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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7: 35 유익을 위함이다.
고전 7: 35 유익을 위함이다 -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
독신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를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성도는 주의 일을 위해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
1]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그가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때가 짧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진실한 성도마다 주의 일에 전심전력하기 위하여 독신(獨身)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을 것이다.
2]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올무는 덫이나 올가미, 창애, 함정등을 의미한다.
짐승을 꾀어 잡는 기구의 한 가지로 남을 헐뜯거나 손해를 끼치기 위한 교활한 꾀의 비유이다.
3]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의도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다.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속에서 주를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바울이 의도한 목적이 있었다.
(1) 고린도 교인들의 신실한 신앙과 빛 된 생활을 촉구하고
(2)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3) 구차한 논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4] 바울은 말한다.
(1) 바울의 성경해석
저자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생전에 한 번도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는 그가 어떤 근거로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토록 깊이 있게 전할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그가 여러 번 확인한 대로 기독교인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환상 가운데서 예수를 만났다는 경험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 예수에 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앙 체험이라는 점에서는 부활한 주님을 만난 것이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라는 점에서는 사도들의 예수 전승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전승이 어느 정도의 크기와 깊이에서 다루어졌는지 모른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이런 예수님에 대한 전승을 기억하면서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을 전했으리라 추정한다.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25절에서 바울이 직접 설명하고 있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바울이 직면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의 구체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상황과 다르기에 바울의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에서 오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찾아낼 수는 없다.
성경과 우리 사이를 다리로 이어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해석이다. 문제는 이것을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역량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우리는 바울의 말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기에 바울의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님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으로서 바울은 미혼 남녀와 결혼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
(2) 금욕생활
고전 7장은 결혼 문제에 관한, 특별히 독신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게 구분하면서 고린도 교회 안에 대두된 이 문제를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가능한 대로 그대로 사는 것이 좋다. 결혼한 사람은 이혼할 생각을 하지 말고 결혼하는 것도 좋고, 결혼하지 않는 것도 좋다.
이혼은 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믿지 않는 상대방이 헤어지려고 한다면 헤어져도 좋다. 혼자 살든지, 결혼하든지 중요한 문제는 거룩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데에 있다(15절).
이렇게 살기 위해서 때에 따라서는 혼자 살아도 되고, 결혼해서 살아도 상관없다. 이런 문제는 자기의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되지만, 가능한 대로 현재 혼자 사는 사람은 그냥 혼자 살고, 결혼한 사람은 그런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다(26절). 이런 것이 바울의 논리다.
바울의 가르침을 읽는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다. 바울이 말하려는 근본적인 내용이 도대체 결혼을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한편으로는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하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면 힘드니까 결혼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렇게 불분명하게,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말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바울은 싫은 소리를 들었다.
요즘도 흔히 말하기를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말씀하신 반면에 바울은 약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게 아닌가 하고 비판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기독교를 구분해야만 기독교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비관론이나 금욕주의적 경향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야만 구 체적인 인간의 삶을 강조한 예수님의 구원 복음이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3) 임박한 종말
바울이 결혼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초기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종말론을 아주 철저하게 생각했다는 데에 있다.
바울은 29에서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러분도 알다시피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도들이 자기 재산을 사도들에게 가져와서 함께 나누어 쓰기도 했다. 일종의 공동생활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이런 종말론적인 신앙 안에서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바울은 철저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든지, '때'가 이르렀다는 표현은 바울이 가장 자주 사용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너무나 명백하다. 종말론적이지 않은 사상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신앙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사건에 담겨 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첫 마디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곧 종말이다. 공생애의 중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그 마지막에 대한 징조와 그것에 대한 기다림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종말의 능력 안에서 사셨다. 유대의 랍비로서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는 사실은 종말론적인 시각이 아니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던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문제들을 이런 관점으로 해명했다.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결혼 문제도 그 범주 안에 들어있다.
임박한 종말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인이라면 결혼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매달려 살지는 않는다. 종말이라는 절대적인 사건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 이외의 것들에 매달리지 아니한다.
결혼 문제에 대한 소극적 주장은 바울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 아주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일종의 금욕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을 유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상당 부분이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큰 힘을 얻고 있었던 쾌락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인간의 전체적인 삶을 파괴하는 게 쾌락주의다. 물론 인간의 몸과 정신이 요구하는 쾌감 자체가 악이나 죄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목표로 삼게 되면 결국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금욕적으로 살았지만 결코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금욕주의도 역시 자기에게서 솟아나는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는 것으로 완전한 세계를 성취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다. 쾌락주의는 자기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며, 금욕주의는 자기를 억제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했다.
(4) 자유의 길
종말론적 시각으로 지금 결혼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바울의 관심은 쾌락이냐 금욕이냐, 즉 결혼 유무가 아니라 자유에 있다. 많은 것을 설명한 다음에 결론적으로 제시한 35절 말씀을 보면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데에 그 무게가 있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물론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진리인 예수님을 인식함으로써 우리 기독교인은 자유의 길을 간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자유를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념, 종교, 정치들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고 믿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여러 주장과 다른 차원에서 자유의 근원인가를 해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삶이 불교 신자들보다 더 풍요로운 자유를 확보하고 있는지, 아니면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는 훨씬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또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운지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상당한 경우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가 지난 교회의 역사에서 보듯이 성도들을 광신의 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진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과거를 회상할 것도 없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과연 자유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을까? 미안한 말이지만 제 주변의 많은 기독인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된 일인지 더 폐쇄적으로 되고, 독단적으로 되고, 그야말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얽매이는 일이 많다.
오늘 바울이 "여러분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울의 가르침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을 속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르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속박하는가 하는 그 차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바울은 이 결혼 문제를 율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 결혼 문제에 휩싸여서 정작 마음을 두어야 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바울에게서 중요한 것은 결혼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상당히 관념적인 용어로 기독인들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경험한 그런 자유의 힘을 이 세상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확증해야 하고 확대시켜야 한다. 바울이 결혼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도 역시 기독교인의 자유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설명하려는 데에 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큰 대상이 바로 결혼과 재물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이런 설명은 타당하다. 29-31절 말씀은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결혼과 재물, 이 두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 이외의 모든 것에서도 역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의 특징은 '아닌 것처럼'(호스 메)에 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바울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걸까?
이 말을 기독인들은 이 세상에서 위선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부자인데도 부자가 아닌 것처럼, 가족이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속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냉소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씀도 아니다. 앞에서 우리가 지적한 대로 바울의 가르침에는 결코 금욕주의나 냉소주의를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시각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따라서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바울의 표현도 현재의 삶을 무시하고 흡사 도사처럼, 망하게 될 세상을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3절에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져 가는 세상이라는 표현에 허무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코 허무주의가 아니다. '사라져 간다'는 말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이 세상에 사라져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예외는 단지 하나님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허무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무엇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성취했는지 모르겠지만, 1천년 후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 지구에 나타났던 많은 영웅호걸, 수 많은 제국들이 사라졌다. 우리도 역시 그런 사라짐의 한 점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의 만물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허무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아는 사람은 결코 사라지는 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출세하는 일들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아닌 것처럼' 살아간다. 여기 결혼하신 분들도 가끔은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사십시오. 아내가 옆에서 볼 때 저 사람 제 정신인가, 왜 소 닭 보듯 하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내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볼 때 저 여자 뭐 잘못 먹었나 할 정도로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게 지나치면 싸우게 되거나, 그래도 지나치며 정신병원에 갈지도 모르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닌 것처럼' 살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기독인들이 괴팍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결혼과 재물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다른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명한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세상으로부터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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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롭고 좋은 일만 가득 하시길 소망 합니다.
밝은 미소와 기쁨이 가득 담은 행복에 문을 살포시 열어 봅니다.
향기에 예쁜 하루 행복하게 보내세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