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9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귀주대첩의 현장
한반도와 대륙을 잇게 될 신의주 동쪽에 자리한 피현군은 의주군의 동남부 지역을 분리해 1952년에 신설한 군이다. 문수산ㆍ천두산ㆍ백마산 등이 솟아 있고 삼교천이 흐르는데, 삼교천에서 강감찬 장군과 거란군 사이에 한판 큰 싸움이 있었다.
현종 9년(1018) 거란은 소배압과 10만 대군을 앞세워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000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강감찬은 적군을 수공으로 섬멸하기 위해 삼교천에 쇠가죽으로 둑을 만들었다가 이를 터뜨려 몰려오는 적군을 수장시켜 크게 이겼다. 그리고 거란군의 남은 군사들을 성 앞까지 들어오도록 유인한 뒤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 신은에서 회군하여 돌아가다가 귀주에서 강감찬과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고려사』에도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다고 한다. 귀주대첩1) 이후 거란의 성종은 힘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되었고,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의주 서쪽 압록강 하구에 자리한 용천군의 고려 때 이름은 안흥군(安興郡)이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용천군이 되었고 광해군 때 부로 승격되었으며, 1952년 12월 군으로 개편되었다. 유정현이 자신의 시에서 “긴 강이 발해에 잇달았고, 평평한 들이 요양에 잇닿았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부지런하다. 사람들의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럽다. 전세(田稅)와 공물을 잘 바치며, 민간의 풍습이 순박하고 정성스럽다”라고 실려 있는 용천군은 삼교천에 의해 형성된 삼각주 평야 지대(용천평야)를 이루고 있어 벼 생산량이 평안도에서 가장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서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북쪽으로 압록강을 바라보며, 강 밖에는 여러 산이 책상 앞에 있는 듯하여 가장 좋은 경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의 물산은 제호유(鵜鶘油)라고 부르는 사다새 기름(한방에서 옹종(擁腫), 이롱(耳聾) 등에 쓴다)과 토화(土花)라고 하는 가리맛조개 그리고 무명석(無名石)이다. 이곳에 있던 양책역(良策驛)을 지나던 목은 이색의 글 한 편이 남아 있다.
작은 관(館)이 황량하여 인마가 드문데,
요란산 깊은 곳에 해 저물려 하네.
괴상하구나! 우리(郵吏, 역리)는 서로 아는 듯하니,
흰밥 푸른 말꼴로 멀리 돌아온 것을 위로하네.
또한 이첨은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 한 편을 남겼다.
몇 군(郡)에 와서 손님을 대접하니
차는 달고 술 또한 맑으며,
봉화 전하니 바다와 산의 일을 알겠고
세상 변한 것은 산성(山城)에 나타나 있네.
골짜기 그윽하니 구름 안개가 오겠고,
창문이 차가우니 눈[설(雪)]이 밝구나.
꿈을 깨어 베개를 어루만지니
반이나 고향 생각일세.
1988년 8월 신도면과 몇 개의 리를 떼어내서 신설한 신도군은 코끼리가 물속에 코를 드리운 형상이라 하여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된 코끼리바위와 간척지를 막아 조성한 비단섬의 갈대가 유명하다. 용천 남쪽은 염주군이다. 대부분 평야 지대인 염주군 역시 1952년 12월 용천군의 일부에서 분리하여 새로 만든 군이다. “순박하고 검소함을 높게 여기며,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 힘쓴다”라고 평한 철산군은 평안북도 서해안 중부 지방에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서희의 활약으로 강동 6주가 수복되면서 철주(鐵州)라는 이름으로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태종 13년에 철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철산군에는 철산반도가 뻗어 있고, 서림면 연산동은 고전 소설의 하나인 『장화홍련전』의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또한 임경업 장군이 철산에서 벼슬을 할 때 못에서 큰 뱀이 뱉어준 검을 얻어 평생에 걸쳐 전투용으로 활용하며 간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철산 동쪽에 자리한 동림군은 선천군의 북부와 철산군의 일부를 합해서 1952년에 신설한 군이다. 그 동남쪽에 선천군(宣川郡)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천군」 「산천」조에 “검산은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봉우리들이 뾰족하고 험하기가 칼끝 같은 까닭에 이름 지었다”라고 기록된 검산에는 검산성, 통주성, 동림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여지도서』 「형승」조에 “북쪽은 큰 고개를 등지고 서쪽에는 숲이 무성해 햇빛이 들지 않는다. 남쪽은 커다란 바다와 닿았고, 동쪽에는 산등성이가 감돌아 서려 있다”라고 실려 있고, 「풍속」조에는 “학문에 재주가 있으면 고전을 읽고, 근력이 있으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힌다”라고 실려 있다. 이 군의 풍습을 보면 오늘날의 교육과 상치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의 체질에 따라 그 체질에 맞는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선천군의 고구려 때 이름은 안화군(安化郡)이었다. 고려 때 통주(通州)와 선주(宣州)로 바꾸었다가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선천군은 162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31년에는 임경업 장군이 검산성방어사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뒤 선천부사 김익순이 항복했다고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 1896년 다시 군이 된 선천군은 평야가 발달하였으며, 동래강이 흐른다.
선천군의 남쪽 30리에 자리한 남면에 신미도가 있는데, 높은 봉우리와 험한 벼랑이 바다 위의 큰 산을 이루고 있으며 목장이 있다. 신미도 가운데 있는 운종산에서 임경업 장군이 무술을 갈고 닦았다고 한다. 신부면 삼성동에는 검산(劍山)이라는 경치가 빼어난 산이 있는데,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고, 그 아래에 임경업을 모신 충민사가 있으며, 선천향교 옆에는 서포사(西浦祠)가 있다. 서포는 김만중의 호다. 1689년 인현왕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할 때 남인들의 참소에 따라 김만중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그는 결국 유배가 풀리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하였다. 1696년 현감을 지낸 전처형과 차성우의 건의에 따라 부사 남오성이 사교서원(四敎書院)의 하나였던 북서원(北書院)에 김만중을 배향하였다.
선천군을 두고 김식은 “훈풍은 움직이지 않고 길은 겹겹인데, 풀 기운이 서로 섞여 더운 기운 짙었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처럼 바쁜 것이 이미 한껏 했는데, 사람의 말들이 벌 떼처럼 소란한 것을 견디겠는가”라고 하였고, 예겸은 “동림 옛 성은 바다 언덕 구석에 있는데, 빈 성벽에는 사람 없고, 미록(糜鹿)만 노네. 추석(墜石, 쌓은 돌)이 쓸려 무너져 평지에 가득하니, 많고 적은 가시나무가 그 위에서 났구나” 하고 노래하였다.
한편 이곳 선천군의 북쪽 25리에 임반역(林畔驛)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장근의 시가 애달프다.
지난밤에 하늘 가득히 눈이 날리더니,
새벽이 되자 찬 기운이 사람의 옷에 다가오네.
초거(軺車)로 또 운흥(雲興)을 향해 달리건만,
천 리 우리 집 동산에는 어느 날에나 돌아갈꼬.
안주성은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8호다. 우리나라 서북지방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요로에 쌓았던 석성이다. 군사적으로 요충지이면서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내성은 고구려 때, 외성은 조선조 초기에, 신성은 17세기에 쌓은 것이다. 현재의 안주성은 고려의 명장 서희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새로 쌓고 1607년에 개축한 것이라고 하나 많이 파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