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달은 이런 인물)
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아울러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이를 본 관원들이 이상히 여겨 태수에게 사연을 고하고 즉시 와서 보니 금궤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어졌다 한다.
그날 해가 질 무렵 근처에 사는 노파가 그 연못에서 빨래를 하는데 서산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뜨며 또다시 금궤가 떠오르자 이를 건져 안고 집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금궤안에 오색이 찬란한 우모(羽毛)에 싸여 있는 남자 아이가 서광이 빛나는 눈과 용모가 범준하며 양어깨에 붉은 점이 日, 月을 상징하고 양쪽 겨드랑밑에는 81개의 용(龍)의 비늘이 있으며 등에는 북두칠성의 검은 점과 손바닥에는 尹자 모양의 손금이 그어져 있었다 한다. 이분이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이분은 성장함에 따라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학문에 능숙하였으며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龍馬)을 얻어 무예를 익히며 파평산 정상을 비호같이 오르내렸으며 이곳을 치마대(馳馬臺)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가운데 어느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산야에 초목이 고사할 지경에 이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국왕께서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문신들에게 지시하니 문신들이 갑작스런 일로 생각이 안나 주저하는 것을 본 윤신달이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
’宣君臣之有罪甘受 災殃 奚草木之無知等 蒙焦熱(선군신지유죄감수 재앙 해초목지무지등 몽초열)란 글귀로 써 놓으니 과연 명구(名句)라며 문신들이 탄복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 한다. 고구려는 당시 궁예왕 막하에 왕건, 윤신달, 신종겸, 홍유, 복지렴, 유검필등 쟁쟁한 명장 걸사들이 모여 세력을 확장 국호를 후고구려로 하고 강원, 함길, 평안, 황해도의 북방지역을 장악 도읍을 송도로 하고 또한 철원으로 천도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봉왕이 된 궁예왕은 날로 난폭하고 잔악해져 중신들의 학살등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되어 덕망이 높은 왕건에게 조정백관을 비롯 백성들이 따르게 되자 태봉왕은 왕건이 반역할까 두려운 나머지 관심술을 써서 나를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호통을 치며 죽여 없애려고 왕건은 소리치며 물러나와 윤신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박술연 등 제장들과 의논 끝에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하고 궁궐로 쳐들어가니 918년(동예 26세) 궁예왕은 궁중에서 빠져나와 강원도 부경(現 平康)으로 도망치다가 피살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리하여 왕건이 등극 송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로 하고 고려왕국 태조가 되었다.
이 당시 윤신달은 파평현에 거주함으로 개국백에 봉한 후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하였다. 당시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씨 三姓이 992개년(55世) 집권해 내려오던 중 935년(신라 경순왕 9) 국정이 문란 민심이 날로 쇠퇴함으로 고려조에 굴복 폐망되었으며 또한 전라도 지방에 진훤이 892년 후백제를 세워 그의 아들 신검이 건국 45년만에 고려에 항거함으로 삼국통일이 되었다.
이는 오직 고려 태조를 극진히 보필한 중신 태사 윤신달선생께서 일상 덕을 닦아 인의 토대위에서(修德行 仁以利天下)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간곡한 권유로 말미암아 왕건이 큰뜻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으며 태조는 삼국통일 후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한 것도 윤신달의 공이 크다 하였다는 전설(羅濟之平 尹莘達之功也)이 내려오며 아래 건국공신들에게 책훈을 내리었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坡平尹氏 始祖 尹莘達),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平山申氏 始祖 申崇謙), 경주배씨 시조 배현경(慶州裵氏 始祖 裵玄慶), 달성홍씨 시조 홍유(達城洪氏 始祖 洪儒), 오천복씨 시조 복지겸(汚川卜氏 始祖 卜智謙), 안동김씨(신) 시조 김선평(安東金氏(新) 始祖 金宣平),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文化柳氏 始祖 柳車達), 전의이씨 시조 이탁(全義李氏 始祖 李탁 ), 안동장씨 시조 장길(安東張氏 始祖 張吉)또한 그밖에 20명에게 수훈을 내렸다.
태사윤신달선생은 문무를 겸전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 파평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하는데 강을 건널적에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하며 말이 물을 마신 나루(如飮津)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하여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조시대 철공(대장간)하는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가 직사하였다 하며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서기 1117년(고려 예종 12)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좌리평계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 지군국 중사(推忠左理平戒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判尙書 吏部事 知軍國 重事)가 되어 943년 왕건태조가 승하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신달은 삼남지방을 평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임명 경주(東京)대도독부(大都督府)에 52세에 부임되었으나 30년만에 다시 돌아와 81세로 서거하니 태사 삼중대광으로 추증하고 경주 기계현 아치동(현 영월군 기계면 봉래동)에 구봉산 사원(四原)에 국장을 지냈다 한다.
조선조 영조 대왕시 경주 유림들이 봉강서원을 건립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던중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후 자손들이 묘옆에 묘사를 건립 매년 음 10월 1일과 한식일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addmoun/654420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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