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말을 타고 시어머니가 말을 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선승 수산성념首山省念은 늘 『법화경』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염법화念法華'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루는 그에게 한 수행승이
찾아와서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수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부기려아가견新婦騎驢阿家牽."
신부가 나귀를 타고 가면 시어머니가 나귀를 끈다는 말이다. 아가阿家는
신부가 시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고, 시아버지는 아옹阿翁이라고 부른다.
당돌하게도 신부는 말 위에 올라타고 시어머니가
그 말을 끌고 간다는 것은 요즈음 상식으로도 있을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신부를 귀여워해 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애틋한 애정이 흐르고 있을 것이며,
이럴 때야말로 말을 탄 신부고 나귀를 끈 시어머니도 모두 남의 눈치에 전혀 개의
치 않고 무심할 수 있다. 이런 무심의 경지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먼 길이라면 한동안 그렇게 가다가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나귀를 타고 신부가
고삐를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나귀가 지친 모습을 보이면 두 사람 다 나귀를
타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이런 것도 자비의 불심이다. 그리고 이런 정겨움 속에
부처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굳이 먼 곳에서 부처를 찾을 필요는 없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다.
시어머니가 볼 때에는 며느리가 못마땅하고,
며느리가 볼 때에는 시어머니의 처사가 지나치다.
며느리는 늘 '만일 내가 자기 친딸이라 생각하면 구박하겠는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든다. 그런 며느리를 친딸이라 생각하면 며느리가 탄
나귀를 시어미니가 끌고 간다 해도 조금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또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가 내 귀여운 딸을 나귀에 태우고 가는 데
무슨 상관이냐' 하고 생각하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립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서로가 남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나의 선어 99 홍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