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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와 속죄제 보충규례
레 6:14-30
14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 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0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21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22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23 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2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 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28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레 6:14-30 / [곡식제물 규정] 곡식제물은 다음과 같이 바쳐야 한다. 제사장인 아론의 후손들은 번제단 앞에서 나 여호와께 곡식제물을 바쳐야 한다. 15) 제사장은 기름을 얹어 섞은 고운 밀가루 한 움큼과 이 제물 위에 얹어 두었던 향을 다 가져다가 이 제물을 모두 여호와께 드린다는 표시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쳐라. 이렇게 바치는 까닭은 이 예물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것이다. 16) 이렇게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차지하도록 하여라.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여호와께서 계시는 만남의 장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어라. 17) 이 떡에는 누룩을 넣지 말고 구워야 한다. 이것은 불살라 바치는 제물 가운데에서 내가 제사장들 몫으로 떼어 주는 것이다. 이 제물 역시 속죄제물이나 면죄제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거룩한 제물이다. 18) 앞으로 오고오는 세대마다 제사장인 아론의 후손 가운데에서 남자들은 나 여호와께 불살라 바치는 제물 가운데에서 이 제물을 먹을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이 내용을 너희는 오고오는 세대마다 영원한 규정으로 삼아 꼭 지켜야 한다. 이 제물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해지므로 이 제물을 다룰 때에나 바칠 때는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19) [임직식 제물 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0)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기름부음을 받아 제사장이 되는 날 그들은 나 여호와께 이렇게 예물을 바쳐야 한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날마다 드리는 곡식제물의 양과 똑같이 고운 밀가루 2.2리터를 반으로 나누어 그 절반은 아침에, 또 나머지 절반은 저녁에 바쳐라. 21) 이 고운 밀가루를 올리브 기름으로 잘 반죽하여 쇠판 위에 올려 놓고 구워라.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여러 조각으로 썰어 나 여호와에게 곡식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 제물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나 여호와의 마음이 흐뭇해지도록 하여라. 22) 이 곡식제물은 아론의 후손 가운데에서 기름부음을 받아 아론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는 이마다 드려야 하는 예물이다. 이 규정 또한 영원한 규정으로 삼아야 한다. 23) 제사장이 드리는 이 곡식제물은 전부 불살라 바쳐야 한다. 그 중에 하나라도 먹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24-25) [속죄제물 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후손들에게 이르라고 하시면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허물을 덮어 달라는 뜻으로 속죄제물을 바칠 때에 제사장은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속죄제물을 잡는 곳은 제단의 북쪽으로, 번제물을 잡는 곳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 속죄제물 또한 거룩한 제물인 까닭이다. 26) 허물을 덮어 달라는 뜻으로 바친 속죄제물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다. 제사장은 이 제물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 만남의 장막 뜰에서 먹어야 한다. 27) 이 제물이 거룩한 까닭에 그것에 닿는 것은 어떤 것이든 거룩해지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제물의 피가 어떤 옷에 묻었든지 그 옷은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이 직접 빨아야 한다. 28) 또한 그 제물의 살코기를 끓인 그릇이 질그릇일 경우에는 부숴 버려야 하며 놋쇠로 만든 그릇일 경우에는 물로 잘 닦아야 한다. 29) 그 제물의 살코기는 제사장이 된 남자들은 누구라도 먹을 수 있다.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하다. 30) 그렇지만 이 제물의 피를 여호와께서 계시는 만남의 장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허물을 덮어 주는 제사를 드릴 때 사용했다면 그 제물의 살코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 그 경우에는 모조리 태워 바쳐라.
하나님은 곡식제물의 일부를 제사장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은 제사장이 제물을 다룰 때 유의할 점과 남은 제물의 처리 방법을 주로 언급합니다.
곡식 제물의 규례(14-18)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곡물로 드리는 제사도 속죄제와 속건제처럼 지극히 거룩한 제사입니다. 곡식 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은 죄와 허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죄악의 누룩이 섞이지 않은 정결한 마음과 삶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안식케하는 향기라는 뜻입니다.(참고 고전 5:7, 8)
제사장 임직식의 곡식 제물(19-23) 성도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는 날에 하나님께 곡식 예물을 드렸습니다. 일반인이 드린 곡식 제물은 그 남은 것은 먹을 수 있지만, 제사장 임직식 때 드린 곡식 제물은 모두 불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을 드릴 때는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거룩한 피(24-27)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고 의로움을 얻었습니다. 속죄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의 보혈을 존귀하게 여기며,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참고 살전 4:3)
고기를 먹는 규례(28-30)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세상의 속된 것과 구분되는 거룩한 것입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속죄제의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토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속제제물의 기름이나 냄새가 토기에 배였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놋그릇에 삶으면 그것은 물에 씻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놋그릇은 흡수하는 성질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는다면 제물의 기름이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례는 모든 제물의 거룩성을 철저하게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참고 딤후 2:21)
적용: 내가 버려야 할 죄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당신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부정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것들을 속된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창 17:1; 롬 6:13).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겨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저마다 다른 역할이 있다는 말이고, 또한 각자에게 맡긴 사역이 존귀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저마다의 개성과 창조적 능력을 다양하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각자의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겨졌다는 믿음은 각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맡긴 주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 설 교 >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레위기 6:14-18, 마태복음 9:20-21 / 이성희 목사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쓰는 일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손을 쓰는 것은 머리가 움직이고 있고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습니다. 솜씨와 손재주가 비롯되는 곳도 바로 두뇌입니다. 그래서 손은 두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고, 그림을 그리고, 퍼즐을 맞추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손으로 이런 것들을 잘 하는 아이들이 두뇌가 발달하고 머리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이 만지게 해야 건강합니다.
유대인은 정결법과 부정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지므로 만지지 말라는 것이 부정법입니다. 민수기 19:22에는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합니다. 주검이나, 사체나,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성경은 엄격하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 내용을 보시면 그냥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만지지 말라는 것은 사람에게 해롭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시체도 만지셨고, 시각장애인의 눈도 만지시면서 뜨게 하셨고, 성경에는 엄격하게 만지지 말라고 한 한센병자도 만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부정과 관계없다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님은 부정 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 먼 자의 눈을 만지십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을 만지십니다. 어린이를 만져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왔을 때에 만져주십니다. 변화산에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대지 말라는 것에도 손을 대십니다. 손을 대지 않아도 될 것에도 손을 대십니다.
시편 115:7에서 우상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우상은 만지지도 못하는 신이며 걷지도 못하며 소리도 못내는 신입니다. 하나님은 손이 있어 만지고, 발이 있어 가시고, 소리를 내십니다. 세상의 것은 만지면 부정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거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2에는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고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게서 정결법을 어겼다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만지는 것을 가지고 정결법, 부정법을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이 깨끗한지 부정한지를 보십니다.
한국인도 부정법이 있습니다. 만지지 말고 만지기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여자를 잘못 만지면 성희롱됩니다. 엘리베이터에 보면 ‘기대지마시오’, ‘만지지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아이가 그 글귀 앞에다 몇 자를 더 보탰습니다. ‘남자에게 기대지마시오’, ‘여자를 만지지마시오’. 말이 되지요? 흔히 남녀의 감정을 느끼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여성은 말만으로도 이성에 대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남성은 스킨십이 있어야 느낍니다. 그래서 여성보다 남성이 성희롱이 많게 됩니다.
신생아는 만져 주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때로는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요즘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교대로 신생아를 안아준다고 합니다. 안아주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고 합니다. 거룩한 것을 만지는 것은 사는 일입니다. 지성물을 만지고 취급하며 먹는 자는 오직 아론의 자손들인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자들로 여겨집니다.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이 지성물을 만질 경우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만지면 만질수록 거룩해 집니다. 오늘날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거룩한 것을 만지고 거룩하게 사기를 바랍니다.
첫째,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거룩하게 됩니다.
16절에는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하게 만들어 거룩한 곳에 먹어야 거룩합니다. ‘그 나머지’란 소제물 중에 제단 위에서 화제로 드려지고 남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거룩한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으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가장 거룩한 것을 먹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가장 거룩한 것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누룩을 넣지 않은 깨끗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몸에 좋지 않은 것을 먹게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의 부정법을 보세요.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레위기 11장에는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법이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못할 가증한 짐승을 구별하십니다. 먹을 수 있는 물고기와 먹지 못하는 물고기를 가르치십니다. 먹을 수 있는 날개 가진 곤충과 새와 먹을 수 없는 날 짐승과 곤충을 구별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을 먹지 말라고 하셨나요? 현대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들은 성인병을 유발하는 것들입니다. 있어야 하지만 과하면 좋지 않은 것들을 말씀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먹거리는 과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처음 주신 먹거리는 과일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의 먹거리도 열매 즉 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계약 시에 땅의 식물들을 인간의 양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동물들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9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에 새로운 계약을 주십니다. 동물과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9:3에는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먹거리가 어떤 것들입니까? 깨끗하고 좋은 것, 거룩한 것,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먹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관광을 갈 때에 흔히 말하는 혐오식품을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웅담이나 뱀이나 녹혈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골라서 먹으러 가는 보신관광도 있답니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녹용이나 녹각의 대부분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정력에 좋다 하면 안 먹는 게 없고, 여자들이 미용에 좋다 하면 안 바르는 게 없다”. 그 정력 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 절대로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누룩을 넣지 말고”라는 말의 ‘누룩’은 ‘하메츠’란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날카롭게 쏘다’, ‘흥분시키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죄, 거짓교훈, 부패 등을 상징합니다. 무엇이든지 날카롭게 쏘고, 흥분시키는 것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날카롭게 쏘고, 흥분시키는 것들이 어떤 건지 알겠지요? 이런 것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런 것들이 절대로 인간의 건강이 유익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먹을 때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미치는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음식을 먹어도 아무데서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일본의 독설가로 유명한 만담가 다케가와 다시가 제자들과 함께 유명한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비싸기는 한데 맛이 형편없었습니다. 불쾌감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데 가게 주인은 눈치를 못 채고 사인 한 장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 종이에 “참고 먹어”라고 썼다고 합니다. 비싸고 유명한 곳이 아닌 깨끗한 음식, 좋은 자리, 거룩한 자리에서 먹어야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먹는 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거룩한 것을 만지면 거룩하게 됩니다.
18절에는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고 합니다. 지성물을 만지는 모든 자가 거룩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려면 거룩한 것들을 만져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만지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제사장의 옷이 평민에게 닿으면 그들이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에스겔 44장에는 제사장이 성전을 수종 든 후에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옷이 평민에게 닿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에 닿으면 거룩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평민이 거룩하게 되면 안 되는가 하면 당시에는 성전을 섬기는 일 외에는 거룩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된 사람이 거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오히려 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20에는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이란 물로 씻어야 합니다. 부정법이란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정결법은 물로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정결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법입니다. 부정을 타시지 않는 예수님은 온전한 정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정결해지고, 만지면 정결해지고, 믿으면 정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다가 만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보세요. 마태복음 9:20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혈루증은 한센병이라 불리는 나병처럼 부정한 병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부정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격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한 병은 병 그 자체보다 가족이나 사회와의 격리가 가장 큰 아픔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유일한 치유 방법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도 의사에게 가느라 다 탕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을 만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만지는 행위가 아니라 만지면 낫는다는 믿음으로 치유 받았습니다. 거룩한 주님을 만지면 거룩한 몸이 되어 병이 낫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이카라고 합니다. 외경 니고데모서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이 여인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변호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로 가실 때 땀과 피가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천으로 예수님을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변호했다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겠습니까? 제자들도 다 무서워 떨고 있었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진 경험 때문에 이런 힘이 나왔다고 봅니다.
레너드 수윗은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교회’라는 그의 책에서 “만질 수 없는 예수님은 구원을 주실 수 없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가 되려면 무엇보다 우리를 만지는 분이 되셔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질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만질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만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오래 전 ‘ET’ 영화에 보면 ET가 손가락을 대면 상처가 낫고, 모든 병이 낫습니다. ET가 만지는 자는 다 낫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외계인의 영적 힘을 표현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외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만지시는 것은 낫게 하고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요한일서 1:1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만지면 생명이 생깁니다. 진리를 만지면 진리가 생깁니다. 의를 만지면 의가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것을, 거룩한 것을 많이 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온갖 예수님의 거룩한 것들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을 가지세요. 거룩해집니다. 거룩한 것을 만지세요.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가사를 보세요. “거친 세상에서 실패 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만지면 평안을 얻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위로를 얻습니다. 소망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아무 거나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는 자마다 부정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거룩하고 정결한 것을 만져서 우리가 그 거룩한 것으로 더욱 거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인간의 손은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손은 창조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으며 어루만질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환영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고,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유할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누어 줄 수도 있고 구걸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손은 안전과 보호의 상징이기도 하며, 협박하는 주먹이 되기도 합니다. 거룩한 것을 만져 거룩하게 된 손이 창조하고, 환영하고, 축복하고, 치유하고, 보호하는 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신종 플루의 가장 좋은 예방법은 손을 자주 씻는 것이라고 합니다. 손은 가장 많은 것을 감염시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고 자주 씻어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거룩한 것을 만지고, 온 세상에 가득 찬 죄에 오염되지 말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 거룩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속죄제 규례
레위기 6:24-30 / 이장우 목사
오대 제사의 제사장의 규례를 보고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를 보았고 오늘은 속죄제입니다. 일반적인 속죄제의 제물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제 중에 그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의 제물은 먹지 못하고 기름을 불사른 후에 나머지는 몽땅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제사들과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번제에서 보았듯이 24시간 제단에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려면 제사가 없이는 만날 수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순간 죄인들은 멸하여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3,5절입니다.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에 모세의 목숨 건 중재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는 하시겠지만 함께 가시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데 한 순간이라도 거룩하지 못하면 그들은 진멸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모세가 기도하기를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광야에서 다 죽여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심이 진정한 구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제 왜 제사가 중요하고 성막이 중요한지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제사제도와 성막이 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까지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은 27~28절입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라고 합니다. 속죄제의 제물로 드려진 고기에 접촉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뜻이 무엇인지 그 피가 묻었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라고 합니다.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다루는 규례입니다.
출애굽기 29:37절입니다. “너는 이레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제단이 되리니 제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리라” 제사장 위임식을 일주일 동안 하면서 제단도 일주일 동안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제단이 되어 제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단이라는 물건에 접촉하면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을 입었기에 평생 성전에 속하여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언약궤를 만진 웃사가 즉사한 것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거룩함을 입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 손을 댄 자들이나 예수님이 손을 댄 자들이 어떻게 거룩함을 입었는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거룩함에 접촉이 되면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 당함을 통하여 거룩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학개서 2:10~14절입니다. “10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학개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할 때의 선지자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제사장들에게 질문한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거룩한 고기에 접촉이 되면 그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것은 세속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선지자가 질문을 한 것입니다.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다른 식물에 닿으면 거룩하게 되겠느냐고 합니다. 거룩한 고기에 직접 접촉한 옷자락은 거룩하게 되지만 그 옷자락이 다른 식물에 닿는다고 그 식물이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시체를 만져서 부정한 자가 다른 식물에 접촉을 하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에 학개 선지자가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이 그러하고 드리는 것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이 본문에 대한 독일성서공회 주석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건축 공사를 시작한 석 달 남짓 지난 뒤에(주전 520년 12월 중순) 학개는 제사장들에게 율법(종교의식법) 문제에 대한 답을 받아내야 했다. 거룩한 고기는 제물로 바친 짐승의 고기를 말하는데, 제사장들만이 이것을 먹을 수 있었다(민18:8~19절 참조).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은 거룩한 고기에 직접 닿았기 때문에 그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게(성물이) 되었지만, 곧 세속적으로 쓸 수 없게 되었지만(레6:27), 그 옷자락에 닿은 다른 음식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간접적인 접촉으로는 ‘거룩함’이 옮아가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시체와 간접적으로 접촉한 음식물은 시체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게’ 되어 먹을 수 없게 된다(레5:2, 민19:11,22참조). 예언자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후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성전 건축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나 건축에 참여하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스4:1~2 참조). 예언자의 질문은 분명한 공식적인 해명과 결정을 겨냥한 것이다. ‘거룩한 것’(성물12절)에는 ‘부정한 것’의 경우처럼 침투력과 전염성이 없다. 곧 유다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과 계속 접촉함으로 마치 시체를 만진 사람들처럼(왕하17:29,33)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유다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는 일과 그들이 벌써 지금 임시로 만든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성전 건축 작업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스 4:5절 다음 해설 참조). 사도 바울은 ‘거룩함’과 ‘부정함’을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반대 논리를 전개한다(고전7:13~14). 그렇지만 바울에게도 거짓된 우상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교회, 곧 마지막 때에 하는 하나님의 성전건축(엡2:19~22)에서 멀리할 경우가 있다(고전3:17; 5:2~5,13; 10:20~21; 고후6:14~16참조)”
거룩한 고기에 접촉된 것은 거룩하다는 말씀을 보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의 해석을 말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누구라도 힘을 보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까? 예배당이 좁으니 능력 있는 사람이 와서 예배당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지난 금요일 어떤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이 저의 설교를 어떤 분에게 소개하였더니 그 분이 예배당을 하나 지어드리면 좋겠다는 말을 했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받아들이겠습니까? 배척하겠습니까? 우리는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신약과 연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히 이룬 그 의에 다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단장품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단장품이란 자기를 치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우상숭배와 주술과도 연결된 단장품들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단장품들이 있습니까? 자신의 공적으로 삼을 만한 것들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깨어져야 합니다. 거룩한 고기가 담긴 질그릇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8절입니다.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ㄴ)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ㄷ)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ㄹ)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ㅁ)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신약의 하나님의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전 됨을 무너뜨리는 온갖 세상의 것들을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였다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된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평소에 가지고 있던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복음을 말하고 자유를 말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과 왜 함께 어울리느냐는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신약의 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인용한 내용이 레26:12, 출 29:45, 겔37:27, 렘31:1, 사52:11, 호1:10, 사43:6절의 말씀을 한꺼번에 인용합니다.
고린도후서 7:1절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 교회에 온갖 세상의 것들이 다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파당이 생겼습니다. 세상에서도 하지 않는 더러운 짓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 어떠한지를 구약을 인용하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 책망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15절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ㄴ)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땅의 티끌입니다. 이 땅의 티끌 안에 천지를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을 우리 안에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아무른 가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보배로 인하여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을 포장하면 안 됩니다. 거룩한 고기를 삶은 질그릇을 깨어버리듯이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담기게 되면 질그릇이 깨어지는 방식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살아있다는 자들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집니다. 질그릇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제 집사람과 함께 곽 집사님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아들과 아내가 같이 있었습니다. 시편 90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아내와 아들에게 교회에 가라고 유언을 했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사망에 넘겨집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배가 담긴 사람이라면 비록 고통 가운데서도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고기가 담긴 질그릇이 깨어지듯이 우리의 육체가 사망에 넘겨집니다. 이러할 때에 거룩한 보배가 담긴 자들은 비록 고통 가운데 있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지며 견뎌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