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70년대
손석우
1920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목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호남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했다. 그는 작곡가 김해송의 추천으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 입사해 조선악극단 소속 기타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 국내 드라마 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을 작곡하며 데뷔한 그는 이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국내외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 자리에 올랐다. '한국 최초의 팝 작곡가'로 불리는 손석우는 미국의 스탠더드 팝 스타일을 처음으로 가요에 도입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손석우 경음악선 제1집 앨범 앞면
손석우 멜로듸 앨범 앞면
또 1961년 자주 레이블인 뷔너스레코드를 설립하며 독립(인디) 레이블의 효시 역할을 하였다. 가수 손시향과는 당대의 콤비로 불리며 <이별의 종착역>, <검은 장갑> 등을 히트시켰고, <꿈은 사라지고>(최무룡), <나는 가야지>(문정숙),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성옥),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최희준), <삼오야 밝은 달>(김상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박춘석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하고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 졸업했다. 1954년 백호라는 예명으로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를 작곡하며 데뷔하였다. 이후 팝의 대모 패티김과 팝 여성 듀엣 김치캣을 음반 데뷔시켰다.
박춘석걸작선 제1집 앨범 앞면
노래를 위한 경음악집 앨범 앞면
1965년 그는 국내 최초로 스테레오 음반을 출반하기도 했다. 이후 트로트 작곡가로 전향해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등 500여 곡의 주옥 같은 이미자 노래들이 박춘석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비나리는 호남선>(손인호),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김),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타인들>(문주란),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가시나무새>(패티김) 같은 히트곡을 남기며 ‘박춘석 사단’을 구축했다.
영화주제가집 제1호 앨범 앞면
그의 작품은 트로트풍의 곡이 많았지만, 팝 스타일의 곡도 잘 만들었다. 백 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맡으며 대중음악의 품격과 저변을 넓혔다. 또한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곡을 주기도 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1950-198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그는 2천700여 곡을 작곡했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1994년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1995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길옥윤
1927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작곡가보다는 색소폰 연주자로 더 많이 활동했다. 1948년 월남한 그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공부했고, 군예단원으로 활동했다. 대학선배 김영순(베니김)이 조직한 악단에 들어가 재즈를 접하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음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그는 요시노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도일 10년 만인 1960년 동경스윙오케스트라를 인솔해 공연을 펼쳤다.
숙명 "1990년" 앨범 앞면
패티김 길옥윤 결혼기념 앨범 앞면
1962년 현미에게 <내 사랑아>를 주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1966년 완전히 귀국한 길옥윤은 패티김에게 <서울의 찬가>, <사월이 가면>을 만들어 주며 패티김-길옥윤의 시대를 알렸다. 가수와 작곡가의 관계에서 부부의 연까지 맺은 둘은 이혼할 때까지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빛과 그림자>, <사랑이라는 두 글자>, <사랑이여 다시 한 번>, <이별> 등의 큰 히트곡을 남겼다. 이혼한 후에도 두 사람은 1974년 제4회 동경국제가요제에 출전해 <사랑은 영원히>로 3위에 수상하며 명콤비의 존재 가치를 알렸다.
혜은이 독집앨범 / 혜은이 고운노래모음 앨범 앞면
패티김과 이별한 뒤에는 또 다른 페르소나 혜은이와 함께 <당신을 모르실 거야>, <제3한강교>, <당신만을 사랑해> 등을 히트시켰다. 이밖에 <별들에게 물어봐>(이시스터즈), <내일은 해가 뜬다>(쟈니리), <나성에 가면>(세샘트리오) 등의 노래가 큰 사랑을 받았다. 특이하게 마셜 제도 공화국의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동시대에 활동한 박춘석이 트로트 형식의 곡을 많이 만들었다면 길옥윤은 철저히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세련된 곡을 만들었고 패티김과 혜은이는 이를 고급스럽게 잘 소화했다. 길옥윤은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훈 받았고, 서울 세종로 공원에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봉조
1931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진주중학교 재학 시절 음악 교사이자 가요 작곡가였던 이재호에게 음악을 배웠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뒤 색소폰 연주자이자 밴드 마스터 엄토미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봉조 악단을 만들어 미8군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고, 거기에서 만난 가수 현미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또한 최희준, 차중락, 정훈희, 김추자 등 60~70년대의 인기가수들에게 곡을 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맨발로 뛰어라 / 월급봉투 / 처녀도시 앨범 앞면
현미 힛트 씨리즈 앨범 앞면
트로트가 주를 이루던 당시 가요계에서 팝과 재즈의 영향을 받은 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가요의 영역을 넓혔다. 특히 현미와 정훈희에게 준 곡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고 있다. 훗날 결혼까지 하게 되는 현미와는 <떠날 때는 말없이>, <보고 싶은 얼굴> 등 무수한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정훈희가 부른 그의 창작곡인 <안개>는 국내 최초로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웠고 <무인도>, <꽃밭에서>는 칠레국제가요제에 입상하며 국제적으로 성과를 남겼다. < 웃는 얼굴 다정해도>(윤복희), <맨발의 청춘>, <종점>(이상 최희준), <사랑의 종말>, <철 없는 아내>(이상 차중락) 등도 인기를 얻었다.
1980~1990년대
이호준
이호준의 시작은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였다. 1970년대 동방의 빛의 건반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0년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는 동시에 당대 최고의 작·편곡가로 활동했다. 그의 특징은 장르의 다양성이었다.
THE ART OF JAZZ PIANO 앨범 앞면
인디안 인형처럼(DJ REMIX) 앨범 앞면
조용필의 히트곡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와 <친구여> 등을 만든 그는 <그녀에게 전해주오>(소방차), <토요일은 밤이 좋아>(김종찬), <인디언 인형처럼>(나미) 같은 댄스곡을 만드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또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박미경)이나 <문밖에 있는 그대>(박강성)처럼 소울풍의 노래부터 성인 취향의 발라드까지 전 장르에 걸쳐 시대를 대표할 만한 노래들을 작곡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뿐 아니라 편곡가로도 유명해 비슷한 위치에서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김명곤과 1980년대 주류 가요계를 양분했다.
하광훈
다섯손가락의 멤버로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를 탈퇴하고 군 전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작곡가 활동을 시작했다. 변진섭의 데뷔곡 <홀로 된다는 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작곡가 하광훈의 주가도 함께 오르기 시작했다.
변진섭2 앨범 앞면
이어 <너에게로 또 다시>, <숙녀에게>,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하광훈은 변진섭의 전속 작곡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가수에게도 곡을 주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까지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하광훈 인물사진
장혜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민우의 <사랑일 뿐이야>, <휴식 같은 친구>로 최정상의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조관우의 <늪>을 비롯해 1, 2집을 프로듀싱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1990년대 말에는 김범수를 발굴해 <약속>을 히트시키며 여전한 감각을 뽐냈다. 그는 MBC <나는 가수다>에 편곡가·프로듀서로 참여해 임재범이 부른 남진의 <빈잔>과 윤복희의 <여러분>을 편곡하기도 했다. <나는 가수다>에 그가 만든 노래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 건 물론이다.
김형석
196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작곡과에 들어가 클래식을 공부했지만 학교 선배인 유재하 1집을 듣고 대중음악 작곡가의 길을 택했다. 이런 클래식한 음악배경과 아름다운 선율이 김형석 음악의 핵심이 됐다. 특히 발라드 작곡에 큰 강점을 보여 서정적인 발라드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는데 다양한 스타일의 가수들과 작업하면서도 서정미를 각각의 목소리로 새겨놓았다.
LIM CHANG JUNG'S 3rd SOLO ALBUM / Again 앨범 앞면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처럼 스테디셀러가 있는가 하면 신승훈의 〈I Believe〉,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처럼 큰 사랑을 받는 노래가 있다. 이밖에도 <날 위한 이별>(김혜림), <결혼해줘>(임창정), <아름다운 이별>(김건모), <편지할게요>(박정현), <하늘만 허락한 사랑>(엄정화) 등 많은 노래들이 여전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또 유승준의 <나나나>처럼 가끔씩은 댄스곡도 히트시켰다. 이런 활약 덕분에 KBS, MBC, SBS 지상파 방송3사의 연말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작곡상을 받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윤일상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때 저작권료 랭킹을 매길 때 순위권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다작을 하면서도 오랜 기간 정상권에 머문 작곡가이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클래식을 공부했지만 비틀스로 인해 대중음악에도 빠져들었다. 비틀스 음악의 다양성만큼 윤일상이 만든 노래들의 범위도 다양했다. 댄스 음악을 많이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발라드와 록 음악까지 소화했다. 특히 쿨과 터보 대부분의 히트곡을 만들며 좋은 호흡을 보였다.
TURBO2 / New Sensation 앨범 앞면
<운명>, <해변의 여인>, <애상>, <변명>(이상 쿨), 〈love is〉, <회상>, <애인이 생겼어요>, 〈cyber love〉(이상 터보)처럼 오랜 기간 한 팀의 음악을 전담하면서도 늘 새로운 느낌의 곡을 제공했다. < 보고싶다>(김범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김건모), <아무 것도 몰라요>, 〈steal away〉(이상 박지윤), <정>(영턱스 클럽>, <애인 있어요>(이은미), <오늘도 난>(이승철) 등 장르와 연령대를 넘나드는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왔다. 최근엔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히트시키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또 영화 <안시성>의 영화음악을 맡아 영역을 더 넓혀나가고 있다.
2000년대~
박근태
박근태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는 작곡가이다. 룰라의 <백일째 만남>을 만들며 1994년 작곡가로 데뷔한 그는 2000년대 들어서 이선희 같은 대선배 가수부터 아이돌 그룹까지 연령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곡을 제공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많은 2000년대 작곡가들이 한 번 히트한 뒤 자기복제를 반복하며 자연스레 밀려났다면 그는 발라드, 댄스, R&B,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Roots Of Reggae 앨범 앞면
젝스키스의 <폼생폼사>, 에코의 <행복한 나를> 등을 만들며 주목 받았던 그는 <timeless>(SG 워너비), <정말 사랑했을까>(브라운 아이드 소울), <친구여>(조PD&인순이), <아직 못다한 이야기>(김진표), <사랑안해>(백지영),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성시경), <유혹의 소나타>(아이비), <시간이 흐른 뒤>(윤미래), <니가 참 좋아>, <superstar>(이상 쥬얼리) 등 장르 폭과 다양성이 느껴지는 노래들을 오랜 시간동안 침체기 없이 히트시켰다. 가장 오래 롱런한 작곡가를 꼽을 때 박근태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다.
테디
테디는 힙합 그룹 원타임의 래퍼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원타임 해체 뒤 소속사였던 YG 엔터테인먼트의 작곡가·프로듀서로 변신해 수많은 케이팝 히트곡을 만들었다. 힙합과 알앤비 등 블랙뮤직에 기반한 곡들이라는 점, 그리고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에게만 곡을 줘야 한다는 한계와 제약이 있었지만 그런 제약 안에서도 많은 인기곡을 만들며 케이팝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점점 분업화돼가고 있는 케이팝 작업 환경 때문에 공동작곡 형식이 많지만 그 중심에 테디가 있는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