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143)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덧 2월 중순, 꽁꽁 언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며칠 후로 다가왔다. 연일 눈 내리고 춥다가 반짝 환한 날(2월 13일) 아내는 대구로, 나는 서울로 나들이에 나섰다. 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는 며칠 전 타계한 가수 송대관의 차표 한 장,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의 노래가사가 같은 시각에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우리를 가리키는 듯 피식 웃음이 난다.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 했다’는 구절에서는 걸어서 병원에 들어가 이내 다시 못 올 길을 떠난 고인의 마지막을 상기시키기도. 모두가 고달팠던 세월을 해 뜰 날 등 절절한 노래로 위로했던 가수여, 온갖 시름 잊으시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시라.
차표 한 장
노래 송대관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랑했지만 갈 길이 달랐다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했다
달리는 차창에 비가 내리네
그리움이 가슴을 적시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추억이 나를 울리네
고풍의 상행 열차에 오르며
서울의 행선지는 인사동 식당가, 종각역에서 내려 안국동 거쳐 인사동에 이르는 도로변에 수많은 경찰버스가 큰 길 양편으로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때마침 안국동 인근의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탄핵재판이 열리는 날,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하는 당국은 물론 불안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는 민초의 발걸음도 가볍지 않다. 계속 이어지는 해난사고에 곳곳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사건들로 힘겨운 나날, 우수에 녹는 대동강 물처럼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희소식이 그립다. 우리 모두 희망사회의 일원이 되자.
안국동 네거리에 늘어선 경찰 버스들
지난주에 개막한 하얼빈 동계올림픽이 오늘 막을 내린다. 메달 순위는 스포츠 강국 중국에 이어 2위, 경쟁상대인 일본을 제치고 멀찍이 앞선 경기력이 대견하다. 오늘(2월 14일)은 하얼빈의거로 재판정에 선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100년 세월 훌쩍 지나 안 의사의 우국충정이 서린 하얼빈 하늘 아래 태극기 휘날리며 분전하는 대한의 아들딸들이 자랑스럽구나. 그 기백과 실력으로 우리 앞에 드리운 시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슬기롭게 헤쳐 나갔으면.
‘아무 일도 잃어나지 않았다’는 12‧3 계엄파동으로 평온한 대한민국을 미증유의 위기로 몰아넣은 대통령의 상황인식,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일상 소망 중 하나는 ‘오늘도 무사히’, 젊은 시절에는 그 말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였다. 임기를 무사히 마친 기관장들이 그 자리를 떠나며 ‘큰 과오 없이 떠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인사말이 밋밋하게 여겨지기도. 그러다가 점차 나이 들어 여러 부서의 책임을 맡으면서 무사히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체득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아무런 불상사나 책임질 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가치중립적 표현, 그러나 나라 전체를 큰 혼란과 위기에 빠뜨리고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인식하고 이를 용납하는 풍조는 옳지 않은 일. 큰 일이 벌어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얽힌 실타래를 푸는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소녀의 기도처럼 오늘도 무사하기를
* 탄핵재판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표현에 대한 패러디가 여럿 등장한다. 가시 돋친 묘사들이 무성한데 그 중 목사이자 시인의 유머러스한 칼럼 한 토막,
‘은행이라는 곳
1948년에 쓴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보면 은행이라는 곳이란 꼭지의 수필이 있다. “우선 안이 깨끗하고 겨울이면 다른 데와 달리 스팀이 따뜻하고 또 공짜로 전화도 맘대로 쓸 수 있고 하니까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데도 흔히들 가는 찻집을 피하고 조용하고 따뜻한 은행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하냐는 것이다…” 거액을 예금하려고 은행엘 가면 따뜻한 차도 주고 그랬나 봐. 저축하려고 은행에 가려면 아껴먹는 약 ‘절약’을 먼저 먹어야 해. 경기 침체로 요새 그 약은 안 팔린다. 따뜻한 히터가 틀어진 1층 은행도 점차 사라지고 없고, 삭막한 현금인출기만 뎅그러니 있다. 최근 오랜만에 은행 강도가 발생했다지. 장난감 총이었고,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잃은 돈도 없이 속전속결 2분 만에 붙잡혔대. 은행을 잘 지키라는 이른바 ‘계몽’ 은행 강도인가. 그러면 무죄라는 억측 댓글이 넘친다. 은행 강도가 ‘모두 나가라!’ 했다는데, 사실은 ‘모두 나가리’라고 했다던가.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2025. 2. 13 경향신문 ‘임의진의 시골편지, 은행이라는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