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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먼저, 시 먼저
― 이원수의 동요론
-윤동재
이원수의 『아동문학입문』(소년한길, 1984)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여러 논의 가운데 그의 동요론이 가장 생생하게 남는다. 그 요점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동요는 시다’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로서 성립하고, 그 시가 노래할 수 있는 형식을 지니며, 거기에 곡이 붙을 때 동요가 된다는 것이다. 노래가 먼저가 아니라 시가 먼저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먼저’란 창작의 시간적 순서라기보다 동요가 문학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가리킨다.
이 말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설득력이 있다. 처음부터 곡에 맞추는 일에만 치우친 노랫말은 리듬은 좋을지 몰라도 시로서의 성취가 부족해지기 쉽다. 이원수는 동요가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보다 먼저 시로서 제대로 서기를 요구했다.
강소천의 두 동요
『아동문학입문』에는 이원수의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 주는 강소천의 동요 두 편이 나온다. 한 편은 시로서도 훌륭한 동요의 보기이고, 다른 한 편은 노래하기에는 좋지만 시로서는 모자란 동요의 보기이다. 두 편이 모두 한 시인의 작품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원수가 평가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작품이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 강소천, 「닭」
이원수는 이 작품에서 물을 먹는 닭의 움직임을 눈여겨본다. 닭이 물을 한 모금 머금고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닭에게도 무언가 생각하는 순간이 있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또 물을 삼키려고 고개를 쳐드는 동작에서 가루약을 먹는 어린아이를 떠올리기도 한다(273쪽).
나도 이 시를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서 노래로 배웠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가끔 부른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시로 읽어보니 노래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시의 힘은 닭이 물을 먹는 흔한 모습을 새롭게 보게 한다는 데 있다. ‘물 한 모금―하늘 한 번’, ‘또 한 모금―구름 한 번’이 짝을 이루며 되풀이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단순히 가락을 만들기 위한 반복이 아니다.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드는 닭의 동작을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쳐다보고’라고 옮겨 놓는 순간, 먹고 삼키는 생리적인 동작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몸짓으로 달라진다. 시인은 닭이 무슨 생각을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닭의 동작을 보여 줄 뿐인데, 읽는 사람 쪽에서 그 몸짓에 생각과 표정을 덧붙이게 된다. 곡을 떼고 읽어도 남는 이 발견이 이 동요를 오래 살아 있게 하는 힘이 아닐까.
이원수는 강소천의 「새해의 노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
새해다, 설날이다, 기쁜 날이다.
모두 다 벙글벙글 해님도 벙글
흰떡 먹고 찰떡 먹고 떡국도 먹고
그리고 새로 한 살 나이도 먹고,
새해다, 설날이다, 기쁜 날이다.
모두 다 우쭐우쭐 국기도 우쭐
동네방네 세배 가자 꼬까옷 입고
손잡고 정다웁게 노래 부르며.
― 강소천, 「새해의 노래」 전문
이 작품에 대한 이원수의 평은 가차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시를 찾을 수 없다. 동요란 것이 시가 아니라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동요를 시라고 인정한다면 이런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322쪽)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흥미롭게도 두 작품 모두 반복과 짝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닭」에는 ‘물 한 모금―하늘 한 번’, ‘또 한 모금―구름 한 번’이 있고, 「새해의 노래」에는 ‘새해다―설날이다―기쁜 날이다’, ‘흰떡―찰떡―떡국’, ‘먹고―먹고―먹고’ 같은 반복과 나열이 있다. 그래서 두 작품 모두 입에 잘 붙고 노래하기 좋다.
그러나 반복이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 「닭」의 반복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면서도 닭을 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어 놓는다. 처음에는 물을 먹는 닭이었는데, 네 행을 읽고 나면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는 닭이 남는다. 반복이 가락을 만드는 동시에 하나의 발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면 「새해의 노래」의 반복은 이미 알고 있는 설날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열하는 쪽에 가깝다. 설날은 기쁜 날이고, 떡과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고, 꼬까옷을 입고 세배를 간다. ‘벙글벙글’, ‘우쭐우쭐’도 흥겨운 분위기를 보태지만 설날을 이전과 다르게 보게 하지는 않는다. 시를 읽기 전 우리가 알고 있던 설날과 읽고 난 뒤의 설날 사이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시인이 의미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닭」은 닭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는 동작만 놓아두고 그 의미를 읽는 사람에게 맡긴다. 반대로 「새해의 노래」는 첫 행부터 “기쁜 날이다”라고 감정을 말해 주고, 이어서 왜 기쁜지를 보여 주는 설날의 풍경들을 하나씩 늘어놓는다. 「닭」에서는 이미지가 먼저이고 의미가 뒤따라오지만, 「새해의 노래」에서는 이미 정해진 의미를 이미지들이 뒷받침한다.
그래서 두 작품의 차이는 단순히 소재가 새롭고 낡았다는 데 있지 않다. 둘 다 누구나 아는 일상에서 출발한다. 다른 것은 그 일상을 언어가 어떻게 바꾸어 놓느냐이다. 「닭」에서는 반복과 배열이 평범한 동작을 새로운 장면으로 바꾸지만, 「새해의 노래」에서는 반복과 배열이 익숙한 내용을 노래하기 좋은 형식으로 묶어 준다. 하나에서는 리듬이 발견을 만들어 내고, 다른 하나에서는 리듬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실어 나른다.
이 차이를 생각하면 이원수가 왜 한 작품에서는 시를 보고 다른 작품에서는 시를 찾을 수 없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노래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다. 두 작품 모두 노래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노래가 되기 전에 그 언어가 이미 시의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동요는 먼저 시여야
이원수는 『아동문학입문』에서 현대 동요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1920년 이후 예술로서, 아동이 노래할 수 있는 시의 한 형태로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동요라는 이름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란 뜻으로 본다면, 이것은 입으로 소리 내어 읊을 수 있는 것, 어떤 멜로디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45쪽)
이원수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동요가 동시의 하나임을 생각할 때 노랫말로서가 아닌 시어로서의 세련된 표현을 가져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57쪽)
‘노랫말’과 ‘시어’를 구별한 점이 중요하다. 곡에 잘 맞고 부르기 쉽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시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요의 언어는 음악의 도움 없이 읽어도 시적 표현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원수가 생각한 동요에서는 음악이 평범한 말을 시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로 선 언어가 음악을 만나 노래가 된다. 이원수에게 시성(詩性)은 좋은 동요가 덤으로 갖추면 되는 장점이 아니라, 동요가 문학으로 성립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정형 동시와 어린이의 가창 욕구
그렇다고 이원수가 동요의 가창성을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린이에게 노래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현대시가 반드시 정형시일 필요는 없고 자유시가 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동요-정형 동시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동의 가창 욕구가 왕성하여 그런 만큼 시가 되지 못한 유행가류의 동요가 널리 불리어지는 사실로써도 알 수 있다. 아동의 가창 욕구는 동시로써 충족시켜야 할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형 동시-즉 동요의 올바른 발전이 요청되는 것이다.”(61쪽)
여기서 이원수는 ‘동요-정형 동시’라고 하고, 다시 ‘정형 동시-즉 동요’라고 한다. 동요와 동시를 서로 대립하는 두 장르로 보지 않고, 동요를 노래할 수 있는 정형성을 지닌 동시로 파악한 것이다.
어린이는 노래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부를 노래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 욕구를 무엇으로 채워 줄 것인가이다. 이원수의 대답은 분명하다. “동시로써 충족시켜야” 한다. 어린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시가 되지 못한 쉬운 노래만 건넬 것이 아니라, 시로서도 제대로 서면서 노래할 수도 있는 작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형이 아니어도
다만 정형성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 이원수와 조금 다르다. 여기서 이원수가 말하는 정형은 일정한 음수율과 반복되는 리듬의 틀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형은 어린이의 입에 쉽게 붙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장점이 분명하다. 이원수가 정형을 요구한 것도 어린이가 즐겨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가 노래가 되기 위해 반드시 처음부터 음수율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자 수에 매이지 않은 동시에도 가락이 있다. 말의 길이와 되풀이, 행과 행 사이의 멈춤, 연과 연의 짜임, 소리의 호응뿐 아니라 말뜻이 움직이는 데서도 가락은 생긴다. 작곡가는 그 가락과 말뜻을 함께 읽어 내어 음악으로 옮길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노래할 수 있는 시’, 곧 동요의 범위는 이원수가 말한 정형 동시보다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가 먼저라는 그의 원칙은 그대로 두되, 그 시가 반드시 음수율을 갖춘 정형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조금 느슨하게 풀어도 좋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요즘 우리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어떤가. 잘 쓴 동시가 노래가 되어 아이들의 입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좋은 동시를 찾아 곡을 붙여 온 백창우의 작업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가 곡을 붙인 노래 가운데 「누구일까」가 있다.
들길을 걷다 보면
도랑 가로 달개비꽃 피어 있지요
달개비꽃 볼 때마다
달개비란 이름 맨 처음 붙인 사람
궁금하지요
누구일까
산길을 걷다 보면
길섶으로 패랭이꽃 피어 있지요
패랭이꽃 볼 때마다
패랭이란 이름 맨 처음 붙인 사람
궁금하지요
누구일까
― 윤동재, 「누구일까」, 백창우 곡, 『꽃밭』(보리, 2003)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작품은 들길에서 달개비꽃을, 산길에서 패랭이꽃을 보며 그 이름을 맨 처음 붙인 사람을 궁금해한다. 늘 보던 들꽃이 그 물음 하나로 누군가 처음 이름을 불러 준 꽃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닭」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이 작품 역시 익숙한 것을 하나의 물음으로 낯설게 바라보려 한다.
형식을 보면 이 작품은 글자 수를 맞춘 정형시가 아니다. 행의 길이가 들쭉날쭉하고, 긴 행과 짧은 행이 섞여 있다. 그 대신 들길과 산길, 달개비와 패랭이가 자리를 바꾸며 두 연이 같은 짜임으로 되풀이되고, 각 연 끝에 짧은 물음이 따로 놓인다. 음수율 대신 연의 짜임과 되풀이가 가락을 만든다. 백창우는 시를 곡의 틀에 맞게 깎아 내기보다 시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가락과 뜻을 살려 노래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음수율에 매이지 않은 동시도 제 안의 가락으로 노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원수가 걱정한 것은 어린이가 노래를 부르는 일 자체가 아니었다. 어린이에게 왕성한 가창 욕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시가 되지 못한’ 노래가 차지하는 현실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문제 제기를 다시 읽으면서 나 역시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어떤 노래를 건네고 있는가.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부르면서 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익숙한 세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노래를 주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지금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노래냐 시냐의 선택이 아닐 것이다. 어린이가 부르고 싶은 노래이면서, 곡을 떼고 읽어도 한 편의 시로 남는가.
이원수의 『아동문학입문』은 오래전에 쓰였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귀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동요에 관한 그의 생각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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