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16일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신명기 26,16-19
복음 마태오 복음 5,43-48
◈ [서울] 사순 제1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전기가 발명되면서 우리는 밤에도 환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집에는 양초가 있었습니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밤을 밝히기 위해서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호롱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전에는 기름에 적신 심지가 밤을
밝혔습니다. 전기가 밤을 밝히는 요즘에도 초가 쓰이는 곳이 있습니다.
예식장, 호텔, 가정에서 향초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당이나 사찰에서 기도할 때 사용합니다. 이번 교육에서 참회 예절이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초를 들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왔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초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와 초는 마음을
차분하게 하였습니다. 성가를 부르면서 성찰하였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환한 전깃불 아래에서는 그렇게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교회는 전례에 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대한 초는
부활성야에 밝히는 ‘부활초’입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축성하면서
그해의 연도를 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며 마침임을
표시합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들고 행진을 하며 성당 안에 있는
교우들은 모두 부활초에서 불을 얻어 초를 밝힙니다.
전례에서 초를 사용하는 이유는 초가 가지는 3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서품식에 초를 드는 것도, 종신서원에 초를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희생의 삶을 위한 다짐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조직
때문에 2000년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2000년 역사를 이어온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초는 아낌없이 자신의 불을 다른 초에 전해줍니다.
그래도 초의 빛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부활초에서 전해지는 불은
성당 안을 환하게 하지만 부활초는 그대로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지만, 물고기와 빵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세포가 자신의
양분을 나누지 못하면 암세포로 변하게 됩니다. 세포는 자신의 양분을
나눌 때 건강한 몸이 됩니다.
셋째는 빛입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작은 촛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촛불이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지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고, 이 빛은 희망을 주고, 이
빛은 지혜가 되었습니다. 풍랑에 휘말리는 배가 멀리 빛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희망의 빛, 사랑의 빛, 믿음의 빛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참회 예식을 밝혀 주었던
초가 완벽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화나는 나를 볼 때 이미
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화나는 나를 볼 때 이미 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복음: 마태오 5,43-48
‘화’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내겐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클레토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장성해 장군이
되어 친구인 알렉산더 대왕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클레토스가
만취해 많은 군사들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모욕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치민 알렉산더 대왕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군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창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가슴을 뚫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절친한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알렉산더
대왕은 자살까지 하려 했습니다. 땅은 정복했으나 정작 자신은
정복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화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내며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화에 사로잡힐 수 없는 곳에 자신을 옮겨놓은
것뿐입니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화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안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바람 불
때는 배를 바다에 안 띄우면 됩니다. 화와 안 좋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탈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일어나는 일이 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나로부터 벗어납니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마치
출렁이는 바다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고 있다가 헬기에 구조되어
하늘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내 안에서
화가 나고 있는데 이젠 그렇게 화나는 내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이렇게 자아와 본래 나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자아를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할 때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로위로 더 올라갈수록 이제 자아에서 화가 올라오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신의
감정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아는 본성적으로 화를 내고 못된 욕정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들어 높이면 그런 몹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을 들어 높이면 제3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보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밑에 있는 동네를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 밑에서 아웅다웅하던
일들이 조금은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위로
올라가니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차이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모두에게 같은 태양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태양처럼
높아지면 이제 지역이나 사람들을 분별을 해서 빛을 주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갑니다. 그 본성이
사랑이라는 말은 이렇게 높이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하느님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과 멀어지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보다 자신과만 함께 있어주며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더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나 아내나 자녀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결혼하셨다면 어떤 남편이 되셨을까?’라는 조금은
불경스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성모님에게 고통을 안겨주셨듯이
훌륭한 남편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정은 소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가정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내어 온전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베드로 사도가 아내를 덜
사랑했을까요? 육체적으로는 멀어졌을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더욱
충만한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더 태양에 가까워져 더 뜨거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뜨거워지려면 더 위로 올라가야합니다. 이것이
아직 밑에서 따듯함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으로 성모님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나를 하늘로 들어 높여 태양까지
가야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불타고 있다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같은 사랑을 뿌려주는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높이 올라가면 분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랑은 나를 높이 들어 올릴 때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1주간 토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보다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루카 18,27 참조) 스테파노가 수난
당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다.(사도7,60 참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법으로 만들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렇게 하였다.(1코린 4,12-13 참조) 이러한 것을 볼 때,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하는 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45절) 이 말씀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참조)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자녀들은 아드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불린 것을 표현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라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고
하신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라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이들과 죄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인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청하며
살아가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완전한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하시는 구원의 참된 길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전해지는 사람의 참된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며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의 여정은 또한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완전해지는 하느님 자녀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순명으로 이끕니다.
받아들이고 내어맡기는 순명은 우리를 완전한 사람이 되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완전하시기에 사랑의 빚으진
우리또한 완전하여 질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은 완전하신 하느님과 함께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우리자신을 맡기는 사순의 여정입니다.
온전한 내어맡김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원수 사랑이 실천될 때,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원수 사랑이 실천될 때,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초보 수도자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저도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마음만 앞섰지 많이 서툴렀습니다. 그래도 후배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 만은 대단했습니다. 새싹 같은 후배들이 초고속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 무리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미사를 봉헌하는데, 반주도 없이 그냥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천상에서‘음악이 없는 오라토리오’를 보시고 슬퍼하실 돈보스코
생각에, 모두 집결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생각해도 무리였다
싶은 요구를 했습니다.
“앞으로 넉넉잡고 세 달 시간을 드릴테니, 그 안에 최선을 다해 오르간
반주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달 후부터는 그 누구도
예외없이 돌아가면서 미사 성가 반주를 하셔야 합니다. 딱 세
달입니다.”
불쌍하고 착한 우리 형제들, 그날 이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빡센
수도원 일과 따라가야지, 틈틈히 생전 처음 만져보는 오르간
연습해야지...한편으로 좋았던 것은, 뭔가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니,
다들 얼굴들이 비장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듯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했던 세 달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명도 예외없이, 그럴듯하게 성가 반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해낸 것에 대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도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악보가 읽혀지지 않던 한 형제는 외워서 치기도
했고, 또 어떤 형제는 늘 입당 성가로, 가톨릭 성가집 중에 가장 짧고
반주하기 쉬운,‘믿음으로’ 1절, 마침성가로 ‘믿음으로’ 2절만 줄기차게
반주하기도 했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한 요구가 참 많으셨습니다.
그만큼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좀 더 크게
성장하기를, 좀 더 넓은 시야를 지니기를, 좀 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를, 좀 더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꽤나 무리한 요구를 건네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장 44~45절, 48절)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백번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면서 그분께 이런
약속 정도 드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노력은 해보겠으나,
죄송하지만 약속은 못드리겠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도무지 수용이
안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원수 사랑은 뼈를 깎는 의지적
노력없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자아’라는 옹색한 그릇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제한된 인간적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좁디 좁은 인간의 시선을 버리고 한없이 광활한 하느님의 시선을 지닐
때 원수 사랑은 가능해집니다. 우리 안에서 인간의 옹졸함과 비루함이
빠져나가고, 하느님의 정신과 숨결이 머물때 원수 사랑은
가능해집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오직
하느님의 힘만으로 가능하니, 그저 정답은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또
기도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사랑이 약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16일 사순 1주간 토요일(마태5,43-48)
사랑이 약이다.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또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23,3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수반합니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양심을 지니게끔 도와주는 용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3월 16일 (토) - 변치 않는 성도
오늘은 ‘변치 않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30장 9절 말씀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사람은 간사하여 조금만 배부른 상황에 놓이면 내가
언제 하나님의 도움을 얼마만큼이나 받았냐며 어깨에 힘을 주고
으스댑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누구냐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싹 잊어버리지요.
모든 인간을 인격적으로 하는 인본주의 성도들로 확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또 형편이 많이 어렵다고 도둑질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 이것은 성도의 신분을 잊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아굴 찬양자는 배불러서 너무 교만하지도 말고 가난하다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말고 언제나 변치 않는 일관성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되지 마십시오.
환경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하여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성도가 되는 것,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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