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이야기
난 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잔치국수, 비빔국수는 물론 칼국수, 우동, 라면, 자장면, 우동, 짬뽕, 쌀국수, 스파게티 등등 면류는 모두 좋아한다. 하루 세끼 면류로만 식사를 해도 좋다. 그런 국수 식탐 때문에 자연히 내가 직접 국수를 끓여 먹는 적이 많다. 휴일 점심에 잔치국수를 해먹고 싶으면 가는 국수를 아주 많이 삶아 우선 물 국수로 먹고 남은 사리를 저녁에 비벼 먹는다. 혹시 이것을 놓치면 나중에라도 띵띵 불은 사리를 프라이팬에 놓고 버터나 올리브유로 볶아 마치 스파게티 같이 고추장과 양념을 넣어 먹는다.
술을 많이 먹고 밤늦게 귀가한 날이면 찬장을 뒤져 어떤 종류의 면류라도 찾아 끓여 먹고 잔다. 내 남산만한 배는 모두 국수로 말미암아 생긴 배다. 국수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냉장고에 있는 어떤 밑반찬도 소위 국수에 얹어 먹는 고명이 된다. 어느 반찬이나 잘게 썰어 김치종류하고 같이 비비거나 얹으면 훌륭한 고명이 되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가는 국수를 좋아하여 형과 내가 잔치국수를 먹고 있는 동안 엄마는 다시 국수를 끓는 물에 삶으셨다. 미리 삶으면 불으니까 쫄깃한 면발의 국수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이미 먹고 있는 국수도 곱빼기인데도 말이다. 그래 국수나 냉면그릇은 유난히 컸다. 그런 국수식탐은 나중에 커서도 나타나 어느 식당을 가나 같이 간 동료들이 남긴 국수는 으레 내 차지가 된다. 또한 중국집에 가면 굴 짬뽕을 자주 시키고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면 아주 느끼한 생크림과 우유가 잔뜩 든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파우더 치즈에 버무려 먹는다. 그리고 월남 쌀국수도 등급이 높은 것만 시켜 먹는다. 쌀국수는 숙취에는 최고다.
또 가끔 집에서 묵국수를 만들어 먹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뜨뜻하게 만들어 먹는다. 물론 들어가는 재료는 신 김치와 김, 각종 양념이다. 내가 즐겨 만드는 요리 중엔 골뱅이 무침도 있는데 이것 역시 북어포에 국수를 삶아 같이 버무려 먹는다. 골뱅이는 주재료가 아니라 비빔국수의 부재료일 뿐이다.

이런 면류 중에는 냉면도 빠질 수 없는 기호음식이다. 냉면은 시원하게 먹는다 해서 여름음식으로 알기 쉬우나 원래 냉면은 겨울 음식으로 나는 겨울에 집에서 냉면을 직접 요리해 자주 먹는다. 아마 냉면 원료인 메밀이나 고구마, 감자를 북쪽에선 가을에 추수하니까 자연히 겨울에 추운 날씨를 이용하여 먹었을 게다. 물론 냉장 저장이 잘되는 지금은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말이다.
며칠 전 날씨가 너무 더워 점심에 직원들에게 가까운 ‘평양면옥’에 가자고 했더니 몇몇 젊은 친구들이 울상이다. 반강제로 겨우 꼬여 갔더니 물냉면 시킨 직원들이 반 이상을 남겨 혼자 호식한 적이 있었다. 확실히 젊은 사람들은 메밀로 만든 면발이 굵고 밍밍한 평양식 물냉면보다 고구마나 감자 전분으로 만든 면발이 가늘고 쫄깃한 함흥식 비빔냉면(회냉면)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배를 꽉 채워주는 포만감과 매운 양념에 뜨거운 육수의 짜릿함의 차이랄까 어쨌든 젊은이들은 함흥식 비빔냉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난 평양식 물냉면을 훨씬 좋아한다. 내 개인적인 성향도 북한으로 치자면 엄마의 영향을 받아 관북보다는 관서 쪽인 것 같다.
그간 내가 갈고 닦은 실력으로 내가 평양냉면을 먹는 방법을 점검해 보기로 하자. 우선 평양냉면의 백미는 육수이다. 예전에 북쪽에서는 꿩고기로 육수를 내었다 하나 나중에는 닭고기로 대신하기도 하고 요새는 쇠고기 사골이나 갖가지 부위 살을 넣어 육수를 만든다고 하는데 육수를 만드는 비법은 식당마다 비밀이지만 육수의 기본은 역시 물맛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동치미나 물김치 국물로 육수를 대신하는 것도 좋고 섞는 비율에 따라 그 맛이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우선 준비단계로 식초와 겨자를 넣는데 식초는 꼭 면발에만 넣고 겨자는 조금 육수에 푼다. (난 자장면에도 식초를 쳐 먹는데 면발이 확 군기가 잡히는 느낌이라 좋다.) 물론 가위로 냉면 면발을 자르지 않는다. 메밀에다가 약간의 전분을 섞은 면발이지만 부드럽기 때문에 치아로 잘 끊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난 쫄깃한 함흥식 냉면도 가위로 안 자르고 그냥 먹지만 말이다. 그런 다음 담백하고 시원한 육수의 감칠맛을 먼저 음미해 본다.
그러고 나서 고명으로 얹은 채나 삶은 달걀, 편육 중 나는 삶은 달걀을 먼저 먹는다. 이것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냉면집에 가면 냉면 먹기 전에 으례 만두나 편육을 먹는데 삶은 달걀이 입속에 남아 있는 다른 음식의 맛을 깨끗이 지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내 정설로 채택하고 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은 냉면 이야기에서는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냉면을 먹는 올드 시니어들이 계신데 그 분들 중에서도 삶은 달걀을 처음에 먹어야 된다는 분도 있고 맨 나중에 먹어야 된다는 분들도 있어 날 헷갈리게 했지만 나는 처음에 먹는 것으로 결정한지 오래다.
삶은 달걀을 먹고 난 다음, 면발을 한 입 푸짐하게 입에 넣는데 약간 까칠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을 씹으면 메밀의 담백한 맛이 혀 속에 감돌 때 뭐랄까 무색무취해야 제 맛이다. 이것은 봉평 메밀국수나 일본의 소바와는 다른 맛이다. 한가득 입에 넣고 씹다가 삼키면 그 시원한 면발이 목구멍을 타고 육중하게(?) 넘어가고 식초의 신맛이 입속에 남아 다음 면발을 기다린다. 몇 번 면을 먹은 다음 시원한 육수를 들이키는데 가끔씩 컵에 담긴 뜨거운 육수를 마시면서 얼얼해진 혀와 입을 덥히고 깨끗이 청소하여 새로운 면발을 맞이할 자세를 갖춘다.
면을 다 먹고 감칠맛 나는 육수를 훌훌 다 마시면 그 포만감이란, 그 행복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실 젊은이들이 평양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메밀 맛이 매우 무미건조하고 맛이 별로 없는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무미건조한 담백한 맛과 조미료가 안 들어간 시원한 육수가 더 좋다. 조미료에 익숙해져 거의 원조 맛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비가 된 입과 혀에서 구수한 고향 맛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평양냉면 예찬만 하여 상대적으로 함흥냉면이 푸대접 받는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고 함흥냉면은 함흥냉면대로 새콤달콤한 맛과 쫄깃쫄깃한 가는 면발이 별미이다. 특히 냉면을 먹으면서 얹어 먹는 홍어회나 간재미 회는 씹는 맛이 일품이다.
나는 그래서 겨울에는 집에서 직접 냉면을 요리해서 먹고 여름에는 냉면집에 가서 먹는데 내가 즐겨 찾는 냉면집은 모두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는 집들이다. 특히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집 중, 앞서 말한 ‘평양면옥’이 있는데 본점이 안세병원 뒤에 있고 장충동에도 분점이 있다. 본점에는 주인 할머님이, 장충동에는 아드님이 주로 있고 연세가 든 이북출신 분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원래 냉면을 먹을 때 선주후면(先酒後麵)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반주로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이곳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다음으로 내가 잘 가는 집은 ‘필동면옥’으로 ‘필동면옥’ 냉면의 특징은 고춧가루가 들어간 것이 다른 평양냉면과 큰 차이점이다. 또한 다소 거친 면발과 쇠고기 사태로 낸 육수가 서로 용호상박한다는 느낌이다. 이곳에서도 많은 이북 시니어들을 만날 수 있다. 어느 해인가 예전에 부총리까지 지낸 분이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시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사실 ‘필동면옥’은 의정부 ‘평양면옥’이 본가로 ‘을지면옥’과 자매지간이다.
다음으로 중구 주교동 ‘우래옥’이 있는데 이 ‘우래옥’은 외국에도 많은 분점이 있는 유명한 냉면집으로 예전에는 꼭 선금을 받았다. 선금 받는 식당으로는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도 있는데 재개발로 수하동 골목에서 명동으로 이사를 해 음식 맛과 더불어 식당의 옛 정취를 이젠 볼 수 없어 유감이다. 90년대 초에 아주 더운 여름, 미국 달라스에 출장을 가서 먹은 ‘우래옥’의 냉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달라스의 기온이 40도가 넘었으니까.
또한 ‘고박사 냉면’도 있는데 ‘고박사 냉면’의 특징은 풋고추를 얇게 썰어 따로 내놓는 점으로, 풋고추 편채와 양배추 무침을 얹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 가 봤더니 그릇을 반으로 나눠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메뉴도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경기도 평택에 있는 본점이 정통으로 프랜차이즈를 하고 있지만 짝퉁도 많이 있다. 또한 ‘고박사 냉면’의 만두는 다른 냉면집의 만두와는 달리 얇고 넓적한 것이 특색이다. 이밖에도 서소문 ‘강서면옥’과 다동의 ‘남포면옥’도 모두 60-8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평양냉면집들이다.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함흥냉면집도 있다. 광장시장 맞은편 시계골목 안에 있는 ‘곰보냉면’(난 이 집을 특히 좋아한다.)을 비롯하여 오장동 ‘오장동 함흥냉면’과 ‘흥남집’, ‘명동 함흥면옥’이 대표적인 함흥냉면 집이다.
이제 냉면의 계절이다. 이 무더운 여름 ‘평양’도 좋고 ‘함흥’도 좋다. 입안에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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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범이가 3일에 이틀은 찾던 평양면옥(안세병원뒤)이었는데 요즘 다른쪽으로 옮겼다지? 암튼 냉면 골수 매니아가 상범인데 기훈이도 일가견이 있구만~ 전에 냉면 번팅할때 기훈이 나왔었나? 상범이 기운차리고 나오면 번팅 다시 함 하자~
얼라? 기훈이도 냉면에 일가견이 있네..냉면하면 상범인데..이 글에 열거된 냉면집들 나도 다 가보았지..어렸을 땐 주로 우래옥에서 가족 외식을 하곤 했었는데~에흐!! 천상 오늘 점심은 냉면이다..점심 메뉴 정해준 기훈에게 감사 _^^
으따~ 기훈이 미식가여~ 내가 평택에 오래있어서 고박사집은 첨엔 많이 갔었는데... 이젠 거기도 좀 변했더라 . 난 을지로 입구의 남포면옥이 맛있던데. 어복쟁반에 땅에 묻힌 얼음 동동 뜬 동치미 항아리며~ 우래옥은 얼마전 부모님 모시고 갔는데 가는날이 장날. 마침 그날이 정기 휴일이라고 허탕만 치고 골목에서 앞 뒤로 차만 낑겨 한참 헤맨 기억이...
삶은계란드시기전 삶은 면발을 조금 입에, 그리고 육수를 조금(약,두숫가락정도?)마셔서 혀와 목과 위장에? 기대치를 높이면 어떨까? 그전에 편육과 소주반병이면 더좋쿠...
그 중에 나는 '을지면옥'의 구수한 맛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나도 기훈이만큼 국수를 좋아하지만 직접 끓여 먹어본적은 없는 것 같구나... 냉면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