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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영혼의 호소, 나를 버리지 말아줘
국민가수 심수봉 씨가 오래전에 TV에 출연하여 고백한 내용이 있다.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를 않고 있었는데 건강했을 때는 그렇게 인품이 고상하고 자상한 분이었는데 치매에 걸리고 나서는 아주 추한 모습으로 변하여 어머니가 점점 미워지고 짜증나서 자주 화를 냈다고 한다. 평소에 너무나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하던 어머니였는데 자신도 모르게 치매 걸린 어머니를 냉대하고 마음의 짐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어쩌면 병든 어머니가 귀찮게 느껴져 빨리 저세상으로 가기를 기다리는 심수봉 씨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차려준 밥상을 뒤엎고 음식들을 쏟는 추한 모습의 어머니에 대해 심한 거부감이 생기고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격분하며 심수봉 씨는 이제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바뀌게 되었고 병든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셔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노인들이 생각할 때의 양로원이란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나 장소라기보다 죽을 때까지 보살피는 현대판 고려장이란 인식을 더 깊게 가지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노인의 심정도 양로원 신세가 되는 걸 반기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의 심정을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인내심이 아무리 강한 효녀라도 감당할 인내심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심을 하고 있을 때 뜻밖에 어머니의 영혼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고생시켜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를 버리지 말아줘. 양로원은 싫어. 난 네 곁에서 마지막 인생을 마감하고 싶구나.." 영혼이 속삭이는 그 말을 듣고 심수봉 씨는 어머니를 붙들고 한없이 오열하면서 약속했다고 한다. "어머니, 당신을 버리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어머니 사랑해요. 어머니 미안해요"
물론 자기 딸들도 모르고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도 못하는 어머니였지만 심수봉씨의 약속에 왠일인지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고 그 후로는 심수봉씨는 틈날 때마다 어머니를 향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사람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의 치매 증세는 기적처럼 좋아져 결국 정상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TV에서 고백하던 심수봉씨의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들 영혼도 스스로 흔들리고 있을 때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타이를 것이다. '좌절하지 마. 현실 앞에 굴복하지 마. 누가 뭐래도 넌 마지막까지 네 목표를 향해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해.. 너 자신을 위해 인류를 위해 네 꿈을 포기하지 말아 줘. 부디 내 영혼을 버리지 말아 줘.' 이런 들리지 않는 영혼의 부탁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갈 것이다. 사람들아, 모든 영혼의 주인들아 이제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무엇을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하는지 그래서 바르게 자각하라고 우리들 영혼이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자. 우리들 영혼은 얼마나 쉬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 애원하고 타이르며 방황하는 삶을 추스르기에 바쁘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살다 가려고 아무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사회 관습에 몸을 맡기고 정처 없는 인생을 살다가 의미 없는 삶을 마감 지으려고 우리들 영혼이 험난한 세상을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품氣禀으로 이뤄져 있다. 육신의 기품 속에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영혼이 담겨있다. 기품에 의해 조종되는 힘이 의식이고 영혼에 의해 조종되는 힘이 양심과 이성이다. 양심과 이성이 인간 본질의 본성이다. 사람의 의식은 두 가지 힘이 작용하는데 한 의식은 짐승의 원초적 오욕칠정이 지배하는 이드라는 에고이고 한 의식은 깨달음으로 가꿔진 지성적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들은 겉으로 드리나는 의식과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이 있다.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과 생각과 감정과 기억들이 모아져 정신을 이루고 그 정신적 바탕에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정신이 마음이고 마음이 정신이며 생각이 마음이 되고 마음이 생각이 되기도 하며 감정에 의해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에 의해 감정이 발생한다. 마음 생각 기억 감정 의식 성깔들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이 결과가 아니라 서로 뒤범벅이 되어서 그것이 되고 그것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 몸의 정신은 주최하는 의식의 대상에 따라 흔들린다 . 감정이 흔들면 감정에 따라가고 생각이 흔들면 사유의 힘으로 조종되며 기억이 흔들면 기억의 방향대로 정신이 작용한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사람의 정신이 복잡한 구조이고 사람의 마음이 복잡한 사슬이다. 사람의 감정 성깔 기억 의식 사유의 정신이란 힘이 마음 바탕에서 일어남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잘하면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고 정신을 바로 세우면 영혼의 자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영혼은 늘 정신이 바로 서기를 고대한다.
마음을 잘못 쓰면 짐승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 마음을 잘 쓰면 우주적 삶을 살아가게 한다. 영혼이 꿈꾸는 삶은 짐승의 삶이 아니라 우주적 삶이다. 우주적 삶이란 큰 그릇을 가진 대인배의 삶이요. 짐승의 삶이란 작은 그릇으로 살아가는 소인배의 삶이다. 원래 인류의 조상은 네안데르탈인으로 그 몸속에 지성이 머물지 못했던 원시 야만인들이었다. 원시 야만인들은 아직 대뇌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 같은 지성과 이성이 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의식들은 거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짐승의 야만성이 야만성으로만 머물 때는 차라리 그 의식이 순수하다. 짐승들은 배고플 때만 약자를 침범한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사나운 것 같아도 배가 부르면 먹잇감이 눈앞에서 서성거려도 장난만 치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짐승들은 육식동물이든 초식동물이든 배고프면 먹이를 찾고 배부르면 쉰다. 배가 불러도 욕심껏 먹이를 찾고 모으는 일이 없다. 그래서 동물들은 사람처럼 한을 만들거나 원을 쌓지 않는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쓸 것이 남아돌아도 더 모으려고 애쓴다. 집이 작아서 늘리려고 애쓰지 않고 욕심 때문에 그렇다. 작은 차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과시하려고 큰 차가 필요하다.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욕 때문에 더 가지려 한다. 대기업은 골목상권의 구멍가게까지 욕심내고 큰 대륙 땅을 소유한 중국은 남태평양의 작은 바위섬 하나를 욕심내어 상대국과 다툰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있는 자들은 없는 자의 몫까지 챙기려 한다. 이러한 탐욕과 야망의 악한 의식들로 인하여 인류 사회는 끝없는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고 원과 한이 쌓여 척신들의 난장판 속에 인류의 역사가 흘러간다.
그렇지만 마지막 가는 모습은 모두가 빈손이다. 인생이란 결국 아무리 애써 모은 무엇도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둔 채 몸뚱이 하나만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는 운명이다. 욕심을 부릴 때는 천년 만년 살 것 같아도 한 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릴 바엔 가진 것을 없는 자들과 나눠 쓰면 얼마나 덕스러운 삶이 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칭송을 듣는 이름으로 남을 수 있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죽은 후에 욕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누가 알랴 싶어도 영혼은 듣고 영혼은 알 것인데 뒤늦게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삶 어찌하랴. 필자가 젊어서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잘나가던 회사가 잠시 어려워진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 불가피하게 사원들에게 월급이 밀리는 난처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전 사원들은 어려워진 회사를 일으키려고 모두가 일심으로 애사심을 불태우고 있었고 조금만 참으면 밀린 월급을 지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한 사원이 노동청에 밀린 월급에 대한 문제를 삼고 관할 기관에 고발을 했다. 노동청에 고발당한 회사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고 어렵던 회사는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러자 회사를 고발한 사원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애사심에 불타던 사원들은 회사를 고발한 그 사원에 대해 일제히 비난을 했고 생을 마감한 후에도 동징은커녕 비난의 목소리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죽은 사원의 영혼이 사원들의 꿈에 나타나 '잘못했으니 제발 비난을 멈춰 달라. 너무 괴롭다'고 애원하는 꿈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었다. 결국 죽은 영혼이라도 살아있는 자들의 비난이 아프고 슬프다는 교훈을 그때 처음으로 필자는 느낄 수 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사람이 사후라도 좋은 칭찬을 듣기 좋아하고 죽은 영혼이라도 악담이 싫다는 교훈일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들 영혼이 육신을 항해 갈망하는 바가 무엇일까? 큰 재산을 모으고 큰 권력과 명예를 얻었어도 한 편의 마음속에서 늘 허전하고 찬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오르면 천하를 얻은 기분일 것 같고 모을 만큼 모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아도 아무리 큰 권력을 얻어도 초조함은 떠나지 않고, 아무리 큰 재산을 모아도 불안함은 떨쳐버릴 수 없으니, 그 영혼이 갈망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고 따로 있음에 어찌하랴. 요즈음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신세를 보면 측은 하다 못해 동정심이 들 때가 있다. 그 자리에 오를 때는 온갖 권모술수를 쓰고 세상을 속이고 국민들을 속여서 권좌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떠날 때까지 잡음은 그치지 않고 떠난 후에는 마음 편히 하루를 지내지 못하니, 그래도 그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화자찬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운명을 육신의 의식은 모르지만 영혼은 안다. 육신의 의식은 과거,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서 자유롭지 말하지만 영혼은 시공을 초위한 존재로서 백 년 후의 일이든 천 년 후의 일이든 손바닥처럼 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미래를 알기 때문에 영혼은 육신의 의식을 향해서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분하며 될 일은 기뻐하고 안 될 일은 만류한다.
영혼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양심과 이성적 판단을 내려주며 영혼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정의롭지 못한 일은 양심이 아파하고 순리가 아니면 이성적 의식이 불편해한다 . 영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지성 이성 양심이란 선의를 동원하여 마지막 결단을 종용한다. 우리들 영혼은 지어지선을 갈구한다. 지극한 선에 머무는 실천이 지어지선이다. 대학에 이르기를 大鶴之道는 在明明德이라 했다. 대학지도란 깨달음의 완성이다. 재명명덕이란 밝음의 덕을 밝힘이요, 그 우주 본질의 이치가 명덕인데 명덕을 밝힘을 止於至善이라 한다. 지극한 선에 머무름이 지어지선이며 결국 깨달음의 완성을 이루고 명덕을 밝힌 후에 지극한 선에 머무를 수 있으니 깨달음의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지어지선을 추구함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영혼은 언제나 정의와 지선을 갈구한다. 명덕과 지선이 아니면 영혼의 목적을 이를 수 없다. 영혼이 세상을 찾아온 목적은 명덕과 정의와 지선을 실천하여 영혼의 파워를 증강시키고 더욱 신령스러움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명덕과 정의와 지선의 실천은커녕 짐승의 원초적 본능에 편승한 지각적 의식으로 탐욕과 야망과 집착에만 열중하는 낮은 차원의 저속한 삶으로 타락해 갈 때 그 영혼의 절망과 세상을 찾아온 후회는 막심할 것이다. 영혼이 편해져야 마음이 편해진다. 영혼이 섭섭하면 마음의 분란이 일어난다. 마음의 분란이 일어나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나며 의욕이 떨어진다. 마음이 편해야 심신이 편하고 심신이 편해야 불로장생한다.
우리 몸이 병드는 건 먼저 마음에 병이 생기고 따라서 육신이 병들기 시작한다. 마음이 병들면 먼저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일에 대한 열망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꺾인다. 삶의 의욕이 꺾이면서 왕성하던 신체적 신진대사에 부조화가 발생한다. 육체적 신진대사 부조화가 바로 병이다. 그 신진대사의 부조화가 발생한 근원이 마음이니 마음을 편히 다스리지 않고서 우리 몸의 병은 치유될 수 없다. 그래서 중병에 걸린 환자가 마지막 찾아가는 곳이 자연이다. 욕심과 타락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 자연의 숨결 속에서 저절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들고 자연의 싱그러운 기운이 몸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시한부 생명이라는 중병까지도 완치된다. 영혼이 편안해지면 누구나 불로장생한다 영혼이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늘 양심과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야 한다. 양심의 소리란 마음의 울림이다. 마음이 편안한 울림으로 다가오면 영혼의 즐거움이다. 마음이 불편한 울림으로 다가오면 영혼의 불편함이다. 영혼의 즐거움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영혼의 불편함은 심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초래한다. 심신의 초조함과 불안이 쌓여 몸속에서 암이 되고 중병이 된다. 불로장생하고 누구든지 신선의 삶을 꿈꾼다면 영혼의 기쁨을 찾아야 할 것이다. 멀리 있는 신을 잘 받들어야 복을 누리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좌정하고 있는 영혼을 받들어야 복을 누린다. 영혼은 신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이치를 알고 있는 영혼과 소통하면 저절로 지혜가 생겨나고 영감이 솟아난다. 지혜와 영감이 복 받는 비결이다.
영혼이 편안하면 몸도 건강하지만 하는 일도 잘 풀린다. 심사가 꼬이면 되던 일도 안 된다. 삶이 꼬이고 일이 꼬이는 건 영혼이 불편하여 심사가 꼬임이다. 삶이 꼬이고 일이 꼬일 때 꼬인 심사부터 풀어보자. 꼬인 심사가 풀리면 저절로 일이 풀리고 주변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상사는 자신의 심사와 연관되어 있다. 주변에서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병든 기억들의 작용이다. 심사가 꼬이면 무의식 공간에서 병든 기억들이 일어난다. 병든 기억들이 나쁜 파장을 만들어 주변을 악화시킨다. 주변의 환경들이 악화되면 온갖 불길한 징조들이 발생한다. 우주는 사사법계라 하.여 풀 잎 하나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고 풀 잎 하나의 움직임에도 그 파동으로 우주를 움직인다. 하물며 사람의 의식은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켜 우주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좋은 의식을 가졌다면 주변에서 좋은 일들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나쁜 의식을 가졌다면 주변에서 나쁜 일들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흔히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면 그 책임자가 나서서 자신의 부덕한 소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사과하며 자신의 부덕함에 모든 책임을 돌린다. 겉치레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조직단체의 책임자가 어떤 의식이 있고 어떤 덕을 갖추었느냐에 따라 그 조직에 불상사도 생겨날 수 있고 길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마음은 파동을 가지고 주변과 우주로 퍼져간다. 말은 일파만파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마음의 파동 또한 마찬가지다. 흔히 영적인 교감을 텔레파시라고 한다. 실제적인 말은 주고받지는 않더라도 영적인 교감을 통해 상대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힘을 텔레파시라고 한다. 텔레파시 의사소통은 고도로 훈련된 영적 기능자라든가 초감각적 능력을 보유한 자들이 이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가끔 텔레파시 현상을 경험할 때가 있다.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자기가 하려던 말을 상대가 먼저 꺼내는 경우가 있다. 한참 누군가에 대해서 칭찬이든 험담이든 하고 있을 때 그 당사자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 때는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주 겪는 일들이다.
우리 영혼은 우리들 현재와 미레에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며 스스로의 육감과 예감을 통해 간접적 의사를 전달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영적인 예감을 무시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는 치밀함을 발휘한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영적 교감과 잘 소통한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 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 함부로 들떠서 행동하지 않고 항상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남의 말에 함부로 부화뇌동하거나 거짓 속임수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순수한 사람들이 남에게 잘 속는다고 하지만 사기 기질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사기당하지 않는다. 사기를 당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속에도 사기 기질이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사기꾼도 조심해야 하지만 사기를 당한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다시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당한 표본대로 사기 치려는 심리가 있다. 마음이 깨끗하면 늘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마음이 안정되면 집중력이 높아지며 집중력이 높으면 통찰력과 관조하는 힘이 강해진다. 항상 집중력을 발휘하여 내면과의 통찰이 잘 이뤄지면 영적 교감과 소통하는 힘이 늘어난다. 영적 교감이 내면의 소리이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 인생을 실패하지 않는다. 영혼을 부정한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겠지만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래 네안데르탈인의 원시 야만인들의 몸속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짐승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겐 사람의 몸속에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말도 맞다. 짐승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겐 이성과 양심의 작용이 불필요하며 그래서 원시 야만인들의 생애는 천성인야의 삶과 무관한 관계이므로 짐승의 혼으로만 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혼이 갈구하는 삶은 지어지선이다. 지극한 선에 머물러 천성인야의 본성을 회복한 영혼들이 불로불사 신선의 몸으로 불생불멸 오고 감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삶과 죽음의 차이란 육신 하나 걸치고 있으면 살아있음이요 육신 하나 벗으면 죽음이라고 한다. 육신과 영혼이 짝을 이룰 때는 무한한 창조가 가능하지만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면 창조적 삶이 무산된다. 그래서 모든 영혼의 꿈은 육신과 더불어 불로불사하며 창조적인 삶을 이어가기를 소망한다. 영혼은 이 세상을 찾아와 육신을 얻음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잡은 셈이다. 영혼이 세상을 찾아오고 싶다고 와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 때나 영혼이 원하는 인연을 찾아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전생에 쌓은 적선공덕이 아니라면 지금의 인연을 찾아 새로운 육신으로 탄생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찾아온 영혼들은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가릴 것이 아니라 각자 세상과 맺어진 인연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인연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적 삶을 펼쳐가야 한다. 세상을 찾아와 좋은 인연의 부모를 만남은 전생에 쌓은 적선공덕 만큼이요 세상을 찾아와 나쁜 인연의 부모를 만남은 전생에 쌓은 적선공덕 만큼이다. 전생의 적선공덕이 높았으면 좋은 인연의 부모를 만났을 것이요 전생의 적선공덕이 낮았으면 나쁜 인연의 부모를 만났을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영혼들도 역시 전생의 적선공덕에 더하여 새로운 적선공덕을 높여 감이요. 어떤 영혼들은 세상을 찾아와 적선공덕이 높아지고 어떤 영혼들은 세상을 찾아와 적선공덕을 까먹고 있으니 영혼이 갈망하는 삶이란 오매불망 적선무량공덕인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삶이 적선공덕을 실천하면 영혼이 행복하고 육신의 삶이 적선공덕을 무너뜨리민 영혼이 슬퍼하는 것이다.
어떤 영혼이라도 미래에 새롭게 맞이할 삶은 현재 쌓아가는 적선무량공덕 만큼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은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적선공덕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일이라도 재물을 얻고 권세를 얻고 명에를 얻는 일이라도 적선공덕을 쌓으면 유익한 일이요. 적선공덕을 잃으면 유해한 일이다. 그래서 인생은 아무 자리나 주어지는 대로 서 있지 못하고 설자리와 서서는 안 될 자리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길이 많이 있지만 크게는 성인의 길이 있고 군자의 길이 있고 대인의 길이 있다. 성인은 고난 속에서 일어나 인류에게 구원의 길로 이끄는 스승이다. 군자는 학문과 덕행으로 몸을 닦아 세상을 바로 이끄는 지도자다. 대인은 우주적 큰 정신을 발휘하여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자이다. 평범한 삶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할 바를 다하고 악인의 길은 인류의 행복에 반하는 삼을 살며 소인배의 길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축생의 삶을 산다. 어느 삶이라도 타인이 강제하는 바는 없으며 악인과 축생의 삶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귀가 막혀 있고 이미 양심과 이성이 마비되어 영혼의 설자리조차 사라져 축생의 혼만이 그 삶을 지배하게 된다. 영혼을 잃고 축생의 혼으로 전락함은 영혼의 사망선고와 다름없다. 육신의 죽음은 일시적 사망이요 영혼의 사망은 영원한 사망이다. 사람은, 육신의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사망을 두려워해야 한다 비결서에 마지막 심판의 날을 예고했고 적선무량공덕을 쌓은 영혼들은 그 조상들까지 부활하여 자손을 찾아 춤을 추며 영광을 누린다 하였고 적악무덕을 쌓은 영혼들은 그 조상의 영혼들까지도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허공에 날려 보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보는 영혼들은 적악무덕의 마지막 습관이 두려운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들이 모두 재물을모아 부자가될 수 없고 출세하여 권세와 명예를 얻을 수는 없어도 지어지선을 실천하여 적선공덕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적선공덕은 부자와도 상관없고 신분과도 상관없다. 가난한 자도 성통공완通功完하여 인류의 스승으로 적선이 가능하고 신분이 낮은 자도 훌륭한 깨달음에 이르러 인류에게 봉사하며 군자의 길을 걷고 제세이화 홍익인간정신을 펼쳐갈 수 있다.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신분이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누구나 이를 수 있는 목표가 성통공완 군자의 길이요 성인의 길이요 적선무량공덕의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공평하고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 영혼의 평안을 누리지 아니하고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이 각자 성통공완을 실천하고 학문의 도를 실천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지에 이르러 성의정심誠意正沈으로 영혼의 평화와 태평성대를 찾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영화를 누릴 때 그 삶이 평안하지 않고 영혼의 평화를 누릴 때 그 삶이 평안함이니 육신의 영화는 잠깐이요 영혼의 평화는 영원함인 것이다. 잘난 자도 못난 자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누구나 이룰 수 있음이 성통공완이요 군자의 길이요 성인의 길 스승의 길을 걷고 적선무량공덕을 지을 수 있으니 사람들아 이제 재물과 명예를 얻으려 애쓰지 말고 적선무량공덕으로 육신의 영화가 아닌 영혼의 영화를 위해 살자!
마음의 향기香氣를 찾아서 2권 중
도선당 저
첫댓글 눈에보이는건 허상이요
보이지 않는것이 진짜
보이는것은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 움직이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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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보고 실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