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블로그 포스팅입니다. 갈수록 글이 난잡해지고 있습니다.
http://chiwoo555.egloos.com/2241059
=================================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프롤로그)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1 - 호족연합정권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2 - 호족 : 고대적인 것의 몰락
고대 중국을 중세로 이끈 계기가 된 황건과 영가의 난이라면 그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7세기 말엽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도 벌어집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은 단순히 산해관 동쪽의 강국 하나가 멸망했다는 단순한 의미나 민족의 방파제(?)가 무너졌다는 감상적 의미부여가 아닌,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구조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어떤 면이 어떻게 황건, 영가의 난에 필적할만한 충격을 산해관 동쪽 지역에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당전쟁은 1차 전쟁기(645), 국지전기(647~660), 2차 전쟁기(661~662), 3차 전쟁기(667~668)을 거쳐 최종 결착으로 668년 고구려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중 전쟁의 전환점이 됨과 동시에 그 지역 삶의 양태를 본질적으로 전환시킨 사건을 꼽으라면 2차 전쟁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전쟁기와 국지전기에서 주 전장이 된 요동지역은 이미 많은 인적 손실과 농지 파괴, 상업망의 손실을 입었습니다만 650년대 경에는 거꾸로 고구려가 당에 대해 반격을 가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640년대 후반~650년대 초반시기를 통해 어느정도 복구 가능했던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1차 전쟁 자체가 고구려 내지로 깊숙히 들어와서 치른 전쟁이라 하긴 뭣하니까요.(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동 전역의 완전한 복구가 이뤄졌다고 보긴 어렵겠죠. 적어도 청야전술 펼친답시고 농지를 불살랐는데 1년간 손을 대지 못해 황무지화된 농토나 산업 인프라망을 복구 좀 할라치면 계속 찔끔찔끔 군사 보내와서 사람 신경을 건드려대니 제대로 복구하기는 대단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지속된 긴장상태로 인해 요동지역을 경유하는 대 중국교역로와 초원 교역로 역시 위축되었구요.)
그러나 2차 전쟁기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국경지역 부근에서 전력의 손실이 발생했던 것과 달리 국가 중심부이자 전쟁 후방지역이던 평양 일대가 직공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육로로 진격한 것이다, 아님 해상으로 진격한 것이다 등등 설이 많지만 평양이 공격당한 그 자체는 같기 때문에 어느 설이 옳다는 것은 여기서 다루진 않겠습니다. 아..물론 전 해상 진격설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사실 여부를 떠나 육로 진격설을 차용할 경우 요동 일대의 고구려 주요 병력이 다 괴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해상 진격설보다 더 큰 피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해상진격설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를 이어갈까 합니다. 그래야 확대해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테니까요.)
같은 인원을 투입해서 공격을 했을 때, 대비가 되어있는 전선 전방을 공격하는 것과 대비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은 단순한 1차 피해만을 놓고 따진다고 해도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고구려 주요 전력 대부분이 투입된 요동방어선 대신 공격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수군을 주공으로 삼아 후방인 평양성을 직공한 당의 작전은 주효했죠. 이 작전으로 평안도 대부분 지역이 당군의 공격 사정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변 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는 기사는 없지만 고구려가 그간 구사했던 청야작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꾸로 이들은 소수 병력을 따로 빼서 평안도 일대의 주요 농업지대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파괴했을 것입니다. (압록강 이남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고는 661년 9월에 남생이 요동도행군을 이끌던 계필하력에게 패해 3만의 전사자를 남긴 사건이 고작입니다. 대비가 되어 있지 않던 평안도 일대의 병력을 간신히 끌어모아 벌인 반격이 저 정도이니 이렇다 할 반격은 없을 정도로 반격의 자원이 평안도 일원에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이를 지원해야할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은 부여도행군과 루방도행군에 묶여 있었고 요동 남단은 요동도행군의 위협 때문에 전력을 이동시킬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661년 10월과 11월에 부여도행군과 루방도행군이 퇴각, 혹은 괴멸되기 전까지 고구려는 반격의 기회를 전혀 잡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2월 연개소문이 대동강 지류인 사수에서 옥저도행군을 괴멸시키고 패강도행군마저 패퇴시켰던 것도 요동방면에서 당군의 위협을 벗어난 요동방면 고구려군의 남하로 인해 가능했을 것입니다.)
설명이 좀 장황했는데 간단하게 얘기하면 2차 전쟁으로 고구려 농업생산의 중심지이자 인구 밀집지역인 평안도 일원 대부분이 파괴당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고 전란을 피해 땅을 버리고 도망쳤던 사람들이 일부 돌아왔겠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토지와 관계시설이 초토화된 것을 목도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시 땅을 일구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유랑걸식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기록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농업 기반시설의 파괴는 장기적인 흉년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따라서 남아있는 사람들 또한 유랑걸식을 선택하는 경우는 많았겠죠.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농업의 문제가 아니라 상업의 문제였습니다.
이들 16개 지역 중에 회색표시가 된 핵심지역 7개 지역(이 중 한강유역은 제외한 7개지역)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상업 유통망에 의해 경제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양성은 고구려 제일의 인구 밀집지역으로서 물자 소비의 최종 종착지역입니다. 고구려에서 생산되는 각종 물산들을 가장 많이 소비하고 그 소비량이 공급량에 영향을 주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평양성으로 집중된 유통망은 두만강 유역에서 생산된 모피를 황해도나 요동 남단지역으로 수송시키기도 하고 역으로 요동 남단에서 생산된 철을 두만강 유역이나 부여 지역으로 수송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1. 물자 수요곡선의 동향을 책임지는 동력원이라 할 수 있고 2. 상업유통망을 통해 각지에서 생산된 물자의 재분배를 가능케 하는 유통 '펌프'란 2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지역별로 산업 분업화와 전문화를 통한 전반적인 생산력 향상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평양성이 포위되면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 외곽의 상주 인구가 흩어지게 되어 1.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대동강 하류의 항구와 요동 남단의 항구같은 상업 인프라가 파괴되면서 물자 재분배의 의미도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자체가 가지는 상업유통망 경색과 그로 인한 유통망 위축 및 소멸은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이제 지역의 산업 분업 구조 붕괴와 전문화의 퇴락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마지막 3차 전쟁은 2차 전쟁의 피해를 제대로 복구할 여지를 주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평양성이 또다시 수개월을 포위당했고 심지어 요동지역 또한 재차 파괴가 되었습니다. 고구려 내지 대부분이 전란에 휩싸여버렸죠. 2년에 걸친 장기전은 사람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비축된 물자도 이 시기 다 소모하고 말았구요.(비축물자의 소진의 대표적인 예는 667년 9월 신성함락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내부 물자 소진으로 인한 아사 위협이 배신자들의 배신 동기를 더욱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성의 경우 신당서 기록을 신뢰한다면 667년 1월에 포위가 되어 8개월 이상을 포위당해야 했습니다.) 잉여물자의 대대적인 소진은 전쟁 후에 안정기로 접어들었다고 하더라도 구매력 저하를 불러와 육로 상업망까지 위축 내지는 부분적 파괴로 이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669년 4월에는 3만 8천호(대략 20만명)의 인구가 당나라에 반항적이란 이유로 끌려가는데 대부분이 부유하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인구가 고구려 전역의 귀족계층이라고 하긴 힘든 것이 이후로 각지에서 부흥군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본다면 거의 평양성 내에서 살던 부민들로 이들의 정체는 귀족들도 있겠지만 기술자, 대상인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약 이들 대부분이 평양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평양 성내에 사는 인구가 대략 20만명을 수용가능했다는 걸 추론이 가능하겠죠. 성 외곽에 사는 인구까지 합친다면 도시인구가 더 늘어나겠습니다만 그 인구는 이미 2차 전쟁 때 다 흩어졌으니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성 핵심부에 사는 핵심인력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2차와 3차 전쟁으로 평양성 내와 인근 지역은 거의 무인지대화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평양성 인구가 대부분이 아니더라도 주요 도시에 산재한 반항적 지식인들이 끌려갔다는 얘기이니 상업 활동에 막대한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통이 회복될 여지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고 그것을 주도할 상공인, 지식인 계층마저 소멸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생산력은 물론 기술력의 전반적 퇴보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상업망의 대대적인 파괴로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농지 파괴와 비축물자 소모로 잉여생산물을 통한 구매력 저하 현상까지 나타나자 16개 지역은 이제 자급자족적 경제생활로 전환하는 수 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맙니다. 자급자족적 상황과 불안한 정국으로 인해 유랑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지역 유지나 실력자들에게로 모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중국사에서 보인 임협적 주종관계 같은 사적 관계가 7세히 후반 고구려에서 출현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또한 호족의 출현이 황건, 영가의 난 이전부터 있었던 후한의 '사권화(私權化)' 현상에 의해 유발된 것처럼 고구려 또한 멸망 이전부터 사권화 현상이 두드러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귀족연합정권기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계층들이 백성들을 사유화하는 사권화 현상이 벌어졌겠죠. 삼국지에서 나오는 준군벌도 있었을 것입니다.
(668년) 2월 이적 등이 우리의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중략.. 드디어 부여성을 함락하니 부여천 중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위의 사료에서 예를 든 것처럼 주요 성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군사관계망의 존재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군벌화 할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연정토가 멸망 직전에 그의 휘하에 있던 12개 성의 지배권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한 것이나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면서 국내성 주변 6개성과 함께 항복한 것은 이미 부족적 질서를 무너트리고 중앙집권을 상당수준 완료했던 고구려사회가 6세기 말엽부터 사권화 현상과 준군벌화 현상을 거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권화, 준 군벌화 현상은 자급자족적 상황에 촉매되어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권화된 모종의 권력주체에 의해 하나의 권역에서 정치,군사,경제가 모두 장악되어 유기적이고도 폐쇄적 순환구조를 가지게 되면 중앙에서 이를 통제하기 위해 어느 한쪽 면으로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고구려 멸망 전에는 유통망이란 경제적 측면에서 이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순 있었겠지만 2차 전쟁으로 유통망이 붕괴되면서 준군벌이 군벌로 변신하는 것을 막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통치 주체가 고구려 조정에서 안동도호부로 바뀌긴 했지만 이전처럼 지방 구석구석을 통제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어졌습니다. 각지에서 유랑민 집단(行)과 이동을 멈추고 자경활동을 벌이는 집단(塢), 혹은 변방 지역에서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자급자족활동을 벌이는 향촌자치체, 그리고 소규모 군벌의 출현 등 다양한 군소집단들이 군웅할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호족적 성격을 가진 지방 실력자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독립을 꾀할 준비를 갖춘 셈입니다. 이제 지역은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제 갈길 가게 되고 그런 상황은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 다음에 계속 -
첫댓글 아주 재미있게 감상하고 있습니다..얼마든지 계속...다음 내용이 기대 됩니다.....^^*
고구려 멸망을 영가의 난과 맞먹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셨군요. 한단인님 글을 읽고 보니 중세사 분기점에 대해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주제가 발해임을 감안하면 옆으로 좀 많이 샌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발해 정권의 성립을 위해서는 고구려 멸망시의 상황 설명이 분명 필요하겠지요. 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을 완료했던 고구려의 멸망이 군벌들의 등장을 부추겼다...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일단 배경 설명을 하자니 삼천포로 빠지는게 수순이더군요. ;;;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발해사를 중세사 분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그것이 '한국사' 란 영역에서의 중세사로 봐야할 것이냐고 한다면 그건 좀 아닌 거 같고.. 국가사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지역사로 발해사를 중세의 한 부분으로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단 신라는 아직 중세로 접어들지 않았으니까요. 국가사의 시대 구분으로 바라보기에는 공간적 영역이 광대하고 또한 시간차도 꽤 많이 나서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지역사적 시대구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지도를 넣어주시니 딱딱한 부분이 많이 감소되고 잼있네요
2차 여당전쟁에서 평양일대를 강타당한 고구려의 피해가 막심했을거라는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이겼지만 이긴 게 아닌 전쟁'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을 지방호족의 대두와 어떻게 연결시키실지 궁금하고 또 기대되네요.
로마제국이 속주방위를 포기하자 각속주들은 야만족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협력하게 되죠. 그리고 야만족들간 영토분쟁이 끝나자 의외로 평화가 확립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요. 고구려도 비슷했을거라고 봅니다. 중앙정부의 붕괴는 결국 각지역의 운명은 각지역에게 넘어가게 되고, 남아있던 귀족과 경제인들과 군인들이 각지역에서 할거했다고 생각됩니다. 발해가 세워지기전까지 옛고구려영토에서 각종위협에서 지역민들을 보호하고 세금을 받았겠죠. 그리고 대조영의 고구려부활 기치에 들어오거나, 싸우거나 해서 발해가 건국되고, 그기치에 저항없이 들어간 세력은 건국후에도 고려의 호족들처럼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겠죠.
매우 신선한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고구려멸망을 보니 이런결론도 가능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