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 : 죄악에 썩은 내 육신을
<사사기 5:12-18>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드보라의 찬가 두 번째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드보라와 바락에게 자기 민족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있고,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민족을 구하는 전쟁에 참여한 지파를 칭찬하고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에 대해 책망하는 내용이지요.
먼저 12절을 보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을 자다가 무슨 무서운 일을 겪었는지 자고 있는 엄마를 깨우는 것 같은 장면이지요. 백성들은 드보라에게 지금 고통과 위기 가운데 있는 나라를 구해 줄 것을 백성들이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12절 후반부에 보면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군대장관 바락에게도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만큼 전쟁에서 이겨 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지요. 즉 드보라와 바락이 왜 이 전쟁에 참여했는지 그 배경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하솔 왕 야빈에게 20년동안 학대를 당하면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에 응답한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13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셨고 그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함께 싸우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 중에서 이런 상황에 함께 참여해 주는 지파가 있는가 하면 참여할까 말까 주저하는 지파도 있고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참여하지 않는 지파들도 있었음을 본문은 말하고 있지요. 과거 여호수아 시대 때에는 모든 지파들이 하나가 되어서 전쟁을 벌일 때와 비교해 보면 지파들 간에 하나되는 마음들이 많이 해이졌음을 보여줍니다.
14절에 언급되는 ‘에브라임 지파, 베냐민 지파, 마길 즉 요단강 서편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 스블론 지파’, 그리고 15절에서 ‘잇사갈 지파’는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해 준 지파들이지요. 그리고 18절에서 언급되는 스블론 지파는 14절에 이어서 한번 더 반복하고 있지요. 스블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스블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가장 열정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드보라도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18절 후반부에 납달리 지파도 참여한 지파로 언급됩니다.
반면 15절 후반부에서 16절은 르우벤 지파가 참여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17절에서 길르앗 즉 갓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 중에 르우벤 지파와 길르앗 즉 갓 지파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있어서 요단강 서편 지역의 지파들이 겪는 고통을 겪지 않았고, 특히 르우벤 지파는 15절 마지막에도 ‘큰 결심이 있었도다.’ 그리고 16절 마지막에도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는 말이 있는데 큰 결심이 있었다는 것은 참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참여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16절 첫 부분에 보면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됨이냐?’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듣는 목가적이고 편안한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지파가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데 다른 지파 문제 때문에 치열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를 보면 17절 중간 부분에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모두가 배를 띄우고 항만이 있는 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곳에서 잘 살고 있다는 거죠. 역시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괜히 귀찮은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드보라 사사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지파를 억지로 참여하게 할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분명히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절실함을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들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다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오셔서 그들을 깨우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졸며 자버렸지요. 그렇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면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셨지요.
신앙생활을 편하게만 하시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도 최소한, 헌금도 최소한, 기도도 경건의 시간도 최소한, 어떻게든 최소한도로 예배와 헌금을 하고, 봉사도 가능한한 안하려 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편리함대로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요. 교회에서도 누군가 반드시 해 주어야 할 일인데 때로는 자원해 주는 분이 없어서 어느 헌신적인 분들이 이것 저것 때로는 힘에 부치도록 일을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에 지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지요.
편하게만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리면서 바른 믿음의 길을 가는 건 사실 어렵겠지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인간의 가장 최악의 낮은 자리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내 편한대로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과연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비난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채찍을 맞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시지요.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잘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드보라 사사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지파를 억지로 참여하게 할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분명히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절실함을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들 육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다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오셔서 그들을 깨우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졸며 자버렸지요. 그렇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면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셨지요.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시지요.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잘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