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얏트 호텔 체인 창립자 제이 프리츠커(1992~99)의 미망인이며, 남편과 함께 프리츠커 건축상을 제정한 메리언 신디 프리츠커가 101세를 일기로 1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고 일간 시카고 트리뷴이 다음날 보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시카고 최고의 부자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가문의 가모장(matriarch)이며 자선사업가, 문화와 시민 공동체의 얼굴이었다. 건축 애호가이기도 했다. 시카고의 여러 기념비적 건축물, 예를 들어 밀레니엄 파크의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 해럴드 워싱턴 라이브러리 센터 등에 힘을 보탰다. 그녀는 J 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의 이모다. 스트리터빌과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란초 산타페 등 여러 곳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1923년 시카고에서 쿡 카운티 판사 위고 프렌드와 새디 코헨 프렌드 슬하에 메리언 프렌드로 태어났다. 조부모는 동유럽을 탈출한 유대인 이민자였다. 신디가 태어나기 2년 전, 부친이 악명높은 시카고 '블랙 삭스' 재판을 주관하게 됐다. 미국프로야구(MLB) 화이트삭스 전직 선수 8명이 1919년 월드시리즈 승부조작 혐의로 기소됐다가 결국 무죄 방면됐다. 선수들은 평생 야구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
신디는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의 켄우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2001년 잡지 시카고 히스토리 인터뷰를 통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돌아보고 “켄우드는 진짜 그 시절 외곽 그대로였다. 블록마다 아이들 한 무더기가 있었다.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불량배마냥 돌아다녔다. 도로 끝에는 항상 굄나무(sawhorse)가 있어서 우리는 야구와 온갖 게임을 하곤 했다. 그것은 성장하는 데 놀라운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신디는 시카고 대학 부설학교를 거쳐 1943년 하이드 파크 고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1943~45년 아이오와주 그린넬 칼리지를 다녔다. 위스콘신주 이글 리버의 여름별장에 휴가 갔다가 미래의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10대 시절은 아니었다. 둘은 1947년 결혼해 1999년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해로했다.
제이가 목재업을 할 때 프리츠커 가족은 이주했다가 결국 시카고로 돌아와 위네트카에 정착했다. 신디는 그곳에 친정 식구들을 보내 터를 잡게 했고, 1979년 남편이 시카고로 이주했다.
남편 제이와 그의 형제 로버트는 이 때부터 둘의 부친 A N 프리츠커가 일구기 시작한 가문의 재산을 본격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형제는 전후 관광산업의 성장을 예측해 공항 근처 호텔들이 큰 돈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하얏트 호텔 체인을 구축하면서 마르몬 그룹 지주회사는 다양한 사업을 문어발처럼 펼쳐 나갔다. 200개 이상의 기업이 150억 달러 자산의 제국을 건설했다.
1960년대 말 신디는 시카고 자선 활동의 간판이었다. 크리스탈 볼을 매년 개최, 마이클 리스 병원 의학연구소를 위해 모금했다. 1971~78년 그리넬 칼리지 이사회 이사였으며 1981년 콜럼비안 볼을 주도해 박물관 건립 기금 등을 모으며 여러 차례 콜럼비안 볼 공동의장을 지냈다.
1970년대 말 부부는 현존 건축가 중 최고의 인물을 시상하는 프리츠커상을 제정하기로 의기투합해 1979년 초대 수상자 필립 존슨에게 시상했다. 20년 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상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부부의 공헌을 치하했다.
1982년 신디는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초상을 제작하고 싶어하자 수락해 지금 미시간 애버뉴의 시카고체육협회(CAA) 빌딩 루프탑 레스토랑 '신디스'의 난로 위에 걸려 있다. 그녀는 1984년 시카고 공공도서관 위원회에 해럴드 워싱턴 시장 추천으로 들어가 12년 이상 공공도서관 신축 부지 선정, 사우스 지구의 도심 재건축 부지 선정 등을 맡았다.
이렇게 해서 해럴드 워싱턴 라이브러리 센터가 1991년 문을 열었고 오디토리엄은 현재 고인의 이름을 붙여졌고, 도로 건너편 공원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1986년 시카고 공공도서관 재단을 세워 이듬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1989년 신디는 이사회 의장에 올랐다. 책 구입 예산을 늘리고 도서관 운영을 이끌 인재 선발과 44군데 도서관 건축 감리와 리노베이션을 주도했다. 밀레니엄 파크 설계를 유명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맡긴 것도 메리언이었다. 신디와 친정 가족은 게리 밴드 셸(Gehry band shell) 건물에 1500만 달러를 쾌척했다. 그녀는 2004년 트리뷴의 크리스 존스 기자에게 "일단 제안을 했으면, 기꺼이 뒷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제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 사업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잘 승계될 수 있도록 가족끼리 타협하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됐을 때, 후계자들은 새로운 합의서를 만들어 150억 달러의 가족 재산을 매각한 뒤 그 수익을 다시 배분하자고 제안했다. 상속자 중 한 명인 고인의 조카딸 리셀 프리츠커가 새로운 합의에서 배제됐다며 2002년 다른 가족을 제소했다. 자신의 신탁자금이 가족 성원에 의해 약탈당했다며 10억 달러를 달라고 주장했다.
신디는 문서로 된 성명을 발표해 이런 폭로가 “극심한 고통”을 안기며 "우리 남편 제이가 일궈낸 가족의 가치관과 방향을 심각하게 혼돈스럽게” 만들었다고 개탄했다. 2005년 리셀과 오빠 매튜가 각각 5억 달러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소 취하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유족으로는 세 아들 톰과 존, 대니얼과 딸 기기 프리츠커 푸커, 14명의 손주, 13명의 증손주를 남겼다. 다른 딸 낸시는 1972년에 떠나 저하늘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