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 송덕희
빛바랜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81쪽을 펼친다.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 11월의 나무는’ 지금 000의 심정은 11월의 나무이리라.
000 교감 선생님은 지난해 9월 1일 자로 신규 발령을 받아 우리 학교에 왔다. 동기 중에서 승진이 빨라 나이도 젊은 데다 무슨 일이나 잘한다는 소문이 먼저 날아왔다. 8월 중순부터 교육계 전체가 술렁였다. 떨어진 교권을 되살려야 한다며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나타내겠다고 일명 '공교육 멈춤의 날'로 정한 날이 9월 4일이다. 선생님들 목소리는 강했다. 학생들은 나오는 날이라서 난감하다. 정식으로 우리 직원이 아닌 터라 도움을 구하기 어려웠다.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데, 구세주처럼 미리 와 주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사흘간을 밤늦은 시각까지 준비했다. 학급 담임을 맡다 온 터라, 학생들 지도할 자료를 금방 만들었다. 교사들의 빈틈을 메우고 대체할 방법을 찾았다. 낯선 직원들을 이끄는 요령도 있었다. 짧은 시간에 학교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차분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막혔던 숨을 터 준 덕분에 무난히 넘어갔다.
아무리 교감 연수를 받았다손 치더라도 실제 겪어 보지 않으면 터덕거릴 수밖에 없다. 처음으로 하는 일은 어렵고 설어서 실수도 잦다. 특히 학교는 1년을 한 바퀴 돌면서 업무의 흐름을 알아야 맥을 짚는다. 초임이라서 내심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듣던 대로 능력자다. 이후로 학사와 관련된 것은 거뜬히 잘 해냈다.
교장은 어떤 교감 선생님과 근무하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중간 관리자로서 직원들과 소통하며 잘 조율해 가는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새사람이 온 후로 학교는 많이 달라졌다. 교직원들을 잘 아우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이끈다. 교사들은 행정 업무를 하지 않고 수업과 생활교육에 힘쓰도록 돕는다. 업무지원팀의 부장들과 많은 일을 헤쳐 나간다. 학부모, 학생들과 담임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내 도움 없이도 깊숙이 개입해서 잘 해결한다. 직원이 많다 보니 이것저것 끝도 없이 문젯거리가 생기지만, 나와 머리를 맞대면 잘 풀린다. 나는 행운아다.
직원들과 속마음을 터놓기는 상당히 어렵다. 사무실도 떨어져 있고, 업무로만 사람을 대해야 할 때가 많다. 교장은 가끔 외롭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먼저 마음을 연다. 먹을거리가 있으면 나누고,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나를 먼저 챙긴다. 깎듯이 예의를 차려 말하며 늘 웃는 낯이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교감 선생님 안 계시면, 나는 끈 떨어진 연이다.”며 고마워한다. 마음 씀씀이가 이토록 예쁜 사람은 처음이다. 오래도록 같이 근무하고 싶은 참 좋은 후배다.
여느 때와 같이 월요일 오전 시간에는 기획 회의를 한다. 업무를 맡은 부장들과 교감, 행정실장이 한 주 동안의 학교 일을 논의하고 공유하는 시간이다. 벌써 11월 첫째 주라서 일 년 동안 해온 교육 활동을 되돌아볼 시기가 되었다. 연구부장이 자료를 준비했다. 설문 조사를 어떻게 하고, 일정은 언제로 잡을지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교감 선생님이 경험을 살려서 잘 말해 주고, 그런대로 가닥이 추려져 내가 부담 없이 마무리 지었다.
다 돌아간 후에야 얼굴을 마주하며 주말은 잘 보냈는지, 재킷과 스카프가 어울린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평소와 다르게 머뭇거리더니 할 말이 있단다. 토요일에 병원엘 다녀왔다. 산부인과로 유명한 ○○병원에서 자궁 초음파 검사를 했다. 난소에 혹이 발견되어 무조건 수술해야 한다. 모양이 좋지 않지만,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정밀 검사를 해 봐야 안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러 경험이 겹쳐 떠오른다. 지난해 말 옆 동에 사는 언니가 난소암으로 죽은 일, 이게 얼마나 낫기 힘든 병인지…. 혹시 오진일 가능성은 없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곧 날짜를 잡아야 한다며 담담하게 말한다. 인사철이 다가와 할 일이 많아질 텐데 걱정이란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다고, 결과에 따라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면 된다며 오히려 나를 가라앉힌다. 휴일을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여러 가지를 검색해 보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고 지우고 했을 거다. 막막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심란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단다. 담대하고 초연하다. 살며시 미소 짓는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다음 날에도 잠은 잘 잤는지 묻는 나에게 아무렇지 않다며 웃는다. 우리 학교에서 일만 하다 몸이 망가졌나 싶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제발 악성이 아니라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듣고 싶다. 간단한 수술로 깔끔하게 나으면 좋겠다. 찬 공기 가득한 새벽녘,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연다.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가 닿아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빈다.
11월의 나무는 곧 돋아날 새잎을 준비한다. 잠시 아픔을 견딜 뿐이라고 담담히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