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권선거 안한다” 천명…내무장관 단명
“문화수도 광주 대선공약 아이디어 제공”
강운태 광주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 그는 광주시장만 세번째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임명직 마지막 광주시장을 지낸 이력이 더해져서다.
강운태 시장은 4년 전 출마 당시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광주비엔날레와 김치축제를 창설한 장본인”이라면서 “‘문화중심도시, 광주’가 예서 태동했다”는 자부심을 강조한 바 있다.
자부심과 자산을 바탕으로 재선 도전에 나선 강 시장의 삶을 들여다본다.
강운태 시장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전근이 잦았던 터라 그 역시 전학이 잦았다. “1학년 땐 담양, 2학년 땐 보성, 3학년 땐 함평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5학년부터 할머니가 계신 광주에서 다녔는데요. 늘 낯설고 힘들었죠.”
그가 이 시절 친구를 사귄 비결이 있다. “내 것을 먼저 주면 그 다음에 친구가 옵니다. 연필·공책을 주기도 하고. 또 청소 당번을 자원해서 ‘오늘은 내가 한다’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결국 친구들이 날 인정하고 좋아하더라구요.”
그는 또 검정고시 출신이다. 그러고도 서울대에 진학한 수재였다.
“서울대를 목표로 세운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했다. 하나는 가정 형편.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강 시장보다 형 두 명을 건사하는 데 신경썼다. 특히 둘째 형이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 졸업할 정도로 뛰어났다. “언젠가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셋째 너는 굳이 대학 갈 것 없잖냐?’하더라구요. ‘형님이 잘하니까 너 하나는 돌봐줄 것이다’는 것이었죠. ”
이에 반발하는 강 시장에게 아버지가 들이민 조건은 “서울대를 가라. 그러면 집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겠다”였다. 이후 서울대를 목표로 세웠고, 공부에 더 전념하기 위해 고교(함평 학다리고)를 중단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서울대 가면 학비 대주겠다”에 검정고시로
서울대 시절 땐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지낸 이력도 있다. “서울대에서 나는 비주류였죠. 학생회장 선거가 있으면 메이저 학교들, 경기고·서울고·광주일고·경북고 출신들이 학생회장을 합니다. 그래서 군소 학교에서 나를 추천한 것이죠. 그래서 후보가 서울고 출신, 경북고 출신, 나 이렇게 세 명이 됐어요. 서울 대 지방의 구도로 가야겠더라구요. 내가 경북고 출신을 밀어줬죠. 그래서 내가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한거예요.”
그 시절 개명도 유명한 사건이다. 강 시장의 원래 이름은 길현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상의도 없이 결정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에 갑자기 편지가 날아들었어요. 겉봉에 보니까 ‘강길현 앞’으로 돼 있었는데, 내용은 ‘운태 보아라’ 이렇게 시작해요. ‘너의 이름을 운태로 개명했다’는 거예요. 아무런 상의도 없었어요. 유명한 작명가에게 물었더니 너의 품격과 이름하고 안 맞다고 해서 이렇게 바꿨다고 하더군요.”
고시에 합격한 후 그는 내무부에서 근무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7년 6월 내무부 행정과장이었고, 거슬러 80년 5월엔 내무부 예산계장이었다.
4년전 지방선거땐 이같은 이력 때문에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지 않았느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강 시장은 “당시 내무부는 치안본부와 분리돼 있어서 시위 제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97년 3월엔 내무장관으로 발탁됐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임명 5개월 만에 교체됐다. DJ에 줄서 집권당에 밉보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대한 강 시장의 답은 이렇다. “장관 되자마자 DJ를 방문했어요. 가서 공명선거를 하겠다고 다짐했죠. DJ는 ‘절대 관권선거는 안 된다’고 강조했구요. 그 뒤 안기부에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호남 출신 내무장관이 호남 야당 총재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고 했더라구요. 부임하자마자 상당히 시끄러웠죠.”
▶‘광주만 예외’ 농림장관 때 광주 생고기 지켜
강 시장은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 “제가 내무장관 때 YS(김영삼 당시 대통령)를 설득해서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겁니다. 그래서 97년 5월5월 묘역에서 국가 주도의 기념식이 열리게 됩니다. 당연히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했고요. 이게 기화가 돼 이후로 대통령들이 기념식에 참석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해온 것 아닙니까.”
앞서 농림수산부 장관 때엔 광주의 특화식품인 생고기를 지켜냈다는 그다. “96년인가 그래요. 서울에서 생고기를 먹고 탈이 난 파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축산법 시행령을 개정해 전국의 생고기 유통을 금지시키게 되는 거죠. 당시 주무장관으로서 시행령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단 광주만 예외’라는 문구를 넣었어요. 다른 도시와 달리 광주는 생고기가 주식인데, 이를 끊어버리면 안된다고 설득했죠.”
그보다 앞선 94년 9월, 그는 임명직 광주시장에 부임했다. 그때 치적 중 하나가 광주비엔날레 창설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광주비엔날레는 제가 배수진을 치고, 시장직을 걸고 성사시킨 겁니다. 그때 문체부장관이 끝까지 방해했어요. (김영삼)대통령이 초도 순시했을 때, 제가 대통령한테 간곡하게 호소하고 건의했어요. 그래서 대통령이 광주에서 ‘비엔날레 반드시 지원하고 성공시키겠다’고 연설했죠. 결국 이 비엔날레가 모태가 돼 광주 문화수도가 가능하게 된겁니다.”
“문화중심도시 사업이 광주비엔날레에서 시작된” 배경은 2002년까지 이어진다. “당시 제가 민주당 광주시당 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 후보 광주 선대위원장을 맡았죠. 그해 12월 초 노 후보가 광주에 왔는데, 노 후보가 차 안에서 ‘무슨 공약 하면 좋겠냐?’고 묻더란 말이죠. 제가 그랬어요. 서울은 경제금융수도하고, 충청권은 기왕에 발표했으니까 행정수도하고, 광주는 예향이니까 문화수도 합시다.”
이때 노무현 후보는 “맞어! 광주엔 비엔날레가 있으니까. 말 되네. 그거 합시다”라고 맞장구쳤다. 이어 노 후보는 광주공원에서 연설하면서 “예향 광주를 문화수도로 육성하겠습니다”고 천명했다.
▶“DJ에 IMF 추가협상 아이디어 제공”
2000년 그는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했다.
그가 무소속으로 나온 이유는? “DJ가 대통령 되는 데 내가 많이 도왔죠. 대표적인 게 IMF 협상 건인데. DJ께서 ‘IMF 협상이 잘못됐다 재협상해라’ 그랬어요. 그런데 여론은 ‘무슨 소리냐. 나라가 거덜나게 됐는데. 빨리 갖다 써야지’ 이런 거죠. DJ가 코너에 몰렸단 말이죠. 그때 내가 ‘추가 협상’이라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재협상은 본질적으로 협상을 부정하는 것이고, 현재 협상을 인정하면서 일부 보완하는 게 추가협상이거든요. DJ가 이 용어를 쓰면서 위기적 상황을 벗어났다고 할까.”
그는 당연히 2000년에 공천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당시 정무수석이 전화해 경기도로 나오라고 권했다. “정치를 한다면 고향에서 하는 것이지 무슨 경기도냐?”가 그의 답변. 그랬더니 “광주는 이미 티오(정원)가 차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나오게 된 겁니다.”
정치인 강운태에겐 당적을 자주 바꾼다는 비판이 늘 따라다닌다.
이에 대해 그는 “저는 민주개혁세력의 틀 안에서 움직였고, 당적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두 개밖에 없다”면서 “다른 사람은 오히려 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신당 등등으로 더 많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강운태만 당적이 많은 것으로 보일까? 그의 설명은 이렇다. “다른 사람은 합당 과정을 거쳐 집단으로 옮기다보니까 두드러지지 않았고. 나는 내 가치관에 따라 혼자 움직이다보니 그렇게 비친 것이죠.”
▶강운태는
1948년 전남 화순 출생
함평학다리고등학교 수학
검정고시
서울대 외교학과
11회 행정고시 합격
전남 순천시장
광주광역시장(관선)
농림수산부장관
내무부장관
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18대 국회의원
광주광역시장(민선 5기)
(출처: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