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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미국에서 첫 발견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1981년
6월 5일AIDS(후천성면역결핍증)을
처음 보고했다.
에이즈는 1950년대 말 아프리카 녹색
원숭이에게서 전파됐다는 가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에이즈 감염경로는 70%가 성접촉이지만
수혈이나 주사기를 통해서도 쉽게
전염된다.
잠복기를 거쳐 일단 발병하면 이후 평균
수명은 고작 1.8년.에이즈바이러스
(HIV)는 8~12시간마다 복제를 하고
그때마다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에이즈는 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성 개방 풍조는 다소 진정됐으며 동성
연애자들에 대한 적대감은 누그러졌다.
‘자이언트’ 등 명화에서 열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1985년 에이즈로
사망한 사건은 에이즈에 대한 세계인의
경각심을 극적으로 고취시켰다.
미국의 다이빙 영웅 그레그 루가니스도
1994년 에이즈 감염사실을 고백했고,
미국의 농구 스타 매직 존슨도 1991년
에이즈 감염사실을 털어놓고 예방운동에
합류했다.
2001년 6월 현재 전 세계 감염자수는
3600만명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에선 1985년 해외 근로자였던
내국인이 처음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이래 2001년6월까지 1350명이 에이즈
감염자로 공식 확인됐다.
▶2015년한국 현대 자수(刺繡) 예술
선구자, 박을복 여사 별세
▶2009년라지브 모트와니 교수 별세
구글의 창업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라지브 모트와니(Rajeev Motwani 47)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자택 수영장에서 2009년 6월 5일(현지시각)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으며, 현지 언론매체들은 캘리포니아주 애서튼의 자택에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하던 모트와니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어둠 속에 발을 헛디뎌 수영장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모트와니 교수는 구글의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학생일 때 이들의 멘토 역할을 했던 컴퓨터 공학자다.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오늘 우리가 테크놀로지의 한 조각을 사용한다면 거기에는 라지브 모트와니의 일부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래리와 내가 후에 구글의 창업으로 이어질 연구를 시작했을 때 모트와니 교수는 우리를 지지해 주고 지도해 줬다”고 적었다.
모트와니의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기법은 수학적 알고리즘이 구글의 웹 검색에서 이용되는 방식에 영향을 줬으며, 모트와니 교수는 실리콘밸리의 많은 IT 벤처들의 초기 창업과정을 지원한 영향력 있는 투자가이기도 했다.
인도 출신으로 뉴델리에서 성장한 모트와니 교수는 미국에 유학,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에서 컴퓨터공학 박사를 취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두 딸이 있다.
▶2009년중국 충칭 광산지대에서 산사태
중국 남서부 충칭(重慶)직할시 우룽(武隆)현 광산 지대에서 2009년 6월 5일 산사태가 발생, 광부와 인근 주민 87명이 매몰됐고 6일 오전까지 이중 26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실종돼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날 사고는 우룽현 톄광(鐵鑛)향 지메이(鷄尾)산에 있는 한 광산이 일부의 오후 3시께 붕괴되면서 산사태를 일으켜 일어났다. 산사태로 100만여개의 돌들이 아래 계곡으로 굴러 광산 3개와 인근의 민가 6채를 덮쳐 87명이 매몰됐다. 산사태 초기에는 전기와 통신이 끊겼으나 구조대가 도착, 구조작업에 들어가 7명을 찾아냈다. 이중 3명은 중상이고 4명은 경상이다.
사고가 나자 보시라이(薄熙來) 충칭 서기는 즉각 현장으로 떠났고, 장더장(張德江) 국무원 부총리도 6일 오전 구조작업을 현장 지휘하기 위해 현지로 향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는 등 지도부에 비상이 걸렸다.
산사태 원인은 즉각 밝혀지지 않았으나 광산의 무계획적인 채광에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의혹이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작년 9월 8일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지 한달도 안돼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 타오쓰(陶寺)향 타산(塔山) 광산지구에서 산사태가 발생, 254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중국 당국은 광산의 불법 영업으로 큰 사고가 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관리 소홀 책임을 물어 8명을 구속하고 멍쉐눙(孟學農) 산시성장과 장젠민(張建民) 부성장을 경질하고 왕쥔(王君) 부서기를 대리성장으로 임명하는 등 문책성 인사를 단행했다.
▶2006년 제주항공 첫 운항.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신유고
연방)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
▶2005년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 달성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가 메이저리그 진출 12년 만에 100승 고지에 올랐다.
박찬호는 5일 새벽(한국 시각) 카우프만스타디움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로 등판, 5이닝 동안 11안타 6실점(4삼진)의 다소 부진한 피칭을 선보였지만 팀 타선의 폭발로 승리투수가 됐다.
텍사스의 14대 9 승리. 이로써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통산 542번째이자 동양인으로는 일본의 노모 히데오(121승106패·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 이은 두번째 100승 투수가 됐다. 280경기에서 무려 2만 5208개의 공을 던져 쌓은 금자탑이었다.
박찬호는 이날 승리로 생애 통산 100승 73패 방어율 4.22를 기록했다. 그는 “혼자 거둔 100승이 아니라, 팀 동료들의 공격 덕분에 승리했다.”며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해준 한국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4년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 사망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을 역임한 로널드 레이건이 10년간 알츠하이머로 투병해오다 폐렴 합병증으로 2004년 6월 5일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오늘날 레이건 전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되찾아주고, 미·소 간 냉전 종식을 가속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1911년 구두장수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지도자가 아닌 배우로서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자질은 영화배우가 아닌 영화배우 노조위원장으로서 뛰어난 정치력과 지도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그의 지도력은 1952년 두 번째 부인 낸시 데이비스를 만나 결혼하면서부터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분석적이거나 전략적인 사고를 하지도 못했고, 연설 때는 참모들이 메모 카드에 적어준 내용만을 소화해낼 정도였다.
그러나 의사전달 방식에 탁월한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TV를 매체로 국민들에게 직접 얘기했고, 종종 자신을 비하하는 즉흥적인 유머로 대중의 마음을 잡았다. 미국 언론은 좀처럼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는 레이건을 ‘테플론(Teflon·때가 잘 타지 않는 천)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레이건은 원칙주의자이면서 실용주의자였다. 1983년 3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를 만큼 증오했지만, 재임 8년간 고르바초프와 5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며 신뢰를 쌓아 결국 퇴임 3년째 발생한 소련 연방 해체의 기초를 닦았다.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인 1994년 11월 5일 그는 “내 생애의 황혼으로 이끌어 갈 여행을 시작한다”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음을 알렸다. 퇴임시 지지율 63%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66%)와 더불어 역대 대통령 중 최고였다.
▶2004년 6.5 재보궐 선거 실시
▶2003년 제주극동방송 창사 30주년
행사 실시(6.5~6.6) - 제주그랜드호텔
제주국제컨벤션센터
▶2002년 CIS 선교대회
▶2002년 모질라 1.0이 공개되다.
▶2000년제5회 세계여성대회
뉴욕서 개막
▶2000년 칠레 법원,
피노체트 면책특권 박탈.
▶2000년이만섭 국회의장 피선
▶1998년우주정거장 미르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와 마지막 도킹
1998년 6월 5일 새벽 지상 3백90km의 우주.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를 향해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천천히 다가갔다. 오전 1시58분. 마침내 미르와 디스커버리호 사이 ‘최후의 도킹’이 이루어졌다. 도킹 90분 뒤, 미르의 해치가 열리고 양측 우주 비행사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통산 9번째인 이번 도킹을 끝으로 3년째 진행됐던 미르와 미국 측 우주왕복선 간의 만남은 마침표를 찍게 됐다.
제7대 미르호 체류 미국인 승무원 앤드루 토머스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것이 디스커버리호의 임무였다. 그동안 미르에 탑재돼 있던 미항공우주국(NASA) 소유 실험 장비도 전부 수거돼 6월 12일 지구로 귀환됐다.
미르의 본체가 우주로 발사된 것은 지난 1986년 2월. 이때만 해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통치하던 냉전시절이었다. 이후 12년 간 러시아 우주인들이 번갈아 미르에 머물며 각종 자료수집과 실험 및 연구를 실시해왔다. 승무원 체류용 미르호 본체는 길이 13m, 폭 4m 규모다. 1987∼1996년에 걸쳐 ‘스펙트르’ 등 5개의 모듈이 추가로 발사돼 우주에서 본체와 결합됐다.
지금까지 지구를 모두 6만 바퀴 이상 돈 미르는 예정수명 5년을 훨씬 넘겨 장수하고는 있지만 잦은 잔병치레로 러시아 측을 당황하게 했다. 이번 최후의 도킹을 앞두고도 자동유도장치가 고장을 일으켰었다. 러시아 언론은 미르호의 고장 횟수가 무려 1천5백여 건에 달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후 미르호는 1999년 8월 28일 마지막 승무원 3명이 지구에 귀환함으로 공식활동을 사실상 마감했다. 그리고 2001년 3월 23일 당초 예상대로 피지섬 인근 남위 40도, 서경 160도의 남태평양에 추락, 15년 생을 마감했다.
▶1984년인도 펀잡주 시크교도 반란.
정부군과 교전 400여명 사망
▶1981년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발족
▶1981년전두환대통령. 남북한
최고책임자 정상회담 제의
▶1980년최규하대통령,
국보위 상임위원 30명 임명
▶1975년수에즈 운하 8년 만에 재개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자 폐쇄된 수에즈 운하가 1975년 6월 5일 8년 만에 운행이 재개됐다. 운행 재개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유일한 수로가 기능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이집트의 평화선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이 해 3월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평화를 위한 미 국무장관 키신저의 중재가 실패로 돌아갔고,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잘의 피살로 중동정세는 긴장을 더해갔다. 이런 와중에 수에즈 운하가 재개됨으로 이스라엘과의 긴장이 해소되었고 제5차 중동전쟁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운하 이용과 관광수입으로 얻어지는 경제 재건과 안정도 한 몫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날의 기념식전에서 "수에즈 운하를 재개하고 평화에의 헌신과 인류의 번영, 협력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1973년제1회 세계환경의 날
▶1972년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제13차 실무회의 개최
▶1972년신민당위원들
국회정상화와 비상사태 철회요구
▶1972년제1차 UN 인간환경회의 스톡홀름서 개막
둘도 없는 지구(Only one Earth)`를 주제로 한 UN주최의 첫 인간환경회의가 1972년 6월 5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개막됐다. 이 회의는 1968년 제4회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스웨덴 정부가 제창한 이후 준비돼온 회의로 세계 112개국에서 약 1천2백여명의 정부대표가 참석했다. 11일간에 걸친 회의는 논란을 거듭했다.
회의장앞은 반전론자들, 공해-오염 피해자들, 고래 남획 근절을 요구하는 이들의 데모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자연에 관한 인간의 인식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훗날 학자들은 이 모임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비유했다. 우여곡절 끝에 참석자들은 마지막날 `지구는 하나`라는 제목의 인간환경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듬해인 1973년부터 사람들은 스톡홀름 회의 개막일이었던 6월 5일을 세계환경의 날로 지정,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날로 삼아오고 있다.
▶1968년미국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피살
▶1967년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발발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아랍에 대규모의 기습공격을 가함으로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스라엘 건국기념일인 5월 14일부터 아랍연합공화국이 시나이반도로 기갑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5월 22일에 아카바만이 봉쇄되자 이스라엘은 개전을 준비했고 6월 1일에는 거국일치내각을 구성, 다얀 국방장관 지휘하에 기습작전을 훈련했다.
6월 5일 오전9시 이스라엘 공군기는 아랍연합, 시리아, 요르단의 아랍3국 공군기지를 공격, 제공권을 장악했다. 뒤이어 공군의 지원을 받아 지상전투에서도 완전한 주도권을 장악했다. 6일간에 걸친 이 전쟁으로 아랍의 맹주 `아랍연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1967년대한광업진흥공사 발족
▶1966년미국 제미니9호 발사
2시간5분간 우주유영성공
▶1964년김종필 공화당의장 사퇴
(6월 18일 두번째 외유)
▶1963년이란 팔레비정권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 체포
▶1960년서울지검. 부정선거관련
전각료 9명 구속
▶1957년미국 과학자들
핵실험중지 호소
▶1956년티토 유고대통령 소련 방문
▶1954년제네바회담에서 남일
북한대표, 개항 통한방안 제시
▶1953년프랑스-중국 무역협정 조인
▶1948년베트남 독립협회 성립
▶1947년마샬플랜(유럽부흥계획) 발표
마샬 미 국무장관이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유럽부흥계획(마샬 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차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경제를 재건, 민주주의 국가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이루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당시 소련의 도전에 직면한 미국은 전후의 빈곤과 실업, 사회적 혼란으로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마샬 플랜은 `유럽 모든 국가들에 열려있다`는 연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반소-반공주의를 전제로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경제부흥과 통합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 불참한 가운데 7월에 결성된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에 참가한 16개국이 유럽 경제재건안을 제출했고 미국 의회는 이에 기초해 1948년 4월 유럽부흥계획을 승인했다. 이를 위해 미국정부 내에 특별 설립된 `결제협력국(ECA)`은 폴 호프만의 지휘아래 1952년 중반까지 4년간 약 1백3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이 계획의 성공적인 실행으로 유럽의 산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됐고 재정이 안정됐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등은 이 기간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했고 화학-기계-철강 등의 산업분야가 빠르게 회복됐다. 먀샬 플랜은 1949년 4월 나토가 발족하는데 경제적 기반이 됐다.
CEEC는 이후 상설기구인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로 대체됐고 이는 1961년 9월 다시 미국과 캐나다를 가입시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발전해왔다.
마샬을 `어금니에 펜을 물고서 말하는 것처럼 어물거리는 남자`라고 빗대며 마샬플랜(유럽부흥계획)을 반대한 프랑스 공산당의 선전 포스터.
▶1942년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4척의 항공모함과 300척의 군함, 1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목표는 하와이 북서쪽 1600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섬.
6월5일 이른 아침, 항모(航母)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가 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비행장은 비어있었다. 이미 일본군의 암호망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전투기들이 다음 공격을 위해 항모에서 발진을 준비하고 있던 10시20분경, 갑자기 미군 전투기 편대가 구름속에서 급강하하며 항모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갑판에 줄지어있던 전투기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됐고 아직 치우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항모였지만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3척이 대파되거나 두동강났다. 불과 6분 만이었다. 미 항모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며 버티던 마지막 1척도 곧 태평양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항공기 332대가 파괴되고 3500명의 베테랑 군인들을 잃었지만 미군의 피해는 항모 1척, 구축함 1척, 항공기 147대와 307명의 군인 뿐이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의 향방도 미국으로 돌아섰다.
▶1942년미국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3국에 선전포고
▶1932년동아일보사 아산현충사에
이충무공 영정 봉안
▶1925년상해서 배외운동 확대.계엄령 선포
▶1910년`마지막 잎새`, 미국 소설가 오 헨리 사망
뉴욕을 "지하철 위의 바그다드" 라고 묘사하며 뉴욕 소시민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묘사, 창작 활동을 폈던 오헨리(본명ㆍ윌리암 시드니 포터)가 1910년 6월 5일 간경화증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 출생으로 내과 의사인 아버지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복도 잠시, 어려서 양친을 잃어 거의 학교교육도 받지 못한 채 숙부의 댁으로 보내졌다. 숙부의 약방을 거들고 있다가, 1882년 텍사스주로 가서 카우보이ㆍ점원ㆍ직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887년 25세 때 17세 소녀 애설 에스티스와 결혼했고 1891년 오스틴 은행에 근무하는 하면서 주간지 `롤링 스톤 (The Rolling Stone)`지를 창간하는 등 저널리스트로서도 활동했으나 적자만 내다가 폐간됐다.
이후 1896년 2년 전 그만둔 은행에서의 공금횡령 혐의로 고소당하자 남미로 도망갔으나 사랑하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아내의 사후 체포됐다. 다행히 숙부의 약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도움이 되어 활동이 다소 자유로운 교도소 내 약제계로 보내졌고 이로인해 그는 필명 `오 헨리` 를 써가며 딸의 부양비를 조달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단편 창작에 몰두했다. 결국 이 3년간의 교도소 생활의 체험이 오 헨리를 한 저널리스트에서 미국의 대표적 단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석방 후 그는 뉴욕으로 와 본격적인 작가생활에 들어갔고 `서부의 마음`(1907) `4백만`(1906) 등의 단편집을 발표하며 인기작가로서 지위를 굳혀, 불과 10년 남짓한 작가활동 기간 동안 300편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다. 그는 순수한 단편작가로 따뜻한 유머와 깊은 페이소스를 사용하여 미국 남부나 뉴욕 뒷골목에 사는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로운 표현과 교묘한 화술로 그려 놓았다.
특히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결말의 의외성`은 기교적으로 뛰어나 단편작가 오 헨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이로 인해 문학 평론가들에게는 냉대를 받아야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탁월하게 묘사한 `경찰관과 찬송` `마지막 잎새` `현자의 선물` 등이 있다.
1898년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 출생
1883년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 출생
케인즈의 경제학, 케인즈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
1883. 6. 5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1946. 4. 21 서식스 펄.
영국의 경제학자·언론인·금융인.
만성적 실업의 원인에 대한 혁신적인 경제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적 저작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1935~36)에서 그는 정부가 주도하는 완전고용정책에 기초하여 경제침체에 대한 치유책을 주창했다.
성장배경
케인스는 상당히 유복한 전문직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경제학자였고 훗날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대학행정관이 되었다. 진보적 성향을 지닌 장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여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케인스는 상류층과 중상류층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사립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학교인 이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작가인 조지 오웰과 시릴 코늘리 같은 재능 있는 영국인들이 학교에 대해 씁쓸한 추억을 지닌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케인스는 즐거운 이튼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는 다소 예민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으나 수학과 고전문학에서는 탁월했다. 그는 클뤼니의 베르나르, 스튜어트 군주의 특성, 동방과 서방의 차이점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여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최대의 장점인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격과 학생회를 이끄는 데서 보여준 탁월한 통솔력으로 자신만만한 그의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었다. 급우들은 전통적으로 이튼 고등학교의 행정에 참여해온 학생회 '폽'(Pop)의 일원으로 그를 선출했다.
1902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칼리지 중 하나인 킹스 칼리지에서 그는 한 전기작가가 표현했던 대로 "이튼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획득했던 우월성"을 재빠르게 다시금 획득했다. 그는 논쟁적인 연사로 성장했고 대학생들의 하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연합학생회의 회장이 되었다. 점차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지도적 경제학자인 앨프레드 마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의 수학적 관심은 감퇴하고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케인스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중요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레너드 울프와 버지니아 울프 부부, 화가인 덩컨 그랜트, 미술평론가인 클라이브 벨을 구성원으로 하는 문화계 인사의 배타적 서클인 블룸즈버리의 초창기 역사는 케임브리지대학교와 리턴 스트레이치라는 탁월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케인스보다 2년 일찍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한 스트레이치는 케인스를 단지 '협회'라고만 알려진 배타적인 사적 클럽으로 끌어들였다. 그들 중 몇몇은 케인스 자신처럼 동성연애자였는데 그들은 블룸즈버리의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케인스는 평생 동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인 이들에 대한 애정과 이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초기경력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케인스는 공무원이 되어 화이트홀에 있는 인도성(印度省)에 근무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최초의 대표작을 썼는데, 그 저작은 지금까지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인도의 금융과 통화에 대한 정통한 해설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돌아와 1915년까지 경제학을 강의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재무부 관리로 임명되어 전시 경제의 관리업무에 종사했는데, 특히 연합국과의 경제협력 및 영국의 부족한 외환공급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케인스는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여 공직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그의 전망을 변화시켰다. 경제고문 자격으로 로이드 조지 총리를 프랑스까지 수행한 케인스는 패전국인 독일에게 부과되는 배상정책의 비현실성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인 속임수에 대해 자신의 건강을 해칠 만큼 낙담하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임박한 '유럽의 황폐화'에 대한 우려로 공직에서 사임했다(→ 파리 평화 회의).
행동가였던 케인스는 개인적인 실망을 공적인 항의로 표출했다. 1919년 여름 2개월 동안 그는 베르사유 협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크리스마스 무렵 출판했다. 이 논문이 갖는 중요성은 독일 경제에 지나친 배상부담과 그에 따른 지불 가능성의 결여에 대한 경제적 분석에 있다. 이 책은 우드로 윌슨, 클레망소, 케인스의 옛 상사였던 로이드 조지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로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결과 화이트홀의 몇몇 집단에서는 케인스의 사후까지도 그를 믿지 못할 사람이며 우상파괴주의자로 여겼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의 그에 대한 평판은 이것과는 다소 달랐다. 케인스는 경쟁적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고,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며, 소비자가 어떻게 자신의 소득을 지출하는가를 귄위 있게 설명했던 앨프레드 마셜과 A.C. 피구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평가받았다. 비록 1920년대에 씌어진 주요저작의 논조가 때때로 비판적이었을지라도 그는 공공정책에 의해 최소한도로 규제되는 자유방임주의가 가능한 모든 사회적 장치들 중 최선의 것이라는 당시의 전통적인 믿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케인스의 견해들 중 다음의 2가지는 1930년대에 그가 주도했던 이론적 혁명의 전조를 보여준다. 1925년 그는 영국이 전전(戰前)의 대 달러 환율인 4.86달러하에서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것에 반대했고, 또한 대공황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석탄광부, 조선소노동자 및 직공들의 지속적인 실업을 우려했다. 이 시기에 로이드 조지와 화해한 그는 실업자에게 생활보조 대신에 유용한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자유당의 공공사업계획을 지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의 자동적인 조정을 믿고 있었고, 재무부는 공공사업으로 인한 정부적자의 증가가 사적 부문의 투자를 동일한 크기로 감소시킬 뿐이기 때문에 공공사업은 무용하다는 원론적인 입장에 집착하고 있었다. 케인스는 아직 동료들의 의견에 대해 이론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공사업에 대한 그의 지지는 별다른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적자재정).
케인스의 사생활은 보다 만족스러웠다. 1925년 그는 재능 있고 매력적인 발레리나인 리디아 로포코바와 결혼했다. '코러스 걸'에게 구애한 그의 지각에 대해 케임브리지의 보수주의자들이 보여준 의혹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실제로 앨프레드 마셜의 미망인은 그의 결혼을 "메이너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블룸즈버리 서클의 성원들과의 우정도 더욱 깊어졌고 매우 성공적인 주식투자로 안락한 런던의 아파트를 쉽게 구입했다. 언제나 늦게 일어나는 케인스는 침대에서 아침을 들면서 자신의 투자를 관리했다. 언론인으로서 그는 주요일간지인 〈타임스 The Times〉·〈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현재의 〈가디언 Guardian〉)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편집진에 참여하게 되는 좌파 신문인 〈뉴 스테이츠먼 New Satesman〉에도 투고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케인스와 공황
케인스의 대중적인 평판을 2번째로 바꾸어놓았으며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1930년대의 경제적 비극에 대해 내놓은 그의 대응책이었다.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치가와 경제학자는 당시의 상황에 매우 당황했고 전통적인 정책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 반대되는 증거들이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경제학은 여전히 정부가 경제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번영을 회복하리라고 믿었다. 결국 실업자들은 보다 낮은 임금으로라도 기꺼이 일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기업가는 상품의 가격을 저하시키는 동일한 전략으로 자신의 판매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취약한 기업 중 일부는 불가피하게 도산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집단이 경쟁적 조정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곧 경기가 회복되고 호황과 보다 높은 임금수준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공황).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부문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허버트 후버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자유방임주의의 정치적인 패배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정책이 긴급히 요구되는 때에 케인스가 이것을 제공했다. 지적인 면에서는 〈국부론 Wealth of Nations〉, 공공정책의 지침으로서는 맬서스의 〈인구론 Essay on Population〉에 필적할 만한 그의 저작은 경제학 논문들 중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이며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1935~36년에 출판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은 1930년 〈화폐론 Treatise on Money〉에 부분적으로 암시되어 있던 새로운 사상에 대한 보다 기술적이고 심오한 해설이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2가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번째는 실업에 관한 기존의 이론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케인스에 따르면, 불황시에 실업을 제거할 정도로 낮은 임금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업의 원인을 실업자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2번째 주장은 실업과 불황의 원인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으로 이것은 총수요, 즉 소비자·기업투자자 및 공공부문의 총지출을 핵심으로 하는데 총수요가 낮으면 판매와 고용이 감소하며 반대로 높으면 판매와 고용이 증가한다(→ 공급과 수요).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으로부터 경제행위에 대한 강력하고 포괄적인 견해가 피력된다. 즉 소비자는 자신이 얻는 소득의 크기에 따라 지출이 제한되므로 경기순환변동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동적인 요인은 바로 기업투자자와 정부이다. 따라서 불황시에 해야 할 일은 사적 투자를 확대하거나 부족한 사적 투자를 대체할 수 있는 공적 투자를 창출하는 것이다. 경제가 다소 위축된 시기에는 신용을 완화시키고 이자율을 낮게 하는 화폐정책이 기업투자를 자극하고 완전고용수준의 총수요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보다 심하게 위축된 시기에는 공공사업이나 빈곤층에 대한 보조금 등의 형태로 적자재정을 유지하는 보다 강력한 대책이 요구된다(→ 재정정책).
케인스는 순식간에 많은 경제학자들을 자신의 경제적 신념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그 이후에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점차로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새로운 정책을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1946년 '고용법'을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대통령과 의회에 호황을 유지할 의무를 부과했다.
후기경력
〈일반이론〉은 케인스의 최후의 주요저작이었다. 1937년에 그는 심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2년 후에 비록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돌아와 다시 강의를 시작했고, 〈어떻게 전비를 조달할 것인가 How to Pay for the War〉라는 표제하에 전시금융에 관한 3편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다시 고문자격으로 재무부에 근무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그는 불황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안된 국제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에 관심을 돌렸고,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협정에 의해 설립된 기관들인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케인스의 견해보다는 당시 미국 재무부의 정통적인 이론의 영향을 더 받았다.
케인스의 최후의 주요공적은 1945년 가을과 초겨울에 걸쳐 미국으로부터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내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의 정계에서는 그를 기꺼이 맞이하고자 했다. 그는 잉글랜드은행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틸턴의 케인스 경이 되었다. 관습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블룸즈버리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나는 우리들, 노부인(영국은행의 별칭)과 나 둘 중 누가 정직한 부인이 될지 확신할 수 없다"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심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케인스의 오랜 적들은 이제 그들 나라의 가장 훌륭한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전시의 지나친 활동으로 케인스는 1946년에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학자·정치가의 친구였고, 문화사업가, 천부적인 스승, 충실한 친구, 로크, 흄과 밀의 철학적 전통을 계승한 타고난 사상가였던 그는 말년에 샴페인에 더 취하지 못했던 것이 단지 유감이라는 말을 남겼다.
▶1882년 舊軍 푸대접-
임오군란 발발
대원군이 10년 만에 물러나고 민비가 집권하면서 새로운 정책이 속속 도입됐다.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신식이 등장하면 구식은 따돌림당하게 마련이다. 5영(營)이었던 군대가 무위·장어 2영으로 축소됐고 이 과정에서 실직 군인이 양산됐다. 2영에 대한 대접도 예전같지 않았다.
1882년은 몹시 가물었던 해였다. 벼가 말라 죽고 화적떼가 들끓었다. 군료미를 13개월 동안이나 지급하지 않아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비는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6월 5일(음력), 무위영 병사들이 밀린 군료미 가운데 1개월분을 지급받았으나 쌀에서 겨와 모래가 섞여 나오고 양도 적었다. 격하게 항의하자 주동자가 구금되고 곧 사형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통문이 돌려졌다. 감옥 문이 부숴지고 민겸호 등이 살해되는 등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민비는 도주하고 대원군이 다시 추대됐지만 사태 해결의 열쇠는 이미 대원군의 손을 떠나 있었다. 일본과 청이 자국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자주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곧 국권 상실로 이어졌다.
1882년 6월 5일, 구식군인들과 도시빈민들이 봉기하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1862년 프랑스 안남(베트남)과 강화(사이공 조약)
1826년 독일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사망
1783년 조셉 몽골피에와 작크 몽골피에형제, 최초 열공기기구 실험비행 성공
1723년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출생
▶1592년 이순신, 당포서 왜군 대파 - 당포해전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에는 붉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장막 안에는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가 앉아 있었다.
아군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다. 아군은 개의치 않고 거북선을 앞세워 현자총통을 비롯한 천자·지자총통을 쏘아 대는 한편, 뱃머리로는 왜장선을 들이받으며 격파하였다. 이어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 와중에 왜장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적선에 올라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많은 수의 왜군이 사망하였는데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해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해전 등 제1차 출전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해전이 된다. 적정과 지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이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