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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해군 사상 첫 여성
파일럿 탄생
해군 최초로 여성 파일럿이 탄생했다.
4일 14개월의 초.중등 비행교육 및 야간
공중조작.해상 전술비행 과정을 마치는
양기진(24.해사 58기) 중위다.
양 중위는 잠수함 탐지 등 대잠 작전에
투입되는링스(LYNX) 헬기를
조종하게 된다.
해군 헬기 조종사는 파도치는 해상에
떠있는 구축함 갑판 위에서 헬기를
이.착륙하고, 해상 15m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수색 작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고난도의 헬기 운용술과 담력이
필요하다.
▶2009년 북한 경비정 51분간
서해 NLL 침범.
▶2009년 한국어 위키백과의 문서수가
10만개를 넘었다.
▶200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2006년 세계선교대회 개최
▶2005년 홍콩 빅토리아공원에서 중국
천안문 민주화시위 16주년 기념 집회
▶2005년 3600년 전 이집트 제13왕조
의 파라오 네페르호텝 1세의 석상 공개
3600년 전 이집트 제 13왕조의 파라오인 네페르호텝 1세의 석상(石像)이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네페르호텝은 제13 왕조 22대 왕으로 기원전 1696-1686년 이집트를 통치했다.
네페르호텝왕의 석상은 장례 마스크에 왕의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코브라가 그려져 있었다. 고대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는 접근하는 적을 불을 뿜어 쫓아내는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믿었다.
이집트 남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보수작업을 벌이던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지난 3월 한 오벨리스크 부근의 땅밑 1.6m 지점에서 1.8m 크기의 이 석상을 발견했다. 이 석상은 같은 모양의 또다른 석상과 손을 잡고 있으나, 절반이 아직 땅에 묻혀 있다.
▶2005년 해군 사상 첫 여성
파일럿 탄생
▶2003년 ‘이빨 가진 새’ 7000만년
만에 부활, 활동중단 유전자 살려내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이 공룡 시대 이후 7000년 만에 처음으로 ‘이빨 가진 새’ 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영국 ‘더 타임스’ 가 4일 보도했다.
프랑스 낭트대학의 조시안느 퐁탠느-페뤼 박사와 영국 킹스칼리지의 폴 샤프 박사 등 과학자들은 병아리 배아에 쥐의 세포를 이식해 7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빨 형성 유전자’ 를 깨어나게 해, 병아리의 부리 안에 흔적 기관으로 남아 있던 이빨이 다시 자라도록 하는 성과를 얻었다.
1억 4700만 년 전 지구를 누볐던 시조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었으나, 7000만 년 전부터는 새의 부리에서 이빨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신문은 이 연구의 성과는 ‘잠자는 유전자의 스위치’ 를 켜는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성장 과정에서 활동을 멈추는 인간의 치아와 모발 유전자 등의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할지 모른다고 평가했다.
▶2002년 2002 FIFA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 48년 만에 첫승(폴란드를
상대로 2-0 승,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
폴란드 2 대 0(승) – 황선홍(전반 26분 골), 유상철(후반 9분 골
https://youtu.be/cM9jdhUX-qw
2002.6.4. 대한민국 vs 폴란드 전반전 하이라이트
https://youtu.be/vjMa5aY8BMs
▶2001년 대한민국·멕시코
4일 정상회담.
▶2001년 이란 대통령, 샐먼 루시디의
`악마의 시` 관련사건 종결 선언
저서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Salman Rushdie·54)가 10여년 만에 ‘사건 종결’ 선언을 받았다.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 이란 대통령은 4일 “샐먼 루시디 사건은 이제 종결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며 “종교적·도덕적·문화적 요구에 따른 어떠한 테러에도 분명히 반대한다”고 말했다고 이란의 관영 IRNA통신이 보도했다. 하타미 대통령은 “루슈디의 저술은 이슬람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지만, 이란은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며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루시디는 소설 ‘악마의 시’를 출판한 이듬해인 1989년 이란의 이슬람 최고지도자인 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루시디는 작품 속에서 예언자 무하마드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그의 열두 아내를 창녀에 비유하면서, 코란의 일부를 ‘악마의 시’라고 언급해, 호메이니 등 이슬람 신도들의 분노를 샀다. 이 문제로 영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단절됐지만, 라프산자니 후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한 호메이니가 숨졌기 때문에 누구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루시디는 이란 암살특공대의 추적에 쫓기며 영국 정부의 보호하에 은둔생활을 했다. 루시디의 목에는 280만달러의 현상금이 걸렸으며, 1991년에는 루시디의 작품을 번역한 일본인 교수가 살해당하는 등 관련자에 대한 테러가 잇따랐다.
91년 재개된 이란과 영국의 국교는 98년 하타미 대통령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기로 약속함으로써 대사급으로 격상됐다.
▶2001년 북한 상선, 서해안 북방
한계선(NLL)과 제주해협 침범
▶2000년 박지은, 美LPGA캐시
아일랜드 그린스닷컴 골프대회서 우승
수퍼 루키` 박지은이 2000년 6월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뮤렐스인렛의 캐시아일랜드 그린스닷컴 클래식 골드대회 4라운드에서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백전노장 줄리 잉스터와의 기싸움에서 이겼다. 외견상 4라운드 내내 선두를 지킨 완성이었지만 마지막 3홀을 남겨두고 3타 뒤진 상황에서 일궈낸 대역전극이었다. 2000년 LPGA투어 한국선수로는 가장 먼저 우승한 선수가 됐다.
여섯살때 `리틀 미스코리아`로 뽑히며 `미의 여왕`을 꿈꾸던 박지은(미국명 그레이스 박)은 리라초등학교 2학년인 여덟살 때 골프채를 잡았다. 그리고 클럽을 잡은지 한 달 만에 93타를 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91년 하와이 친척집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미국의 주니어대회에서만 33승을 올렸다. 1995년 US여자오픈 역대 최연소(16세) 출전, 1997년 외국인으로 첫 전미체육대상 수상. 애리조나주립대 진학 후 학업과 골프를 병행하며 아마추어 랭킹 1위를 달리던 박지은은 1999년 5월 NCAA(전미대학체육협회)여자골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아마추어 통산 55승을 달성했다.
1백67cm,55kg의 체격조건에 엄청난 장타가 주특기. 이번대회 2라운드에서는 드라이버샷을 303야드나 날렸다. 한편 서울에서 갈빗집 `삼원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박지은의 아버지 박수남씨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음식점을 찾아온 손님 모두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 400년전 강화조약
체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기 일본서 발견
▶1998년 남북한 개신교
첫 합의문 채택.
▶1998년 인도·파키스탄 분쟁
카슈미르서 이슬람 분리주의자 총파업.
▶1998년 6.4 지방선거 실시
▶1997년 브라질 상원,
대통령 중임 허용.
▶1997년 프랑스, 좌파정부 공식 출범.
▶1997년 아프리카단결기구(OAU) 30
개국 정상회담, 쿠데타 없는 대륙 선언.
▶1996년 유럽 우주국(European
Space Agency)의 로켓 아리안 5호
(Ariane 5), 발사 1분만에 폭발.
▶1996년 일본 NEC의 해외컴퓨터
부문, 미국 패커드 벨사와 합병 발표.
▶1996년 나이지리아 야당 지도자
아비올라의 부인, 괴한 총격에 사망.
▶1996년 유럽 차세대로켓
'아리안-5호' 발사에 실패.
▶1995년 중국에 대홍수,
이재민 3백여 만명 발생.
▶1994년 대한민국-우즈베키스탄,
정상회담.
▶1993년 과학로켓 `과학1호`,
서해안에서 발사(96초동안 오존층 측정)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한국최초의 과학로켓 ‘과학1호’ 가 1993년 6월 4일 서해안에서 발사됐다. 로켓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왕복선을 쏘아올리는 수송수단으로, 우주 개발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로켓 개발이 1차적으로 돌파해야 할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과학1호’ 발사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우주기술 보유국의 대열에 서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최초 국산 과학로켓 ‘과학1호’.
이번에 발사된 ‘과학1호’ 가 비록 과학실험 및 원격탐사용 소형 과학위성을 저궤도상에 올리기 위한 중형과학로켓으로 선진국에서 방송통신위성이나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릴 때 활용하는 3단추진 로켓에 비해서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한번 추진으로 지구상공 75km까지 올라갈 수 있어 다른 나라의 과학로켓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과학1호’ 는 길이 6.7m, 무게 1.4t, 직경 42cm의 고체연료추진형 로켓으로, 발사 후 최고 비행고도 38.6km, 비행거리 77km를 188초 동안 비행하면서 한반도 상공의 오존층 농도를 측정했다. ‘과학1호’ 는 1990년 7월부터 3년간 항공우주연구소 유장수 박사팀과 서울대, 삼성항공 등 3개 대학, 5개 기업이 공동참여, 28억4천7백만원의 연구개발비와 총3백22명의 연구인력이 투입돼 설계 제작했으며 탑재되는 전파송수신기 오존측정기, 온도측정기 등 전자장치의 경우 국산화율이 약70%나 됐다.
▶1992년 미국 우정성,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우표 발행 발표
▶199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OMS와 선교협정을 체결.
▶1991년 한기총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본부, 사할린에 쌀 80톤과 생필품 전달.
▶1990년 마리온 배리 전워싱턴시장
코카인복용혐의 재판개정
▶1990년 한 미국여성,
`자살기계'로 자살
▶1990년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제8대 이사장에 배태준
장로가 취임하다.
▶1990년 북경대 등 11개대 대학생
3천여명, 천안문사태 1주년을 맞아
현정권 퇴진등을 요구하며 시위.
▶1990년 韓蘇 정상회담(노태우-고르바초프,샌프란시스코에서 첫 회담)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1990년 6월 5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의 회담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양국이 단교한 이래 86년만에 국교수립을 가능케 했으며 동시에 동북아 냉전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됐다.
한소정상회담은 소련의 한반도정책과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이 맞아떨어져 성사된 것으로, 고르바초프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한소경제협력 확대를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발전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한국측 역시 사회주의권 특수를 통해 경제침체를 극복하면서 한소수교를 통한 한반도 평화구조의 정착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이 회담 결과 남북교차승인 문제가 활발히 거론되고,국가보안법 철폐, 방북인사 석방 요구가 제기됐으며 9월 30일 한소수교가 이루어졌다.
▶1989년 중국, 천안문 민주화요구
시위를 유혈진압
1989년 6월 4일, 중국정부가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일어난 유혈참극 `천안문사태`로 전 세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4월 15일 호요방 前당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기 시작했고, 일반 시민도 여기에 가세하면서 집회는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천안문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등 100만여명이 연일 모여들어 민주화를 요구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온건파인 조자양 총서기, 호계립 정치국 상무위원 측과 강경파인 양상곤 국가주석, 이붕 총리 측이 대립했으나, 강경파가 득세하자 계엄군이 이날 새벽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군의 발포로 수천명이 희생됐다.
이후 중국은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상층부 권력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 조자양을 실각시키고, 강택민을 당 총서기로 선출, 새 실권자로 등장시켰다. 실권자 등소평은 가을 4중전운에서 당중앙군사위 주석직 등 모든 공직에서의 사퇴를 발표했다.
천안문에 진주하는 탱크부대를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시위대.
▶1989년 폴란드 자유노조(Solidarity)
폴란드 의회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
▶1989년 하메네이 이란 대통령,
이란 최고지도자로 선출
▶1988년 폴란드,
동국권국가 처음으로 다당제 총선
▶1987년 영국정부, 자국의 외교납치와
관련 이란 영사관 폐쇄.
외교관7명에구속영장. 5명에 추방령.
▶1985년 한국기독교사회교육원 개원
▶1985년 북한 보천보전자악단 창단
북한의 `보천보 전자악단`이 1985년 6월 4일 결성됐다. 북한의 2대 경음악단의 하나로 김일성의 혁명 전적지인 보천보에서 이름을 따왔다.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고 기량이 가장 뛰어난 연주가, 가수, 작곡가로 구성됐으며 평양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신디사이저 등 전자악기를 주축으로 해서 피아노 등의 양악기와 전통악기를 혼용하고 있으며 음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성악 무용을 하는 전속배우와 합창단을 사이에 두고 있다. 노동당의 문예방침에 의해 리듬보다는 가사를 중시하는 북한식 음악을 지향하고 있으나 팝송 등 세계 각국의 대중음악 여러 곡도 레퍼토리로 갖고 있다.
▶1983년 중국-소련 국경무역 재개합의
▶1982년 제8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프랑스 베르사유)
▶1981년 사다트와 베긴,
팔레스타인과 시나이문제로 회담
▶1980년 우리나라 첫 태양광발전소
가와군 아북도에 준공
▶1980년 카터 행정부, 한국에
항모 '코랄 씨'를 포함한 함대 급파.
▶1980년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
영여사지 발견
▶1980년 우리나라 첫 태양광 발전소가
아차도에 준공
▶1979년 가나에서 군부 쿠데타 발생.
▶1978년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여당 자유당의 트르바이 당선.
▶1977년 소련 새 헌법초안 발표
▶1970년 엘살바도르-온두라스
국경분쟁 종결(1969년 7월이래)
▶1970년 연평도 서방서
해군방송선 북한경비정에 피랍
▶1970년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국경분쟁 종결
▶1970년 연평도 서방서 해군방송선,
북한경비정에 납북
▶1970년 통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9년 서독, 캄보디아와 단교.
▶1967년 영국여객기 하루 2대 추락,
160명 사망
▶1967년 기독장교회(OCU)주최,
NCC후원으로 군민합동 현충일추도예배
▶1966년 장면 전 국무총리 사망.
6.12 국민장으로 장례식 거행.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1966년 6월 4일 제2공화국 총리였던 장면이 간염으로 작고했다. 1899년 인천에서 출생했고 호는 운석(雲石)이다.
YMCA 영어학교를 거쳐 도미(渡美),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했고 외국대학 여러곳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1946년에는 정계에 진출했으며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이 됐다. 초대 주미대사로 한미국교수립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1951년에는 국무총리가 됐다. 그 후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6년에는 부통령이 됐다. 부통령 시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격됐으나 미비한 상처였다. 1960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8월 19일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피선되어 정권을 장악했으나 5ㆍ16군사정변으로 취임 9개월 만에 물러나야했다.
제2공화국이 대한민국 역사상에서 가장 민주적이었던 시기였던만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민주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한편에서는 성격이 부드럽고 온순한 탓에 한 국가의 최고권력자로서는 의지가 강건하지 못했다는 평도 받았다.
▶1965년 소련-월맹(베트남)
원조협정 조인
▶1961년 자유 감리교 창립
▶1959년 추풍령 터널 개통식.
▶1956년 이집트, 1968년 기간 만료
이후, 수에즈 운하 회사(Suez Canal
Company)의 권리가 연장되는 것이
아님을 발표.
▶1956년 쿠바 내 미국 소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과 제조소 전원 몰수.
▶1954년 프랑스-베트남 독립협정 조인
▶1953년 배우 파커 스티븐슨 출생
▶1952년 교육자치제실시
▶1950년 상공은행 발족
▶1950년 선린마을 창립.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길리 산78번지(현 강동구 길동)
에 조성된 기독교인 공동마을.
▶1950년 상공은행 발족.
한국-일본 무역협정 조인
▶1946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
1946년 후안 페론 대령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선출돼 6월 4일 취임했다. 2차대전 초기에 이탈리아에 주재하고 있던 후안 대령이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공감하고 귀국한 것은 1940년이었다. 1943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권을 폐하고 스스로 노동부장관에 취임했다. 카리스마에 부유한 페론은 사회개혁을 공약하고 노동자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親노동자 정책과 국민을 통제하는 경제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945년 10월 그는 정적에 의해 투옥된다.
곤경에 처한 그를 구해준 것은 장차 부인이 될 무명배우 에바 ‘에비타’ 두하르테였다. 24살의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한 지난 경력이 무색할만큼 아름답고 총명하면서 야심까지 가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페론지지를 호소하며 노동자대중을 결집시켰고 그 힘으로 페론을 석방시킨 후 그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부인 에바와 함께 2차대전 중에 비축해 둔 풍부한 재정을 연간 20%가 넘는 임금인상과 사회보장제도, 노동자 주택정비에 투입하며 ‘페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심정책은 결국 20세기 남미 최대 부호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1952년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에바가 세상을 떠나자 페론은 급감한 인기도와 함께 계속된 경제 파탄으로 1955년 실각했다. 이후 1973년 전 부인 에바를 닮은 세 번째 부인 이사벨과 함께 부부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나란히 당선되는 이변을 낳기도 했으나 이듬해 조국을 구제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미국-영국군 로마입성.
▶1944년 허성도 목사 사망.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1944년 미국-영국군 로마 점령
▶1943년 아르헨티나에
페론 지휘하의 쿠데타
▶1942년 일본, 미얀마에 군정 실시
▶1942년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
태평양에서 미드웨이 해전 개전.
▶1942년 일본 버어마에 군정시행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
프랑스점령후 영국-프랑스-벨기에군
덩케르트 철수완료.
▶1938년 제3회 월드컵(프랑스) 개막
▶1937년 가수 프레디 펜더 출생
▶1937년 피카소 `게르니카` 완성
흑백을 사용하여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게르니카>
20세기를 대표하는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1937.6.4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하다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는 한 아기가 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면 울어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아기는 울음을 터뜨려야 한다. 첫 울음, 그것은 존재 확인 이상의 문제이다. 첫 울음과 더불어 아기는 호흡을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 한 아기가 울기를 거부하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가 아기의 뺨을 때려도 아기는 울지 않는다. 의사는 불안해 한다. 마침내 의사는 시가를 크게 빨아들여서 아기의 얼굴에다 뿜어댄다. 그때서야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무조건적 지지자였던 동료조차 비판한 <아비뇽의 아가씨들>
태어나면서부터 살기를 거부했던 그 아기는 아주 오래 살았다. 아기는 1973년까지 살았다. 무려 아흔두 해를 산 것이다. 단지 오래 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도예와 조각 작업도 했다.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사이 그는 현대 미술의 창시자가 되었다. 아니 그는 현대 미술 자체가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그의 이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대 미술의 거의 모든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1907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 언덕에서 살았다. 언덕 위에 배가 서 있다. 배의 이름은 ‘바토-라부아르’, 즉 세탁선이다. 한 건물 안에 30여 개의 아틀리에가 있다. 계단은 삐걱거리고, 수도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가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습기로 가득 찬 그 건물에는 일년 내내 고양이 오줌 지린내가 풍긴다. 바토-라부아르, 그것은 이 건물의 보기 흉한 몰골이 ‘세탁부들의 빨래터로 쓰이는 강변에 늘어선 낡은 배들’과 흡사하다 하여 어느 시인이 붙인 이름이다.
문을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통로 맨 끝 쪽 아틀리에, 그 곳에서 피카소가 무덤덤하게 자신의 그림을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후에 그와 함께 큐비즘을 발전시켜 나간 조르주 브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마치 우리에게 솜뭉치를 먹이고 석유를 마시게 해서 불을 뱉어내게 하려는 것 같군.” 펠릭스 페네옹이나 앙리 마티스, 피카소의 무조건적인 지지자였던 기욤 아폴리네르마저 그의 그림을 비판하고 있었다. 오직 한 친구 칸바일러만이 그 그림의 가치를 알아 보았다. 초대한 친구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는 그림을 둘둘 말아 화실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1935년경 첫 번째 부인 올가의 초상화(1917년)앞에 선 피카소(왼쪽),
1907년 선보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본격적인 입체파 운동의 계기가 됐다.
그 그림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243 X 233센티미터의 거대한 화폭 안에 여자 다섯이 그려져 있다. 네 여자는 서 있고, 한 여자는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익히 보아왔던 그림들 속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까지 화가들의 화폭 속 여인들은 항상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아름답지 않다. 보기 흉하다. 아니 그런 여자의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큰 눈, 정면의 모습에 담긴 옆 모습의 코,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엄청나게 큰 발, 도무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오른쪽 여자는 난폭하게 쭈그리고 앉아 몸의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은 정면이다. 그것은 가능한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하나의 화폭 안에 어떻게 얼굴 정면과 등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 다섯 여자들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화면에 둘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간 것이다. 여자들의 육체는 찢어져 있다. 그는 말했다. “비뚤어진 코,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코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1907년은 마땅히 젊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그 해에 큐비즘이 시작되었고, 현대 미술도 시작되었다. 그 그림은 현대 회화의 첫걸음을 알리는 기록이다.
하나의 화폭 안에 여러 시점을 담고자 했던 화가들의 열망으로 탄생한 큐비즘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자연에 대한 모사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넣는 것이라고 여겼다. 대상을 아주 정확히 화폭 안으로 옮겨야 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이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 그려서 그것이 마치 화폭 안에 실재하는 것처럼 그리는 것은 모든 화가의 열망이었다. 거장들의 생각과 손을 거치며, 르네상스 이후 그 열망은 실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인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 보다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로 실재하는 것인가. 때로 우리 눈 앞에서 날아가는 새가 저 멀리 보이는 집보다도 크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가 집보다 클 수는 없지 않은가.
대상과 화가 사이에 존재했던 역할 분담에 생긴 이 미세한 균열은 폴 세잔에 와서 구체화 된다. 그는 화가가 맡아 온 오랜 임무를 포기한다. 1904년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자연을 원통, 구와 원추에 의해서 다룬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항상 자연을 자신이 그리기 쉽도록 변화시켰다. 그 자연 대상의 기본 형태가 세잔이 보기에 원통과 구와 원추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본 단위들로 그는 자연을 재구성했다. 세잔은 1906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그림들은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물이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분해되고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여러 시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된다. 하나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입체주의 화가들은 여러 각도의 시각을 하나의 화면 안에 담으려고 했다. ‘하나의 화폭 안에 사물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모두 담고 싶다’는 이러한 열망은 르네상스 이래 근 500년을 지속되어 온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큐비즘(입체주의)이란 말은 1908년, 그러니까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다음해에 브라크의 그림들을 보고 마티스가 한 말에서 유래했다. 그때 마티스는 “아, 입방체(cubic)들만으로도 그렇게 그릴 수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1908년 루이 보셀이 “브라크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든 사람이든 집이든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즉 입방체로 환원했다.”라는 평을 썼을 때 그것은 미술사의 한 용어로 정착되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피카소의 '청색시대'
1900년 피카소는 자신이 단골로 다니던 바르셀로나의 선술집 ‘네 마리 고양이’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어두운 선술집 벽 위에 그는 데생 150여 점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 해, 친구인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 다음해 피카소의 친구 카사게마스가 거리의 여인 제르멘 가르가요에게 실연을 당해 그 충격으로 자신의 머리를 권총으로 쏴 자살했다.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그림에 반영되었다.
그 해, 그러니까 1901년부터 4년 간 피카소는 청색만을 소유했다. 청색은 하늘의 색이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색이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카사게마스가 무심코, 아주 무심코 올려다보았을 하늘의 색이다. 청색은 단순히 그의 캔버스에 칠해지는 색이 아니다. 청색은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 시절, 그는 옷까지도 청색을 입었다. 피카소는 청색은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하곤 했다. 피카소는 그 색으로 늙은 뚜쟁이, 알콜 중독자, 누더기를 걸친 걸인, 장님, 그리고 죽은 친구 카사게마스를 그렸다. 그들은 모두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 부른다.
이른바 '피카소의 청색시대'라 일컫는 시절인 1902년도 작품
1904년 피카소는 몽마르트 세탁선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 해 여름 피카소는 소나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고양이를 발견하고 아틀리에로 데려 왔다. 막 아틀리에로 들어가려 할 때 그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피카소는 길을 막고 웃으면서 그 여인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친해졌고 얼마 후 페르낭드는 그의 아틀리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피카소의 그림에서 더 이상 청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버린 것이다. 그는 행복했다. 하루하루 끼니와 땔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 둘은 행복했다. 페르낭드의 쾌활함 덕분에 그의 화폭은 점점 밝아져 갔다.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장밋빛 그림이 된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는 곡예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흑백의 대조로 전쟁의 참혹상을 표현한 <게르니카>
1907년 피카소는 파리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조각품과 가면들을 보았다. 그는 그 원시 예술품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마술적인 분위기, 강력한 상징성, 원시적인 감각, 공포감, 그 감동을 껴안고 그는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해 늦여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완성했다. 큐비즘의 탐구는 그 후 브라크와의 교류로 더욱 확장되며, 그 기법은 20년대까지 단속적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가 그린 큐비즘 최고의 걸작인 <가면을 쓴 악사 세 명> 두 점은 1921년에 그려졌다. 1937년 에스파냐 정부가 피카소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파리 만국 박람회 에스파냐관에 걸릴 그림이었다. 그 해 5월 1일 <스 스와르>지가 에스파냐 내전 중 일어난 학살 사진 석 장을 게재했다. 4월 26일, 프랑코의 명령을 받은 독일 폭격기들이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을 무참히 공격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폭격은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고, 그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다쳤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피해자의 대부분은 노인, 여자, 어린아이들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한 피카소는6월 4일,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죽은 아이들과 불길에 휩싸인 집, 깨진 동물의 머리 등을 그려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서 유독 붉은색을 쓰지 않았다.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검정, 흰색, 회색만을 썼다. 흑백의 대조만이 강조되는 거대한 화폭에는 폭탄도 전투기도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전쟁의 참혹상을 처절하게 보여주었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마을 게르니카를 사람들에게 증언해 주었다.
공산당에 입당,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다
1940년 여름,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었다. 모든 전시회가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피카소는 그림을 그렸다. 나치 치하의 암울함을 잊기 위해 그는 그림만을 그렸다. 많은 예술가가 변절을 하거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도 그는 파리에 틀어박혀 그림만을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주로 정물을 그렸다. 어느 날 한 나치 장교가 그를 찾아왔다. 장교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게르니카> 사진을 보고 물었다. “이것을 당신이 그렸소?” 그는 대답했다. “아니요, 그걸 그리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오.”
1944년 파리가 해방 된 후, 피카소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한동안 그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였다. 1951년에는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1954년에는 <전쟁과 평화>를 그렸다. 그가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그렸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1953년 한 잡지의 표지화로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는 다시 공산당과 충돌했다. 표지에 실린 스탈린의 얼굴이 너무도 젊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비난 중 하나는 이러했다. “오늘 스탈린의 가혹한 죽음이 찾아온 것에 이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피카소는 혼란과 몰이해의 씨를 뿌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피카소는 이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역사를 포기했다. 가장 강한 것은 그림이다. 그는 어느 노트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그는 대가들을 상대로 버거운 대결을 시도했다. 대가들의 그림이 심하게 변형되어 그의 화폭 안으로 들어왔다. 1957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그리고 1960-61년에는 세잔의 <풀밭 위의 점심>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아흔 두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
80대로 접어들어서도 그림과 도예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이 시기는 판화의 시기였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실험을 계속했다. 피카소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판화의 역사가 쌓아온 기존의 규칙들을 무시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남부 무쟁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흔두 해 삶 동안 많은 친구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사게마스의 자살은 그의 그림을 청색으로 가득 차게 했고, 페르낭드는 그 청색을 화폭에서 몰아냈다. 러시아의 발레리나 올가는 그의 그림에 한동안 질서와 안정을 부여했다.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으로 나타났고, 프랑수아 질로는 빛이 가득한 앙티프 시절을 지배한 여인이다. 그의 임종을 지켜 본 부인 자크린은 화가와 모델 연작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1955년경 영화배우 게리쿠퍼와 함께 익살스러운 선글라스를 끼고(왼쪽),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었던 피카소(1973년2월15일).
1989년 <라팽 아질에서>가 4070만 달러에 팔렸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 때 자신의 캔버스를 땔감 삼아 추위를 녹여야 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점도 사지 않았던 프랑스의 미술관들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의 국적은 에스파냐이지만, 그를 키운 토양은 분명 프랑스이다.”
피카소가 없었다면 큐비즘이 있었을까?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큐비즘은 그렇지 않다. 20세기 미술 최대의 혁명, 큐비즘은 피카소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큐비즘도 없었을 것이고, 현대 미술은 많은 부분이 현재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피카소 이후 화가들은 남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 번도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던 그 사내 덕분에.....
▶1937년 항일유격대 보천보 급습
1937년 6월 4일,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 소속의 항일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 병력 1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남 갑산군 내 보천보를 급습했다. 보천보는 일본인 50여명과 조선인 1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시골도시.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고 관청을 불태운 뒤 밤늦게 떠난 유격대의 뒤를 인근에 있는 일본 경찰이 추격에 나섰지만 7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만 내고 말았다.
이상이 북한이 그들의 영도자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다. 이 전투는 당시 국내신문이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크게 보도됐지만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실제로 지휘했는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약한 김일성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의 레온 브룸
내각 성립. 최초의 사회당정권
▶1935년 카프 산하 좌익극단
신건설사 해체
▶1932년 칠레에 쿠데타, 보수내각을
타도 사회주의적 정책을 채택
▶1929년 배우 데니스 위버 출생
▶1929년 볼드윈 영국내각 총사직
▶1928년 만주 군벌 장작림,
일본군의 열차폭발로 피살
▶1922년 배우 진 배리 출생
▶ 1922년 극진가라테 창시자 최배달 출생
최배달 어록
“적에게 너의 살을 주고,
적의 뼈를 부수며, 적에게 너의 뼈를 주고, 그 목숨을 취하라.
자신의 안전에 구애 받으면, 이길 수 없고,
진정한 사무라이가 될 수도 없다"
“무도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는 것뿐,
실전이 아닌 시합은 춤이나 체조에 불과하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실전공수(實戰空手) 그것 뿐이다"
”자신이 강함을 추구한다면 강하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무도의 궁극은 사랑이다”
“고향 산천을 어찌 잊어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어찌 잊어요,
내가 고향산천에 할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존심이 있어요”
“실전이 아닌 것은 인정받지 못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신용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신용이 없어지면 존경 받을 수 없다”
“세상은 넓고 상수(上手)는 많다.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내 선생이다”
“신용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돈을 뒤쫓지 말아라. 돈, 명예, 여자가 뒤쫓아오는 남자가 되어라”
“3D. 힘들다. 더럽다. 위험하다? 젊은 무렵, 내가 좋아했던 것 뿐이다”
“싸움에 임박해서 필사적이 되는 건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서는
누군들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랴.
문제는 기필코 이긴다는 신념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사물을 느낄 뿐이지만
기는 비어있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리니…”
“잔을 비운다는 것 가지고는 어림없다. 잔을 깨부숴라.
잔을 비운다고 하더라도 비어있는 ‘그대’가 있다면 그 잔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비어있음’이 그대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1921년 합커크 내한.미북 북장로회
선교사 의사 의학박사로 부인과 내한.
세브란스병원에서 내과의사로 활약.
▶1920년 최초의 공설목욕탕
평양에서 개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헝가리와 트리아논조약 체결.
▶1913년 박용만 등,
미국 네브라스카주에서 유학생회 조직
▶1912년 여배우 로절란드 러셀 출생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킴
▶1903년 헌트 출생.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 목사, 수난자. 한국명 한부선.
1928,10,4 내한 충북 청주선교부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함.
▶1900년 미국 작가 크레인 사망.
▶ 1886년 한국-프랑스 수호통상조약 체결
▶ 1878년 영국, 터어키 비밀동맹 체결, 영국 키프러스섬 획득
▶ 1877년 1927년 담즙산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의 빌란트 출생
▶ 1875년 독일의 서정시인 뫼리케 사망
▶ 1864년 중국 신강지역 무슬림, 쿠차에서 청조의 지배에 항거하며 봉기
1864년 6월 4일 중국 신강지역 쿠차에서 무슬림들이 청조의 지배에 항거하며 봉기했다. 쿠차에서의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인근 도시로 확산되자 그것은 곧 또 다른 봉기를 촉발시켜, 우룸치 야르칸드 카쉬가르 호탄 일리 등지의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 6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해 말에는 신강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도시에서의 봉기는 거의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었는데 퉁간(중국인 무슬림)들이 최초의 봉기를 주도하고 이어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1862년 중국 섬서성과 감숙성에서의 회민(무슬림) 봉기로 서북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청조가 신강으로의 사태확산을 막기 위해 퉁간(중국인 무슬림)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신강전역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군대의 숫자도 적었고 내지와의 통신도 두절된 상태에서 청군은 변변히 대항하지도 못한 채 대부분 자폭하거나 살해되었다.
봉기에 성공한 무슬림들이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사분오열 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산 서쪽 코칸드 칸국에서 파미르를 넘어 신강지역으로 온 야쿱 벡이라는 `위대한 성전사`가 1년 만에 천산 남쪽의 양기히사르 야르칸드 호탄 등에 있는 여러 무슬림 세력들들을 모두 평정하고 1870년에는 북쪽의 악수 쿠차 우룸치 투르판 등까지를 손에 넣어 신강 전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났던 청나라가 10여년 만에 다시 신강지역 공세를 강화해 오고, 야쿱 벡도 혼란스런 와중에 돌연사함으로 신강지역의 무슬림 정권도 막을 내렸다.
▶ 1798년 카사노바 사망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자유를 더 사랑했다"던 베니스 출신의 카사노바가 1798년 6월4일, 체코 프라하의 둑스성(城)에서 73세로 숨졌다.
죽기 전 자신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탈고, 자신의 존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렸다. 자서전은 노골적인 사랑 묘사로 그의 생존시 출간되지 못했다. 카사노바는 사람들이 알고 있듯 많은 여성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파였고 낭만파였지만 그가 추구했던 지향점은 여성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였고 그의 촉수는 언제나 상류사회를 향했던 현실파였다.
18세에 법학박사를 받았던 뛰어난 두뇌, 40여권의 저서를 저술한 박식함, 신학ㆍ자연과학ㆍ예능 등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그를 어느 한 곳에 묶어두질 않았다. 한 여성의 남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유럽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프리드리히 대왕, 예카테리나 여제 등 당대의 실력자를 만나서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고, 계몽사상가 볼테르를 만나서는 그의 사상을 반박했다. 넘치는 재능과 해박한 지식은 신분상승을 위해 상류사회를 기웃거릴 때도 활용됐지만 여성들을 탐할 때도 동원됐다. 2m나 되는 큰 키와 남자다운 풍채를 겸비한 그에게 여성들도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의 여성관은 자서전 서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 1304년 고려 국학 대성전 완성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