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9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평안북도 영변은 『택리지』에 “안주 동북쪽은 영변부다. 영변부는 산세를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가파르고 험하여 철옹성이라 부르며, 평안도 전체에서 외적을 방어할 만한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변의 고구려 때 이름은 밀운군(密雲郡)이다. 고려 초에 연주와 무주로 분리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에 연산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세종 11년(1419) 때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묘향산에 임시 보관한 일이 있고, 인조 2년(1624) 이괄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뒤 1952년에 영변군은 향산군, 구장군 등 3개의 군으로 나뉘었다. 다음은 허굉이 이곳 영변군을 두고 노래한 시다.
홀로 붉은 난간에 의지하여 모자를 비스듬히 하고
취한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네.
백이 삼천이 참으로 훌륭한데
겹겹이 피어오르는 연화는 몇 집이나 되는고.
솔바람 소리 비를 지어 금탑에 시끄럽고
나무 그림자 봄을 흔들어 사창으로 들어오네.
이 변성에는 아무 일도 없으니
춤추고 노래하여 풍경을 즐겨도 무방하리.
『신증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약산(藥山)은 영변부의 서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옛 기록에서는 “약산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으뜸간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가 서로 사면을 에워싸 그 모양이 쇠 독과 같다”라고 하였다. 영변부의 기록에도 “약산은 하늘이 만들어낸 성이다. 또한 의주, 삭주, 강계 등 여러 고을 가운데 이곳이 군사를 모으기에 알맞은 땅이다”라고 실려 있으며, 『여지도서』「풍속」조에는 “품성이 순박하고 꾸밈이 적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실려 있다. 영변군에 자리한 향적산, 오봉산, 북장대, 약산 등은 해발 400~500미터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구룡강 기슭에 자리한 약산은 산에 약초가 많고 약수가 난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하며 관서8경의 한 곳이다. 약산을 약산동대(藥山東臺)라고도 부르는 것은 옛날에 영변이 무주, 위주, 연주로 나뉘어 있을 때 무주에서 보면 약산이 동쪽에 우뚝 솟은 대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변 하면 떠오르는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은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소월은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오산학교와 배재고보를 거쳐 도쿄 상대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문예지 『개벽』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임을 진달래꽃으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산유화」 등을 발표하였다.
나중에 처가가 있는 구성군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다 실패한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신 이튿날 아편을 마시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6년 남짓한 짧은 문단 생활 동안 그는 154편의 시를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볼 때 1920년대에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김소월을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