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미생물) 03. 충수와 자연선택
맹장에는 꼬리가 하나 달려 있는데 이것이 바로 충양돌기(vermiform appendix) 또는 막창자꼬리로 불리는 충수(蟲垂) 돌기다. 충수라는 이름은 벌레 같은 모양이라는 뜻이며 구더기나 뱀에 비유되기도 한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이 충수염을 일으키는 존재로만 알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기관이다(일반적으로 맹장염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대부분 충수염에 해당한다). 충수 돌기는 길이가 짧게는 2cm에서 길게는 25cm까지 이어지며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충수 돌기가 두 개인 사람도 있고, 반대로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100년이 넘게 충수는 아무 기능도 없는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기관으로 취급받았다. 통념대로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00년을 끈질기게 따라붙은 이 오해에 관해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다. 동물해부학을 마침내 우아한 진화의 틀에 멋지게 기워 넣은 다윈은 《종의 기원》의 후속작인 《인간의 유래》에서 흔적기관에 대해 다루면서 충수 돌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다른 동물들의 커다란 충수 돌기와 비교했을 때 사람의 충수 돌기는 인류가 식단을 바꾸는 과정에서 기능을 잃고 점차 퇴화해가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다윈 이후로도 딱히 밝혀진 기능이 없었으므로 100년 동안 충수가 흔적기관이라는 것에 의문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충수염으로 골치를 앓은 탓에 충수는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더 널리 퍼졌다. 특히 의료기관들이 충수를 아예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규정하다시피 하여 1950년대에 이르러서 충수 절제술은 선진국에서 가장 흔하게 행해지는 외과 수술이 되었다. 충수는 심지어 병원에서 다른 복강 수술 시 덤으로 함께 제거될 정도였다. 한때는 남성 여덟 명 중 한 명이 충수 절제술을 받았고, 여성의 경우는 네 명 중 한 명으로 비율이 두 배나 높았다. 통계적으로 인구의 약 5~10%가 살면서 충수염을 앓는데 대체로 자식을 낳기 수십년 전에 발병하며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의 반이 사망에 이른다.
이 점이 수수께끼다. 충수염이 이처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병이고 빈번하게 어린 개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충수는 자연선택에 의해 재빨리 도태되었어야 한다. 한 집단 내에서 충수를 가진 사람들이 번식기 도달하기 전에 염증이 생겨 죽는다면, 충수를 만드는 자신의 유전자를 자손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집단 내에 충수를 가진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자연선택이 충수가 없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충수를 지니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면, 충수가 과거의 유물이라는 다윈의 가정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충수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이유에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두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충수염은 환경이 변하면서 비교적 근대에 나타난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충수염으로 인해 죽는 일이 드물었을 테니까 이 쓸모없는 기관도 별 탈 없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충수가 진화의 역사에서 미처 퇴장하지 못한 해로운 흔적기관이 아니라, 충수염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지해할 만큼 이로운 기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선택이 충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왜일까?
해답은 바로 충수 안에 들어 있는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 충수는 지름 약 1cm, 평균 길이 8cm의 가느다란 관인데, 그 입구를 지나는 음식물 찌꺼기로부터 차단되어 보호된다. 충수는 그냥 말라비틀어진 살점이 아니다. 그 안에는 특수화된 면역세포나 미생물이 가득 차 있다. 충수 안에서 미생물들은 서로 지탱하며 생물막(biofilm)이라고 부르는 보호막을 형성하여 해로운 박테리아를 차단한다. 충수는 비활성화된 기관이 아니라 미생물을 보호하고 키우며 소통하는 면역계의 중추 기관이며, 퇴화기관이 아니라 인체가 착한 미생물 세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안전가옥인 셈이다.
뜻밖의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비상금을 숨겨두는 것처럼 충수에 비축된 미생물은 재난의 시기에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식중독이나 장염이 대장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장은 곧 충수에 피신해 있던 정상적인 주민들로 다시 채워진다. 물론 식중독이나 장염같이 비교적 가벼운 질병 때문에 미생물을 비축해둔다는 건 보험치곤 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질, 콜레라, 편모충증 같은 치명적인 장염이 서방 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겨우 최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또 선진국에서는 정수처리장이나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공중위생시설 덕분에 감염성 질환을 예방할 수 있지만, 아직도 전 세계에서 다섯 명 중 한 명의 아이가 감염성 설사로 죽어가고 있다. 질병에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충수 덕분에 빠르게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난 대비책은 평화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충수의 기능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충수를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불이익은 근대적이고 위생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밖으로 드러날 일이 없었다. 깨끗한 환경과 생활 습관 덕분에 감염에 걸리질 않으니 충수 속의 미생물 대원들이 출동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사실 충수염은 근대에 출현한 질병이다. 다윈의 시절에는 충수염이 극히 드물었고 충수염으로 죽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다윈이 충수를 가리켜 이로운 것 없는 기관이지만 그렇다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 진화의 잔재일 뿐이라고 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충수염은 19세기 후반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1890년 이전에는 충수염으로 인한 사망 건수가 한 해에 서넛 정도로 유지되던 것이 1918년에는 113건으로 늘었다. 이러한 빠른 증가는 산업화가 일어난 지역 전반에서 나타났다. 충수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을 때도 충수염 진단은 어렵지 않았다. 환자가 배를 쥐어짜는 극심한 고통 끝에 결국 사망한 경우에 부검해보면 금방 진단이 가능했다.
충수염이 증가한 원인에 대해 많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육류나 버터, 설탕의 섭취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설명부터 코안 쪽의 부비동이 막혀서, 혹은 충치가 원인이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대체로 섬유질이 부족한 식단이 충수염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흘러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설들이 난무했다. 예를 들면 수질 관리의 개선과 이로 인한 위생적인 환경이 가져온 변화(실제로 이 때문에 충수가 거의 불구가 된 것은 사실이다.)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었다. 충수염 증가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이미 사람들은 충수염이 원래는 희귀한 병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충수염은 비록 겪고 싶지는 않지만 살면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질병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실 현대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충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수시로 재발하는 장염, 면역기능 장애, 혈액암, 그리고 일부 자가면역 질환이나 심지어 심장마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미생물 보호구역으로서 충수의 역할은 이러한 이점을 가져온다.
충수가 있으나 마나 한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몸속 미생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다. 체내 미생물이 단지 무임승차를 하는 히치하이커가 아니고 인체에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장이 진화를 통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충수 안에 숨어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위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가?
앨러나 콜렌(저), 조은영(역). 미생물의 과학, 10% HUMAN.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