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뿅뾰뵹뿅뿅
'어린 여자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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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지금 서울은 눈이 엄청 와. 나 처음 서울에 왔던 삼 년 전에도 눈이 참 많이 왔는데. 그때 삼월 말까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서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어. 우리 고향은 눈이 흔하지 않으니까 너무 신기했지. 이상기후인 건지, 서울이라 그런건지 그때는 잘 알지도 못했어. 안 그래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서울이 더 춥고 힘들게 느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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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는 이 정도 월급이면 혼자 살기에 충분할 줄 알았어. 내가 씀씀이가 큰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돈 나갈 데가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서울 월세가 이렇게 비쌀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지 뭐야. 그렇다고 돈을 많이 받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퇴근이 너무 늦거든. 서울 사람들은 참 이상해. 잠을 안 자나봐. 회사에서 자주 저녁을 시켜먹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여섯시 삼십분 넘어서 시키면 배달이 밀려서 한 시간씩은 기다려야 해. 근처 빌딩에는 아홉시, 열시까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창이 태반이야. 그 시간에 퇴근하면서도 그냥 가기 아쉽다며 다들 맥주를 한잔씩 하고 취하면 또 다른 종류의 술을 마시러 가고. 그렇다고 서울이 안전한 도시도 아닌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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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가스배관에 매달려 좁은 방범창 틈새로 손을 집어 넣어서 창문을 열고 있었던 거야. 채 한 뼘도 열리지 않은 창문, 그 바깥의 방범창. 그것도 삼층 높이에 매달려 있는 걸 알면서도 난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 그렇게 내가 굳어 있는 사이 남자는 계속 창을 열려고 애썼고 어느 순간 스르륵, 하고 굴러가듯 부드럽게 창이 열려버렸어. 아주 활짝. 정신이 번쩍 들더라. 뱃속부터 용기를 끌어모아서 아아악, 하고 온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어. 그러니까 남자도 으아악, 소리를 질렀고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어. 나는 그제야 112에 신고를 했지.
그 남자 죽지 않았어.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발목 뼈에 금이 가서 도망은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잡혔는데 나 죽는다고 난리난리를 피워서 일단 병원에 데려간 모양이야. 그리고 나는 경찰한테 혼났어. 내가 사람 죽일 뻔 했대. 만약 그 남자가 죽거나 어디 불구라도 됐으면 어쩔 뻔 했냐고, 그 높은데서 사람을 위협하면 되느냐고, 앞으로는 조용히 경찰에 신고하래.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나한테 짜증을 내더라.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지. 감사실이랑 청와대에 민원 넣고 뉴스에도 제보할 거라고 미친년처럼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난리를 피웠어. 나중에 팀장이 와서 사과하고 여경으로 담당자가 바뀌고 아무튼 잘 해결됐지만.
근데 잡고 보니까 글쎄, 그 남자가 내 방이랑 같은 라인 일층에 사는 남자더라. 나보다 두 살어리고 전과는 없대. 경찰에서는 술 마시고 실수한 거라고, 특별히 나를 노린 것도 아니고 이 방에 여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고, 자기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그랬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한 사람이 좁고 위태로운 가스관을 딛고 올라와서 그렇게 치밀한 손놀림으로 창문을 연다는 게 가능한가.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경찰은 그 말을 믿는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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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줄여서 쓰니까 별일 아닌 것 같네. 사실 나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밤에 불을 끄고는 잠을 못 자. 환하게 불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불을 껐다가 무서워서 또 작은 스탠드를 켰다가 아침이 되어서 창 너머가 밝아지면 그제야 잠이 들어. 생활이 엉망이지. 예전 집 구할 때 사실은 삼층이라서 좀 꺼려졌었어. 보증금 오 백만원만 더 있었으면 더 높은 층을 구할 수 있었는데, 천 만원만 더 있었으면 공동현관에 CCTV와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 천만원만 더 있었으면 대로와 바로 맞닿은 경비실도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까 돈이 없는 게 그저 조금 아쉬운 일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일이더라.
/51쪽
엄마처럼 씩씩하고 당당하지 못한 내가 늘 한심했지? 근데 엄마는 힘들 때 털어놓을 사람이라도 있었잖아. 나 말이야. 하소연 정도가 아니라 퍼부었지. 그건 화풀이였어. 가족 중 누군가 상황이 안 좋을 때, 집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엄마는 내가 감정의 윤활유 역할을 해주길 바랬어.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구하겠다고 했을 때, 엄청난 배신을 당한 것처럼 분노하던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 없어. 제 나이에 맞게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자라면서 동시에 가족들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로 남아주길 바랬던 거야? 엄마,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하겠어. 엄마는 늘 저주처럼 말하지.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보라고. 근데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나 같은 딸로 태어난 게 아니라 나 같은 딸로 키워진 거야, 엄마에 의해서.
왜 또 얘기가 이렇게 흘러갔을까. 그냥 잠들기 무서워서 쓰기 시작했던 건데.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엄마에게는 엄마의 삶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다고, 모든 다른 인간관계처럼 부모와 자식 관계 역시 잘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내심 속마음은 꼭 그렇지도 않았던 걸까. 이 편지는 아무래도 보내지 못할 것 같다.
'내 이름은 김삼순'
/54쪽
드라마 속 삼순의 나이는 서른, 열여섯 은순에게 너무나 까마득했던 나이, 노처녀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나이, 내년이면 은순도 바로 그 서른이 된다.
/58쪽
아버지도, 매니저님도, 잘 나가는 선배들도, 오늘 모인 스물아홉 동갑내기들까지도 마치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말했다. 결혼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마지노선. 더 늦어지면 못 하거나 떠밀리듯 아무하고나 하게 될 거란다.
/60쪽
그제야 은순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나는 정말 결혼이 하고 싶은가. 아니다. 그런데 왜 조급한가. 스물 아홉이라서? 은순이 겪은 모든 일들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고 스물 아홉이기 때문에 벌어질 불행은 아무것도 없다. 서른 아홉에도 마흔 아홉에도 쉰 아홉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관람차'
/66쪽
얼마 후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다시 집에 돌아왔다. 엄마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있었다 해도 그것은 부부 사이의 일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셨든 살아계셨든 나는 두 사람의 문제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와 엄마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 근처 고시원에 방을 잡았고, 오빠는 나에게 나쁜년이라고 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오빠나 실컷 효자 해."
하지만 집을 나오던 날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은 거대한 나방처럼 기분 나쁜 가루를 흩날리며 수시로 나를 덮쳐왔다.
"그래도 너는 딸이잖아."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구구절절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소연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딸이다. 그래서 뭐 어쨌는데.
첫댓글 그녀 이름은 책 아직 안읽어봤는데 여시 필사하는 부분만 읽어봐도 공감가는게 넘 많다 주말에 책읽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