는데 심장마비였다. 내가 열네 살로 중앙중학교 2학년일 때였다. 등굣길에 복싱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에 앉아 “어, 우리 육사생도 들어오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남대문시장 입구에 있는 한 가게에 미제 복싱 글러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했고 모은다고 모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 글러브를 보면서 돈을 다 모으기 전에 누가 사가면 어쩌나 싶었다. 그리고 멀리 그 가게의 복싱 글러브를 보면서 ‘아직 안 팔렸구나’라고 마음 놓으며 집으로 향하던 생각도 난다.
정리·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6·25전쟁 중 교회서 태어나
* [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 [역경의 열매] 홍수환 <3> 무패 전적 태국 선수와 붙어 8회 KO승
* [역경의 열매] 홍수환 <4> 군 복무 중 세계챔피언 도전 위해 남아공으로
* [역경의 열매] 홍수환 <5>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 [역경의 열매] 홍수환 <6> 2차 방어전에 18전 18KO승 철권이…
* [역경의 열매] 홍수환 <7> 챔피언 벨트 뺏기고 귀대하자 영창행
* [역경의 열매] 홍수환 <8> 심판의 편파 진행… 자모라에 설욕 무산
* [역경의 열매] 홍수환 <9> "네가 이겼으면 문제 없었잖아" 조롱에 이 악물어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1> 국내 방송사 카라스키야戰 KO패 우려 중계 꺼려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2>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3> 4전5기 기적의 승리… 나 아닌 하나님의 작품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4> 조부모로부터 신앙 대물림… 복싱 인생 버팀목 돼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5> 가사하라 상대로 방어전… 시합 직전 설사로 고생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6> 목회자 된 동생 "형은 전도 세계 챔피언"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7> 카르도나·스캔들·프로모터, 3대1로 싸워 패배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8> 어려웠던 이민 생활… 하나님은 다음 계획 예비하셔
* [역경의 열매] 홍수환 <19·끝> 인생에서 4번 쓰러진 후 만난 주님, 감사합니다
약력=△1950년 서울 출생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밴텀급·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WBA 주니어페더급 전 챔피언 △KBS 전 복싱 해설위원 △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현 구리 예빛교회(홍수철 목사) 장로
***[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 결심… 처음 반대하던 어머니도 적극 지원
홍수환 선수가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필리핀 선수 알 디아즈를 판정으로 이긴 뒤 손을 들고 있다.1966년 6월 25일 나의 복싱 영웅이 탄생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그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별로 없던 시대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다니던 중앙고 보이스카우트 행사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TV로 봤다. 그다음 날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도 갔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복싱을 좋아하는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를 가져다 놓겠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마추어 시합에 두 번 나갔다. 두 번 다 졌다. 바로 프로무대에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김준호 선수가 내 아마추어 경기를 보고 조언도 해줬다.
69년 5월 10일 대구 출신 김상일 선수와 겨뤘다. 경험이 많은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첫 프로경기에선 무승부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합은 서울 청량리 신도체육관 소속 최창배 선수와 만났다. 그때 심판 전원일치로 첫 승을 거뒀다. 1승을 한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지지했다.
당시 한국 밴텀급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나는 이를 놓고 부산 출신 문정호 선수와 결정전을 가졌다. 5회에서 라이트 어퍼컷과 훅의 연타로 KO승을 거뒀다. 데뷔 1년도 안 돼 한국 챔피언이 된 것이다.
복싱 판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밴텀급 챔피언은 멕시코의 괴물 올리바레스 선수였다. 동양 챔피언은 일본인 가네자와 선수였다. 이 둘이 세계 타이틀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됐다.
나는 필리핀 알 디아즈와 결정전을 벌였다.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였다. 이 시합에서 나는 판정으로 이겼다. 정말 갑작스레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까지 거머쥐게 됐다.
패배도 있었다. 1970년 6월 9일 일본 원정 시합에서의 첫 패배는 한이 됐다. 상대는 일본의 파이터 하라다 선수 동생이자 당시 세계 밴텀급 랭킹 4위였던 우시와카마루 하라다 선수였다. 일본 규슈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아깝게 판정으로 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선수를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불러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완벽 승리였다. 그 선수가 병원에 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는 방송 카메라의 관심을 받았다.
엄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인천 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안에서 카투사 식당을 했다. 엄마는 버터와 치즈를 허리춤에 차고 나와 내게 주셨다. 나는 버터를 좋아했다. 엄마가 주는 버터를 밥에 비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자식사랑은 대단했다. 나뿐만 아니고 4남3녀 모두에게 말이다.
그즈음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동양 챔피언이 됐으면 복싱선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미군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론 취했다. 그동안 연습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연습은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복싱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매니저가 알고 내게 전화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사실 오늘날 홍수환을 만들었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3> 무패 전적 태국 선수와 붙어 8회 KO승
대전료 60만원 주겠다던 매니저 “너, 돈 안줘”라는 말에 분노 폭발
1973년 대전육군병참학교 8주 훈련 당시 홍수환 장로. 병참학교 동기와 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군에 가겠다고 연습 한번 하지 않던 그때 매니저가 전화했다.
“수환아, 태국 가자.”
“저, 복싱 그만뒀습니다.”
“60만원 줄게, 가자.”
매니저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60만원 이야기를 했다. 60만원이면 당시 큰돈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럼, 갑시다.”
‘돈 벌어 엄마에게 땅을 사드리고 복싱을 때려치우자. 그리고 군대 갔다 오자’라고 생각했다. 1973년 2월 7일 상대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합 일자는 2월 9일이었다. 태국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상대가 수코타이 선수였다. 그는 태국 최고의 선수였다. 별명이 무언의 알리(Mute Ali)였다.
시합은 태국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보코솔 선수와 필리핀의 살라바리아 선수 간 세계 타이틀 매치와 함께 진행됐다. 수코타이는 인기가 높은 데다 태국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나와 수코타이 간 동양 타이틀 매치가 그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메인게임이 됐다.
나는 링에 오르기 전 3회전까지 견디겠다고 각오했다.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하지 않았어도 3회전 9분까지는 버티리라. 그러고 안 되면 내려오겠다.’ 연습은 단 하루도 안 했다. 어차피 지난 일을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링에 올랐다. 태국의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2월과 상반된다. 우리는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여름 날씨 속에 태국민들의 열기를 한몸에 받고 링에 올랐다.
수코타이의 주먹은 묵직했다. 역시 18전 18승 16KO승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선수였다. 나도 기죽지 않고 ‘너나 나나 3회전 안에 둘 중 하나는 쓰러지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뻗었다. 3회전, 상대도 안 보고 그냥 휘두른 주먹에 수코타이가 다운됐다. 태국 심판은 느리게 카운팅했다. 태국 왕이 관람하는 시합에서 자국 선수를 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다운시켰다. 역시나 느린 카운팅. 수코타이는 몰아치는 연타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필살의 주먹’을 휘둘렀다. 이와 함께 3회전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나도 지쳤다. 휘청거리며 다시 링으로 들어갔다. 숨은 헐떡거렸고 머릿속으로는 남아있는 라운드 수를 셌다. 연습 안 한 것을 그렇게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코타이에게 ‘나를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몸을 맡겼다.
4회전, 한발 물러나며 받아 때린 오른손 어퍼컷이 적중했다. 수코타이는 한 번 더 다운됐다. 그도 국왕 앞에서 지기는 싫었던지 엄청난 반격을 했다. 내 얼굴도 멍이 들었다. 4, 5, 6, 7회전을 끝내고 코너로 들어오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나, 못하겠어요, 다음에 합시다.”
매니저가 내게 말했다. “너, 돈 안 줘.”
“언제는 돈을 잘 줬느냐”며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때리려고 하는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8회전, 나는 그 화를 수코타이에게 풀었다. 결과는 KO승이었다. 이 시합 영상을 보면 맨 마지막에 매니저가 승리한 나를 포옹하려 하는데 내가 밀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합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일어나 얼굴을 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귀국길 공항에서 ‘잠자리 선글라스’를 사서 꼈다. 선글라스를 벗자 비행기 승객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승리의 상처는 누가 뭐래도 좋았다. 아픈 줄도 몰랐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4> 군 복무 중 세계챔피언 도전 위해 남아공으로
도전자 지명돼 35시간 걸려 더반 도착 “내가 죽더라도 타월 던지지 마세요”
홍수환 장로가 1973년 세계 밴텀급 챔피언 테일러와의 시합을 앞두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팜비치호텔에서 잠시 몸을 풀고 있다.태국에서 수코타이전을 마친 뒤 얼마 지나 MBC TV프로그램 ‘챔피언 스카웃’이 수코타이전을 방송했다.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세계랭킹에 들어갔다.
나는 동양 챔피언이었으나 세계랭킹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수코타이는 동양 챔피언은 아니었지만 세계랭킹 6위였다. 마지막 8회전에서 사력을 다해 KO로 이긴 결과 나는 세계랭킹 4위가 됐다.
1973년 2월 13일 얼굴의 멍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수색 30사단 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곳에서 6주 훈련을 받고 대전육군병참학교에서 8주 후반기 훈련을 받았다. 14주 훈련을 마친 후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에 배치됐다. 육군 일등병, 부대는 수도경비사 제5헌병대대 본부중대였다.
수경사에서 몸무게를 재고 깜짝 놀랐다. 체중이 68㎏이었다. 14주 동안 훈련을 받으며 10㎏이 쪘다. 그즈음 훈련 기간 동안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던 매니저가 찾아왔다. 시합 일정이 있다고 했다. 이노우에라는 일본 선수가 상대인데 계약 체중이 55㎏이라고 했다. ‘아, 13㎏을 어떻게 빼나!’
별수 없었다.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체중 감량을 하고 시합에 나가서 3회 KO승을 했다. 입대 후 첫 승리였다. 당시 수경사에서는 시합에 나갔다 지면 영창에 갔다. 아니면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야 했다.
당시는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없었다. 또 아마추어 복싱은 몰라도 프로복싱을 키우는 군부대는 없었다. 나는 프로선수였기 때문에 육군 일등병 신분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 밴텀급 타이틀전에 못갈 뻔했다.
나는 상대 선수의 지목을 받았다. 당시 세계 밴텀급 챔피언이 된 남아공의 아널드 테일러가 나를 첫 지명 도전자로 택했던 것이다. 반공교육을 이틀 받고 일본으로 가서 남아공 입국 비자를 받은 후 홍콩, 실론, 세일추일스 군도,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시합 장소인 남아공 더반에 도착했다.
장장 35시간을 이동했다. 비행기를 타고 남아공까지 가면서 반드시 챔피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여행이 길면 길수록 각오가 더 굳어지는 듯했다. 오기가 생겼다. 김기수 선배 이후 7년 만에 세계타이틀전을 하러 가는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권투위원회에서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인이 관심을 가졌다. 김준호 선생님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국인 선교사 세 명이 공항에 나왔다. 또 엄마와 큰형 동생들이 배웅 나왔다.
테일러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테일러를 이기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가 이겨서 귀국한다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더반에 도착했다. 35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김준호 선생님과 나는 더반에 있는 팜비치 호텔에 묵었다. 그곳에서 테일러의 시합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구부정한 큰 키에 스트레이트가 압권이었다. ‘계속 움직이자. 그것이 상대를 죽이는 거다.’ 김 선생님과 나는 초반부터 적극 공세에 나서기로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시합 날. 나는 처음으로 야외특설 경기장에서 경기했다. 그곳에서 우리 원양선원들도 만났다. 한쪽 링 사이드를 점령하다시피 앉아 있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이들을 보면서 김 선생님에게 얘기했다. “선생님, 내가 오늘 죽더라도 타월 던지지 마세요.” 그러자 김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냐. 넌 이겨, 오늘.”
***[역경의 열매] 홍수환 <5>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김기수 선수 이후 8년 만에 세계 정상, 국민들 열광 속에 카퍼레이드 환영
홍수환 장로(왼쪽 네 번째)가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밴텀급 세계 챔피언 아널드 테일러를 판정으로 이기고 기뻐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홍 장로가 세계 챔피언이 된 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드디어 공이 울렸다. 작전대로 몸을 최대한 흔들며 상대 선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널드 테일러의 스트레이트 펀치를 피했다. 그러면서 휘두른 왼쪽 훅이 상대를 강타했다. 1회에 다운을 시켰다. 이어 5회에 또 다운을 빼앗았다.
‘그래, 내가 너를 이겨야만 우리 엄마가 식당에서 쟁반을 나르지 않는다.’ 이런 각오로 휘두른 주먹은 바람을 갈랐다. 계체량 때 나를 깔보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나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몇 회전인지도 몰랐다. 내 귀가 갑자기 뜨끈했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뭔가 흐르는 것도 같았다. 상대의 스트레이트에 내 귀가 찢어진 것이다. 그때가 6회였다. 이때부터 찢어진 귀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운명의 11회전, 심판이 시합을 중단시켰다. 귀에서 흐르는 피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를 커미션 닥터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시합을 중지시킨다면 끝인 것이다. 웬일인지 그는 시합을 계속하라고 했다. 흐르는 피로 봐선 중단시켜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
‘시합은 이기든 지든 멋지게, 매력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리틀 알리’로 불리는 상대와 멋진 경기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 시합은 멋진 정도가 아니라 승리한 경기였다.
나는 세계 챔피언을 적지에서 그것도 판정으로 이겼다. 김기수 선수 이후 8년간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한 세계 챔피언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초대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 그리고 그 뒤를 이은 2대 세계 챔피언 홍수환.”
어린 시절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복싱체육관에 들러 김기수 선수의 연습을 보곤 했었다. 그의 카퍼레이드도 보고 심지어 그가 다녔던 목욕탕까지 따라다녔다. 그런 홍수환이 이제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이다. 이를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이었다. 내가 김기수 선수의 세계 챔피언 뒤를 이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멋진 카퍼레이드 선물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2002년 월드컵 4강에 진출한 대표팀 빼곤 없을 것이다. 나는 혼자였고 월드컵 대표팀은 22명이었다. 인원수에 비례하면 시청 앞 내 카퍼레이드가 더 컸다.
그때부터 정확히 8년 전 김기수 선수의 시청 앞 카퍼레이드를 보고 복싱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 자리에서 복싱팬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남아공 더반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뒤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이 전화 통화는 당시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김기수 선수 어머니가 그렇게 부럽더니만 네가 내 일생의 소원을 풀어주었구나. 대한국민 만세다!”
한국에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육영수 여사도 만났다. 식사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바라던 훈장은 못 받았다. 다른 나라 시민권자로 해외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사람은 훈장을 받고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으로 적지에 나가 세계 챔피언이 된 나는 훈장을 못 받았다.
지금도 ‘대한뉴스 992호’에 나오는 귀국 카퍼레이드를 보면 당시 국민들의 복싱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후 나는 전국을 누비며 ‘홍수환 복싱 시범’ 순회시합을 하고 다녔다. 그해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돌아가셨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6> 2차 방어전에 18전 18KO승 철권이…
대전료 2배 제의에 美 LA서 경기… 자모라 선수에게 4회 KO패 당해
홍수환 장로(왼쪽)가 1975년 미국 LA에서 열린 밴텀급 세계챔피언 2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자모라 선수와 경기를 펼치고 있다.세계 복싱 경량급에서 가장 인기 높은 체급이 밴텀급이다. 모든 도전자들이 호시탐탐 내 타이틀을 노렸다. 첫 번째 도전자는 필리핀의 카바네라 선수였다. 이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며 1차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는 쉽지 않았다. 폭우를 앞두고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멕시코의 자모라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 입대 전 태국에서 수코타이를 고전 끝에 이길 때 매니저 다음으로 날 도와준 분이 있었다. 오운모씨다. 그분을 태국시합 끝난 후 오랜만에 만났다. 입대하고 14주의 훈련기간도 지난 이후였다.
“수환아, 내가 요새 미국에 있어. 미국 프로모터 돈 프레이저 밑에서 매치메이커로 일하고 있는데 한국서 시합하지 말고, 넌 적지에서 강하니까 돈 두 배로 받고 미국에서 시합해라. 너 돈 좀 벌게 해줄게.”
“좋지요.”
“그럼, 미국 LA 교포들 많은 데서 타이틀매치를 하자. 거기 자모라라는 멕시코 선수가 있는데 뮌헨올림픽 은메달리스트야. 지금 18전 18승, 18KO승인데 내가 볼 때는 네가 충분히 이기고도 남아. 어때, 한번 해볼래?”
구미가 당겼다. “얼마 받을 수 있어요?”
당시는 세계적으로 밴텀급 타이틀전이 4만 달러 정도면 이루어졌다. 1달러에 500원인 시절이었다.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200만원이면 서울 후암동 변두리, 용산고 입구, 해방촌, 남영동, 청파동, 갈월동 등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자그마치 8만 달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4000만원. 좋다고 했다. 진행하자고 했다.
상대가 약해서 깔보는 것보다 상대가 강해서 긴장하는 게 낫다. 그래야 연습도 더한다. 맞아도 때려도 소위 복싱하는 맛이 났다.
‘그래, 전승 전 KO승이라….’
긴장감이 온몸에 흘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때는 김준호 선생님 집에서 합숙훈련을 했는데 전 국민, 전 군인의 스타가 된 후엔 그게 어려웠다. 되레 시기를 받는 것 같았다.
복싱 연습을 하기 위해 서울 충무로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연세대 앞에 있는 고려체육관까지 군 트럭을 타고 다녀야 했다. 그것도 동료들과 트럭 안에 쪼그리고 앉아 이동했다.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되자 수경사는 전에 없었던 쓸데없는 것까지 신경을 썼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어렵게 했다. 나는 ‘제대가 얼마나 남았나’ 하고 날짜를 세곤 했다.
행복지수로 따진다면 세계 챔피언이 아니었던 시절, 홍수환이 누군지도 몰랐던 그 시절 행복지수가 더 높았다. 복싱이 하기 싫어졌다.
그즈음 매니저를 바꿨다. 이전 매니저인 김주식씨는 그동안 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 고생해준 김준호 선생님께 부탁했다. 그랬더니 권투위원회는 내가 배신자라며 김준호 선생님을 권투 등록 선수에서 제명했다. 링에 오르기 전에 내란이 생긴 것이다.
당시 한국은 세계 챔피언을 유지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됐건 오운모씨 중개로 2차 방어전을 위해 미국 LA로 향했다. 그동안 나와 호흡을 같이했던 김준호 선생님은 그냥 동행인 자격으로 따라갔다. 교포들은 열렬히 환영하면서 반드시 이겨달라고 소망했다. 그러나 나는 자모라 선수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4회전 KO패,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뺏기고 말았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7> 챔피언 벨트 뺏기고 귀대하자 영창행
경기전 먹은 꿀에 취해 경기 망쳐… 심기일전 자모라와 재대결 추진
자모라 대 홍수환 선수의 세계밴텀급 타이틀 매치가 10월 16일 오후 5시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열린다는 내용의 전단지.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그러나 핑계는 있다. 평상시 나를 좋아하시던 한 할아버지가 세계챔피언 2차 방어전 자모라 선수와의 경기를 앞두고 한국을 떠나 미국 LA로 가기 전 체육관에 꿀을 가지고 오셨다. 그 꿀이 화근이었다. 이 꿀을 공복에 먹고 링 위에 올랐고 그 꿀에 취해 있었다. 진짜 실력으로 자모라에게 졌다면 그로부터 1년 반 후에 26전 26승 26KO승의 자모라와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다시 시합할 이유가 없었다.
시합 당일 계체량 장소를 찾았다. 시합을 주선한 오운모 씨로부터 계체량 장소를 들었지만 한참 헤매다 겨우 찾았다. 도착해보니 우리측 사람은 오씨 뿐이었고 상대 선수인 자모라는 이미 체중을 재고 갔다고 했다. 본래 계체량 때는 두 선수가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오기도 전에 체중을 재고 갔다는 것이다. 내가 챔피언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못 산다고 철저히 무시당한 것이다.
시합은 미국 잉글우드 포럼에서 열렸다. 우리가 투숙한 장소는 LA시내에 있는 웨스턴호텔이었다. 시합시간은 오후 5시인데 정오에 체중 테스트를 통과했다. 밥을 먹고 소화시킬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반드시 공복으로 링에 올라갔던 나였다. 걱정이 됐다. 그래서 아예 아무것도 안 먹고 올라가기로 했다.
한 재미교포 식당에서 준비해준 삼계탕 국물이 먹은 전부였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소화가 안 돼 배가 출렁거리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보단 아예 안 먹고 링에 올라가는 게 휠씬 낫다고 생각했다. 등장할 시간이 거의 됐다. 차 트렁크를 열고 가운을 들어 올리는데 그 할아버지가 주신 꿀이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나는 그 꿀을 퍼 먹다시피 했다. 그 다음은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다. 속은 뒤틀리고 가슴은 답답하고 거리 감각도 떨어졌다. 꿀에 취한 것이다. 그렇게 4회전에서 KO를 당했다. 짧은 세계 챔피언 시대를 마감했다. 챔피언이 됐을 때 멋진 카퍼레이드와 정반대로 챔피언 자리를 내주자 혹독한 시련이 이어졌다. 수도경비사령부에 귀대하고 1주일간 자대 영창에 갔다.
나는 ‘홍수환 후원회’ 회장인 정운수 박사를 찾아갔다. 은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링 위에서 쓰러지면 상대 선수가 못 때리게 말려주는 심판이나 있지. 인생에서 넘어지면 너도나도 더 짓밟으려고 난리야. 약해지지 마라.”
사실 지금도 이 정신으로 산다. 링보다 무서운 인생, 하지만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상대를 때리고 상대에게 맞던 복싱 선수가 무슨 일이든 못할까.
다시 시작했다. 나는 자모라 선수와 재대결할 수 있는 옵션을 갖고 있었다. 수코타이 선수와 자모라 선수가 경기를 벌이고 이 경기에서 이긴 사람과 재대결한다는 것이었다. 경기를 하고 승리를 거두며 자모라와의 재경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옵션은 무시됐고 시합도 무산됐다. 자모라 선수는 나를 이긴 후 8연속 KO로 챔피언 자리를 굳혀 나갔다.
1975년 12월 23일 제대 후 나도 연승가도를 달렸다. 태국의 복싱 영웅 보코솔 선수를 다시 이기며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탈환했고 자모라 선수와의 일전을 학수고대했다. 76년 10월 16일 드디어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자모라 선수와 다시 맞붙었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8> 심판의 편파 진행… 자모라에 설욕 무산
카운트도 안하고 자국 선수 손 들어줘… 세계권투협회서 결국 무효 경기 선언
홍수환 장로(오른쪽)가 1976년 10월 16일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자모라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다.자모라 선수와의 대전료는 12만 달러였다. 1년 반 전 미국 LA에서 방어전할 때 받은 8만 달러보다 4만 달러를 더 줘야했다. 나는 내 돈 4만 달러를 들여 자모라를 불러들였다.
‘내가 미국 가서 졌으니 너도 와서 깨져봐라.’
문제는 체중이었다. 한계 체중 53.520㎏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1년 반 전에도 결국은 체중 실패로 꿀 먹고 취해서 타이틀을 뺏긴 것 아닌가. 나이는 26세가 됐고 체중은 점점 빼기 어려워졌다.
어쨌든 사력을 다해 연습했다. ‘복싱이라는 것이 꼭 주먹만 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 전에 먹은 꿀 때문에 졌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다. 드디어 시합 날 아침 간신히 한계 체중을 통과했다. 자모라도 쉽지는 않았던지 얼굴이 핼쑥했다. 체중을 잴 때 팬티까지 벗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자 더 잠이 오지 않았다.
1976년 10월 16일 오후 5시 인천 선인체육관. 관중은 꽉 들어찼다. 1회전. 아뿔싸! 슈즈 신은 것이 잘못됐다. 강한 이미지를 보이려고 까만 슈즈를 신고 링에 올랐는데 안쪽 밑창이 반질반질해 내 양말이 미끄러져 안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엄지가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신발을 신고 시합했을까.’ 양말이 두꺼우니 신발을 벗고 했어야 했다. 아차 싶었다.
상대의 복부를 노렸다. 자모라가 빠지면서 왼쪽 어퍼컷을 날렸다. 내 이마에 적중했다. ‘이거 봐라’싶었다. 1년 반 전의 주먹이 아니었다.
울분의 주먹 홍수환, 100% KO승률을 유지하려는 자모라의 시합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양발 엄지의 통증이 심해졌다. 운명의 라운드인 9회전 내가 뻗은 원투 스트레이트에 자모라가 걸렸다. 링 쪽에서 빠져나오려다 링 줄에 걸렸다. 다시 한번 들어가 때리려는 순간, 심판이 끼어들어 등으로 막았다.
심판은 멕시코 사람이었다. 멕시코 선수와 세계 타이틀 매치를 하는데 멕시코 심판을 부르다니…. 제3국인 일본 심판 등을 불렀다면 나는 당연히 9회에서 KO승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아쉬운 9회전이었다.
11회전. 발도 아팠고 빼기 어려운 체중을 억지로 뺐더니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자모라도 10회전을 뛴 경험이 없었다. 그 역시 체력이 소모됐다. 11회전 끝 무렵이었다. 내가 코너에 몰렸다.
다행히 “땡!”하고 종이 울렸다. 나는 내 코너로 들어가려 했다. 자모라는 종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공격했다. 30초나 지연됐다. 코너에 들어가 마우스피스만 갈아 물고 나와야 했다.
운명의 12회전. 다시 코너에 몰려 자모라의 연타를 맞았다. 견딜 수 있었다. 펀치력은 약해도 강한 맷집이 있었다. 그런데 심판이 끼어들더니 자모라의 손을 들어버렸다. 한 번의 카운트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관중들이 링을 점령했다. 내 형은 심판의 멱살을 잡았다. WBA는 결국 무효 경기(no contest)를 선언하고 재시합을 하기로 했다.
자모라.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나보다 키도 작고 팔도 짧은데 어떻게 내 오른쪽 턱을 강타할 수 있었을까. 그 근본 원인을 알아야 했다. 물론 엄지발가락이 아팠던 것, 잠 한숨 자지 못한 것, 멕시코 심판이 온 것, 11회전이 끝난 후 30초간 연타를 맞은 것,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12회전에 나온 것 등 정말 억울한 일이 많았지만 말이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9> “네가 이겼으면 문제 없었잖아” 조롱에 이 악물어
판정 항의하던 형 구속돼, 언론도 등돌려…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 벨트에 도전
홍수환 장로가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큰누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자모라 선수와 경기를 끝낸 다음 날 서울 남영동 ‘두꺼비체육관’을 찾았다. 인천구치소에 가 있는 형을 생각했다. 그 경기 9회전에서 멕시코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다가 그 장면이 사진에 찍히는 바람에 구속된 것이다.
자모라 선수의 짧은 왼팔이 어떻게 내 오른쪽 턱뼈를 금 가게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체육관의 한 선배에게 물었다. “형, 내가 왜 그놈 왼손에 그리 맞았지?”
“아니, 네가 그걸 몰라?” “모르겠는데….” “네가 왼손을 뻗으며 들어갈 때 그놈이 왼쪽으로 돌면서 왼손을 뻗었어. 그러니까 들어갈 때마다 오른쪽 턱이 맞더라고.”
‘돌면서 치니까 내 오른손 가드 사이로 파고들면서 오른쪽 턱을 맞힌 거구나.’
그 선배가 또 말했다. “수환아, 내가 보기엔 네 체중도 문제야. 네 몸에 밴텀급은 무리야, 잘 생각해 봐라.”
한동안 턱이 아파 잠을 못 잤다. 인천구치소에 있는 형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왔다.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를 봤다. 미국 LA에서 자모라에게 질 때 받은 8만 달러, 4000만원에서 트레이너 두 명 800만원, 매니저 한 명 1200만원을 떼어주고 나머지 2000만원으로 해방촌 목욕탕을 샀다. 자모라를 한국으로 부를 때 이 목욕탕을 팔았다. 돈이 모자라 종로에서 양복점을 하던 이일호 복싱 원로의 도움을 받았다.
신문 기사는 나를 놀렸다. ‘막 내린 홍수환 시대’ ‘역시 자모라’…. 어느 누구도 억울했던 9회전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결과만 놓고 따졌다. 형님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하는 말. “네가 이겼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잖아.”
귀찮다는 식이었다. 복싱이 크게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커피 한잔 대접받지 못했다. 건성으로 인사만 하고 나와 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상대에게 맞은 상처로 엉망인 내 얼굴을 봐서라도 봐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큰누나를 찾아갔다. 누나에게 비행기값이라도 달라고 해 외국에 가서 경기하고 이겨서 돌아오고 싶었다. 누나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여성 두 분이 나를 알아봤다.
“어머, 홍수환 선수다. 얼마나 아프세요? 한 번 더 도전하세요.”
그날 나는 두 번 울었다. 인천 검사실 앞에서 억울해서 한 번, 누나 가게 앞에서 감격해서 한 번 울었다. 큰누나에게 돈을 얻어 하와이로 향했다. 일본인 프로모터에게 가서 경기 주선을 부탁했다.
‘한 번 더 해보자. 반드시 이기리라. 이겨야 원수를 갚는 거다.’
상대는 필리핀의 바스케스라는 선수였다. 뛰고 또 뛰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달렸다. 아침에 일어나 뛰는 것은 복싱 선수에게 산삼과 같다. 만장일치로 이겼다.
그즈음 WBA에서 주니어 페더급을 새로 만들어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귀국해서 염동균 선수와 일본 다나카 선수를 이기고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11전 11승 11KO승의 파나마의 괴물 선수 카라스키야와 한판 붙게 됐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상대는 ‘11전 11KO승’ 파나마 복싱 영웅, 출국하기 전 아버지 묘소 찾아 인사 드려
홍수환 장로의 부모. 아버지 홍경섭씨와 어머니 황농선씨.‘밴텀급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2㎏ 더 올려 주니어 페더급에서 힘 좀 써보자.’ 이런 각오로 연습량을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랐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와 싸운다는 건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했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희망을 못 줄지언정 “질 거면서 거기까지 왜 가냐”는 식이었다. 한 선배는 내가 콜롬비아 선수에게 KO로 패했을 때 “일어나서 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안 일어났다”고까지 했다. 복싱이라고는 1회전도 뛰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나.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제재소에서 사온 통나무를 쪼개며 힘을 키웠다. 샌드백이 ‘ㄱ’자로 꺾일 만큼 펀치력도 키워 나갔다. 신도체육관 조순현 관장에게 어깨 힘 빼는 법도 배웠다.
시합을 앞두고 권투위원회 회장님과 한 제과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지더라도 잘 싸우고 와라. 오렌지 주스 하나 마셔.”
적지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치르러 가는데 지더라도 잘 싸우고 오라니. 체중 조절하는 선수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하다니….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란 듯이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는 기관총으로 탱크 쏘러 가는 바보다.’ 이를 악물었다.
만나는 상대가 모두 KO승을 자랑했다. 태국 수코타이 18승 16KO승, 자모라 26승 전승 KO승, 카라스키야도 아마추어 전승으로 11승 모두 KO승이었다. 내 승률은 희박했다. 공항에 나온 가족들에게 필승을 다짐하며 비행기를 탔다. ‘이게 마지막 시합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테말라, 파나마로 가는 항로였다. 이기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탱크에 기관총 쏘다 오느냐의 문제였다. 비행기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서 벌어진 동네 복싱시합을 보러 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나와 같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그때까지 47번을 싸우면서 시합마다 경기 전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시합을 마치면 또 산소를 찾았다. 모두 94번이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앞두고도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자마자 “아버지가 그렇게도 예뻐하시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어릴 때 막내 여동생이 집에서 기르던 하얀색 큰 불도그에게 목이 물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고 어린 여동생을 구했다. 이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수환이 순발력이 엄청 빠르네.” 여동생에게 가까이 있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랐다.
할머니 생각도 났다. 서울 돈암동에서 살 때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항상 책을 읽었다. 표지는 검정색, 옆은 빨간색인 작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하나님 말씀 책”이라고 하셨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1> 국내 방송사 카라스키야戰 KO패 우려 중계 꺼려
복서로는 늙은 나이 27세에 도전… 조부모님 신앙이 ‘기적’ 만든 듯
복싱 전문지 ‘판치라인’ 1977년 10월호. 카라스키야 전을 앞두고 표지에 ‘창조되려나… 홍수환 신화’라는 제목을 달았다.누나에게 들은 어릴 때 이야기다. 누나 등에 업혀 미군 지프에서 던지는 초콜릿을 받으려다 개천에 떨어졌다. 누나가 내려가 보니 하나도 안 다쳤다. 누나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이를 본 사람이 엄마에게 얘기해서 크게 혼났다고 했다.
조금 더 자라선 신문 배달하는 동네 형들을 따라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를 부르고 다녔단다. 얼마나 까불었는지 서울 돈암동에 살 때 군인이던 외삼촌이 집 앞에 세워 놓은 트럭에 동생과 올라 장난치다가 큰 사고를 내기도 했다. 이것저것 만졌는데 트럭이 움직이더니 내리막길로 달렸다. 그래서 남의 집을 부숴버렸고 이로 인해 신문 사회면에 처음 이름이 올랐다. 개구쟁이였지만 누나는 항상 내 편이었다. 시합을 앞두고 나를 격려했다.
“수환아 넌 이겨, 엄마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폭격이 심했는 줄 아니. 그런 속에서도 넌 살았어.”
엄했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읽으셔서 그런가, 비참하게 맞고 쭉 뻗어버린 시합은 없었다. 아니면 신의주 제2교회를 섬겼던 할아버지의 헌신이 4전5기 시합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3번을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패 하는 룰이 있었다. 카라스키야 측은 룰 미팅에서 ‘무제한 다운 룰’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어차피 KO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나 또한 판정을 원치 않았다.
당시 파나마엔 세계 복싱영웅인 로베르트 두란 선수가 있었다. 카라스키야의 인기는 두란을 능가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다. 나는 그들 파티에 제물이었다.
파나마는 더웠기 때문에 한 체급 올린 체중 감량엔 무리가 없었다. 남은 1주일은 시합 때 있는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도록 말수조차 줄여야 한다. 그때 한국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시합 1주일 전인 11월 20일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세계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김태호 선수가 상대 선수 세라노를 다운시키고도 10회전에서 KO로 졌다고 했다.
또 다른 소식도 들렸다. 같은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파나마의 루한 선수가 자모라를 10회 KO로 이겼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복싱의 나라였다. 사파타, 루한, 두란에 이어 카라스키야까지 세계 챔피언이 된다면 파나마는 세계 챔피언 4명을 보유한 복싱 강국이 되는 것이다.
복싱 연령으로는 늙은 나이 27세, KO율 30%인 내가 그들 잔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국에서는 이 시합을 중계방송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나 마나 뻔한 KO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싱을 좋아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1주일마다 한국선수가 KO로 지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김태호 선수의 시합을 중계했던 TBC 박병학 아나운서와 김재길 체육국장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홍수환 시합은 꼭 중계하겠다, 홍수환이 지면 국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다.
온 국민이 복싱을 좋아했다. 세계 복싱계의 동향은 물론 선수 랭킹까지 줄줄 외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판치라인’이라는 복싱 전문지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카라스키야전 중계가 결정됐다. 계체량도 통과했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2>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
세 번 다운당하고 패색 짙은 경기 조순현 선생 격려에 다시 힘내
홍수환 장로가 1977년 11월 27일 카라스키야와의 경기에서 그의 주먹을 맞고 링 바닥에 쓰러져 있다.드디어 시합 날. 링 위에서 진행된 계체량을 통과하고 빨리 방에 올라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기에서 내 시합 심판인 미국인을 만났다.
“Hey, soo! I’m the referee. Good luck today(수환, 내가 심판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Thank you, but I’m ready for this fight(고마워요. 나는 준비가 돼 있습니다).”
“Where did you learn English(영어 어디서 배웠어요)?”
“High school(고등학교에서요).”
이 짧은 만남은 기적을 만들었다. 왜 시합 하루 전 룰 미팅 때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을까. 왜 시합 날 엘리베이터에서 심판을 만났을까. 경기가 끝난 이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합을 앞두고 나는 라커룸에서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가 나타났다. “수환아, 오늘 시합 네가 이겨. 상대는 펀치가 세지만 턱은 약해. 너는 펀치가 좀 약해도 대신 맷집이 좋잖아. 자모라 봐라, KO로 졌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 안 쓴다.”
나는 이마에 땀이 약간 흐르도록 몸을 풀고 코트라에서 빌린 우리나라 고유의 삿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링 위에 올랐다. 카라스키야도 등장했다. 초록색 가운을 입고 올라온 그의 모습은 이미 챔피언이었다. 애국가가 흐르고 결전의 시간이 왔다. 복싱 선수에게 언제가 제일 긴장되는 순간일까. 바로 ‘세컨드 아웃’이다. 선수 둘만 남으라고 할 때다.
“수환아, 5회전만 넘기면 이 싸움은 네 거다.”
조순현 선생님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링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상대 상체 놀림이 부드러웠다. 주먹도 생각했던 대로 빠르고 가벼웠다. 그리고 강했다. 이제껏 상대를 5회전 안에 모두 보내버린 그런 주먹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다. 5회전 안에 끝내자. 그게 편하겠다.’ 그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1라운드는 잘 싸웠다. 운명의 2라운드. 상대의 전광석화 같은 왼손이 나올 때 나는 라이트훅으로 응수했다. 아뿔싸! 상대가 오른손 어퍼컷과 왼손 훅으로 나를 받아쳤다. ‘걸렸구나!’ 링 밖에서 선생님이 외쳤다. “침착해!”
나는 이미 링 바닥에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쓰러졌다. 그 정도 되자 파나마 관중은 게임이 이미 끝난 줄 알고 축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심판이 나를 살렸다. 카운트를 천천히 셌다.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때 종이 울렸다. 2회전 끝.
종소리를 듣고 겨우 코너로 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꺼내 마시게 했다. 미제 군용 암모니아였다. “정신 나게 하는 거다.” 너무 독해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쭉 마셔. 1회전만 더하고 하지 마!”
‘그래, 1회전만 더하고 그만하자.’ 그러고 나서 앞을 보니 상대 코너의 링 줄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신이 좀 든 것이다.
“1회전만 하고 관둬.” 선생님이 또 외쳤다. 선생님은 눈물을 참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릴 기세였다.
“세컨드 아웃.”
선생님은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링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래. 총을 맞더라도 등에 맞지 말고 앞가슴에 맞고 전사하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소가 너를 받는 게 아니야. 네가 겁먹으니까 소한테 받히는 거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겁이 나를 죽이는 거야. 네 주먹 별거 아니야.’
***[역경의 열매] 홍수환 <13> 4전5기 기적의 승리… 나 아닌 하나님의 작품
‘3번 다운’ 룰 변경 등 작은 행운 겹쳐… 돌이켜보니 하나님이 이기게 해준 것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를 4전5기 끝에 KO시킨 홍수환 장로를 보도한 경향신문.기억이 생생하다. 카라스키야와의 3회전. 카라스키야가 왼손 연타를 칠 때 나는 있는 힘껏 라이트훅을 날렸다. 안 맞았다. 이어 때린 왼손 더블 펀치는 상대의 배와 턱에 적중했다. 그때 내 눈에 카라스키야의 두 무릎이 들어왔다. 반쯤 주저앉았다 일어났다.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시 들어가면서 원투를 쳤다. 오른손이 적중했고 홀딩 상태가 됐다. 그때 걷어 올린 두 번의 짧은 오른손 어퍼컷이 결정타였다.
카라스키야의 눈동자를 보고 링 구석에서 계속 몰아붙였다. 자꾸 주먹이 빗나가 상대를 약간 누르듯 공격했다. 두 번이나 그랬다. 주심은 내게 주의를 주며 카라스키야를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판에 카라스키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대로 시합이 끝났다. 4전5기.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의 말씀대로 나는 이겼다.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다.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LA에 도착해 교포들과 만났다. 2년 반 전 자모라에게 졌을 때의 슬픔 대신 기쁨을 남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747점보기의 기장이 “기내에 파나마에서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가 있다”고 방송하자 승객들이 환호하며 박수쳤다.
1등석에 앉아 아버지를 회상했다. 할머니도 생각했다. “너희들은 예수님 믿어야 돼, 예수님 믿으면 복 받아.” 자주 그렇게 말씀했다. 그래서 적지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이 됐나 싶었다. 한 번은 남아공에서 한 번은 파나마에서.
이기긴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남들은 ‘4전5기’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내가 싸웠던 영상을 보지 못했고 무슨 주먹으로 카라스키야를 KO시켰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큰 트로피를 내 옆에 세우고 승무원들과 축하사진을 찍었다. 즐겁긴 했지만 내가 이긴 것 같지 않고 누군가 나를 이기게 해준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룰 미팅 때 왜 룰이 바뀌었을까. 당초 3번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로 인정하던 룰이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다. 체중을 재고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떻게 심판을 만나게 됐을까. 네 번 다운당한 후 실컷 맞고 있을 때 선수 보호 차원으로 경기를 중단시켰다면. 큰형은 종 치기 바로 전에 수건까지 던지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 서소문 TBC 동양 방송국에 걸린 현수막 글귀가 재미있다. ‘불사신 홍수환’.
1974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열린 카퍼레이드보다 환영 인파가 2배 더 많았다. 시청 축하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때 비로소 시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심판의 카운트는 분명히 느렸다. 나를 봐주듯 했다. 세 번째 다운당해 로프에 기댔을 때 심판이 내게 다가왔다. 보통은 선수에게 오라고 부른다. 네 번째 쓰러졌을 때 심판이 내게 와서 물었다.
“You OK(괜찮나)?” “Slippery(미끄러졌어요).”
이 부분이 가물가물 생각났다. 심판은 미끄럽다고 들었을까, 미끄러졌다고 들었을까.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이번 승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로프 쪽에 몰아놓고 때리는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있는 힘을 다해 치는 무지막지한 연타였다.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켰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4> 조부모로부터 신앙 대물림… 복싱 인생 버팀목 돼
‘한국 첫 두 체급 석권’ 은혜 간증·강연… 복싱 스타 중 조지 포먼 등 신앙인 많아
홍수환 장로가 2016년 9월 서울 스타복싱체육관에서 4전5기의 상대 선수인 카라스키야를 만나 기념촬영하고 있다. 카라스키야는 1981년 은퇴 후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나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 한국에 돌아와 서울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묘지 비석에 늘 있던 십자가가 그날은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한국 최초의 두 체급 석권. 어릴 때 아버지 배를 치면 주먹이 세졌다고 격려해 주시던 당신. 그 아버지 앞에 꼬마였던 아들이 자랑스럽게 서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복싱 사랑, 함께 보던 앞집 아저씨 복싱시합,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학교 가는 골목길에 붙어있던 복싱 포스터를 보면 으레 그리워졌던 아버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방과 후 계동에서 충무로의 집까지 가면서 보던 한국체육관, 그 체육관에서 연습하던 복서들을 구경하던 일, 김기수 선수가 좋아서 연습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목욕탕까지 따라다니던 일 등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스쳐갔다.
나는 확신한다. 할아버지의 신앙생활, 특히 신의주 제2교회를 세울 때 못질하면서 헌신했던 할아버지의 신앙, 29세 때 남편을 여의고 홀로 4남매를 키우며 성경을 항상 곁에 두고 읽으셨던 할머니의 신앙이 내 복싱 인생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걸 통해 진실로 번성케 하신 것이다.
나뿐 아니고 여러 세계적인 복싱선수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인 조지 포먼은 알리에게 지고 난 후 목사가 됐다. 47세에 링에 돌아와 당시 22살이나 아래인 무어 선수와 싸워 10회에 KO시켰다. 그 후 그는 링 중립 코너에 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
역사상 가장 강한 주먹으로 꼽히는 타이슨이 홀리필드에게 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홀리필드는 11회전에서 KO로 이긴 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님 때문에 이겼다”고 했다.
전 세계가 좋아했던 알리는 1964년 소니 리스턴을 7회 KO로 이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위대하다. 내가 세상을 흔들었다.”
알리와 포먼을 비교해보자. 알리는 전무후무한 헤비급 3연패를 이뤘지만,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다.
반면 포먼은 목회자가 됐을 뿐 아니라 가장 예리한 복싱 해설가로 선수 시절 못지않은 영광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파나마에서의 4전5기 시합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전국 교회에서 당시 영상을 보여주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는지 간증하고 다닌다. 또 군부대, 기업체, 보호관찰소를 다니며 하나님께 의지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호소한다.
23년이 지났다. 나는 앞으로도 강연을 통해 할렐루야를 외치고 하나님이 시합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증거하며 살 것이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5> 가사하라 상대로 방어전… 시합 직전 설사로 고생
태연한 척했지만 속 아프고 힘 빠져… 상대는 세번 다운되고도 버티며 반격
홍수환 장로가 1978년 2월 일본에서 열린 가사하라전에서 상대를 다운시키고 있다.일본 가사하라 선수와의 시합에 대비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때까지 일본 선수와 13번 싸워 12번 이기고 한 번은 일본 규슈에서 하라다 선수에게 졌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76년 11월 서울에서 멋지게 이겼기 때문에 아직 진 적이 없다고 늘 생각했다.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기자회견 할 때 한 기자가 가사하라 선수가 나온 신문기사를 보여줬다. 가사하라가 자기 아버지 묘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실렸다. 나는 ‘아버지 묘지에 94번 찾아갔는데 당신은 몇 번이나 갔겠나’라고 생각했다.
시합 날 아침 계체량을 통과하고 주스를 마셨다. 아침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설사를 시작했다. 형에게 이야기했다.
“형, 내 말만 들어. 나 지금 먹는 대로 설사해. 조순현 선생님 좀 불러줘요.”
선생님이 내 방으로 오셨다. “왜 그래, 수환아.”
“선생님, 제가 이제껏 복싱하면서 이런 적은 없었어요. 먹는 대로 나옵니다. 그러니 커피숍에 좀 있다가 내려갈게요. 밥 잘 먹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게요.”
“그렇지. 절대 내색해선 안 돼.”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연했다. 후배에게 호텔 방으로 몰래 약을 사오게 했다. 설사 멈추는 약, 초록색 알 6개였다. 약을 먹으면 설사가 당장 멎는다고 했다. 약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설사가 멎었다.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니 멈추었겠지만.
“할아버지, 손자가 할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설사를 합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먼 파나마에서 가져온 챔피언 벨트를 일본에 풀어줘서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이 시합 이겨야 합니다. 제발 힘을 주세요. 힘을.”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열심히 바란 적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신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할아버지를 불렀다.
시합 장소는 일본 전통씨름장. 겉으로는 밝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설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아팠다. 무척 아팠다. 링에 올라가며 나는 속으로 계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았다.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이 손자가 갚게 해주세요.”
1회전이 시작됐다. 그는 나를 잡지 못했다. 2회전에서는 원투로 다운을 빼앗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미국 심판 마틴 던킨은 완전 친일파였다. 다운된 선수를 세우다시피 하며 말을 붙였다. 파나마에서 내가 심판의 도움을 받아서일까. 이젠 정반대가 됐다.
5회전에서도 다운을 빼앗았다. 코너에서 받아 때린 주먹이 적중했다. 그런데 힘이 빠져 갔다. 허벅지에 쥐가 났다.
‘할아버지, 지금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닙니다’라며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가사하라는 끈질겼다. 몇 번의 주먹을 제대로 맞고도 버텼다. 가사하라가 비틀거리면 심판은 가운데 끼어들어 내 공격의 맥을 끊었다. 8회전이 끝났다. 몸은 지쳐갔다. 운명의 9회전. 가사하라가 내 상태를 알았는지 끝까지 덤볐다.
9회전 중반 그는 사력을 다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연타 다섯 대가 차례로 상대의 목과 턱에 적중했다. 그는 로프 밖으로 머리가 빠지면서 다운됐다. 심판은 카운트를 느리게 하는 것 같았고 가사하라는 다시 일어났다. 가사하라에게 접근해 연타를 치려는데 공이 울렸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6> 목회자 된 동생 “형은 전도 세계 챔피언”
가사하라전 이겼지만 무리로 몸 망가져… 그제야 주께 귀의 옥희와 한날 세례식
홍수환 장로가 한 교회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과정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일본 가사하라전 10회에서 두 번 더 다운을 빼앗았다. 모두 5번 다운시켰다. 가사하라는 또 일어났다. 이젠 내가 지쳤다. 카라스키야도 내가 매번 일어날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겠지 싶었다. 하루 종일 설사하고 먹은 것도 없이 경기에 나와 9회전을 끝냈다. 남아있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5회전이 더 남아 있었다. 내 복싱 인생에서 이 시합만큼 어려운 시합은 없었다. 솔직히 11회전부터는 내가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경기는 내가 판정으로 이겼다. 일본 교포들의 환영을 받고 귀국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설사를 하고 15회전까지 뛰었을 때 내 몸은 이미 허물어졌다. 내 몸이 허물어지자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됐다.
나는 1978년 5월 7일 콜럼비아 카르도나 선수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줬다. 아버지가 49세로 돌아가셨는데 공교롭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와 똑같이 49전 만에 챔피언을 빼앗겼다. 이것이 싫었다. 라이벌이던 염동균 선수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뺏긴 지 2년6개월 만에, 그것도 프로선수로 데뷔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50전을 끝으로 사각 링의 인생을 접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신의주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할아버지의 후손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한 것이다. 가문의 영광이 홍수환은 아니다. 우리 가문의 영광은 ‘철없던 사랑’을 부른 내 동생인 가수 홍수철이다. 동생이 목회자가 된 것이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그는 신학박사까지 됐다. 그토록 고생했던 미국 이민생활 10년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동생은 내게 “형, 내가 7년째 기도하고 있어”라고 했다. 동생은 16년 만에 다시 만난 내 아내 옥희와 함께 경영하는 불고기집에 십자가를 걸게 했다.
1996년 12월 29일 아내와 나는 서울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으로부터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그전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제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런 비전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챔피언이 됐고 이제 거듭 났으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
나는 동생 홍수철 목사가 담임인 예빛교회 장로다. 천국에 계신 어머니는 내가 장로인 것을 알고 활짝 웃고 계실 것이다. 동생은 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어릴 적 기억에 정말 맛있었던 중국집에서 물만두를 맛있게 먹던 막내가 이제는 단상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도 홍수철 목사가 자랑스럽다. 그 좋은 목소리로 설교 중에 찬양도 한다.
홍 목사는 내게 몇 번을 이야기했다. “형은 세계 챔피언이잖아. 세계 어느 곳에 가든 환영받잖아. 이제는 전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해. 형은 이미 전도 세계 챔피언이야.”
그는 내가 이미 전도 챔피언이라고 믿고 선포하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전도서 12장 13절 말씀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 말씀을 항상 가슴 깊이 새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 거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챔피언이오니 죽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7> 카르도나·스캔들·프로모터, 3대1로 싸워 패배
“옥희 때렸다” 2년 반 동안 시합 못해 50경기 채우고 은퇴… 미국으로 이민
홍수환 장로가 콜롬비아 카르도나 선수에게 다운을 당했다.1978년 5월 7일 콜롬비아 카르도나 선수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 준 이야기다. 그리고 왜 50전을 채우고 은퇴하려 했는지도 이야기하고 싶다.
카르도나 선수는 가사하라 다음에 싸운 선수였다. 콜롬비아 출신이었다. 이 선수와 싸울 때 나는 세 가지와 싸워야 했다. 먼저 카르도나 선수, 다음은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 그리고 내 제2차 국내 방어전의 프로모터권이었다. 즉 누가 프로모터 할 것이냐를 놓고 싸웠다. 그러다 보니 힘들었고 결과가 뻔했다. 나는 한국에서 시합한다면 프로모터는 당연히 최근호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모터권은 일본인 아라시다가 쥐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카라스키야의 승자는 무조건 아라시다가 지정하는 두 명의 도전자와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옵션이 있었다. 그래서 두 달, 세 달 간격으로 가사하라, 카르도나와 붙었다.
연습하랴, 체중 조절하랴, 세 가지와 싸우랴, 여러모로 카르도나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카르도나와의 시합에서 12회 TKO로 졌다. 1회 때 눈이 찢어졌다. 눈 위에서 흐르는 피는 내 눈으로 흘러들었다. 내 눈뿐만 아니라 그날 장충체육관 링과 바닥에도 떨어졌다. 오픈시합 때 단 한명도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체육관에 묻은 피는 다 내 것이었다. 눈이 찢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복싱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상처가 난 적이 없었다.
3회전 이내에 버팅(부딪치는 반칙)으로 상처가 나면 재시합을 할 수 있었다. 시합을 다시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앞이 보여야 복싱을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일본의 아라시다로부터 주최권을 넘겨받은 친일계 한국인 이시야마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시합에서 이기면 옵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카르도나가 이길 수 있게 내버려 둬야 했던 것이다.
피가 양 눈 사이로 흐를 때 눈을 껌벅거리면 눈앞이 붉은 암흑으로 변했다. 1회부터 12회 KO로 질 때까지 앞을 제대로 못 본채 나는 상대방 왼손 하나에 놀림을 당했다.
사람들은 내가 조강지처 옥희를 버려서 졌다고 했다. 파나마에선 4번 다운당하고도 옥희 때문에 힘을 얻어 이겼다. 나는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옥희와 힘들게 결혼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떳떳이 놀러갈 수 없이 살다가 1년여 만에 파경을 맞았다. 딸 아이 하나를 낳았고 “맞았다” “때렸다” 해가며 우리는 꼭 14개월 만에 헤어졌다. 내 나이 28세였다.
한국권투위원회는 내가 같이 살던 여자를 때렸다고 2년 반 동안 시합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1978년 5월 7일 카르도나에게 챔피언 자리를 뺏긴 후부터 마지막 시합 1980년 12월 9일까지 2년 하고도 6개월 넘게 시합을 못했다.
마지막 시합이 50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49세였고 세계타이틀을 뺏긴 숫자도 49전만이었기 때문에 49라는 숫자가 제일 싫었다. 그래서 친구 염동균 선수와의 시합을 끝으로 50전을 채우고 은퇴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50전을 채우고 링을 떠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 1969년 데뷔전이 무승부더니 80년 은퇴시합도 무승부였다. 링을 떠나고 83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8> 어려웠던 이민 생활… 하나님은 다음 계획 예비하셔
멕시코 국경서 티셔츠 장사하다 귀국… “챔피언 내 아들이…” 어머니 눈물바람
홍수환 장로(왼쪽)와 동생 홍수철 목사(구리 예빛교회).하나님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어릴 때 복싱 선수가 집 앞으로 이사 온 것, 그 선수의 시합을 아버지와 같이 본 일이 ‘복싱 선수 홍수환’의 시작이었다. 이어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가 49세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나는 한국 최초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의 카퍼레이드를 보게 됐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이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나를 훈련시켰다. 돈 없던 일본 훈련 시절, ‘빠찡꼬’에서 구슬 닦기로 일했다. 큰 통에 구슬을 넣고 광약을 부은 다음 물레방아를 돌리듯 손잡이를 돌리는 일이었다. 그 일이 모든 선수가 탐내던 나의 라이트 어퍼컷을 만들었다. 그 어퍼컷으로 한국 챔피언, 동양 챔피언이 됐고 수코타이전의 8회 KO승을 이뤘다.
그러면서 기도하게 하셨다. 내가 성숙하지 못해 기도하지 못할 때 곳곳에서 기도해주시던 분들이 계셨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미국 선교사였다. 군에 입대해 14주간 훈련하고 12㎏를 감량한 후 지구 반대편 남아공 세계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와 시합하게 됐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 김준호 선생님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국인 선교사 세 명이 배웅 나와 기도해줬다.
시합 초반에는 어려웠다. 11회전에선 귀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자 심판이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링 닥터는 시합을 계속하라고 했고 이후 적지에서 세계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선교사들이 해준 기도가 내겐 큰 힘이 됐다.
KO왕이라고 불리던 자모라를 만나 두 번 모두 KO로 패했고 이후 모두 나의 복싱인생이 끝났다고 했지만 나는 재기에 성공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 자리를 놓고 시합할 때도 그랬다. 갑자기 시합 룰이 무제한 다운방식으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미국인 심판을 만났다. 내가 4번 다운당하고 로프에 몰려 공이 울리기 전까지 그토록 맞았는데 그 심판이 시합을 중지시키지 않았다. 심판이 그때 경기를 중단시켰다면 어땠을까. 나는 초대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과정도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의 경기들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설사에 시달려 배에 통증을 안고 적지 일본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지킨 일, 카르도나에게 손 한번 못 쓰고 타이틀을 뺏긴 일, 옥희와 만나 사생활이 시끄러워 챔피언 타이틀을 뺏겼다는 이유로 2년반 동안 시합하지 못한 일 등도 돌이켜보면 큰 틀에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1981년 미국으로 향했다. 그곳에 이민 가서 알래스카에서 5년간 고생했다. 로스앤젤레스(LA)로 87년에 와 멕시코 국경에서 티셔츠 장사를 했다. 그땐 정말 힘들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겨우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나를 측은하게 여겼다. 가끔 어머니 식당에서 조용필의 ‘허공’을 불렀다. 어머니는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자랑스러운 아들 수환이가 이제는 한국에서 발을 못 붙이고 평택 미군부대 엄마 식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라며 슬피 울곤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후의 인생을 준비하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9·끝> 인생에서 4번 쓰러진 후 만난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계획대로 나를 훈련시키고 쓰셔… 기업·軍·소년원 등서 예수 사랑 강연
홍수환 장로가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 최고”라며 ‘엄지척’을 하고 있다.어머니는 1994년 돌아가셨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복싱 해설자로 나섰다. 내 해설을 들은 한 선배는 강사로 활동해 보라고 추천했다. 그래서 강사의 길로 들어섰다.
어머니를 서울 영락교회 묘지에 모시고 난 후 형은 “엄마 모시고 남은 돈 200만원은 수환이 네가 써라”고 했다. 이 말에 나는 죽고 싶었다. 우리 집안이 어려웠을 때 내가 세계챔피언이 됐고 다들 나로 인해 먹고살았다. 그런데 이젠 빈털터리가 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은 돈 200만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너무 슬펐다.
큰형이 말했다. “수환아. 너무 속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엄마가 너를 제일 사랑했잖아. 다른 자식은 다 대학까지 나왔는데 너만 대학도 못 가고 복싱했잖니.”
나는 엄마에게 죄 많은 자식이었다. 미국 이민생활 10년이 엄마 생명을 10년은 단축시켰다. 그만큼 나의 이민생활은 힘겨웠다. 어느 날 누나가 말했다.
“수환아, 우리 교회 가자.” “교회 가려면 영락교회에 가야지.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아니야. 따라와 봐.”
서울 남대문시장 삼익패션 맞은편에 상동교회가 있었다. 누나와 나는 대낮 아무도 없는 상동교회 기도방에서 울며 기도했다. 그날 누나가 얼마나 나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나는 헤어진 지 16년 만에 옥희와 만나 재결합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미국 등 세계를 다니며 예수님을 자랑했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도 4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셈이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잘 몰랐다. 4번 쓰러지고 나서야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4번 쓰러졌다가 5번째 일어나 싸워 이겼기 때문에 나를 기억한다. 내가 그냥 상대를 일방적으로 이겼다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했을까. 그냥 복싱 잘하는 선수, 아니면 지금 기억에 없는 그런 선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나를 훈련시키셨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하나님 계획대로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래저래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사용하신다. 그렇게 쓰시려고 하나님은 역경을 주시고 훈련시키신 것이다. 지금도 그 훈련은 계속되고 있다. 기업체 군부대 소년원 등에서 강연하며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간증한다.
강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홍수환을 모르는 젊은세대 앞에 서서 나를 이야기하고 꿈을 주고 복음을 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고 확신한다. 순간순간 주님을 찾고 동행하며 말씀을 이어간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또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더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를 주목해 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루셨다. 그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자랑하고 소개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고 찬송이다.
“할렐루야! 내 인생 마지막에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전의 나의 모든 영예가 다 헛것입니다. 두 번의 세계챔피언 타이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저는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