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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건제 보충규례 / 균등 분배
레 7:1-10
1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 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 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 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레 7:1-10 / [면죄제물 규정] 잘못한 일이 있어서 여호와나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그 값을 치르는 뜻으로 여호와께 바치는 면죄제물은 이렇게 드려야 한다. 이 제물의 살코기도 여느 제사의 제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거룩하다. 2) 이 제사에 드리는 제물도 번제물을 잡는 곳, 번제단 북쪽에서 잡아라. 이 제물의 피는 번제단의 사방에 뿌려라. 3) 그리고 이 제물에서 떼어 낸 기름덩어리는 모두 다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야 한다. 기름덩어리가 붙어 있는 제물의 고리와 내장을 뒤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4) 허리 양쪽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뒤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를 함께 떼어 내어 5) 제사장이 그 기름 덩어리를 모두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야 한다. 이것이 여호와나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에 그 값을 치르는 뜻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의 절차이다. 6) 이 제사때 바치는 제물의 살코기는 무척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된 남자들만 먹을 수 있다. 이 제물의 살코기 또한 반드시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이 제물은 무척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7) [제사장이 차지할 몫] 면죄제나 속죄제에는 똑같은 규정이 적용된다. 곧 이 제사를 드릴 때에 바쳤던 제물은 모두 다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8) 번제물을 바쳤을 때 그 제물의 가죽은 그 제사를 치르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9) 또한 가마나 솥이나 쇠판에 구워 바친 곡식제물도 모두 그 제사를 치르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10) 이렇게 곡식제물은 기름에 반죽하여 바친 것이든지 마른 것이든지간에 모두 다 제사장 가문인 아론의 후손들이 차지할 몫으로 돌려야 한다.
앞에서 상세하게 언급된(레 5:14-6:7) 속건제의 보충규례가 여기서는 제사장의 임무에 초점 맞추어 설명됩니다.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1-5) 속건제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관한 설명으로,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가 나옵니다. 제사장은 번제물이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에서 그 희생 제물을 잡아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그리고 내장과 간, 콩팥의 기름을 화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속죄하는 제사장에게 돌아갈 것이요(6-7)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릴 때의 제물 분배 규정입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사죄를 목적으로 엄격하게 드려지는 제사였기에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릴 때 화제로 하나님께 드려진 기름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오직 제사장과 그 아들들만이 거룩한 회막의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분배 규정은 같으나 속죄제의 경우, 이는 족장과 평민을 위해 드린 속죄제에만 해당합니다.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 드린 속죄 제물은 남김없이 불에 태워야 했기 때문입니다(4:8-12, 19-21). 하나님은 제물의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십니다.(참고 고전 11:28)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8-10) 번제와 소제를 드릴 때 받을 제사장의 몫이 언급됩니다. 8절의 번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번제를 가리키는데, 이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은 제물의 가죽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제를 드리는 방법은 3가지인데(레 2장), 9절에 언급된 소제물은 그중 두 번째인 고운 가루를 가공하여 드리는 3가지 방법입니다. 이 소제는 특별한 경우에만 드려졌으며 제물의 양 또한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진 것 이외의 몫은 그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에게만 돌려졌습니다. 10절에 나오는 소제물은 9절에 언급된 이외의 방법으로 가공된 일반적인 형태의 제물이기에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이 혼자서 갖기에는 분량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소제물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모든 제사장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용: 속건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의 속죄 사역을 상징합니다. 예수의 희생이 내 죄를 깨끗하게 하셨음을 확신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일꾼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사역의 길이나 주저하는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요?(눅 12:24; 엡 3:8)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 시민답게 살 수 있도록 삼아야 할 지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의 말씀이면서 예수의 삶입니다. 복음에서 지목하는 합당한 삶은 예수를 삶의 표준으로 삼아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를 닮는 생활을 단번이 아니라 지속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의 주인공이신 예수를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를 묵상해 봅시다.
< 설 교 >
속건제와 화목제
레 7:1-10 / 전희성 목사
속건제의 규례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과 남의 소유권을 침해했을 때 그것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띤 제사이다. 남의 물건에 대한 범과는 그것을 돌려줄 뿐만 아니라 20%의 벌과금을 더하여 갚아야 한다. 이러한 속건제의 규례는 지극히 거룩하다(1절)고 하셨다. 속건제의 제물은 피와 기름과 콩팥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의 것은 제사장이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특히 속건제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는 죄를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도 잠을 편히 잔다면 그것은 사망의 잠일뿐 은총의 잠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다섯장으로 되어 있고 모두 108절인데 이렇게 하라 는 말씀이 54절이나 된다.
화목제의 규례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이다. 세가지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감사제로 드리며 둘째, 이루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앞으로 될 것을 믿고 드리는 예물인 서원제이며 셋째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예물인 자원제이다. 화목이란 기쁨 , 행복 의 뜻이 있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고 행복을 회복하는 제사가 화목제이다. 제물은 형편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렸다. 화제는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이고,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것이며, 전제는 부어 드리는 것이며, 거제는 상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세가지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이며 둘째는 결단의 자세인 서원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려야 한다.
신앙을 지켜 나가는데는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신앙의 내용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내용을 담는 의식입니다. 내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보존하는 의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컨대, 의식을 수레라고 한다면 내용은 수레에 싣고 갈 짐입니다. 또한 의식이 틀(form)이라면 내용은 틀 안에 담긴 알맹이입니다. 알맹이를 보존하고 성숙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틀이 있어야 합니다.
콩이 자라는 것을 보면 콩꽃이 떨어지면 콩깍지가 먼저 생깁니다. 그 콩깍지 안에서 작은 씨눈과 같은 콩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 콩 알맹이가 자라는데는 콩깍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콩깍지 안에서 자란 콩 알맹이가 성숙할대로 성숙해지면 콩깍지는 터져 나가고 콩 알맹이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신앙행위에 있어서 틀과 같은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의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예컨대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이나 성가대원과 헌금위원이 입는 가운은 하나의 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통하여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틀입니다. 이 틀은 내용을 정성스럽게 담기 위한 것입니다. 틀이 없는 내용은 흐트러지며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틀인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내용으로 볼 때 의식법에 속합니다. 이 의식은 세밀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의식법이지만 그대로 준행할 때 거룩이 손상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내용을 지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구약의 의식대로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법의 정신과 근본의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의식법을 자신의 몸으로 완성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의식법대로 하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삶에서 그 정신은 계승해야 하고 규례의 깊은 뜻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드렸듯이 우리가 예배에서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물은 흠없는 것을 드렸듯이 우리의 예배와 삶에 흠이 없게 드려야 하나님이 열납하십니다. 소제는 가루를 만들어 드렸듯이 우리는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영적으로 성화의 제물이 되어야 드려야 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제사의 의미와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삶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전적인 헌신과 감사의 헌물과 속죄의 회개와 성도의 친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분몬은 속건제와 화목제의 규례를 말씀하시는 내용인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영적 의미를 찾아 깨닫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1절에서 10절까지 속건제의 규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속건제에 대해서 레위기 5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과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했을 때 그것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사입니다. 남의 물건에 대한 범과는 그것을 돌려줄 뿐만 아니라 5분의 1의 벌과금을 더하여 갚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5:14-17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러한 속건제의 규례는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속건제의 제물은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고, 피와 기름과 콩팥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의 것은 제사장이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피를 단 사면에 뿌리라고 하셨는데 피는 생명을 대속하는 것입니다. 단 사면에 뿌리는 것은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짐승의 피를 보고 하나님이 죄인을 사망에서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건지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 가셨습니다.
마태 26:28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사신 교회입니다. 보혈을 쏟아 교회가 되게 하셨고 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생명도 이 제단에 쏟아야 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속건제에 있어서 강조하는 것은 실천입니다. 회개만 해서는 안됩니다. 보상하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상에 대한 실천을 고백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탈취하였으면 4배가 갚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속건제는 실천을 통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실 때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죄를 쌓아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죄를 짓고도, 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도 잠을 편히 잔다면 그것은 은총의 잠이 아니라 사망의 잠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형제와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성껏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만큼 정성을 다해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배당 안에서의 믿음은 열심있고 헌신적인데 예배당 밖에서의 믿음은 희미하다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예배의 생활화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있으나 믿음의 실천이 없다는 뜻이며 믿음과 삶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다섯장 밖에 안되는 적은 책입니다만 행함을 많이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는 모두 108절인데 절반인 54절이나 이렇게 하라 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요한복음 7:5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5-7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 보이시고, 500여 성도들에게 보이시고, 사도 바울에게 보이시고,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주님께서 야고보에게 단독으로 나타나셔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야고보야, 받아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받아 눈물로 먹으며 자신의 불신을 회개하고 평생을 철저히 헌신하는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30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말씀대로 실천하다가 유대인의 박해로 성전 꼭대기에서 떠밀려 떨어졌는데 아직 죽지 않은 야고보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인 떡과 주님의 피인 잔을 마셨으면 야고보처럼 실천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으면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성령의 역사 속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죄를 멀리 하고 성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속건제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10절에서 18절까지를 보면 화목제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화목제는 레위기 3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세가지 경우에 드렸는데 첫째,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감사제인데 토다라고 하며, 둘째는 이루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앞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의 예물인 서원제인데 네다바라고 하고, 셋째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자원제로서 네데르라고 합니다.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평화라는 뜻이면서 기쁨 , 행복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복을 회복하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중요하고 인간관계에서 행복이 중요합니다.
화목제를 감사제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기름섞은 무교병, 기름바른 무교병, 기름바른 과자를 감사희생과 함께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없는 떡을 말합니다. 희생은 형편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화제는 불에 태워 온전히 드리는 것이고, 요제는 흔들어서 드리는 것이며, 전제는 부어서 드리는 것이고, 거제는 제물을 상하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드리는 제사방식입니다. 제사의 방식은 다양한데 다양한 방식으로 감사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범사란 모든 일을 말합니다. 좋은 일과 궂은 일, 기쁜 일과 슬픈 일, 성공할 때와 실패했을때, 건강할 때와 병들었을 때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미국은 모든 책의 판권을 국회 도서관이 관장합니다. 몇 년전 국회 도서관에 아주 이색적인 책 한권이 들어 왔습니다. 책 제목은 「일백만번의 감사」였습니다. 책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문장만 일백만번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책은 텍사스의 한 실업가가 출간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책을 출간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감사한 일을 느낄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는 일백만번이나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쓴 종이를 책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만나는 사람들과 거래처마다 주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행복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매주일 감사헌금을 드려 보십시오. 일생동안 계속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화목제에 해당하는 1천번제를 시작하신 분이 많음을 주보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지혜와 부와 영화를 주시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응답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분명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세가지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시편 100:4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나를 통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서원을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결단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성과 속을 구별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겠습니다 이런 서원의 결단을 드릴 때 하나님이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셋째로, 자원하는 심령입니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희생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심이라 고 하신 뒤에 고린도후서 9:7에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물질과 시간과 몸과 재능을 즐겨내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미국의 아이젠 하워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가는 길이 두렵다 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 못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이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며 기도해 주었는데 아! 감사합니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맡은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규례를 정하시고 행하라 하셨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감사하는 생활이 될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만족함을 누리는 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생을 책임지시고 소망을 주시는데 감사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속건제는 은혜를 알게 한다
레 7:1-10 / 권신구 목사
레위기를 통해서 다섯가지의 제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1) 번제: 제물 전체를 태워 드리는 제사로써 제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
2) 소제: 유일하게 피없이 드리는 제사. 충성과 헌신에 대한 제사.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 화목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한 제사. 유일하게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다.
4) 속죄제: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 일상에서 죄를 깨달을때마다 드리는 제사이다.
5) 속건제: 5,6장에 걸쳐서 언제 제물을 드려야 할지에 대해 나온다. 오늘 다시 어떤 내용으로 들어야 할지, 속건제 내용에 대해 나온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비슷하다. 모두 죄에 대한 제사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속죄제는 대속의 희생으로 죄에대해 속한다는 대속에 의미가 있다. 속건제는 대상에 의미가 있다. 죄을 지은것에 대한 제물과 동시에 죄를 배상한다는 의미가 나온다. 제사의 과정은 이렇다.피가 나온다. 피를 보임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에 대한 사함에 의미가 나온다.
다시 말하면,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했다고 하는, 죄사함의 의미에서 피를 보게 된다. 동물을 죽인데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로 피가 나온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넓고 굵은 꼬리뼈, 거기에 덮힌 기름. 이런 동물이 양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속건제의 제물은 양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중요한 부분의 기름을 떼어서 불사른다.
기름이 상징하는의미가 있다. 레위기에 보면 율법에 많은 의미를 답고 있는데 교만을 상징한다. 하나님앞에 지을 수 있는 가정 더러운 죄, 교만을 상징한다. 콩팥은 몸에 있는 찌거기를 모으는 곳이다. 죄의 요소, 요소들에 대한 상징을 나타낸다. 죄의 모든 요소들에 대해 다 불사른다는 의님가 있다.
그 다음에는 속건제의 특징이 나온다. 말씀을 보기전에 속건제가 갖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별히 속건제는 부지중에 짓는 죄라고 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짓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앞에서 잘못을 제사를 통해서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속건제는 의도적으로 짓는 죄와 다르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앞에서 짓는 죄들을 말한다. 그런데 속건제는 모르고 짓는 죄까지 용서와 배상까지 해야하는 의미를 갖는다. 제사법이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죄를 지을려고 지은것도 아니고 죄를 의도적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에 대한 제물을 요구한다는 사실, 희생을 요구한다. 피를 요구한다.
한동안 싫어했던 말 중에 하나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이 싫었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 없는데 “누가 와서 당신이 한 행동때문에 누구누구가 상처 받았다고 한다. 당신이 한 말때문에 누가누가 시험 받았대”.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였는데 누구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는데 나의 말때문에 누가 상처받았다고 하면 듣기가 싫어가 싫었다. 오늘 속건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죄에 그것때문에 제물을 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모르고 짓는 죄에 대해 회개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까지 이렇게 해야하는가? 그런 의도가 전혀 없고 나는 동기가 순수했는데 오늘 율법을 잘 보면 모르고 짓는 죄에 대한 제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오늘 모르고 짓는 죄까지 속건제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속건제에 대해 정확하게 알면 이것이 억울한 제사가 아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이고 은혜가 그 속에 담겨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무지한 것. 우리가 모르고 죄를 짓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전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지한것이 순수하고 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지도 죄라고 말한다. 나는 전혀 죄를 지을 동기가 없었는데 억울하다. 레위기는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한다. 죄를 짓기위한 동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지울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에 기능이다. 그리고 자기가 죄를 짓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은죄조차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동기는 순수할지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허다한 죄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짓고 있느냐는 것이다. 무심코 던진 돌이 어느 방향으로 튀지도 모르는 그런 불확실성을 가진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중에 짓는 죄가 결코 그냥 넘어가거나 선한 것이 될수가 없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죄라는 사실. 성경은 율법을 통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동기가 순수하다면 괜찮은 것인가? 우리가 동기가 순수하다면 다 좋은 것인가? 어떤 것을 보면 그런 의도가 아니였는데 정말 좋은 의도로 시작했는데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줄수 있고 죄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면, 다 괜찮은 건가? 동기가 순수하고 선하다면 여러분 목표를 이룰수 있는가? 동기가 순수하면 다 이룰수 있는가? 안되더라 왜냐하면 무능하기 때문이다. 무능한것도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약하다. 우리는 악한 존재임과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 속건제는 인간이 악하고 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부지중에 죄를 짓는 이 악함를 가진 존재임과 동시에 또한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선과 의를 이룰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라는 것이다 속건제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부지중에 짓는 죄까지도 간과하지 않는 것이 바로 율법을 통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레위기의 초점은 수없이 많은 율법을 나열하고 ‘너희들이 율법가운데서 빠져나갈수 있느냐?’ 없다라는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래서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부지중에 짓는 죄로 인해 제사를 드려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도 하나님은 제사를 요구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끝은 은혜라는 사실이다.
여러분! 율법은 차라리 정비해서 우리가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항변을 해서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면 좋지 않은가? 율법이 법이 아닌가? 차라리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해 항변해서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레위기는 간단히“너희들은 죄인이야 빠져나갈수 없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뤄라!:”고 한다. 그래서 율법, 레위기를 잘 보면, 다른 종교는 이런것이 없다는 것이다.죄에 대한 지적이 없다. 다 은헤로 설명이 끝이 마무리가 된다.
신약에 오면 십자가 은혜로 다 종속이 된다. 여러분! 동기의 순수성울 가지고 있으면 복을 받고, 다음에 악한 동기가 있으면 벌을 받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동기가 순수해도 우리는 죄인이고 악한 죄인의 동기가 있어도 죄인이다. 오히려 동기가 순수한 사람들이 복받고 악한 사람들은 벌받는다. 이것은 인과응보이다.
많은 경우에 인과 응보의 논리로 살아갈때가 많다는 것이다. 인과 응보의 논리를 나에게 적용하면 내 신앙의 태도와 신앙의 삶을 더 우리가 이렇게 해야지하는 믿음은 좋지만, 또 그 인과응보의 논리로 다른 사람을 보게되면 다 율법에 얽매인다. “너 이거 잘못됐어,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돼!”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 성경은 다 뒤짚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동기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고 악한 동기지만 하나님께서 굴복시키고 변화시키셔서 사용한다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동기가 어떠했는가? 동기가 순수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저 그리스도인들을 죽여야 한다.” 동기가 순수하다. 그런데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악한 일인가? 또 반면에 강도가 나오고 세리가 나오고 무지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다 하나님께서 바꾸셔서 선한 하나님 나라의 목적의 은혜로 바꾸신다.
우리중에 이 인과응보의 논리로 살때가 많다. 이 율법, 레위기에서는 다 죄인이다.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도 부지중에 짓는 죄도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통해서 드리라는 것이다. 오늘 2,3절에 보면 기름을 다 떼어 내어서 불사른다. 우리의 교만의 요소들, 죄의 요소들, 부지중에 짓는 죄도 다 번제로 깨끗하게 살라낸다.
동기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어도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생긴다. 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내가 던진 돌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것도 힘들어한다. 심지어는 복수심, 원망, 분노에 늘 차있는 것같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굴복시키시고 은혜로 깨닫게 하시고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속건제는 거룩으로 시작해서 거룩으로 마치는 제사이다. 특별히 숫양을 뭐하고 하냐면, 5-7절을 보면 숫양을 거룩하다 말한다.
양이 뭐가 그렇게 거룩 하겠는가? 다 동물이고 힘없는 제물일 뿐이지만 하나님게서 거룩하다 이름붙혀 주셨기 때문이다. 속건제는 거룩으로 시작해서 거룩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거룩하게 불렀기때문에 거룩한 제물로 드린다는 사실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죄인이고 피해갈 수없는 죄의 그물안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의 그물안에서 우리를 속박해 주셨고 자유케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율법을 통해서 깨닫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