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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27일 밤, 길주성 다신리의 정문부 군 진영에
단천에 파견되었던 조선군 기병들이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선군 기병들을 지휘했던
훈련정 구황이 정문부에게 아뢰었습니다.
[함경남도의 왜적 1000여명이 이미 마천령을 넘었습니다!]
정문부와 그의 조선군은 큰 결전이 다가왔다고 여겼습니다.
이무렵인 1593년 1월 11일, 조선 조정에선 전국 각지의 의병들과
조선군의 수를 조사하였는데
이때 파악된 정문부 휘하의 함경도 조선군은 5000여명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함경도 조선군은 일본군 뿐만 아니라 여진족들도 상대해야 했기에
실제로 정문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000여명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정문부와 그의 조선군은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1592년 10월에 정문부가 길주성의 일본군 병력을 1000여명으로 파악했지만
사실 길주에 배치된 일본군 수는 3000여명 이었고
단천,이성 방면에는 4000~5000여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제 2번대 가토 기요마사 직속군 10000명의 대부분이
정문부의 조선군을 상대하기 위해 배치됨을 의미 했습니다.
하지만 1593년 1월 무렵엔 일본군의 군세가 훨씬 증강되어
조선군 측에선 길주 방면에만 일본군이 최소한 19000여명 이상
배치 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이는 함경도에 주둔한
일본군 제 2번대의 모든 병력이 길주에 집결함을 의미 했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대병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정문부의 조선군은 군수물자가 거의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문부는 1월 27일 장계를 작성할때 물자가 바닥났음을 지적하며
조선 조정에 부레풀,활시울,화살꼭지 등의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무렵의 조선 조정 이야말로 조선 각지에서의 물자 조달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처지라 정문부에게 물자를 보낼 여력이 없었고
또한 함경감사 윤탁연은 정문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사사로이 나눠주는 것을 모함하여 조정에 고해바쳐서
비변사로 하여금 오히려 정문부에게서 전리품 진상을 요구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함경도의 일본군은 불안했습니다.
경상도의 일본군 보급로가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을 받아 위태로웠고
함경도 길주에선 가토 기요마사군 휘하 3000여명이
조선군에게 포위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1592년 11월 이후부터 식량 부족이나 조선군의 공세보다
조선 최북단의 추위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의 포위로 성 밖으로 나가 땔감을 구할 수 없었던 그들은
성 안의 관아과 민가를 헐어버리고 그 잔해를 땔감으로 사용함으로서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추위가 심해지고 조선군의 포위가 계속되자
길주와 단천 방면의 일본군은 안변의 가토 기요마사에게
구원이나 철수를 요청 했습니다.
그런데 가토 기요마사는 구원이나 철수 둘 다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안변의 가토 기요마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000여명 이었지만
붙잡은 조선 왕자들과 포로들을 호위하는 데에
당장 5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안변 수비 병력을 제외하면 구원하는데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야 1500명 정도 였고
겨울이라 병력을 이동시키기에 용이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더구나 함흥 인근에는 함경감사 윤탁연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성윤문이
조선군 5000여명을 확보하여 일본군 제 2번대 소속
나베시마 나오시게군 본진인 함흥을 노리고 있었고
가토 기요마사의 본진인 안변엔 별장 김우고와 조방장 김신원이
각각 조선군 100여명을 거느리고 왕자 구출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가토 기요마사 군과 더불어 일본군 제 2번대를 구성하는
나베시마 나오시게군도 각 자가 담당한 함경남도의 각 성들을
지키며 버티기에 급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이런 처지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병력 집중을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길주, 단천에서 일본군이 철수를 한다면
정문부의 조선군은 성윤문,윤탁연의 조선군과 함께
나베시마 군의 본진인 함흥을 협공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592년 12월 10일, 안변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와 단천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사수 명령을 내려서
1593년 봄까지 버티라고 주문 하였습니다.
그러나 1593년 1월 8일엔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제 1번대가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여
평안도,황해도의 일본군이 모두 서울로 패퇴함으로서,
함경도 일본군도 이제 서울로 후퇴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1593년 1월 10일, 가토 기요마사는
단천 방면 배치된 자신의 직속군을 불러들이는 명령을 내려
함경도의 일본군을 집결시켜 철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길주성의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포위되어 있었기에
함경도의 일본군 전체가 퇴각하려면 길주의 조선군 포위망을 뚫고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가토 기요마사는 가신 삿사 마사모토에게 군사 1000여명을 주어
영동 방면의 일본군과 함께 길주의 일본군을 구출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1593년 1월 26일에 안변에 주둔한
나머지 일본군 2000여명을 모아 붙잡은 조선의 왕자들과 함께
함흥으로 북상하였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사로잡았던 조선인 포로들에게 분풀이를 했습니다.
조선 왕자들과 대신들과 그들의 가족을 제외한
함경도 수령들과 왕자의 수행원들과 그들의 가족,노비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 이었습니다.
북우후 이범, 온성부사 이추, 회령부사 문몽헌, 훈련원 봉사 신희수와
그의 가족, 노비들이 모조리 몰살당했고
전 경원판관 이홍업은 예전에 일본군에게 잡혔다가 도주했지만
그의 가족과 노비들은 그대로 붙잡혀 있어서 그들 역시 다 죽였습니다.
다만 남병사 이영, 장계군 황정욱, 승지 황혁 등은 안변의 토굴에
그대로 가두어 두었습니다.
1593년 1월 28일 이른 아침, 삿사 마사모토의 일본군이
길주 임명에 도착 했습니다.
그들의 수는 길주 임명 들판을 가득 채울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영동에 주둔한 일본군들도 데리고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길주 임명에는 정문부가 배치한 조선군 날랜 기병 600명이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뒤를 보일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고
일본군도 조선군이 생각보다 적은 것을 보고
그대로 지나가 뒤를 보였습니다.
일본군이 뒤를 보이자
복병장 훈련정 구황, 첨정 박은주, 첨사 강문우, 판관 인원침,고경민,
정로위 김국신이 휘하 병졸들을 이끌고 일제히 일본군의 뒤를 쳤고
정문부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 진격로에 배치된
좌위장 유경천,중위장 오응태,우위장 한인제가
각각 3위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앞을 막고 일본군 대열의 허리를 치면서
일본군을 향해 들락날락 하며 화살을 쏘아대니
일본군은 졸지에 조선군을 피해 이리리 도망쳐다녔습니다.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6시까지 조선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었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피해 무려 60리나 달렸습니다.
날이 저물무렵, 일본군이 조선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여
길주성 남쪽 20리 지점에 백탑교에 이르니
백탑교에서 매복하고 있던 훈련판관 원충서의 군대가 튀어나와
일본군에게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일본군도 조총으로 저항하니 양군이 화살과 철환을 퍼부으니
이에 양군은 서로 창칼로서 싸우지 못하고
다만 조선군 경기병들이 그들을 쫓으며 사격할 따름 이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쫓아 넓은 곳에선 각 부대가 일본군을 협격하고
좁은 곳에선 일본군의 뒤를 치는 전술을 구사 하였고
정문부는 종사관 학유(선비) 이성길에게 전령을 주어
일본군 대열 가까이에 다가가 조선군을 독전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군 기병들은 일본군 대열에서 몇걸음 떨어지지 않는 지점까지
달려가며 활을 쏘아댔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수에 겁을 내어
쌍포나 장평 전투때처럼 일본군 대열 안으로 돌격하여 싸우지 못했고
마침내 일본군은 전투에서 죽은 자기편 병사들을 수레에 싣고
길주성으로 입성하였습니다.
이날, 조선군은 일본군 수급 9개를 얻었고
말 15필을 노획 했습니다.
또한 많은 일본군이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쳐서
일본군이 도주하면서 그들의 피를 길에 가득 적셨고
일본군이 자기편 병사들 시체를 수습하여 이날에 길주성에서 불태웠는데
이때 소각된 시체가 약 100여구 정도 되었습니다.
이날, 조선군의 피해도 상당했습니다.
주을온만호 이희당이 힘껏 싸우다가
해가 저물무렵 조총에 맞아 전사 하였고
전 훈도 전중 이붕수도 앞장서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붕수는 이날 활을 빠르게 쏘아
화살이 활시위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이 일본군 장수를 쓰러뜨렸고
이붕수는 이에 정문부의 앞에 나아갔다가 총탄에 맞아
정문부가 탄 백마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596년, 정문부는 경성 어량리에 이르러
자신을 돕다가 죽은 이붕수를 생각하며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문에 들자 혼백이 눈에 선한데
늙은 형만 남겨둔채 어머니도 저버렸네
천년을 통하여 오직 장순과 허원 인데
저승길 행여 함께 갈 수 있으려나.
(장순과 허원은 안녹사의 난때 한 진영에서 원수 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 였음)
이외에도 이날 전투에서 허대성과 조선군 25명이 전사 했습니다.
이날 밤, 정문부와 3위의 장수들은 전략을 논의 했습니다.
이때 조선군은 이날의 격전으로 매우 지쳐있었고
특히 조선군 정예 기병들은 단천 전투를 치르고 길주로 달려와서
또다시 격전을 치른 까닭에 전투를 수행하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이날 밤 ,단천군수 강찬의 편지가 정문부에게 도착했는데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왜적 2000여명이 이성에 이르렀소이다.]
이때 조선군은 길주 방면에 집결한 일본군이 적어도
20000여명에 이를 것이라 여겼는데
여기에 이성의 일본군까지 합세하면 그후의 전황이 어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일본군의 규모에 조선군은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이후의 전황을 정문부는 염려하여
3위의 장수들과 의논하고 약속하여
중위군과 좌위군은 명청에 웅거하게 하고 우위군은 서북보를 지키게 하고,
길주목사는 좌군에서 정예군이 못되는 군사들을 가려내어
다신창에 있는 곡식을 바다 섬에 옮기게 하고
정문부 자신은 군사 100여명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서 민심을 진정시키고
성을 지키기로 했는데
이는 당시 정문부의 군대가 일본군이 정문부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고 판단한 것 이었습니다.
출처: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소수정실록)
연려실기술(선조본말고사)
농포집(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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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마 만지 교수의 연구논문(제공-앨런비,번역-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