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운복 님이 커피에 대해 글을 보내줬었죠.
커피 하면 추억이 많습니다.
국민학교는 춘천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경쟁률이 있어 약간의 선발고사를 보고 들어간 기억이 있었죠.
춘천시내에서 유일하게 교복을 입고 교모도 쓰고 다녀
지금도 동기들 다른 학교 졸업한 친구들 사이에선
딸랑이(모자에 주먹만한 방울이 붙어 있어 붙여진 별명입니다)로 불리우죠.
다른 학교 친구들이 크레용도 귀하게 쓸때 우린 크레파스를 썼고
병뚜껑 같은 용기에 물감을 담은 수채화 물감 에누구를 쓸 때
우린 치약처럼 짜는 물감을 썼죠.
연필은 일제 잠자리표 향나무 연필을 썼구요.
1학년 말 쯤 집안이 망해
방 18개짜리 집(일제때 여관이었던 집이었다고 하더군요)에서 나와
그야말로 초가삼간에 10식구가 살았습니다.
4학년땐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길에 아사자가 보일 때쯤
밀기울 죽을 먹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때 나름대로 공부를 잘 하던 일류학교고
나름 성적이 상위권에 속하던 나로서는
가정형편상 경기중학교는 꿈도 못 꾸고
친구들 다 가는 춘천중학교도 포기하고
장학금을 노려 성수중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냥 놀아도 계속 성적 상위권을 유지하다보니 중학 3년을 그냥 놀았더랬죠.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부자 망해도 3년 먹을건 있더리고 성적 상위권이긴 한데
서울대 갈 성적은 부족해 고2때부터 공부한다고 덤벼들었었죠.
아침 7시에 기상, 15분만에 세면, 식사를 끝내고
걸어서 35분쯤 걸리는 학교에 등교, 8시부터 수업을 들으면 저녁 9시에 마지막 보충수업이 끝납니다.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11시 20분까지 앉아있다 집에 오면 통행금지 싸이렌이 불었죠.
당시 웬만한 집이면 세멘트로 만든 역기가 있었고,
뒷산에서 잘라온 낙엽송으로 만든 평행봉도 있어
15분쯤 땀빼며 운동하고, 펌프질해 받은 물에 샤워하고 나서
다시 책상앞에 앉으면,
2시 반쯤,
그때까지 공부하는 어린 동생 동무해 준다고
뜨게질이나 여원 잡지나 보시며 안주무시고 기다리시던 큰누님이
당시로서는 귀했던 가루커피,
(지금 생각하면 양키시장에서 흘러나온 미제 맥스웰이었던듯 싶은)
커피 한 잔에 토스트 한 쪽, 또는 우유 한 컵에 토스트 한 쪽을 해 주시고 주무시고
난 4시까지 그럭저럭 책상에 앉아 있었죠.
고3 여름방학 하기 전까지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그때 커피 맛을 알게 되었죠.
그 후 직장에 나와 다방에 가면
다방마다 자기집 고유의 맛을 낸다고
맥스웰, 맥심, 초이스 가루커피를 믹스해서 커피를 내 오는데(원두커피는 웬만한 다방에 없을 때입니다)
귀신같이 그 비율을 맞춰내기도 했었죠.
당시 지방에서는 원두는 구할래야 구할 재주가 없었기에
가루커피에 맛을 들였다가
90년대쯤 되니 춘천에서도 일반인이 원두를 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학교에도 원두 드리퍼를 갖다 놓고 내려먹기도 하고....
지금도 한달에 원두 6kg 정도 먹으니 세살 버릇 여든 가는가 봅니다.
첫댓글 이 글을 읽다보니 저의 고교시절이 생각납니다. 고 2때까지는 잘 놀았었는데, 막내누나 대학 입시 치르는 것을 보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 고2 겨울방학을 내내 도서관에서 새벽 통금 해제와 동시에 가서 자리잡고 밤 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는제 고3 첫 시험 성적이 쑥 올랐더군요.
그때 밤 늦게 집에 오면 삼척도립병원에 다니시던 둘째누님이 커피 한잔과 토스트를 만들어 두었다가 내어 주시곤 했었고, 가끔 용돈도 쥐어 주시곤 했던 기억...
그런 도움을 받아 오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위때 어청도라는 서해의 외딴 섬에 근무하면서 인천에 수리 올라갈때마다 한두가지씩 원두커피를 사와서 거의 7~10종류를 놓고 이것 저것 골라 마시며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동료 선배님들 형수님께서 총각집에 단체로 몰려오셔서 맛난 커피 타달라고 하기도 했지요.
커피에 대한 단상이 새록새록 돋아 오르는 아침입니다.
저는 고교시절 정말 공부를 포기 했었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한해 집에서 농사일 거들면서 지옥같이 힘든 생활을 했었습니다. 쥐약을 먹고 죽을려고 까지 했었으니까요~ 목숨이 질긴것인지 자살에는 실패를 하고... 다음해에 중학교 진학을 시켜 주더군요. 중학교때는 실장도 하고 공부도 그런대로 하다가 고등학교때 교납금 가지고 도망도 다니고 무기정학에 학교 다니기가 싫었었지요~ 커피는 누님 덕분에 고등학교때 맥심 커피를 처음 마실 수 있었습니다. 매형이 맹방초교 교사였었는데 놀러 갔다가 한잔 내어 주는데 그 맛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지금은 프림을 넣지 않고 마시지만 그땐 커피 두 스푼에 프림 한 수푼 반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강릉이 어쩌다 커피의 도시가 되었는지 요즈음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두집 건너 커피숍이랍니다. 교회보다 많을 걸요~^^ 교회하니 또 코로나가 생각나네요. 교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교회를 절대 다닐 수가 없답니다. 집단으로 하는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만 준비하던 사람들은 맥 빠지는 일이겠지요~ 저희 과학산업진흥원에도 대회의실은 대관을 폐쇄했습니다. 빨리 수그러 들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