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제의 보충규례
레 6:8-13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 6:8-13 / [번제물 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9) `제사장인 아론과 그 후손들에게 번제는 다음과 같이 올려야 한다고 일러라. 번제물은 번제단 위에 밤새 두어야 하며 번제단에 지핀 불도 아침이 될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10) 제사장은 고운 모시로 짠 긴 옷과 모시 속옷을 입어 맨살을 가리워라. 그런 다음 제사장은 번제물의 재를 긁어 내 일단 번제단 곁에 모아두어라. 11) 그리고 재를 치울 때 입었던 모시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번제단 곁에 모아 두었던 재를 담아다가 진영 밖 깨끗한 곳에 버려야 한다. 12) 제단 위에 지펴 놓은 불은 항상 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지피고 그 장작 위에 번제물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바쳐라. 또한 화목제물의 기름 덩어리를 그 위에 함께 올려놓아 불살라야 한다. 13)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번제의 영적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온전히 바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26:39-44; 빌 2:5-11).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희생한 일을 의미합니다(롬 12:1-2). 번제물은 제단 위에서 아침까지 태워야 합니다. 불에 타서 재만 남은 번제물은 제단 옆에 둬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화목제물의 지방이 있는 부위를 불태워야 합니다. 제단의 불은 꺼져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의 고운 삼베옷(8-11) 하나님께 헌신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고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드려야 할 번제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서 태우고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합니다. 제사장은 고운 삼베로 만든 긴 겉옷과 속바지를 입고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장의 고운 삼베옷은 온 몸을 가릴 수 있도록 통으로 짠 긴 옷입니다. 제사장이 진영 밖으로 나갈 때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이 진 밖에서 부정한 것과 접촉되어 더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의 고운 삼베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참고 롬 13:12)
제단 위의 불(12-13)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헌신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가져다 제단 위에서 불을 붙이고 그 위에 화목제물의 지방을 태웁니다. 저녁에 한 마리의 양을 번제로 드려 아침까지 태우고, 아침에 또 한 마리의 양을 번제로 드려 저녁까지 태웁니다. 따라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태우는 불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제단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는 예배와 찬송과 기도의 불이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성도의 심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늘 뜨겁게 타오르는 성소가 돼야 합니다.(참고 눅 3:17)
적용: 번제단에서 꺼지지 않은 불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끊임없는 경배와 예배 행위를 가리킵니다. 당신의 예배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옳지 못한 행실로 거룩한 예복이 더러워졌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의 향을 올려 드립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교회를 섬깁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모시는 주인으로서 우리의 사역의 역량과 형편에 따라 주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우리는 맡김을 받은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랑할 수 있는 소유가 있다면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근본은 하나님을 통해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용함에 있을 때는 결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최선을 다해 잘 사용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 설 교 >
깨뜨리지 말아야 할 불
레위기 6:8-13 / 계강현 목사
우리가 꺼뜨리지 말아야 할 불이 있다. 그것은 성막 번제단의 불이다. vv12- 13, “제단 위의 불은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장작을 지피고, 거기에 번제물을 벌여 놓고, 그 위에다 화목제물의 기름기를 불살라야 한다. 13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번제단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드려서는 안 된다.”고 세 번씩이나 반복 강조하셨다.(v9, v12, v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숫양 한 마리씩을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번제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게 그들의 고단한 나그네 삶 중에 최고의 낙이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완전히 불살라 드리는 헌신의 제사를 뜻하는데, 제단의 생명력은 꺼지지 않는 불에 있다. 불 꺼진 제단은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여러분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고 캄캄하다면 마음이 어떨까? 맞벌이 부모 밑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그런 텅 빈 집에 들어갈 때가 많다. 그럴 때 아이의 마음에 허전함의 생채기가 생긴다고 한다. 하물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에 불이 꺼져있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성경에는 불이라는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데, 불은 크게 두 가지, 심판과 임재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먼저, 불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죄와 불의를 심판하실 때 불을 사용하셨다. 음란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유황과 불을 비같이 쏟으셨고(창 19:24), 광야의 여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셨다.(민 21:6) 주님이 다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미혹하는 마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신다.(계 20:10)
다음에,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상징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임하여 타는 것을 보았다.(출 3:2) 또한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을 때 연기가 자욱하고, 하나님이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출 19: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 가운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백성들은 낮이나 밤이나 성막에 금 촛대에 불이 켜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또 제단에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백성들은 마음의 위로와 힘을 얻었다.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임해서 제물을 다 태워버렸다.(왕상 18:38)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불이 임했다.(행 2:3) 이처럼 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불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누릴 수 없다. 우리 속에 불이 임할 때 복음 전하고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이 번 제단에 불이 꺼뜨리지 말라고 특별히 강조한 이유는 그 불은 하나님이 친히 내려주신 불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아론이 아들들과 함께 첫 번제를 드렸을 때 제단에는 불이 없었다. 레 9장에 보면 아론이 번제를 드리고 난 후에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여 순식간에 단 위에 있는 제물을 불살라 버렸다. 이걸 본 백성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다.(레 9:23-24) 그러므로 번 제단에 타오르는 불은 인간이 만들어낸 불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고, 직접 하늘에서 내리신 하나님의 불이다. 그래서 절대로 그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다른 불로 드리는 분향도 받지 않으셨다. 바로 이 사건에 이어진 레 10:1-2의 사건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기 때문이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피워서 주님께로 가져 갔다. 그러나 그 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이다. 2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고 말았다.” 하나님의 불이 아니라 자기들이 편하게 지핀 불로 지성소에 있는 금향로에 불을 붙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거룩한 불로 드리는 제사와 분향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늘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우리 속에 임하는 성령의 불, 성령의 임재와 능력 가운데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가 참된 예배와 전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성령의 불이 꺼지면 제대로 된 예배와 전적인 헌신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와 지속적인 헌신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속에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는가?
1. 예배의 불이 타올라야 한다.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드리기를 쉬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고, 싫어질 때가 있는가? “아니 벌써 주일이야! 아니 또 교회 가는 날이야!” 이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말이다. 아무리 연세가 들어도 예배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더더욱 좋아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예배만 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코로나로 인해 예배의 불이 자꾸 식어가는 것이 큰 위기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5)고 했다. 언제나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자가 복된 성도다. 또한 예배드릴 때에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고 그 속에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신다. 그런 예배를 계속 드리도록 힘쓰라.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심지어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잡아드리라고 했을 때도 다음날 일찍부터 일어나 순종하려고 힘썼다. 예배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 예배를 쉬면 성령의 불이 그 속에서 식어진다. 한 달간 예배를 쉬어봐라. 세상 사람하고 똑같아 진다.
예)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1839-1937)는 33살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53세 때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비결은 어릴 때부터 유대인 어머니로부터 다음의 10가지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잘 듣고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적용해보라.
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②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축복된 길이다. ③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섬기는 교회에 충성해야 하며, 가능한 주일예배만큼은 본 교회에 참석하여 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④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한 후 나머지를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⑤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게 되고, 때로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⑥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⑦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알게 모르게 계속적으로 짓는 죄를 가능한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⑧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⑨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 된다. ⑩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으라.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록펠러 어머니가 가르쳐준 교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라는 것이다. 주일 연합예배와 목장예배에 열심을 내자.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서 사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매일의 헌신의 삶을 드리자.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메마른 생활이 되고 만다. 중요한 것은 예배는 어떤 이유로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예배의 불이 식어지고 있지 않나 살펴보자. 번제단의 타오르는 불처럼 언제나 예배가 불타오르게 하자.
2. 말씀의 불이 타올라야 한다.
말씀의 불이 꺼지면 방황할 수밖에 없고, 성령의 불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고치고 그러면 성령 충만한 건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사도가 쓴 옥중서신인데, 구조가 비슷하다. 엡 5장과 골 3장은 문맥뿐 아니라 단어까지도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둘 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엡 5:19; 골 3:16)라는 내용이 똑같이 나온다. 또 곧 이어서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하듯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주님이 교회에게 하듯 사랑하라”(엡 5:22-25; 골 3:18-19)라는 똑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그 조건이 되는 내용인 골 3:16b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살아있게 하십시오.”라고 한 반면에 엡 5:19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고 말씀하고 있다. 동일한 결과에 대해 다른 조건을 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말씀이 풍성히 살아있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똑같은 뜻이란 사실이다. 성령 충만이 말씀 충만이고,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불을 계속 붙이려면 말씀의 불을 지펴야만 한다.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은사를 좀 한다는 사람들이 왜 기복이 심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는가? 왜 꾸준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운지 아는가?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말씀에 착념하지 않고, 말씀에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타나는 엑스타시 현상만 너무 사모하기 때문에 현상이 사라지고 나면 맥이 풀리고 만다. 그러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말씀의 불이 타오르면 성령 충만해지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지만, 은사와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늘 신앙이 바람에 요동하는 물결처럼 요동치게 된다.
다윗은 고백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길을 밝혀주는 진리의 등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항상 정확하고 빠르게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다. 어두운 인생의 초행길에 등불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흑암 중에 있어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내비게이션을 따라 가면 바르게 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고, 밝혀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그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할 때 우리의 문제가 풀려지고 응답되고 질병이 떠나가고 새로운 길이 열려지게 된다.
다윗은 항상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주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부르짖었다고 했다.(시 119:147-148) 그는 주의 계명을 사모하여 입을 열고 헐떡인다고 고백하였다.(시 119:131) 그는 주의 계명을 정금보다 돈보다 더 사랑했다.(시 119:127) 이것이 다윗의 신앙과 삶과 사역에서의 성공비결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말씀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감사한 것은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 교회가 성경통독노트를 사용하면서 통독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이다. 다윗의 심정으로 새벽을 깨우며,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자. 지금도 안 늦었다. 성경통독에 도전하고 삶 공부를 즐겁게 신청하고 듣자. 말씀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불로 덧입게 될 줄 믿는다.
3. 기도의 불이 타올라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능력 있는 삶으로 인도해주신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자,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서 각 나라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불이 임하자 무식하고 비겁했던 베드로가 거리낌 없이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 그가 한 번 설교하면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그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기도할 때 치유되는 기적이 나타났고,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이 나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 성령님이 임하자 땅 끝이 어딘지도 몰랐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소아시아와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 하였다.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하자 영안이 열리고, 복음의 증인이 되고 제자를 만들어내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유럽에서 영국과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 땅까지 왔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성령님은 바로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은혜와 은사를 사모하라.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 예수 믿으면 불행해지고, 성령의 능력 없이 사역하면 탈진하게 된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예수 믿고 사역하는 건데 얼마나 힘이 들겠나? 골 1:29에서 바울은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고백하고 있다. 내가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하지만, 그것은 내 힘과 노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성령님의 활력을 따라’ 내가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 능력으로 거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진정한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밀려온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하늘의 지혜가 생기고, 내가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차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살전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라고 명령하신다. 성령의 불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있다. 마치 삼손이 머리를 잘리는 순간, 모든 힘이 사라진 것처럼 성령의 불이 꺼지는 순간 우리의 모든 능력은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약정하시고 성령으로 도장 찍어 보증하신다. 그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장본인은 바로 죄란 놈이다. 그래서 죄가 틈타지 못하게 싸우고 실수하여 넘어졌을 때 바로바로 회개해야 한다. 본문 vv10-11에 보면 제사장은 번제단의 재를 진영밖에 버려야 한다. 불 피워보지 않았나? 재가 그냥 남아있으면 불이 약해지지만 재를 제거하면 불이 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재와 같은 우리 죄를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그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계속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해주신다. 더 나아가서 갈 5:16의 말씀처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때만, 육체의 욕심을 극복할 수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기려고 극기하거나 금욕하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기를 힘쓰면 자동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소멸되고 잊어지고 생각할 틈조차 없어진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일체의 비결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내 뜻대로 여전히 일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 손을 활짝 펴고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드는 것이다. “주님! 제 힘과 제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만을 의지합니다. 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나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어주십시오.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시고, 정결한 맘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주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나를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고 구해라. 기도하면 바로 성령 충만을 주신다.
그렇다! 성령의 불이 꺼져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와 헌신자로 살아갈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안에 꺼져가고 있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의 심지를 돋우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할 때, 말씀을 가까이할 때,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있는 성령의 불을 계속 활활 타오르게 하시고, 은혜와 능력 주셔서 영혼 구원 제자 만드는 참된 헌신의 삶을 살도록 해주신다. 이런 은혜가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단의 불을 끄지 말라
레 6:8-13 / 진희성 목사
음식을 만들거나 난방을 위해서 사용한 불씨를 잘 모아서 덮어두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때로는 화로에다 옮겨 놓아 불씨를 보존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365일, 그리고 대대로 이어가면서 불씨를 보존했습니다. 불씨를 보존 하는데는 많은 수고와 깊은 관심과 희생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끈기와 성실로 불씨를 소중히 여기며 보관했습니다. 이사를 갈 때도 이 불씨만은 꼭 소중히 챙겨서 갖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미 주신 불씨가 있는데 그 불씨를 끄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씨를 끄지 않기 위해서 성실과 끈기와 깊은 관심과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불을 끄지 말라 는 말씀을 세 번이나 거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불씨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레위기 9:24에 보면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단 위에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니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불을 꺼지지 않게 항상 제단에 불을 피우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제단 위의 불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때까지 결코 꺼진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번제는 아침과 저녁에 드렸습니다. 저녁번제 드린 후에 그 불을 밤새도록 지펴서 다음날 아침 제사 드릴 때까지 불을 붙여 놓아야 합니다. 이 불이 꺼지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며 하나님의 사유의 은총과 축복이 단절된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10:1-2에 보면 제단의 불을 꺼뜨린 일이 있는데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하려다가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그들을 삼키니 즉시 죽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7:20 이하에도 성막 안의 등대의 불은 항상 밝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 밖의 번제단이나 성막 안의 등불은 똑같이 꺼지면 안됩니다. 구약의 이 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6에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사명의식이 희미해지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불이 꺼져가는 상태입니다. 다시 불붙여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속에 주신 사랑의 불씨, 믿음의 불씨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합시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시한번 우리 믿음과 심령에 불이 붙어 충성할 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이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왜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의 끊임없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계속적으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불이 없어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동물이나 곡물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침으로 죄를 속량함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전 중심의 제사에서 교회 중심의 예배로 바꾸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을 원치 않으시고 오직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이사야 40:6-8과 히브리서10:5-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몸을 속죄제물로 드리시므로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늘의 예배에서 그 맥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표현방식과 순서가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중심은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동시에 성도의 축복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것에 응답하는 표현입니다. 불을 끄지 말라 는 것은 제사를 계속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배를 계속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내 중심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드리고 싶지 않으면 안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으면 예배드리고, 없으면 못드리고, 한가하면 드리고, 바쁘면 못드리고,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고 그래서는 안됩니다. 내 형편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못드리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불이 꺼져가는 상태입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열심히 모이라 고 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과 주의 재림과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 3:1-5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게을리하고 예배에 대하여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그 심령의 불이 꺼지는 현상 스무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어디에 불을 피워야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번제단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곧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마음의 제단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눅 24:32에 보면 황혼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실망하여 낙심 중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저들과 동행하며 말씀을 풀어 주실때 저희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서로 말하기를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 마음 속에 불이 붙고 있지 않더냐? 고 했습니다. 마음 제단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됩니다. 열심은 끓어 오른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3에 성령을 불이라 고 했습니다. 출 3:24에는 하나님이 불가운데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의 불, 하나님의 불이 우리 마음에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 마음 제단에 이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렘 23:27에는 말씀이 불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말이 불이 되게 하고 불이 백성을 사르게 하겠다 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준행케 합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이 꺼지면 멸망의 불, 지옥의 불이 붙게 됩니다.
약 3:5-6에 보면 혀는 곧 불이요 혀가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고 했습니다. 혀는 통제할 수 없는 불입니다. 불이 사르는 힘을 가지고 있듯이 혀는 다른 사람의 인격과 믿음을 사르는 무서운 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옥에서나 말해져야 할 말들이 그 입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그 마음에 지옥불이 타고 있는 것입니다. 혀는 작은 것이지만 죄악의 바퀴를 돌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삼상 21:과 22:에 보면 다윗이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도망다닐 때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왕에게 놉에 있는 제사장이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말 한마디가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옥불이 내 마음에 붙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고 하나님의 말씀의 불이 활활 타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태워지는 것입니다. 냄새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화제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불이 타올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고귀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떻게 불을 꺼지지 않게 합니까?
본문 12절을 보면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올려 놓아야 합니다. 나무는 아무 나무나 올려 놓는게 아닙니다. 모양이 뒤틀렸거나 벌레가 먹은 것은 안되고 좋은 나무만 올려 놓았습니다.
눅 23:31을 보면 예수님 자신을 나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벧전 2:24에는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나무는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나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을 십자가로 연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원수 마귀가 볼때 하나님의 아들이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죽어간 비참한 실패의 종말로 여길 것입니다. 마귀의 승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지극히 짧은 승리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승리로 끝난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토니 캠폴로(Tony Campolo) 목사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기 교회에서 지금은 금요일이지만 주일은 오고 있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 한편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켜 유명한 설교가가 되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아침과 함께 생각할 때 구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십자가가 있는 금요일일지라도 곧 부활의 아침인 주일이 오고 있음을 믿을 때 십자가의 고난과 혹독한 환난도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거룩한 금요일과 승리의 부활절 사이는 광대한 거리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날 하나님과 함께 웃을수 있도록 지금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신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따를 때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살전 5:19 이하의 말씀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의 말씀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 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이 불을 끄지 않는 방법이며 말씀을 멸시치 않아야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했습니다. 다른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세상 나의 가는 길을 비춰줄 등불과 빛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이요 구원이요 빛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단 위의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과 충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우리 마음에 성령의 뜨거운 불이 활활 타게 하여 우리의 충성과 헌신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단의 불을 끄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단의 불을 끄지 말라
레 6:8-13 / 박봉수 목사
원시시대에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벼락이나 산불과 같이 자연적으로 생긴 불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다 나무 마찰을 통해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조금 더 발전해서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을 일으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집집마다 필요할 때 불을 일으켜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불씨를 보존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동굴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고, 나중에는 화로를 만들어 그 안에 불씨를 보존하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비교적 최근 19세기에 와서 성냥이 발명되고, 20세기에 라이터가 발명될 때까지 인류는 이 불씨를 지키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불을 신성하게 여겨서 이 불씨를 보존하는 일을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여겨왔습니다. 이 불씨를 보존하는 일이 그 집안의 흥망과 연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한 집안의 불씨는 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사갈 때 그 불씨를 화로에 담아가기까지 했습니다.
며느리는 시집오면 시어머니로부터 그 불씨를 전수받았습니다. 이제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일과 함께 이 불씨를 보존해야 하는 일은 시집온 며느리의 준엄한 사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는 강력한 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에게 준엄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 그것도 반복해서 세 번이나 주어집니다.(9, 12, 13)
그렇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의 가장 주된 사명 가운데 하나가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제물이 드려지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제단에서 제물이 드려지지 않는 시간에도 불은 끄지 말고 계속 타오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에 아침 상번제를 드리고 난 후 종일 여러 가지 제사가 드려집니다. 저녁에 다시 저녁 상번제를 드리고 나면 그날의 모든 제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제사가 드려지지 않는 밤중에도 계속 그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사장들이 꼭 지켜가야 할 임무였습니다.
제단의 불은 무엇입니까?
우선 이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불입니다.
레위기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첫 번째 제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말씀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다 나온 뒤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9:24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하늘에서 불이 임해서 제단 위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그 제단 위에는 아론이 붙여 놓은 자연적인 불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불은 다른 자연적인 불과는 다른 거룩한 불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단의 불은 아주 특별한 불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불과 구별되는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불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불은 오직 이 불로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불입니다.
레 10:1-2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제사장이 성막에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불에 타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입니까? 제단의 그 거룩한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했기 때문입니다. 레 16:12를 보면 제단의 그 불로 분향하라 했는데 저들이 그 제단 불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든 불로 분향을 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리고 1:13, 1:17, 2: 2, 2:9, 3:5 등등 계속해서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바로 이 제단의 불로 제물을 태워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제사가 여호와께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불로 제물을 태워드린 제사만 기뻐 받으셨습니다. 다른 불로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고 오히려 진노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불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불입니다. 이 불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고, 이 불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제단의 불은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줄까요?
행 2:1-4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불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제단의 불은 오늘 우리에게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롬 4:14를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불이 임하시면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요 4:24를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령의 불이 임하셔서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 성령이 불로 임하셔야 합니다. 이 성령의 불이 오늘도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왜 제단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까?
우선 이 불은 다시 붙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은 꺼지면 다시 붙일 수 있습니다. 성냥이나 라이터로 간단히 다시 붙일 수 있습니다. 요즘 가스레인지에는 자동 점화장치가 있어서 성냥이나 라이터도 필요가 없습니다. 스위치만 켜면 저절로 다시 붙습니다. 그러나 이 불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붙일 수 있는 불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다시 붙일 수가 없습니다.
한 청년이 성경공부 도중에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 강도가 참 부러워요? 제멋대로 인생을 즐기고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 만나서 구원 받아 천국 갔으니 말이예요. 저도 세상 재미 좀 보다가 나이 들어 세상 떠나기 전에 주님 앞으로 돌아올까봐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혹시 이 청년처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 청년이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고 싶으면 언제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다니다가 쉬고 또 쉬다가 마음 내키면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려면 성령이 역사해야 하고,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도 다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불을 꺼뜨리면 안됩니다. 우리 마음대로 다시 붙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불이 있어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이 꺼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출 29:4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제단의 불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그 때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단에 불이 꺼지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는 명령에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저들 중에 거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다시 말하면 이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를 때 우리는 하나님과 아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이 성령의 불이 약해지거나 꺼지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현격하게 약화됩니다. 결국은 단절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19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여기서 소멸이라는 말은 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불이 우리 심령 속에서 결단코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성령의 불이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올림픽의 상징은 “성화”(sacred olympic fire)입니다. 이 성화는 올림픽이 시작되기 직전 고대 올림픽 개최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태양으로 점화합니다. 그리고 올림픽 개최지까지 릴레이로 봉송합니다. 개회식 때 성화대에 점화하여 올림픽 기간 내내 밤낮으로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다 올림픽이 다 끝나고 폐회식 마지막 순간에 꺼집니다.
이것은 올림픽이 개최되는 동안 올림픽 정신이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상징입니다. 신성한 경쟁, 우호 그리고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온 지구촌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기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림픽 기간 동안 성화가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성화가 꺼지면 올림픽이 끝이 난 것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꺼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풍성한 삶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성령의 불을 꺼뜨리면 안됩니다.
어떻게 제단의 불을 끄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선 재를 치워야 합니다.
본문 10-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한 마디로 계속되는 제사로 인해 제단에 점점 쌓여있는 재를 치우라는 말씀입니다.
모닥불을 오래 피우다 보면 나무가 타고 남은 재들이 수북하게 쌓입니다. 계속해서 모닥불을 피우려면 이 재들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산소 공급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새로 넣은 나무가 불꽃 한 복판으로 연결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 재는 불이 활활 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꾼입니다.
제단 위에는 더 했습니다. 쉴 새 없이 제사가 계속됩니다. 타고 남은 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갑니다. 나무를 올려놓을 자리가 없습니다. 제물을 놓을 공간도 없습니다. 산소 공급은 말할 것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이 재를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 불을 꺼뜨리지 않고 활활 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마음에 갖가지 영적인 재가 쌓입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죄와 허물입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저지릅니다. 또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죄인 줄 모르고 저지릅니다.
둘째로 원망과 불평입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원망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불평이 찾아듭니다.
셋째로 자기 자랑과 교만입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중에 남보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찾아듭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자기가 제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재를 치워야 합니다. 이런 재들이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그대로 두면 점점 불이 약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불이 꺼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땔감을 계속 공급해야 합니다.
본문 12-13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한 마디로 계속 나무를 공급해서 불이 계속 붙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무엇일까요?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다시 불 일듯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일에 몰두하게 될 때 우리 마음속의 성령의 불은 약화됩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사람을 깊이 담아두고 있고, 상황과 사건을 깊이 생각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의 성령의 불은 약화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은 우리 속에서 불 일듯 일어나 뜨겁게 역사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심령의 제단 위에 말씀을 놓아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공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고전 3:16을 보면 우리가 성령의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욱 그 불이 일어나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 6:8-13 / 연재원 목사
미국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박사가 1997년 발표한 ‘Finding Flaw’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서출판 ‘해냄’에서 ‘몰입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번역으로 지난 10년동안 20만부나 판매된 스테디 셀러입니다. 이 책에서 미하이 박사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 목적을 두고 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행복감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몰입’ ‘몰두’ ‘집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의지가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맞다’라고 여기는 감정과 ‘목적성’ = ‘무슨일이 있어도 해야되는 일이다’ 이 두가지가 합쳐질 때 엄청난 힘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Flaw = ‘몰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Flaw 라는 단어는 ‘결함’ ‘약점’ 이라는 뜻도 있지만 ‘돌풍’ ‘폭풍’이란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목적성을 두면 ‘돌풍’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몰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명’에 몰입했습니다.
‘주님일’에 몰입했습니다.
‘복음전도’에 몰입했습니다.
‘말씀’에 몰입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행20:23,24절 말씀을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결국 사도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살아있는 목적이 주님께 받은 사명, 곧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최선을 다할 때 열정을 쏟아 일할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열정을 품고 살아갈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주님안에서 열정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몰입’해야합니다.
‘오직 주님!’ ‘오직 말씀’ ‘오직 사명’ 집중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레위기 본문 말씀은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방법중 ‘번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번제’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문으로 hl;[ = ‘올라’ 라는 단어입니다. 단어적 의미로는 ‘오르막길’ ‘계단’ 이런뜻입니다.
번제는 희생제물을 드릴 때 새나 가축등 드려지는 그 제물을 제단위에서 불태워 제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앞서 레위기 1:1-1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의 원칙’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6:8-13절에서는 ‘제사의 절차,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제사는 오늘날 ‘하나님께 대한 예배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재물을 불로 태우는 예배’행위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번제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다.
“번제물은 단 윗 석쇠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하라.”
즉 밤새도록 번제단에는 번제물이 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다시 새로운 번제물을 올려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출애굽기 29:41절입니다.
“한 어린 양은 저녁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라고 하십니다. 번제단에서는 끊임없이 제물이 타서 연기가 올랐습니다.
즉 이것은 예배가 끊겨서는 않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구약시대의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였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출애굽기 29:42,43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이어서 45,46절을 봅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즉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행위’ ‘ 충성’ ‘ 헌신’ 이것이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늘 삶의 예배를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는 끊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가운데서 거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수많은 번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꺼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중단되는 것은 곧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 아름다운 덕소가족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불이 꺼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끊어져서는 안되는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번제단 위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헌신과 충성, 그리고 예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번제단 위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그 불을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 백성을 향해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귀한 언약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 번제단의 불을 주의를 기울여서 잘 보존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민4:13, 14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광야길을 걸을때도 특별히 불 담는 그릇을 만들어 그곳에 번제단의 불을 담아 이동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우리의 번제물은 계속 타올라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갈망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아름다운 덕소가족들의 심령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으면 불 꺼진 제단과 같이 됩니다. 이처럼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 헌신된 열정의 예배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열정을 회복할때가 되었습니다.
기도의 열정
찬송의 열정
헌신의 열정
섬김의 열정
봉사의 열정
사명의 열정
복음전도의 열정
막 13:35-3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세계적인 기업 코카콜라는 ‘아사 캔들러’ 라는 분이 창업을 했습니다.
물론 시작은 1886년 애틀랜타의 약제사인 J.S. 펨버턴(1831~1888)이 코카의 잎,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하는 음료를 만들어 ‘코카콜라’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약제사인 캔들러가 제조 ·판매권을 매입하여 1919년 현재의 회사조직을 설립하고 청량음료로서 판매를 개시하기 시작하여 정식적인 코카콜라 회사가 태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사 캔들러’라는 사람은 원래 알코올 중독자 였습니다. 매일 술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몇 번이고 술을 끊어보려고 했지만 의지가 약해서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아내늘 매을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술에 취해 집으로 가던중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이기는 사람이 성공한다.”
깜짝 놀랐고 걸음을 재촉해서 집으로 와보니 아내가 그시간 자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캔들러는 길에서 들은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약을 하고 기도하면서 금주에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열정을 회복합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작은 수입에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면서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이 사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고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 기업이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심지어 그는 성공의 비밀을 묻는 기자에게 “내 혈관 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고 흐르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관계가 꺼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헌신의 불, 섬김의 불, 사명의 불이 꺼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열정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성전에서 두 번째 예배를 드립니다.
이 축복된 선물을 받은 우리 모두가 영적인 불이 타올라 하나님보시기에도 부끄럼없는 멋진 교회로 세워지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위의 불로 꺼지지 않게 하라
레 6:9-13 / 피종진 목사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두 차례씩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때 저녁에 드린 희생 제물이 다음날 아침까지, 또 아침에 드린 제물이 그날 저녁까지 계속 타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 위에 불이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타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충성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단은 오늘날 ‘교회’를 상징합니다. 번제단 위에 타오르고 있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교회에는 항상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야 합니다. 성령의 불은 기도(계 8:3)와 말씀으로 타오릅니다. 특히 기도는 잠시라도 쉬면 안됩니다(살전 5:17, 삼상 12:23).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에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감당하거나, 소원을 이루고 기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떠나면 실패하게 됩니다. 혹 실패했어도 하나님을 만나면 성공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6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둘째, 어두움의 권세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기도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사탄이 근접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가정, 기도하는 자녀, 기도하는 기업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하여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마 7:7).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넷째, 환난 날에 건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많은 사람들이 ‘천재지변 혹은 질병, 사업의 실패’ 등으로 환난을 당하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몸부림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자시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환난 날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다섯째,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5~17)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행 4:31). 성령을 받으면 은사가 임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8~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타오르고 있는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말고 항상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에 힘써서 하나님을 만나고, 어두움의 권세에서 승리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고, 환난 날에 건짐을 받으며, 성령을 받아 능력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