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1
비를 맞고 일어서는 강, 일어서는 바다, 내 안에도 갑자가 물난리가 나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소나기를 감당 못하는 기쁨이여.
2
온종일 사선으로 나를 적시는 비. 나도 몰래 내가 키운 일상의 안일함을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를 깨워 일으키는 눈물이여.
3
비가 너무 많이 와도 우리는 울고 비가 너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운다. 눈물로 마음을 적시지만 아름다운 사랑처럼 오늘도 세상을 적시는 꼭 필요한 비야, 생명을 적시기 위해 눈물일 수밖에 없는 비야.
4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폭풍 속에서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말하다가도 지나고나면 다시 개인 하늘 보며 새롭게 웃어보는---
5
먼지 뒤집어쓰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도시의 꽃과 나무들을 씻어주는 비야, 갈라진 논바닥에 떨어져 생수가 되는 비야, 그리고 오늘은 내 가슴을 적시며 마음 놓고 참회의 시가 되는 비야, 씻고 또 씻어내도 다시 그을음이 생기는 나의 일상엔 다시 내리는 비처럼 크고 작은 허물들이 참 많기도 하구나. 쏟아지는 비처럼.
6
하얀 비가 내리네. 죽어서도 잊혀진 무명의 순교자의 뼈처럼 희고 단단한 슬픔, 더디 부서지는 슬픔의 조각들으 하도 많은 이 땅에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7
우산도 받지 않고 빗속으로 황망히 뛰어들던 벗이여,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가 각각 홀로이듯이 함께 사는 우리도 각각 홀로 임을 깨닫는 비 오는 날의 아침, 우리의 젊음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 해도 아직은 갈길이 멀구나. 얻기 위하여 버릴 것들이 너무 많구나.
8
비를 맞고 더욱 환해진 꽃밭의 꽃들을 보며 슬픔의 눈물을 흘린 뒤에 더욱 아름다워진 한 사람을 생각한다. 대지가 비를 필요로 하듯 사람에겐 꼭 눈물이 필요하다.
9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젖은 얼굴들이 보이네. 열기를 식혀서 더욱 담담하고 편안해진 참 오래된 사랑의 눈길로 그들이 나를 바라보네. 마른가슴 가득히 고여오는 물살을 감당 못해 나는 처음으로 비와 함께 시인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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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지 않으려고 비옷을 입어도 소용없듯이 장마철이 아니어도 계속되는 그대의 소나기 같은 사랑의 말에 나는 내내 젖지 않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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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소나기의 4부 합창. 오랜 세월 연꽃처럼 피워올린 나의 조용한 기도에 대한 힘찬 응답의 소리로 오늘은 비의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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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땐 안 오다가 문득 예고 없이 나의 창을 두드리는 비처럼 나의 죽음도 언젠가 그렇게 올 테지. 미리 문을 열어두자.
< 시간의 얼굴 > (분도출판, 2006)
첫댓글 절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