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 7 15 주일 낮 예배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에스겔 2장 1-5절(256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지난 월요일 목사 모임에서 자기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각자 어떤 사역, 어떤 교회, 어떤 건물들을 꿈꾸고 있는지를 나눴는데... 저는 지난 주일에 했던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 1:10 말씀이 저와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고 비전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분들이 너무 막연하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고, 그제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사실 지난주일 설교 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목사 모임에 모인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예레미야 1:10의 말씀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명’으로 보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고민을 해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성도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셨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 그것이 목사인 저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에게 주어진 소명이고 사명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주보 칼럼에도 썼습니다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에스겔의 소명에 대한 내용이어서 예레미야의 소명과는 관계없어 보이지만,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사명을 이어가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부터 멸망할 때까지 사역했다면, 에스겔은 유다 왕국이 멸망하던 초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부터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에스겔은 유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하면서도, 결국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인지를 예언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소명과 그의 사역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는 것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소명과 사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다른 선지서들과도 성격이 많이 다른, 독특한 책입니다.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에스겔서를 보면서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선지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말씀 선포와 기이한 행위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뭔가?’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에스겔서에는 희한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다른 선지자들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다면, 에스겔은 ‘말씀’도 사용하지만 특이하게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그런 독특한, 어떻게 보면 미친 것처럼 보이기는 그런 ‘행위 예언’보다 저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그의 그러한 예언 행위가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이 지적하는 것처럼 에스겔의 존재와 사역의 의의는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예레미야와 우리에게 주신 소명/사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2장의 일부분만 읽었지만 2장과 3장, 그리고 33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윌밍턴 성경연구]는 ‘에스겔의 상징적인 12가지 행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그는 성읍을 에워쌀 운제를 보여주면서 커다란 박석 위에 예루살렘의 지도를 새겼다. 그때 그는 그것을 에워싼 적의 진과 공성퇴의 설치를 묘사하면서 보다 자세하게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도와 자신 사이에 전철을 가져다 놓았다. 이것은 바벨론 군대가 꿰뚫을 수 없는 벽과 같음을 가리키며 또한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겔 4:1-3).
2) 그는 390일의 날수동안 좌편으로 누웠다. 그것은 북왕국인 이스라엘 족속의 부정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각 날은 한 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겔 4:4,5).
3) 그런 후 그는 남왕국인 유다의 부정을 묘사하기 위해 40일의 날수동안 우편으로 누웠다. 여기서도 각 날은 한 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겔 4:6). 이 기간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엉거(Unger)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가 좌편으로 누운 390일 동안의 불편함과 우편으로 누운 40일 동안의 불편함은 (하루가 상징적으로 한 해를 나타내므로 총 430년, 애 4:1). 이와 유사한 포로 시대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에게 닥쳐왔다. 그러나 북왕국의 포로 시대는 더 오랜 기간이었다"(엉거의 「성서 편람」,p.367).
4) 그는 곡식을 갈아 만든 떡을 준비하고 달구어진 마른 쇠똥에 그것을 구웠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어서 양식의 부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겔 4:9-17).
5) 그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머리카락을 자른 후 그것을 똑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겔5:1-4). (1) 그는 그 중1/3을 태웠다. (2) 그는 그 중 1/3을 칼로 쳤다. (3) 그는 그 중 1/3을 바람에 흩었다. 이 모든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닥칠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성읍의 백성 중에 1/3은 예루살렘이 포위 되었을 때 불에 타죽을 것이다. 그리고 성읍의 백성 중에 1/3은 칼로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며 나머지 1/3은 바람에 흩어져 버릴 것이다.
6) 그는 백성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쳐야만 했다(겔 6:11).
7) 그는 자기 집 밖에 행구를 놓았다. 그리고 나서 날이 저문 때에 그는 성벽에 통과할 구멍을 뚫었다. 그가 행구를 메고 거기를 지날 때 그는 자기 얼굴을 가렸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생생하게 상징하는 것이었다(겔 12:1-16). (1) 행구는 급하게 자기 집을 떠나는 포로들을 나타냈다. (2) 벽을 통과하는 것은 운명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포로들을 나타냈다. (3) 얼굴을 가리는 것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묘사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반역했으므로 느부갓네살에 의해 눈이 먼 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25:1-7).
8) 그는 마치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음식을 먹을 때 떨며 놀라면서 물을 마셔야만 했다(겔 12:17-20).
9) 그는 마광된 칼을 공중에 휘두르며, 슬피 울면서 자기의 넓적다리를 쳐야만 했다(겔 21:9-17).
10) 그는 지시표를 그려 바벨론 왕이 올 두 길을 표시했다. 하나는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이었다. 두 성읍은 기원전 593년에 느부갓네살에 대하여 반역했다. 에스겔은 갈랫길에 있는 왕을 묘사했다. 어느 쪽 성읍이 먼저 파괴될 것인가? 그 대답은 슬프게도 즉각 다음과 같이 온다(겔 21:18-22).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게 될 것이다"(겔 21:21, 22).
11) 그는 물이 끓는 가마에 값비싼 고기를 가득 넣어 뼈에 붙은 살이 무르도록 삶았다. 그런 후 그는 그것을 전부 꺼내고 그 안에 더러운 것과 녹이 없어지도록 마를 때까지 가마를 완전히 구웠다(겔 24:1-4). 물론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불의 심판은 불의 심판은 예루살렘의 부자와 귀족마저 완전히 소멸시키리라. 그 성읍의 모든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으며 그 성읍은 그 도덕적 부정과 녹으로부터 씻겨져야 했다.
12)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어떤 외적인 슬픔의 기색도 나타내서는 안 되었다(겔 24:15-18). 파인버그(Charles Feinburg)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에스겔에게는 머리에 무엇을 쓰거나(삼하 15:30), 맨발이거나(사 20:2), 입술을 가리는 것(레 13:45; 미 3:7)이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은 친족을 위해 애도할 수 있었지만(레 21:1-3), 에스겔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런 것에서 제외 되었다. 장례식을 치루는 것은 고대에 있어서 관습이었다. 상을 당한 사람의 이웃들은 함께 슬픔을 나누는 표시로써 음식을 보냈다(신 26:14렘 16:7호 9:4). 이러한 관습에 직면해 있는 에스겔은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하나님의 의지 가운데서 자신의 예언적 직분에 완전히 종속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갔다. 그것은 얼마나 모범적인 순종의 실례인가!"(「에스겔의 예언」,pp.139, 140). 성서 중에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절 중의 하나는 바로 이때에 그가 한 증거이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겔 24:18).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자신이 애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려하지 말라고 에스겔에게 명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대한 세 번째의 마지막 공격을 시작했던 바로 그날에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겔 24:2).
1.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2:1-10)
1) 에스겔 사역의 의미(1-5v)
에스겔 2장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장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그룹을 타신 하나님’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2장에 넘어오면서 그의 소명을 기록합니다. 2:1-5은 에스겔에게 주어지는 사역이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의 소명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유사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특별한 현상에 대한 기록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지만(렘 1:1-10), 그 후에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과 끓는 가마에 대한 환상이 나온다(렘 1:11-19). 에스겔의 경우에는 이상이 보인 시기에 대한 간단한 언급 후(겔 1:-3), ‘그룹’을 타고 나타나신 여호와의 모습에 대한,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독특하고 상세한 기록이 1장 전체에 걸쳐 묘사된다(겔 1:4-28). 그런 후에야 선지자로서의 소명 기사(記事)가 나온다(2:1 이하). 한편, 이사야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높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와 수행하는 ‘스랍’들에 대한 이상(異狀)을 본 후에(사 6:1-7) 선지자로서의 소명 기사가 나온다(사 6:8-13). 에스겔이 그의 사역 실패를 예고 받은 것처럼, 이사야 역시 사역의 실패를 예고 받는다(사 6:9-10).
“(1)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2)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4)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5)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여기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 그리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에 에스겔이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는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지만, 그들은 패역하고 배반하며 뻔뻔하고 강퍅한 자들이기 때문에 안 들을 거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에스겔을 보내도 안 들을 것을 아신다면 뭐 하러 에스겔을 보내시는 걸까요? 그것은 ‘최후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몰랐어요!’하고 발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셔서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것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겠지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2) 에스겔 사역의 특징(6-10v)
2:6-10에서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이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것은 문제 삼을 것이 없고, 에스겔 자신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6)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 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7)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8)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9)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10)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시는 것은 마치 그를 가시와 찔레, 전갈 가운데로 들여보내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시와 찔레, 전갈 가운데로 들어가는 에스겔은 상처받고 고통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대로만 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패역하게 한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이 패역하게 행동하지 말고 주시는 말씀을 잘 간직하고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눅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이것은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와 매우 흡사하다. 렘 1:7-8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8)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두루마리 책’으로 묘사되는데, 이 두루마리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안과 밖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해야 하는 말씀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예레미야의 소명이 어떻게, 또 왜 힘든 것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에스겔도 예레미야와 거의 동일한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시기는 유다가 완전히 망하기 직전 상황입니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는데,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단번에 멸망시켰던 것과는 달리 3번에 걸쳐서 정복당합니다. 에스겔은 2차 포로 때에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니 아직 유다 왕국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이때 예루살렘에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렘 28장). 에스겔은 이미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예레미야가 한 것처럼 유다 왕국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선포했으니, 그에 대한 핍박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을 에스겔에게 주십니다.
* 이것은 예레미야의 소명 가운데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라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겔의 예언이 애곡과 재앙으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로 가면 부흥과 부활의 소망이 제시되는데, 이것 역시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다.
2.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고하라(3:1-11)
1) 꿀 같은 말씀 두루마리(1-3v)
한편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기 책을 먹으라는 표현이 여기 나옵니다(2:8). 그리고 이어서 3:1-3에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1)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2)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사람이 염소도 아닌데, 더구나 종이로 된 것도 아니고 양피지로 된 책을 먹으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하게 그것을 먹은 사람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입을 벌리라고 하시곤 이 두루마리 책을 그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꿀처럼 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칭찬하고 격려하는 내용도 아니고,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글’이 기록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꿀처럼 달다고 말할까요? 이것은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재앙을 받아 애곡하게 되지만 결국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즉, 예레미야의 소명 가운데 ‘건설하며 심’는 부분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 계 10:9-10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2) 실패할 사역(4-7v)
말씀이 에스겔에게 꿀처럼 달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역이 물 흐르듯 쉽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3:4-7에서 에스겔의 사역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5)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6)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7)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한지를 증명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거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족속에게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족속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오히려 들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전하는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에스겔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에스겔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3) 금강석 이마(8-11v)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잘 말해도 듣지 않을 대상에게로 가서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8)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9)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10)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11)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패역한 그들 때문에, 이마를 단단하게* 해서 씨도 안 먹힐 그들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이마를 ‘부싯돌’이나 ‘조약돌’**처럼 단단하게 하고서 들이받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이마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처럼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은 후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하지 말고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 ‘이마를 굳게’ 한다는 표현은 ‘목을 곧게’ 한다는 표현과 같다. 즉, 교만하고 완고해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 ‘화석’이라고 번역된 ‘초르’(rxo)는 ‘(굳게, 또는 어느 정도까지 꽉 짠 듯한) 돌, 칼, 부싯돌, 날카로운 돌’이라는 뜻이며 ‘부싯돌, (칼로 사용되던) 단단한 조약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예레미야와 비교하라. 렘 1:17-19 “(17)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18)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19)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은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지치는 일입니까! 수시로 우리를 공격해오는 사람들을 버텨내는 일은 얼마나 힘을 소진시키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처럼 우리의 이마를 다이아몬드처럼 만들어 주시지 않고, 예레미야처럼 우리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린 결코 그 사역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저 멀리로 도망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하는 것, 우리를 통하여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그 사역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나가야 합니다.
3. 너를 사랑의 노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33:30-33)
33장은 3장과 매우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30-33절을 봅니다.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31)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32)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 하거니와(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이 무엇을 합니까? 담 곁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집 문에서 공공연하게 에스겔과 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들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에스겔에게 나아옵니다. 에스겔 앞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2장과 3장에서 말한 것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33장의 상황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이 성취된 이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에스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할 뿐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행치는 않습니다. 그들은 야고보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지 행하지 않으므로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들의 입으로는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욕, 이익과 그들의 욕심을 좇을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음악을 잘하는 사람,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사람처럼 여깁니다. 듣고 즐길 뿐이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준행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 약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들이 에스겔을 핍박하든 사랑 노래나 하는 사람처럼 여기든, 에스겔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존재와 사역은... 그들에 대한 최후 심판에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 여기 2:5과 33:33에 동일하게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이것이 에스겔의 존재와 사역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의 존재와 사역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성도의 존재와 사역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십니다. 그것은 참 거창해 보이고, 우리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명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으므로 그 진리 위에서 ‘자유’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이 우리를 얽매지 않도록 지적해야 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비진리는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진리를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비진리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배제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말씀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 사람들을 향해서, 이 세대와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진리를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세상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해 줄 것인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것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이 시대에 ‘선지자가 있었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십니다. 이 혼탁한 시대에 ‘진리’를 붙잡고 살았던 사람들, ‘진리’를 전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붙잡고 산다고 해서 반드시 번창하고 세력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진리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는 꼭 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면 흥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면 망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손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하면 됩니다.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를 기준으로 삼아 비진리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진리를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디 멀리 나갈 필요 없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 내가 사는 자리, 내가 활동하는 그 자리에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세력을 형성하고 운동을 일으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일을 성실히 행하고, 우리 성도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와 상황에서 이렇게 살고, 우리 교회가 이 일을 중심으로부터 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인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 삶을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