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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넌, 그냥 너야. 그 자리에서 평생토록 기억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야."
"...... 밥, 먹으러 가자."
친구의 고백
벌써 니가 떠난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가을의 끝자락에 머물렀다. 이미 니가 떠난지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난 일곱 살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나이를 더 먹었다. 물론 너도 그랬겠지. 겨울이 다가오는 날씨여서 그런지 너무나도 을씨년스러운 날씨였고, 내 마음도 날씨처럼 추웠다.
아마도, 니가 떠나고나서부터였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넌 참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자립심 강하고 생활력 강하고, 힘들어도 힘든 내색 한 번 안하고. 똑바르지 않은 것은 죽어도 싫어하고, 중학교 땐 남녀 구분없이 어쩌다가 한 번 호기심에 피워보는 담배도 질색했기에, 난 너 때문에 친구들도 다 피는 담배 한 번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니가 하는 대로, 너를 보는 대로 따라하게되고, 너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길들여졌는지.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널 이렇게 그리워하고 생각하게 된 때가.
뜬금없이 유학을 가버린다 하고 어디로 가는지, 주소조차 한 줄 남겨주지 않고 넌 훌쩍 떠나버렸다. 중학교를 마치고였나... 그래, 졸업앨범에 너의 환한 웃음띈 얼굴이 한 구석에 딱 자리잡고 있는 걸 보니, 중학교는 마치고 갔었나보다. 그렇게, 너는 열 일곱살에 나에게 공허함만을 남겨놓은 채 떠나고 말았다. 그냥 한 번의 웃음만을 남겨주고, 그렇게, 옅게 연기가 퍼져나가 없어지듯이, 넌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내가 스물 네 살이 되기까지, 벌써 7년이구나...
너 때문에 피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굴까.. 언제부턴가, 난 모르는 전화번호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받곤 했다. 물론, 모두 허탕이었지만. 속는 셈 치고, 다시 한 번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 야.
"...... 누구세요."
- 민도현 핸드폰 아니에요?
"...... 맞는데. 누구세요."
- ....흠... 누군지 맞춰봐요.
웬 미친여자야. 하고 끊으려는 찰나, 갑자기 머릿속에 빠르게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설마.
"....이... 다현..."
- ...... 맞췄네. 나, 돌아왔어.
방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니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니가, 거짓말처럼 말했다. 나, 돌아왔어- 라고.
*
너의 전화를 받자마자, 난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고 3 수험생이 된 내 동생이 독서실을 다녀오겠다며 현관에 서있을 찰나, 내가 문을 벌컥 열어제끼자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닌가보다. 형 이라며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녀석을 뒤로 하고, 냉큼 내 방부터 들어가 침대로 골인했다.
두근두근을 뛰어넘은, 쿵쾅대는 내 심장소리가, 널 얼마나 보고싶어했는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게, 몇 년만이던가. 널 본 지가... 벌써 7년이다. 7년이란 세월동안 나도 많이 변했다. 그만큼, 너도 많이 변해있을까.
돌아왔으니까, 너부터 봐야겠어- 라는 말을 들은 나는, 허둥지둥 일어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이면 니가 나에게 멋지다는 말을 할까. 옷이란 옷은 있는 대로 꺼내 대보고 입어보고, 그러다 웃음이 나왔다. 무슨 남자친구 만나러 나가는 여대생도 아니고, 이렇게 옷가지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꼴이라니. 그러다, 겨울은 특히나 싫어하는 너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조금은 두툼한 코트에 목도리를 골랐다. 천천히 옷을 입고, 열심히 꽃단장을 한 뒤, 거울을 보았다. 그래, 이 정도면. 이 정도면 되겠지.
"다녀오겠습니다."
"넌, 들어온 지 30분밖에 안 지났어. 어딜 또 나가?"
"엄마, 다현이 왔어."
"어머, 다현이? 그 키크고 예쁜?"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니 이름 석자가, 우리 집안에 이런 존재였던가. 순간 흐뭇해졌다. 다녀올게요, 라며 신발을 신는데, 엄마가 나가려는 나를 붙잡는다.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주머니 속에 무언가를 챙겨준다.
"다현이 왔다며. 맛있는 것도 사 먹이고, 같이 놀러다니고 그래. 남자가 그 정도는 해줘야지."
"엄마, 나도 돈 있는데. 그래도 엄마 아들인데 돈 버는거 있어요."
"특별 용돈이라 생각하고 받아. 다현이 때문에 주는 거니까 너 혼자 쓰지 말고."
"... 알겠어요. 다녀올게."
돈을 두둑하게 챙겨주는 엄마에, 난 한번 씩 웃어보이기만 하고는 얼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대 카페에서 보자는 너의 말에, 난 니가 자주 가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시끌벅적한 홍대의 저녁과 밤을 좋아했다. 들어가지는 못해도 클럽의 신나는 음악소리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리듬을 타고,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들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홍대의 색색들이 들어선 예쁜 카페에 앉아서 달다 못해 쓰기까지 한 카페 모카를 마시는 것도 좋아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발걸음은 어느 새 니가 있을 것 같은 카페 문앞에 다다랐다. 딸랑, 7년이 지난 지금도 여기는 여전히 예쁘게 소리나는 종이 달려있었다. 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렸다. 니가 어디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서. 그 때였다.
"민도현..?"
"......"
낯익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니가 서 있었다.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키는 여전히 컸지만, 더 마르고, 더 여리여리해져버린 니가, 작은 얼굴에 큰 눈망울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예쁜 니가, 7년 전, 아니 16년 전부터 널 줄곧 봐왔던 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너무나 여위고, 너무나 가늘어진 니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다현아."
"야.. 완전 오랜만이네... 얼굴 까먹을 뻔 했다. 키 더 컸다, 너."
"너.. 왜 이렇게 말랐냐."
"응? 아, 그냥. 대학도 갔고, 졸업도 했고. 일도 좀 하고.. 그랬지 뭐.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봐."
"대학? 어디."
"중국에서. 중국 유학했잖아. 나 거기서 그래도 꽤 명문대 나왔어. 하하.. 니 친구 자랑스럽지?"
그 큰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며 웃는데, 정말이지 니가 맞았다.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널 안았다. 카페 한 중간에서, 너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게 느껴지면서 날 퍽, 하고 때리는 니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난 널 안고 하하, 이다현 왔네. 라며 바보같이 그 한 마디만 던져버렸다. 버둥거리던 니가, 너도 어이가 없었던지 픽 웃으며 내 등에 팔을 둘렀다.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야. 너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다시 한 번 울렸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 너무나도 보고싶던 얼굴. 그게, 7년만의 너였다.
*
"어떻게, 넌 연락 한 번이 없냐. 이렇게 오기 전까지.."
"바빴어, 할 것도 많았고... 내가 워낙 욕심이 많잖아."
"진짜, 16년지기 친구라는 녀석이. 이제서야."
"그래도... 엄마 아빠 보고, 할머니 뵙고, 너 제일 먼저 찾아온거야. 제일 먼저 연락했다구."
'제일 먼저' 라는 말에, 난 또 한번 픽 웃었다.
"어어, 못 믿는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너에게 난 아니, 라고 말하며 웃었다. 뾰루퉁한 표정을 짓던 너는, 아차 하며 무언가 생각난 듯 가방을 뒤적였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난 널 한번 더 내 눈에 담았다. 가늘어진 손목, 염색을 했는지 와인 빛이 나는 올려묶은 머리, 작은 얼굴을 다 뒤덮을 만한 커다란 뿔테 안경, 더 말라버린 체구. 말랐어도 얼굴은 통통했던 너의 얼굴이 너무나 말라버려서, 마음이 아파왔다. 그 때, 니가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물!"
"어...? 뭐야."
"선물. 사실은, 나 월급타고, 할머니 선물 사고, 아빠, 엄마 선물 사고, 동생 선물도 사고.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니 선물이 제일 급하더라."
"선물..?"
"응. 안 풀어볼꺼야?"
풀어보라는 너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당겼다. 상자 뚜껑을 열자, 조그마한 다이어리와 향수가 들어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니 니가 좋아했기에 내가 좋아하게 된 그 향수였다. 청량한 향이 나는.
"너, 꼼꼼하잖아. 다이어리 샀어. 그리고.. 향수, 아직 이거 쓰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흠... 고마우면... 나, 어디로 데려가 줘."
"어디로?"
"음... 시끌시끌하고, 사람 많고, 재밌게 놀 수 있는 곳으로."
어딜까, 생각하다 갑자기 떠올랐다. 밤에 늦게 둘이 돌아다니면, 니가 시끄러운 음악에 흥얼거리던 곳. 난 몸을 일으켰다. 너도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니가 갑자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꼈다. 춥다며, 좀 빌린다- 라며 능청스레 나에게 달라붙은 너 때문에, 내 심장은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 뭐야, 왜이래."
"야.. 조선시대 살고 있냐? 친구 오랜만에 봤는데 팔짱 좀 끼자. 아, 추워-"
조금은 허스키한 너의 목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조선시대 살고 있냐니, 너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라며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주워들은 소리야. 라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너는, 정말이지 많이 변했다.
*
클럽안의 열기는 대단했다.
번쩍거리는 불빛들과 음악에 몸을 맡겨 리듬을 타는 많은 사람들. 너는 활짝 웃으며 나를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들과 가끔 오긴 했었지만, 오늘의 느낌과는 너무 달랐다. 니가 웃는다. 아- 정말, 이런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어- 라고, 니가 말했다. 자리를 잡은 후, 너는 뭐랄 것 없이 혼자 나가 리듬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난 그런 너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도 신나고, 그 마른 얼굴에서 생기를 되찾은 것 같은 너의 표정에 난 픽, 또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너의 주위에 남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너는 나를 한 번 슥, 쳐다보더니 슬며시 미소지었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나와는 달리, 여유만만한 너의 표정은, 날 조금씩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네가, 앞에 있는 남자들에게 속삭인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때, 네가 그 남자들을 제치고 나에게로 걸어왔다.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를 띈 채. 난 여전히 굳어져 있는 표정으로 널 타박했다.
"넌 임마, 남자들한테."
내가 한 마디 하자, 너는 나에게 한껏 웃으며 나에게 손짓을 했다.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네가 말했다.
"내가, 저 남자들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도리도리, 내가 고개를 저었다.
"누구랑 왔냐고 해서, 남자친구랑 같이 왔어요- 라고 했어."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도 키득키득 웃으며, 나에게 다시 말했다.
"저 사람들도 어이없을거야. 왠 미친 여자길래 자기 남자친구랑 클럽에 왔는지 이해도 안될거야. 그치."
그렇게 말하며, 넌 내 앞에 놓여있던 맥주를 한 모금 기울였다. 그러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너를 바라보느라 시간이 얼마나 가는지도 몰랐던 나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클럽에 들어온 지 세 시간이나 지났다. 많이도 놀았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난 다시 가방과 외투를 모두 돌려받고는, 밖으로 나왔다. 너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나의 고개가, 한 구석에 멈추었다.
거기에서 너는, 하얗게 연기를 뿜으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 이다현."
"....어, 도현아. 왜 나왔어.."
내 목소리를 듣자 당황한 듯 담배를 꺼버리고는 일어나는 너였다. 성큼성큼 너에게 다가가 외투를 입히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알싸한 담배향과 너의 꽃향수 향이 섞여 코끝을 찔렀다. 언제부터 시작한거야, 나즈막히 묻자, 유학 하고나서부터란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난 너를 붙잡고 다짜고짜 벤치부터 찾았다. 차가운 나무의자에 몸을 맡기고, 너에게 물었다. 왜냐고.
"그냥. 스트레스 때문인지도-"
"얼버무리지 말고. 왜. 너 담배 싫어했잖아. 그렇게 질색하더니."
"하하... 그냥 힘드니까. 그렇게 되더라."
목메인 니 목소리가, 내 마음 한켠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었냐."
"..."
아무말 없는 니가, 그냥 내 어깨에 기댄다. 떨리는 니 어깨가 느껴졌다.
강한 척 했지만 많이 힘들었구나. 너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너의 그 더욱 가늘어진 어깨가, 가늘어진 손목이, 가늘어진 다리가. 말라버린 얼굴이, 너의 커다랗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음이 가득해진 눈망울이 위태해보였던 건, 내가 너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아무래도, 아무래도- 너의 그 7년간의 삶의 무게때문이었으리라.
그날 밤, 아니, 어느덧 추워져버린 새벽에, 난 나의 어깨로 너의 하염없는 눈물을 다 받아내었다.
*
한 달 정도가 흘렀을까.
나는 매일 너에게 전화를 했다. 뭐하냐고, 심지어는 심심하다며 투정 아닌 투정도 부려가며, 너를 귀찮게 해댔다. 하지만 넌 군말 않고 언제나 나와 전화통화를 했다. 하지만, 항상 나오라고 말하는 쪽은 너의 쪽이었다. 난 한 마디 귀찮다는 말 없이 너와 만났다.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카페에 앉아 어느새 달라져버린 너의 커피 초이스에 맞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너와 함께 나눠 마시고, 이런 저런 - 가끔은 묵묵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 이야기들을 하고, 공연도 보러 가고, 아무 생각없이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날은 어느새 늦가을에서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겨울로 둔갑해버렸다. 하지만 너는 시간이 아까운 듯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보냈다.
- 민도현.
"어. 왜."
처음이었다. 너에게 먼저 전화가 온 건. 다짜고짜 나의 이름을 부르는 너에, 난 조금 당황했다.
- 나와. 술 마시자.
"갑자기 왠."
- 나. 할 말 있어.
불안해졌다. 다시 또 웃음만을 남기고 네가 7년 전 그날처럼 떠나갈까 봐.
"무슨 일인데.."
- 얼른 나와. 보고 얘기해야 돼.
".....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누워있던 난 냉큼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전화를 해 보니 우리 집 앞이란다. 난 얼른 내려가 너를 맞았다. 언제나, 반달 모양으로 눈이 휘어지도록 나를 보고 웃는 너는, 전혀 변함없는 이다현이었다.
동네에 조그마한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를 시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너는, 왠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잔만 연신 기울여댔다. 설마.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걱정이, 현실로 되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난 널 또 그리워할지도. 널 놓쳐버리고 다시 후회할지도.
"도현아."
"... 말해.'
"나... 다시 떠나."
"..."
"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무슨 일인데. 라고 묻자, 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또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의 팔을 잡고, 무슨 일이냐고- 라며 되묻자, 그냥, 아직 할 일이 많아. 라며 또 다시 그렇게 웃었다. 7년 전처럼, 그렇게.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넌,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한 달동안, 너무너무 재밌었어.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
"나, 다시 돌아와. 음... 언제가 될 지는, 잘 모르겠는데."
"..."
"아마, 7년 전에 떠났던 것처럼, 오래 걸릴지도 몰라. 아니면 더 오래-"
"후..."
한숨이 나왔다. 너를 다시 보내야한다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듣고 있는 내가 싫어서였다.
너를 보내기 싫다고, 널 사랑한다고 하고 싶은데. 니가 떠나고나서부터, 아니 니가 떠나기 전부터 난 줄곧 너만을 보고 너만을 생각하고, 니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니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고, 언제부턴가, 너에게 길들여져 버렸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데. 친구들에게 병신이라고, 짝사랑 귀신이라고 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너만을 바라봤는데, 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니가 떠난다는 그 소리에, 난 바보같이 덩그러니 앉아 너의 말을 담담하게 듣기만 하고 있다.
가지 말라고, 널 사랑한다고... 그 소리가 목까지 차올랐지만, 너의 얼굴에 서려있는 그 슬픔에 무어라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 다음주 수요일에 떠나."
"...그 전에."
"..응?"
"그 전에, 우리.. 딱 한 번만 보자. 이번 주 토요일."
"... 그래."
서운한 듯, 아니면 침착한 듯. 대답하는 너의 목소리에, 그 밤은, 아무 말없이 서로 맥주만 연신 들이켜댔다.
*
너에게, 고백해야지. 라고, 마음먹었다. 니가 가기 전,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난 며칠 전부터 생각해 놓았던 목걸이를 샀다. 열심히 포장도 하고, 너와 만나기로 한 시간도 훨씬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쳐놓은 후, 나는 혼자 미친놈처럼 거울 앞에 서서 몇만 가지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떻게 표정을 짓는게 좋을까,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마치 정신줄을 한껏 놓은 것마냥, 나는 그렇게 너와 만나는 시간을 기다렸다.
전화가 울리고, 난 받기 전에 집을 나왔다. 여보세요-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에 울렸다.
- 나, 그냥 오늘은 어디 안 가고, 밖에만 있고 싶어. 집 앞이야.
"알겠어. 기다려. 금방 내려가."
서둘러 내려가니, 네가 집앞에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가까웠지만 그래도 꽤 먼 거리여서인지 너의 볼이 발그스레했다. 손도 얼어있었다. 난 너의 손을 냉큼 잡아 내 코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자, 나의 목소리에, 너도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우리는, 여정없는 길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점점 더 까매졌다. 가로등불이 하나, 둘 켜지고, 우리는 끝없이 걸었다.
"아, 배고파."
뜬금없이, 네가 말을 꺼냈다. 서먹한지, 내 코트에서 손을 빼내고는, 너는 너의 코트 주머니로 너의 손을 가져갔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걷다가, 내가 멈춰섰다. 그리고, 너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다현."
니가 멈춰선다. 돌아보지마, 라는 나의 말에, 가만히 그 곳에 서있는 니가, 가로등불 아래 서있는 너의 뒷모습이, 나를 설레게 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 할 말 있는데."
"..."
"니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고, 니가, 니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
"비록, 난 친구로.. 니 옆에 남지만,"
"..."
"나에게 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야."
네가, 가만히 서있다. 날 돌아보지도 않는다. 난 한 걸음, 한 걸음 너에게로 다가갔다. 너와 나의 간격이 다섯 보 쯤으로 좁혀졌을 즈음, 너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서게 했다.
"그럼,"
"..."
"사랑 말고, 너에게 나는.. 뭐야?"
너는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답했다.
"나에게 넌..."
"..."
"... 그냥 너야."
"..."
"그 자리에서 평생토록 기억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야."
한걸음, 또 한걸음, 또 한걸음, 한걸음, 나머지 한걸음. 나는 너를 살며시 안았다. 너는 가만히 있었다. 한달 전 나를 봤을 때처럼 버둥거리지도, 나를 때리지도 않았다. 다만, 너의 손은 너를 감싼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너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사진기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평생토록, 날 기억하라고. 너는 천천히 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밥, 먹으러 가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넌 얘기한다.
"...나, 비싼 거 먹어도 되지?"
"... 얼마든지."
그렇게 넌, 다시 나에게 입을 맞춰온다.
너와 나의 16년 우정은, 아니 16년간의 나의 짝사랑은, 다른 것으로 시작됐다. 너와 나의 사랑으로.
*
처음으로 단편을 쓰네요.
시험이 아직 다 끝나질 않아서 (중국유학중) 스트레스 막 받고 있는데 갑자기 필 팍! 받아서 끄적끄적거려 올립니다.
막 탄탄하지도, 재밌지도 않은 어째보면 지루하기 짝이없는 스토리지만
그냥 순수한 청년의 짝사랑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아, 번외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많이들 봐주신다면요^^* 하하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런 극찬을...감사합니다. 번외는 시험끝나면... 아하하
ㅎㅎㅎ 재미있어요~ >.,< 중국유학 중이라니 힘드시겠네요~
힘내세요~ 화이팅~
건필~ 건필~ ^^*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열심히 힘내서 시험 잘볼게요 ^^
부럽네요ㅠ 여자주인공~!! 재밌게 잘봤습니다~ 주위에 저런친구 없나요?;;
저도 정말 저런 친구가 있음을 상상하며 ㅠㅠㅠ... 썼답니다. 왜 주위에 저런 멋진녀석들이 없을까요 ㅠㅠ 감사해요. 재밌게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여자는 왜 계속간걸까요>????담밴또왜피고,,,,,,,휴.........난 여주가 아파서 죽는줄알았는데ㅋㅋㅋㅋㅋㅋㅋ뭔가 반전이라면 반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