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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2019년 1월 29일 (화) 촬영.
문화역 서울 284에서 커피사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18.12.21 - 2019. 2. 17)
커피사회는 근현대생활문화에 녹아들어간 커피문화의 변천사를 조명하고 일상 속에서 만나는 우리사회의
커피문화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기획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도입된 커피는 약 100여 년간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국의 사회문화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기호 식품 이상의 가치를 담아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옛 서울역은 근현대의 상징적 공간이면서, 그릴, 1,2등 대합실 티룸에서 본격적인 커피문화가 시작된
공적 장소이기도 하다. <커피사회>는 맛과 향기 속에 담겨진 역사와 문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커피를 통한
사회문화 읽기라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안내서에서-
제비다방, 낙랑팔러, 돌체다방 등 커피가 도입되며 활성화되었던 근대 시기의 다방들과 이후 6,70년대
청년문화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다방들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거치며 문학, 미술, 철학 등 문화예술의
활발한 교류에 영향을 미친 커피의 문화사를 중심으로 사회적 관계를 읽어 본다. -안내서에서-
커피볶는 로스팅 기계.
1층 전시장.
입장할 때 커피잔을 한 개씩 준다. 이 잔으로 곳곳에서 주는 커피 중 마음에 드는 커피를 받아 마실 수 있다.
1층 드립커피를 주는 곳.
(이 곳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주는 곳.
이 커피를 마시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물이 끓어 생기는 증기를 이용하여 추출하는 커피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작은 구멍에서 추출되는 커피.
1930년대 문인들이 드나 들던 다방과 다방의 풍경들을 묘사한 문학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
제비다방, 낙랑팔러, 멕시코 다방 등1930년대 경성의 다방은 미술가와 문인 등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교류의 장이자 문예적 공론장이었다.
낙랑파라는 이상, 박태원 등이 속했던 모더니즘 단체 구인회 동인들이 모이던 곳이고,
1933년에 종로에서 개업한 제비다방은 이상이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다방은 단지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장으로 기능했다.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에서는 특별히 제비다방을 문예다방의 시초로 해석하고,
후에 시대에 영향을 미친 문학적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기폭제가 되었던 곳으로 주목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이상과 관련 예술가들의 시, 수필, 소설 등 당시의 문학 자료를 기반으로 한 사료를
마주하게 된다. 동선을 따라 크게 원을 그리며 해당 사료를 들여다 보고
벽화, 설치 등 공간 곳곳에 숨겨진 이상 고유의 기하학 사유를 통해 마치 시대를 질주하듯 했던 경성의
모더니스트들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얼굴 그림. / 이상의 얼굴 그림 자신의 얼굴과 구보의 얼굴을 겹쳐놓은 것 같다.
잠시 동안 저 탐조등의 동그라미 속에서 원숭이처럼 뛰돌아다녔다. 문득 도기 파편의 던져지는 기색이었다.
그렇다. 발이 아픈 것이다. 발이 헐어서 몹시 아픈 것마저 잊었던 것이다.
눈은 누구를 위해 식물(食物)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맹목인가 / 은반에 사지를 뻗고서 호흡이 흉작인 수염을
잘라도 새들은 날아오지 않는다.
<구두> 중의 일절
옆그림의 메모는 "요시찰 원숭이"가 감옥을 탈출할 것을 동물원 원장이 염려한다는 내용이다.
이상은 <지도의 암실>에서 세상 사람들을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들처럼 표현했다.
<날개>의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족관의 금붕어들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1931년 작품제1번>의 10장에서는 자신이 이러한 동물원의 감옥에서 탈출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의 방에 시계 별안간 13을 치다. 그때, 호외의 방울소리 들리다. 나의 탈옥의 기사.
제비다방 성냥갑. / 바 - 제비 / 커피를 세상에 나눠주는 제비 여인의 발자국들.
바 - 제비의 외관적 구조는 <끽다점 평판기>에 잘 나와 있다. 전면 전체를 유리로 한 전위적인 기하학적
구조는 그의 건축 디자인의 예술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 것이었다. 그 이후 여러 다점들은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의 다양한 양식을 전개했다.
옆의 성냥갑은 김영준씨가 소장한 것인데 1930년대 미국 만화에 등장한 베티풍의 여인을 조금 변형시킨
것이다. 아마 제비 다방 금홍을 서구적인 도회풍 여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
자신의 몸에 비해 과도하게 크게 과장된 커피잔이 전체 연한 다갈색 배경에서 산뜻하게 부각된다.
붉은 색의 두 줄 물결선은 위의 "BAR-/ JEBI"라는 붉은 두 줄의 글씨와 적절히 연결되고 조화된다.
연한 다갈색은 커피의 진한 다갈색을 퍼트리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인의 몸은 커피색이다. 커핏잔에서 흘러 나온 진한 다갈색과 같은 것이다.
즉 이 여인은 커피의 여인인 것이다. 그녀는 커피를 세상에 나눠주는 다덕을 베푸는 행보를 하고 있다.
마치 글자의 행렬같기도 한 점선들은 여인의 발자국이 찍힌 것이다.
그것은 제비 여인의 BAR들이다.
기계적인 도시시간에 갇힌 자들에게 그러한 시계의 초침들로 이루어진
원형의 철책 BAR 바같으로 자유롭게 펼쳐진 이 커피여인의 행보는 이상이 꿈꾸는 시와 예술의 행보였다.
커피가 흘러내려 사람얼굴 형태를 한 부분에는 "끽다 쯔바에 / 전광 1857"이라는 글자가 있다.
"쯔바에"는 제비이다. 전광은 광화문전화국을 가리킨다. 1857은 전화번호이다.
화신백화점의 전화번호도 광고를 보면 "광2680" 이었다.
그림1, 이상<자화상>. / 그림2, 구본웅의 <우인의 초상>, / 그림3, 구본웅 <푸른 머리의 여인> 1930년도.
이상의 자상(自像),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자화상.
당시 심사위원인 이승만은 이 그림을 누렇게 떡칠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박태원의 <애욕>에서도 제비다방 벽면에 걸린 이 그림이 삽화로 나온다. 이 소설에서도 박태원을 지칭하는
"구보"는 이 그림을 보고 황색계열이 남용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자화상은 한복을 입은 모습이어서 이상이 평소 집에서 입었던 한복 차림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구본웅이 그린 <우인의 초상>
불타는 듯한 입술과
벌겋게 불붙은 담배 파이프의 불이 이상의 예술적 열정과 타오르는 사상을 부각시켜준다.
담배 파이프와 얼굴 오른쪽 부분은 하얗게 처리해서 어둠 속에서 빛나도록 했다.어둠에 가려진얼굴 부분이
뒤로 숨듯이 움츠려든 것에 비해 밝은 부분의 얼굴은 활기차게 드러나고 의지의 시선과 콧날을 드러낸다.
그의 파이프 연기는 후광처럼 얼굴 전체를 감싼다. 이러한 초상은 후일 이상의 사후 추도시로 발표된
김기림의 <쥬피타 추방>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기서도 파이프와 모자가 강조된다.
모자는 이상에게 사상의 기호였다. 불타오르는 궐련 담배는 자신의 예술적인 사유의 꽃, 뇌수의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의 최후의 시로 추정되는 <무제-궐련기러기>에 그러한 분위기의 마지막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구본웅이 그린 푸른 머리의 여인
금홍이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박태원이 그린 삽화에 나오는 그림과 닮았다.
<꺽다점 평판기>의 "뽄 아-미"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제비 마담"인 금홍이가 "뽄 아-미" 마담과 더불어
경성 시내 다방 마담 중에 가장 미인이라고 언급한다.
1939년 2월 21일 조선중앙일보 / 자작자화, 유모어 콩트, 제비 (상) / 글, 그림 박태원.
이 글은 이상이 죽은 2년 뒤에 박태원이 "유모어 꽁트"라는 형식으로 이상의 제비다방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룬 가벼운 글이다.
아래 삽화도 박태원이 직접 그린 것이다. <판 들어먹기 조곰전의 제비>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비다방이 파산 직전에 도달했을 때의 풍경이다.
마담인 금홍이는 더 이상 제비다방을 지키지 않고 돌아다닌다.
나나오라 전축은 팔아먹었고, 전화기도 떼어간 상태이다.
등나무 탁자와 의자는 손님들이 없이 텅 빈 상태이다. 여기 그려진 금홍이 얼굴은 꽤 미인형이다.
경성 다방 마담의 5대 미인 중에 들어갈 정도니 박태원도 그 미모에 신경써서 그렸을 것이다.
박태원이 신경써서 그렸을 것이라는 금홍의 모습..
1939년 2월 23일 조선중앙일보 / 자작자화. 유모어 콩트. 제비 (하) / 글, 그림 박태원.
이 글에서 박태원은 매일 이상을 보려 제비다방에 가면서도 차 한 잔 사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손님도 없는 다방에 심심하게 있는 사동 수영이와 사과나 귤을 사먹고, 군밤을 사 먹으면서도 차를 한 잔도
사먹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마 이상에게 돈을 꾸어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그려진 삽화에서 박태원은 갑빠 머리를 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사동 수영이가 사과를 먹는 모습인데, 사과 먹는데도 질려서 내일은 군밤을 사먹자고 말하는 장면을
만화처럼 그렸다. 제비다방의 실내풍경은 이 삽화를 통해서 가장 세밀한 묘사를 남기게 되었다.
제비다방 개업 기념사진 / 1933./ 출처,임종국(이상전집)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씨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인데 임종국의 <이상전집>2권(1956) 속표지에 실렸다.
마지막에 제비다방에서 일하는 아이인 사동 수경이가 사진의 위쪽 중앙에 서 있다.
박태원의 유머 콩트 <제비><하>의 그림에서 박태원과 마주 앉아 사과를 먹는 아이가 바로 수경이다.
박태원의 글에서는 수영이로 나온다.
명치제과의 홍차광고 / 1939년 10월.
경성 최초의 커피숍 역할을 했던 명치제과의 홍차광고.
대동아전쟁 시기가 되면서 커피수입이 금지되고 커피는 일본과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그것은 적국의 음료가 되었다. 오장환의 한 수필에서 당시 콩가루 커피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비 / 김남천 / 1940년 7월.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김남천의 가비론,
카프 문인으로서 소설과 비평을 겸비한 김남천은 비평 분야에서도 임화와 쌍벽을 이룬 존재이다.
그의 커피론은 어떠할까 ?
그가 궂이 커피란 말 대신 한자로 가비라고 쓴것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
홍효민과 비슷하게 그도 커피와 차에 대한 학술적인 관점을 은연중 과시한다.
카프 비평가들의특징이 그렇다.
그들은 이성적인 거대한 체계를 갖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가 홍명희의 임꺽정을 들이대어 담배 이야기를 하며, 띠보데의 미슐레를 들먹이면서
커피의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커피를 좀 공부한 사람은 미슐레가 서구 역사의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원인의 하나로 커피를 들었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김남천은 요즘 신세대 시인들의 시에서는 "가비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발자크의 다작을 격렬한 노동으로 보며, 그것을 지탱해준 것이 4-50잔의 커피였음을 강조한다.
그는 커피를 소설쓰는 노동의 동력으로 본 것이다. 카프 비평가 다운 발상이다.
커피의 맛과 향에 취해 살던 이효석이의 커피 취향과 얼마나 다른가!
낙랑다방기 / 이효석 / 1938년 12월. -이효석 평양다방 순례기-
이효석은 1933년 구인회 창립 멤버이다. 그러나 구인회에서 이상, 박태원 등이 김기림, 정지용과 함께해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 다음해에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고, 사실상 구인회 활동이 끊겼다.
그의 커피 취향은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평양에가서도 다방 순례를 했다.
그것은 <낙랑다방기>라는 글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처가 집이 있는 함경북도경성에 가서 살았는데 거기서도
매일 산길을 2시간씩이나 걸어서 카페 등을 찾아가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곤 했다.
이러한 낭만적 커피 취향은 그를 카프 문인들 그룹에서 갈라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낙랑다방기>를 읽으면서 그가 걸어간 "커피 순례의 길"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의 다방기로서는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차에 대한 이효석의 감각은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오후 4시 정도에 다방에 나가 무엇을 마실까 고민해
본다. "공복에 커피는 위험한 것이다"라고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홍차를 마시자니 향기없는 뜸물이
속에 차지고 레몬 스캇쉬를 마시자면 날마다의 음료로는 사치하다. 고 했다. 당시 다방들의 차를 품평하면서
홍차에 대해 비판한다. 즉 커피 미각에 대해서는 섬세한 주의를 하는 다방들이 홍차의 맛에 대해서는 매우
등한시한다는 것이다. 그의 커피 취향 못지않게 홍차 사랑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는 홍차의 맛을 내려면 새통에서 꺼낸 홍차를 우려내는 3일 동안에 참맛이 있다고 했다. 오래 지난 홍차는
그 본래의 풍미가 사라져 뜸물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의 "낙랑다방기"는 이러한 차에 대한 그의 전문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고 또 여러 방면에 대한 예술적
감각과 교양을 겸비한 것이어서 흥미롭게 읽힌다.
평양에도 음악 다방이 있으며, 차를 따르는 여인이 있는 다방이 있다.
글을 쓴 1936년 당시 5개의 다방이 있고 년내 2곳이 더 생긴다고 했다.
카피잔을 들고 -편석촌-
오 - 나의 연인이여
너는 한개의 <슈-크림>이다
너는 한잔의 <커피>다
너는 엇지면 지구에서 아지못하는 나라로
나를 끌고가는 무지개와 가튼 김의 날개를 가지고 잇느냐
나의 억개에서 하로동안의 모-든 싯그러운 의무들을
나려주는 짐푸는 인부의 일을
너는 <칼리-포니아>의 어느 부두에서 배워왔느냐
카피잔을 들고 / 편석촌 / 1933년 8월
신문사에서 격무에 시달리던 김기림에게 한 잔의 커피는 잠깐 동안의 달콤한 휴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엄격한 성격과 절제된 삶을 살았던 김기림은 달콤한 연예 같은 것에 집착하지는 못했다.
그는 대신 한 잔의 커피를 향해 "오! 나의 연인이여"라고 노래했다.
신문기사는 현실의 온갖 사건들, 즉 협잡, 사기, 추문, 전쟁 등을 다룬다.
구보 박태원은 김기림이 그러한 사건들을 취재하느라 분주한 것을 잘 안다.
<소설가구보씨의일일>에 등장하는 벗 중에 김기림이 있다.
그는 그러한 분주함 속에서도 시를 쓰는 소중한 시간을 마련할 줄 안다.
그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시의 날개를 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가 커피를 마실 때 그는 그로부터 멀리멀리 날아가는 꿈을 꾼다.
커피잔에서 피어 오르는 김의 날개를 타고 그는 무지개의 나라로 간다.
이것이 커피에 대한 김기림의 시적 정의이다. ㅡ 편석촌은 김기림의 필명이다-
소설가구보씨의 일일 18화 / 박태원 / 조선중앙일보 / 1934년 / 그림 이상.
하이힐을 신은 여인들의 다리들, 그러나 동시에 화려하지 못한 다리들, <그림 이상>
구보는 어둠이 내린 경성의 밤거리를 즐기러 나온 여인들의 화려한 다리, 또는 화려하지 못한 다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들은 저마다 경성의 근대화된 풍경을 즐기며, 웃고 떠들며 논다.
그러나 구보의 시선에 그녀들의 발걸음은 모두 위태롭고 불안하다. 구보는 여인들의 화려한 화려하지 못한
다리들의 역설적 풍경을 본 것이다.
아마 이것이 식민지 근대의 풍경이 전시하는 화려함에 대한 구보의 근본적인 통찰일 것이다.
이상 하융은 이 장면을 여인들의 스타킹 신은 다리들만을 그림으로써 구보의 시선을 드러내려 했다.
여인들의 다리들이 위태롭고 불안한 풍경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 것인가?
여인들이 걷는 도시의 포도는 격자 그물무늬로 표현되었다. 바닥은 수평으로 여인들을 안정적으로 받쳐
주지 못하고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그것은 오른쪽 여자의 세로줄 무늬 상의와 연결되거나 그 옆 건물의
창과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의 투명한 기둥 같은 것이 이 전체를 연결해주고 있다.
격자무늬 보도는 경성거리를 관리하는 총독부 권력의 확고한 식민지 제국의 질서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국의 사각형틀 속에서 여인들은 살고 있고, 거기에 적응하며 길들어진다. 그 안에서 놀며 즐기는
것이다. 그러한 즐거움이 진정한 행복일까? 구보와 이상은 동시에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다.
제비다방 건물의 도로에 인접한 전면 벽 전체의 하반부를 투명한 유리창으로 만들어 이상은 보도를 지나
가는 사람들의 하반신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상은 아마도 구보처럼 지나가는 여인들의 다리를 바라보도록 그렇게 창을 만든 것이 아닐까?
소설가구보씨의 일일 14화 / 글, 박태원 / 조선중앙일보 / 1934.
월미도 해수욕장 소파 위의 올랭피아.
천박한 친구의 돈과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치환해보며 상상하는 구보의 생각 속에서 친구의 여인은
인천 앞바다 월미도 해수욕장 호텔 침대 위에 나체로 누워있다.
이상은 이 여인의 나체를 세잔 풍의 "올랭피아"처럼 그렸다. 여인의 나체는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 호텔방
소파에 길게 널브러져 있다. 이 장면은 바닷가 바캉스 장면과 호텔 안의 침대 장면 그리고 창밖의 돛과 배
이미지를 중첩시켜 표현한 것이다.
바다와 배의 이미지들이 마치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듯이 그렇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소파와 방안이 배이기도 하다.
이상의 "올랭피아"는 그가 서양 근현대미술사에서 마네와 세잔으로 이어지고 고갱이 끊임없이 도전했던
가장 혁신적인 주제로서의 "올랭피아"를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월미도"라는 한자를 표기해서 이 풍경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추가했다.
소설가구보씨의 일일 25화 / 글 박태원, 삽화 하융(이상) / 조선중앙일보.
낙랑파라 속으로 들어온 군중
구보는 김기림과 대화를 하며 산책하다 이상의 제비다방으로 간다. 이상은 파산상태이다.
그는 수심가 부르는 술주정꾼들의 광화문 거리를 헤매다 다시 "낙랑파라"에 돌아온다. 사람들이 꽉차 있다.
사람들이 되도록 피하는 가운데 자리만이 남아있다.
구보는 사람들을 비집고 간신히 그 가운데 탁자에 앉는다.
구보가 겪은 기분 나쁜 경성역의 군중적 분위기가 여기서도 연속된다. 박태원은 낙랑파라 공간 속에 경성의
도시적인 어수선함을 가져왔다.
박태원은 이렇게 어수선해져가는 다방공간의 비좁은 한 가운데 구보를 배치했고,
거기서 엘만의 "발스 싼티만랄"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고독하고 고요한 상상계로 빠져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 고요는 깨진다.
자신의 친구 중에 자신을 "구포"라고
일부러 틀린 발음으로 부르는 친구가 방약무인하게 구보를 큰 소리로 부른 것이다.
차보다 비싼 맥주를 마심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이 친구와 대중소설 몇몇을 거론하면서 그러한 소설들이
마치 자신들이 아는 최상의 작품들인 양 어설픈 비평들을 남발하는 친구들이 그 자리에 합석해 있다.
이상 하융의 삽화는
수많은 찻잔들과 탁자들이 마치 서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는 모양새로 그려졌다.
탁자들을 서로 겹쳐놓음으로써 이러한 어수선한 군중적 분위기를 표현했다.
찻잔과 탁자들은 거기 앉은 사람들을 대변한다. 구보의 찻잔은 그 가운데 가만히 놓여있다.
그러나 그 옆에 과도하게 크게 그려진 맥주병과 맥주잔이 구보의 작은 탁자와 찻잔을 짓누른다.
맥주병을 간신히 담을 것 같은 친구의 탁자는 날카롭게 각이 져서 그 옆의 탁자를 위협한다.
소설가구보시의 일일 제5화 / 글,박태원. 그림 이상 / 조선중잉일보 / 1934. / 소설 속 낙랑파라 제비 이야기
청년 실업자인 구보의 행복 찾기
모두 병들어 버린 이 시대에 구보는 집을 나섰다. 실업자 청년인 그에게는 갈 곳이 없다.그는 무작정 전차를
타지만 그의 목적지는 없다.그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구보의 행복은 거리에서 그의 소설 재료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구성하고 메모하고, 소설의 한 부분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다방은
장곡천정(현 소공동의 일제강점기 명칭)의 낙랑파라와 종로 1가의 제비다방이다.
구보가 자신의 행복에 대해 깊이 사색하는 곳은 낙랑다방이다.젊은 실업자들이 모여있는 이 곳에서
그는 금전이 주는 행복의 최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다방의 오후 두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 같이 느꼈다. 구보는 아이에게 한 잔의 가비차와 담배를
청하고 구석진 등의자로 갔다.-구보는 자기에게 양행비가 있으면, 적어도 지금 자기는 거의 완전히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동경에라도-. - 혹은 구보는, 조그마한 슈-트케이스를 들고 경성역에 섯을 때,
응당 자기는 행복을 느끼리라 믿는다. 그것은 금전과 시간이 주는 행복이다.
그러나 구보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최대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답을 얻지 못하고 다만
"이 자리에 앉아 한잔의 차를 나누며, 또 같은 생각속에 있고 싶다" 생각하는 벗을 그리워하고 벗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상과 박태원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관을 연 김규진의 작품.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도 있다.
2층 전시실.
이 곳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전시장을 나와 식사할 곳을 찾아 염천교를 넘어
서울미래유산이 수제화거리까지 왔지만.
식당이 별로였다.
서울역으로 다시 와 동대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