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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김옥균의 집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인 홍영식의 집이 있었다. 홍영식의 집은 한성부 북부 가회방에 있었는데, 현재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입구였다. 그의 집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있었으며, 대대로 명문거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홍영식 집 바로 옆에는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안 백송이 서 있는 부근이다. 박규수는 김옥균의 과거 시험 시관이었고, 박영효의 일가였으며 홍영식의 이웃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박규수 집 사랑에는 박영효ㆍ박영교 형제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같은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서광범 집은 박규수 집에서 바로 아래쪽 지근거리에 있었는데, 안동별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었다. 현재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경계 지대나 덕성여고 남쪽 일대로 생각된다.
서광범 집에서 경복궁 광화문과 창덕궁 돈화문을 잇는 길(현 율곡로)을 건너 조금 내려가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 집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 오순덕계 교동에 있었다. 현재 종로구 경운동 88번지로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이다. - 69쪽
김옥균의 생부와 양부는 모두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후 양아버지 김병기는 파양을 단행하여 김옥균과 양자 관계를 끊어 자신과 집안의 살길을 도모했다. 하지만 친아버지 김병태는 아들의 대역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천안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김독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암삵당한 두 달 뒤인 1894년 4월(양5월) 긴급히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애로웠던 김옥균의 친어머니는 갑신정변 후 남편이 체포될 때 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또 진사였던 동생 김각균은 칠곡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대구 감옥에 갇혔다. 김각균이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감옥에서 탈주하여 동학당에 가입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개화당이 정권을 잡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1908년 죽은 자들의 죄명을 벗겨줅 때 그의 이름이 명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구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 131~132쪽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ㆍ서재필 네 사람은 숙도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행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 이러한 처사에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
이규완 평소의 태도는 동지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조목조목 을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적 어도 계급 사상의 폐단을 바로잡고, 널리 인재 등용을 포방한 공들이 망명한 우리 동 지들에 대하여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김옥균 외 가장 신뢰하는 것은 제군들입니다. 정이 형제와 같아 후의에 맡겨 그런 것이지 결 코 가볍게 여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동지들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당시 이규완은 김옥균, 박영효 등을 ‘수령파’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의사파’라고 불렀다. 혁명적 인민평등권을 주장하던 그들도 현실 생활에 서는 신분의 굴레와 관행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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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오늘, 김옥균의 삶의 의미는?
“역사가 부른 혁명가, 시대가 버린 이단아! 인간 김옥균을 새로 읽는다”
역사적 전환기, 전통과 근대라는 이중의 부조리와 모순이 조선 사회를 짓누르던 시대. 이 책은 김옥균의 뒤에는 유교국가 조선이 있었고, 앞에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세계가 있었다는 시대변화를 중요한 배경으로 삼아 문제적 인간 김옥균을 새로이 조명한다.
전통사회에서 근현대 사회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상놈(常漢)이 시민사회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주목해 온 역사학자 박은숙은, ‘풍운아’의 이미지로 굳어진 채 애국과 매국의 양 극단의 평가를 받아온 김옥균에게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 당대 최고의 문벌귀족이자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고위관료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조선의 비극에 임해 옛 질서와 새 질서의 연결을 위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약점이야 많았지만 현명한 선택을 내세우며 얍삽하게 시세를 저울질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비록 실패하였다고는 하나 그 차이를 중시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오늘날 재산과 학력을 가진 ‘지도층’이 스스로를 ‘이기적 존재’로만 규정하며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풍조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와 있지 않은가? 김옥균의 삶은 부끄러움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은 이 시대의 ‘지도층’과 우리 자신에게 보다 더 깊은 성찰과 행동을 촉구하는 듯하다.
김옥균의 생애사와 조선의 비극
“김옥균이 살아 움직였던 동선과 공간구조를 따라 걷는다”
우리 역사에서 김옥균만큼 안팎을 넘나들며 나라를 뒤흔든 혁명가적인 인물이 있었을까?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서 그처럼 이슈가 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살아생전 행적뿐만 아니라 극적인 죽음까지도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풍운아’의 이미지로 굳어진 채 여전히 풍문 속에 떠돌 뿐이었다. 박은숙의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는 아동서를 제외하면 학계와 출판계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나온 ‘전기, 평전’이라는 사실은 의외이며, 우리의 역사인식의 허점이 어떠한지를 알려준다.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2005), <시장의 역사>(역사비평사, 2008), <추안급국안 중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ㆍ진술 기록》(2009, 아세아문화사) 등을 써온 박은숙 박사는 다음의 주안점을 가지고 전환기 인물의 특성을 포착하면서 김옥균의 생애사와 조선의 비극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1) 김옥균의 생애사를 처음으로 복원하였다. 성장기와 출세한 후의 관료생활을 물론이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기를 상세히 밝혀낸다. 망명 당시 동지들 사이의 불신과 흩어진 내막, 김옥균 암살을 노리는 조선 권력집단과의 관계,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로 이어지는 유배, 그리고 상하이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삼국의 함수관계 속에서 고찰한다.
(2) 김옥균이 살아 움직였던 동선과 공간구조를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김옥균의 생애사를 조사, 복원하는 데 저자는 마치 빙의가 된 듯이 그를 따라다녔다. 천안의 출생지와 유년의 뜰을 찾았고 특히 개화의 산실 ‘북촌’에 대한 공간 묘사, 46시간의 긴박했던 정변의 길, 귀양지 오가사와라 섬 생활 등 실패한 혁명가의 길을 따라 발로 걷는 과정은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도 인간적인 삶의 냄새를 맡게 한다.
(3) 김옥균과 함께 했으나 역사의 저편에 묻혀버린 행동대원들을 조명한다. 저자는「추안급국안」을 면밀히 검토하는 가운데 김옥균과 갑신정변 관련한 행동대원들을 만난다. 갑신정변은 ‘위로부터’ 개혁을 시도한 사건이었다. ‘위로부터’라는 시각은 정변의 진행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칭 ‘아랫것들’의 이야기를 역사에서 묻어버렸다. 이인종, 김봉균, 신중모, 윤경순, 박제경, 윤영관, 이창규, 이점돌…, 그들은 단순히 정변 주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이 아니었다. 신분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개화 세상과 능력에 따른 출세를 꿈꾸었던 진정한 혁명가들이었다.
저자는 김옥균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골목골목에 배인 절망과 아픔, 고뇌가 느껴져 무심하게 글을 엮어나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옥균이 아팠고 그의 시대가 아팠다고 한다. 김옥균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 그의 무덤이 될 상하이행을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인간 만사 운명’이라는 말로 ‘죽을 때’를 암시했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고 설계했던 그가 왜 결국에는 ‘운명’이라는 말을 했을까? 기존의 거대한 기득권 세력의 바위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깨뜨리지 못한 채 권력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던 쓴 맛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단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왕조 말의 누적된 부패와 구조적 모순, 중국ㆍ일본ㆍ서구 세력의 중층적 침탈에 맞서 서구 열강과 ‘나란히’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애국심과 열정, 불굴의 투혼과 용기, 자신과 주변의 희생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죽는 순간까지 꿈꾸었던 조선의 독립과 개화는 김옥균에게 너무나 무겁고 혹독한 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조선 문제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시시포스의 바위와 같은 숙명이었다. 결국 김옥균은 조선이라는 숙명의 굴레에 이리저리 얽혀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 머리말 중에서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왜 갑신정변을 일으켰을까?
“옛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연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등은 당대 최고의 문벌 귀족으로 고위 관료 또는 기대주였다. 구질서 아래에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목숨을 걸고 위험천만한 ‘모반 대역’을 감행했을까? 갑신 5적(賊)이라 불리던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의 집은 모두 북촌에 위치해 있었다.
김옥균의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박영효 집까지가 1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그 사이에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박규수는 김옥균의 과거 시험 시관이었고, 박영효의 일가였으며, 홍영식과 서광범이 그의 이웃이었다. 유교국가 조선이란 옛 질서의 상징이던 북촌에서 양반 문벌의 기득권을 축소 또는 폐지할 개혁이 태동한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세계로 향한 안테나를 세우고 근대 사조를 받아들였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정치적으로 절박한 상황이었을까? 당시의 정치적 위기감은 개화당과 민씨 일파 모두 느꼈고, 통치권자인 고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선 내 정치 세력의 위기감은 단순히 내부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일본, 서구 등 외세와 조선의 세력 관계 속에서 파생된 측면이 강했다.
청은 왕권을 위협하며 절대적 힘을 휘둘렀고, 일본은 청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할 기회를 노렸으며, 서구 열강은 자국의 이해를 저울질하기에 바빴다. 망국을 불러온 1차 변수는 제국주의의 외압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내적 조건은 그 종속 변수였다.
김옥균과 개화당은 ‘매사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고종을 더는 믿고 따를 수 없었다. 1884년 무렵 혁명적 방법을 통한 대경장론으로 기울어졌다. 이는 1882년경 실사구시를 주장하며 ‘중흥의 기회’를 기대한 것과 확연히 달랐고, 이는 결국 혁명적 방법을 통한 갑신정변으로 이어졌다. 김옥균은 개화와 독립을 달성하여 조선이 “서양 여러 나라와 동렬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고, 그 희망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급격한 변화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의 다양한 사료 연구는 물론, 그들의 행보를 쫓아가고 함께 고민하면서 이러한 김옥균과 그 동지들의 피할 수 없는 고민과 선택을 생생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김옥균,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려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한 사람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김옥균은 1872년 2월, 김옥균은 당시 22세의 나이로 과거에서 갑과 1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삼사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청요직을 거치면서 중앙 정계의 관료로서 경력을 충분히 쌓아 갔다. 개항 이후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며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나이도 30대에 접어들어 열정과 능력을 겸비한 정객으로서 그 면모를 갖추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김옥균이 유학자로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효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모습, 경연관으로서 왕에게 유교적 덕화(德化)와 치세를 강조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사상과 종교 측면에서도 일반적으로 반(反)유교로 알려진 것과 달리, 유학적 바탕 위에서 불교를 수용하고 기독교 유입도 인정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새로이 조명한다. 특히 절에서 개화를 논하고 정변의 모의훈련을 실시하는 등 친불교적인 입장도 소개한다.
한편 역사상 처음 등장한 동남제도개척사와 포경사를 맡은 일에 주목한다. 김옥균은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해나가는데 바로 울릉도를 개척하는 데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구상으로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도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무렵 김옥균은 「조선여지도」(이 지도는 서북쪽으로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선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고, 동쪽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 땅으로 표시했다.)를 주관하여 만들었다. 저자는 원산 개방 후 일본의 울릉도 침투에 대비하여 우리의 영토, 영해권을 분명히 하려 한 것으로 여긴다.
저자가 이해하는 김옥균의 특징은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려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넓은 도량과 포용력, 유창한 언변, 강렬한 카리스마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준 박규수와 유대치,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힘이 되어준 미국공사 푸트, 목숨을 내놓고 정변에 참여한 이름 없는 동지들과 궁녀ㆍ환관ㆍ승려들, 일편단심 그의 곁을 지킨 유혁로, 머나먼 유배지 태평양 오가사와라 섬까지 따라간 이윤고, 그를 위해 기꺼이 사지로 들어간 백춘배, 위험한 최후의 길을 따라나선 와다 엔지로, 죽어서도 그의 곁에 묻히기를 원한 가이 군지 등 난세에 모진 세월을 살았지만 사람들과 함께해온 그의 행적은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3일 천하, 46시간의 갑신정변의 길을 따가가는 역사공부
https://youtube.com/live/XKrAJhvaCbI
1884년 갑신정변의 추이를 간략히 짚어보자. 김옥균은 4월에 일본에서 돌아왔고, 서광범은 미국에서 5월에, 서재필은 일본에서 6월에 귀국했다. 정변에 돌입한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준비했다. 행동대원 200여 명을 규합하여 모의훈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는 ‘천(天)’을 정변 때 사용할 암호로 정했다.
김옥균과 개화당은 원래 계획대로 1884년 10월 17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파장 무렵인 저녁 9시 정변을 일으켰다. 이틀째(10.18), 정적을 제거하고 개혁 내각을 구성하여, 조보를 통해 도성 내 관료들에게 알렸다. 사흘째(10.19) 밤새워 준비한 정령을 반포한 지 네다섯 시간 만인 오후 3시경 청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퇴각하기 시작한 때가 저녁 7시였다. 갑신정변을 ‘3일 천하’라 이르지만 이틀도 채 안 되는 정확히 46시간 만에 정변은 실패로 끝이 났다.
저자는 이때 발표된 개혁안을 일반적으로 ‘정강(政綱)’이라 부르는데 ‘정령(政令)’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정령이란 왕조의 법제, 또는 국왕의 명령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던 용어이고 김옥균 또한 그런 맥락에서 정령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3일 천하’, 그 긴박했던 46시간의 정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갑신정변의 마치 답사를 하듯이 동선과 공간구조를 드러낸다. 우정국, 일본공사관, 창덕궁 희정당, 경우궁, 계동궁, 창덕궁 관물헌… 그리고 정변의 마지막 고지였던 연경당까지 실제로 이 책을 가지고 정변의 길을 따라 답사를 해보는 이상의 역사공부가 있을까.
고종의 일방적인 추격전, 일본ㆍ중국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비겁한 보복
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의 선택지는 도망과 죽음 사이였다. 이때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따라간 사람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완, 정난교, 신흥희 등 9명이었다. 10월 24일 새벽, 김옥균 일행은 치토세마루를 타고 인천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후 김옥균은 살아서는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던 것이다.
상층의 정변 주도층에게는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는 ‘망명’이라는 카드가 있었지만 하층의 행동대원들에게 망명이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그들에게 주어진 대가는 참혹한 죽음과 가족들의 처절한 희생이었다. 정변 이후 정부에 체포되어 심문받은 자들은 모두 23명이었고 20명이 처형되었으며, 2명은 유배되었고, 나머지 1명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남은 가족은 적물가산, 파가저택에 이어 형벌 또는 ‘자살’이라는 사회적 타살에 내던져졌다.
“신중모는 고종의 어가를 모시고 북묘까지 갔다가 위험한 상황을 눈치재고 도망했으며, 길에서 김봉균과 이희정을 만나 경기도 양근의 사나사라는 절에 이르러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가 붙잡혀왔다. 동대문의 소문난 장사로서 대신들을 살해한 윤경순은 곧바로 도망하여 전라도 곡성 땅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1885년 3월에 경기도 부평으로 올라와 농가에서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또한 군인이었던 낭창관은 전라도 고창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꾸고 고창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하다가 붙잡혔다.”
저자는 김옥균 암살을 노리는 조선의 권력집단과 김옥균의 관계를 상세하게 그린다. 고종은 정변 이후 10여년간 김옥균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뒤쫓았다. 자객의 선정과 파견은 고종의 속내를 잘 아는 민씨 일파가 담당했다. 망명 초기 송병준, 장갑복, 지운영 등의 암살 기도가 이어졌다. 김옥균이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유배되어 있던 1886년부터 1890년까지는 고종의 자객 파견이 뜸했으나 도쿄로 돌아온 이후 다시 자객을 밀파하였다.
1892년 4월, 이일직은 권동수ㆍ권재수 형제와 김태원, 홍종우에게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했다. 결국 김옥균은 이일직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피살되었다. 고종의 일방적인 추격적이었고, 일본ㆍ중국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비겁한 보복이었다.
고종은 왜 그토록 김옥균 암살에 집착했을까? 고종은 갑신정변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역적’처단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반전의 기회를 노린 것이었으며 차후에라도 정계에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했던 것이다.
<저자의 말>
만일 그때 죽지 않았다면, 김옥균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졌을까? 친일파, 독립운동가, 무역상, 방랑 시인, 투기꾼……. 무한 상상이 가능하리라. 많은 사람이 박영효처럼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옥균이 죽을 때와 자리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기질과 모험적 열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 등을 반추해보면, 오히려 만주 벌판의 독립운동가나 세계를 누비는 모험적 무역상, 누군가의 자본을 이용한 광산 경영자 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