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못봐서 그렇다 치자. 백제에 무녕왕릉말고 다른릉이 있다는 말을 들어
봤는가? 백제 30대왕에 왕비 최소 30명 왕과 왕비 친족 10명에 5인가족으로
봤을때 최소한 (30+30)*10인*5인가족=45,000 이다. 최소한 백제 왕족묘는
45,000기墓가 있어야 한다. 모두 도굴됐을까? 아니면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부여 공주 가봐라. 왕릉 45,000개 만들면 사람 살곳이 없다고 앞에서
'백제는 대륙에 있었다'에서 역설했다.
자, 그럼, 경주는? 지천에 널린게 왕릉인데? 반월성 이라고 가봤다. 그게
성城이란다. 언덕이라기 보다는 거의 평지다. 아니 반월성 터라 해야 언덕
인지 겨우 알수있다. 그게 무슨 성이고 무슨 방어를 할수 있는가? 군대 각개
전투를 해도 거기서는 안한다. 성벽이 무너졌다? 면적을 봐라. 거기에 몇 명이
있을수 있나. 그리고 지금의 전차에 해당하는 각종 병기와 말은 어디다가
둘것인가? 병정놀이 하나? 병참은 어디두고 밥도 안먹고 전투하나 부다.
식민사학자들 양심이란걸 한번이라도 생각해봐라. 당신들은 밥먹는 직업일뿐
학자나 민족구성원의 자격은 없다. 중국 고궁에 한번 다녀온 사람은 경주를
보면서 왜소함을 느낀다. 그리고 속국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는 왜
이리도 작은데서 東西와 南北을 나눌까? 땅이 좁아 속도 좁은걸까?
그리고 중국인을 보면서 뙤넘드은 느긋하다며 땅이커서 그렇느니 하면서
부러워 하고 돌아서서 소국에 사는것을 한탄스러워 한다. 이 패배감이 당신들
사이비 식민사학자들 당신들 업적이다. 이건 일제때 무력감을 심어주고
저항심을 없애기위해서 주입하던 방식이다. 하긴 미국이 일제 자리를 메우고
있으니 열심히 떡고물 챙기느라 정신없을 거다. 그게 당신들 일이다.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 그 야그는 담에 하기로 하자.
좋다! 그렇담 뙤넘들 북조와 남조가 얼마나 찬란한가 보자. 멀리갈 필요없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존속했을 때만 비교해 보자. 밑에 정리해둔 중국의
한漢때부터 청靑조, 만주국 멸망때까지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당시
힘센넘이 장땡 아니 삼팔광땡이었다. (료遼,금金,청靑은 뙤넘들이 이민족인
만주족이라한다. 만주족이 아니라 조선족이다. 한漢,명明,송宋은 뙤족의
국가라 인식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 보다 동시대에 이 세나라보다 오래버틴 중국
왕조가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라. 그래서 왕조 비교를 해봤다. 고구려시대를
지나친 중국왕조는 무려 705년동안 36국國이 지나갔다. 과연 '당나라 군대'
란 말이 실감난다. 나열 하려니까 너무많다. 그래도 이해를 돕는다면...
1. 한漢,前漢 BC 206~24, 230年間
2. 신新 BC 8~23, 23年間
3. 후한後漢 25~219, 194年間
4. 삼국 220~265, 45年間 3國
5. 5호 16국 302~439, 137年間 17國,
6. 남북조 386~589, 203年間 9國,
7. 수隨 581~618,37年間,
8. 당唐 618~907, 289年間
요약해도 잡다하긴 매 한가지다. 여기 북부여 200년 역사를 뺀 고구려 역사
705년 역사만해도 고구려 하나만 대입해도 잡다한 중국왕조를 무색케한다.
이렇게 맥없는 중국의 국가들을 이보다 오래도록 존속했던 삼국이 대륙을
기름진 중국본토를 탐을 내지 않았다면 과연 삼국의 우리 조상님들은 뭣에
관심이 있었을까? 국토확장에는 창피할 정도로 소극적 이었던걸까?
그토록 자주 바뀌는 중국의 왕조를 보면서 어찌 욕심한번 내지 않았을까?
지금 이라도 그럴까?
얼마전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삼국시대 쯤에는 어떤넘이 장땡이었을까?
칼들고 땅따먹기 하던시절에는 힘센놈이 장땡임에 분명하겠다.
그럼 오래버틴 나라가 센넘일까? 빨리 망한넘이 센넘일까?
모두들 그렇듯이 오래 버틴넘이 삼팔광땡이다. 삼국지를 보면 문관의
지혜가 세상을 정복하지만 무관의 용맹함이 먼저 갖춰진 다음 문관의
지략이 빛을 발한다.
컴퓨터로 말하면 무관은 하드웨어고 문관은 소프트웨어라 할수있겠다.
엄청난 용량과 속도와 최신 프로그램이 깔린 관우야말로 가히 천하무적
이라할수있었다. 물론 영업이 부진했었지만...
암튼 그시절엔 힘센넘이 법이요. 진리라해도 과함이 없을 것이다.
당시 삼국三國이 중국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배웠었다. 그래서 장안長安을
동경해서 '장안의 화제'란 말을 썼다? 나는 과감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장안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라서 그말이 생활 깊숙히 그대로 남아
있는거다.
'당나라 군대'란 말도 많이 썼을거다. 말하자면 오합지졸을 지칭하는거다.
그런 당唐이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운다? 헐헐~~
당의 존속기간은 618~907년이다. 289년간 존속했다. 찬란한 문화의 당이
너무 력사가 짧다. 중국문화를 꽃피웠다는 당의 역사다. 당의 찬란한 역사는
고구려의 선진문화를 덤으로 안고 있어서 당의 역사는 찬란했던거다.
당은 고구려의 그 영광을 지속 못하고 내란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이어
가다가 발해가 멸망하기전 고려가 개국하기 11년전에 고려개국의 태풍에
당은 신라보다 빨리 폐업신고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나라군대는 이름값을 하고야 만것이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평정한 군대가 기병8만 이라 하면 믿어지는가?
믿고 안믿고필요없다. 사실이니까... 그8만의 기병이 유럽을 초토화
시켰다면 믿어지지 않을거다.
징기스칸이 귀국길에 러시아 사신이 구원을 요청했다. 징기스칸은
제베에게 이천명의 기병을 준다. 당시 유럽 최강국 폴란드를 박살내고
폴란드 식민지이던 러시아를 독립시킨다.
전 유럽이 경악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지 얼마안된 시기라 교황은
십자군을 급히 조직하여 각국에서 기사 10만을 소집했다. 당시 폴란드
땅이던 라이프니쯔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고구려도 몇십만씩 대군운용을 잘 안했다. 나라가 작아서? 아니다.
군사가 많으면 기동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경비가 많이든다. 병참 및
지원부대도 덩치가 커져 취약점이 너무많다. 비효율적 이라는 거다.
대륙을 평정하는데는 보병보단 날랜기병이 있어야한다.
수,당처럼 보병만 많으면 '당나라군대' 소릴 듣는다.
광개토렬제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때 기병 4~5만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아리수阿利水 즉 한수漢水건너 성城을 공격했다.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견디지
못하고 남녀천명,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고 왕이 친히나와 항복하고 복속국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왕의 동생과 대신 10인도 볼모로 잡아왔다.
4만 군사중 일부는신라 내물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실성을 볼모로 잡아왔다.
고구려는 5천에서 5만의 군사를 동원했다. 백제도 신라도 다를바 없다.
징기스칸이 8만군사로 세계정복이 됐다면 5천에서 5만의 군사가 중국대륙을
누비는데 결코 작은 군사라 할수없다. 정예기병 이니까...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 나라는 삼국이후 고구려 밖에 없다.
신라는 북조北朝인 발해가 있었고 고려 역시 발해가 있었고 발해 멸망후
영토를 회복치 못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라는 말은 염치없는 언어도단이다)
고구려도 반목반농이다. 고구려 군사가 그리많이 필요없었던 것은 바로
정예병이 있었다는거다. 말갈을 선두에 배치하여 무수한 전공을 올린다.
말갈은 이민족 또는 피지배층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배계층이다.(담에설명)
어중이 떠중이 모인 당나라 군대가 인원만 많으면 뭐하는가? 특전사
1개연대과 민병대 1개군단의 싸움이 어디가 낫겠는가? 개인장비부터
차이가난다. 고구려 기병이 특전사라면 당나라 군대는 민병대다.
일단 호북성의 한수漢水의 소개를 함보자.
길이 1,532km.유역면적 17만4350km2. 상류는 규수赳水 륙수戮水, 면수沔水
라고도 하며, 한중漢中 이하의 하류를 한수라고 한다. 호북성호北省에
들어와서는 단강丹江 당하唐河 백하白河 등을 합치고 강한평원江漢平原의
수향지대水鄕地帶 중앙을 곡류하며 흐르다가 무한武漢에 이르러 양자강에
흘러든다. 광화현光化縣 로하老河 하구까지 작은 기선이 항행하였으나,
단강 댐의 완성으로 섬서성의 백하까지 소항遡航할 수 있게 되었다.
연안의 양번시襄樊市는 중원中原과 강남江南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로서
번창하였다. 하류부는 무수한 소택沼澤 그물과 같은 인공수로가 발달하여
수운이 편리하나, 여름에는 홍수의 피해를 자주 입었다.
중국 성립 후 홍수에 대비한 단강댐이 건설되면서 홍수조절이 가능해졌다.
내륙수로로서도 수위가 안정되어 중류부의 관개 면적도 증가하였다.
아 !! 내가봐도 너무 차이난다. 조상이시여! 어찌 이리도 작은 땅을 주셨나이까?
고구려는 북조의 영향을, 백제는 귀족적인 남조의 영향을,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 소박한 신라 문화를 만들었단다. 소박함을
솔직하게 말하면 '볼품없다'랑 별반 차이가 없음에... 아! 어찌 이리 조그맣고
유약한 나라를 물려 주셨나이까?
광개토렬제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때 아리수阿利水(한수漢水)를 건너
명주溟洲를 공취했다. 그 명주가 수해가나서 카불시내를 방불케한 江陵이다.
강원도 강릉江陵의 소개를 보자.
면적1,040㎢, 인구 23만3812명(2001)이다. 본래 예국濊國의 도읍지로 알려
졌으며 313년 고구려 때는 하서랑河西良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 하였다.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 북빈경北濱京,
하서주河西州, 명주溟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512년지증왕13년에 주州를 설치하고 639년 선덕여왕8년에 북소경北小京으로
승격시켰다가, 말갈과 인접하여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자 658년 태종무열
왕 5년에 다시 州로 환원시켰다. 757년 경덕왕16년에 명주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날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후기신라시대에 명주지역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서 내물왕계와의 왕위경쟁
에서 밀려난 김주원金周元이 낙향하여 근거를 잡은 곳으로, 일찍부터 지방세
력이 활발하게 성장했던 지역이다. 894년 진성여왕8년에 궁예는 북원北原에
있던 양길의 휘하에 있다가 명주로 들어와 무리를 모으고 스스로 장군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으로 칭하고 다시 940년 명주, 983년 하서부河西府,
986년 명주도독부, 992년 명주목, 1260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1389년 강릉
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명칭과 품계가 바뀌었다. 강릉대도호부라는 명칭
을 조선 초에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그 후 1666년 강릉현, 1775년 대도호부로
승격, 1789년에는 강릉부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13도제 실시로 1896년
강릉군이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다시 호북성 남단의 강릉현江陵縣의 소개를 보자.
면적은 1032.2㎢이고, 인구는 약 37만 9000명(1997)이다. 호북성湖北省
강한江漢평원, 양자강揚子江 유역, 형강荊江의 북단에 위치한다. 의창宜昌의
남동쪽 100km거리에 있다. 연평균온도는 16.2℃이고, 연강우량은 1,184mm
이다. 옛 명칭은 형주荊州이다.
초楚의 장왕 원년부터 시작하여 20대 초왕楚王들이 411년 동안 이곳을 수도
로삼았다. 한漢 때부터 강릉현江陵縣으로 불렀으며 이 지방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말 남쪽 8km 지점에 발달한 사시沙市에서 통상이 활발해지
면서 옛날의 성황은 볼 수 없다. 1994년에 사시와 합병하여 형사시荊沙市
가 설치되었다.
1996년에 형주시荊州市 강릉구江陵區로 바뀌었다. 양자강 좌안의 교통 중심
지로 춘추전국시대 초의 도읍이었던 영落은 북쪽 교외에 있다. 쌀·목화 등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전통산업인 형주비단은 유명하다. 부근에는 석유가 나
며, 1940년대 에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이었다. 교육기관에 11개의 중학교
가 있다.
형강의 길이는 404km이다. 호북성湖北省 지성현枝城縣에서 그 하류인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의 성릉지城陵磯 부근까지를 말한다. 양자강揚子江 중류부 일단
一段의 별칭이다. 강한평원江漢平原과 동정호평원洞庭湖平原 사이에 이르므로
양안兩岸에는 호수가 많아 어미지향魚米之鄕 이란 별칭도 있다.
장강의 유로가 몹시 곡류하고 있지만, 제일 험하게 곡류하는 곳이 바로
형강 부분이다. 연안의 평야는 쌀과 목화의 중요한 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역사상에 수해가 많았고 해마다 여름의 증수기에는 자주 범람하여 수해가
격심한 지역이다.
1952년의 장강 치수공사의 일환으로 형강 남안에 있는 호북성의 공안
公安 석수石首 강릉江陵 3현에 걸친 지구에 ‘형강분홍分洪(홍수가 나지
않도록 상류에서 물줄기를 나눔) 공사를 하고 유수지遊水池(면적 920km2,
홍수 때 55억t의 물을 수용)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형강 연안뿐만 아니라 호북성과 호남성 두 성의 수해방지와 농업
생산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1966~1969년에 중주자中洲子에서 상차만
上車彎을 향하는 수로를 확대하여 현재 수운이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이상이다.
강원도 강릉과 호남성 강릉의 비교다. 역시 우리가 딸린다. 그리고 호남성
강릉과 강원도 강릉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여기 단오제 유명한거 아실거다.
호남성 강릉도 단오행사를 크게한다. 우연한 공통점이다. 단오는 음력5월5일
이다. 일년중 양기가 가장 충만한날 이라고 한다. 이날이 바로 고구려시조
주몽이 태어난 날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닮았다.
광개토렬제가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하서랑 즉,강릉을 평정했다. 아리수가
서울의 한강이란다. 그리고 하서랑을 평정한다. 이유가 뭘까? 뭣 때문에
광개토렬제는 대관령을 넘었을까? 강릉에 바다구경 오셨나? 지금 강릉인구
는 23만 가량이다.
그리고 여기의 경제력은 미약하다. 해산물, 산물, 농산물 이 모두 여기
인구가 소화하면 더 이상 없을 지경이다. 세금도 제대로 못내는 이곳을
눈독 들였다면 광개토렬제는 경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니면 등산을 너무 좋아하신지도 모른다. 조선말까지 강릉선비는 과거
보러 갈려면 등산부터 배워야 한다고 할정도 였으니까. 그렇게 험했다.
70년대 고속도로 개통시까지 서울한번 갈려면 열차타고 영주로 돌아서
중앙선을 타고 10시간 이상 가야 청량리였다.
사오십대는 청량리역에 대한 추억이 하나씩은 다 있다. 이렇게 험한
대관령 강릉길을 광개토렬제가 뭐 아쉬운것이 있다고 여길 평정하겠는가?
그 노력이면 중국본토를 공격하고도 남겠다.
호남성의 강릉을 보자. 한글로 장링이라 써서 나도 강릉인지 몰랐었다.
북으로 23km가면 형주荊州가 나온다.서북으로는 장강따라 의창宜昌이고
북으로는 의성宜城을 지나 양번襄樊 그리고 바로옆 익숙한 지명
양양襄陽 이있다.
그곳에서 동북으로가면 락양洛陽,정주鄭州요 동남으로가면 장강 요충지
무한武漢이요 남으로 가면 형주荊州,강릉江陵을 거쳐 강남江南인 호남성
장사長沙지방으로 이른다. 서북으로 가면 상주商州를 거쳐 서안西安으로
들어간다. 서로가면 한중漢中땅으로 접어들어 태백太白을 거쳐 서안西安
으로 들어간다. 한중에서 서남으로 가면 사천성 성도成都에 이른다.
백제의 웅진熊津이라 추측되는 것이다. 한수의 중요성이 보이는거다.
이정도는 돼야 박터지며 싸우는 명분이 생기는거 아닐까? 강원도 강릉
에서 북으로 속초 원산이다. 남으로 삼척 영해다. 그야말로 망망대해와
백두대간이 西로 가는길을 막고 있다. 뭘 보고 군사를 움직여 정복을
감행하겠는가? 한마디로 먹을게 있어야갈것 아닌가?
서울의 한강,漢水의 발원지가 어딘가? 강원도 태백산 검용수다. 이 태백산이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 태백산이 아니라 한강의 발원지를 따라 올라가다가보니
그산에서 물이흘러 태백산이 된거다. 즉 한강 즉 한수가 있고 단군이
내려오신 신단수 태백을 역추적하니 지금 강원도 태백에 산에서 발원해서
그산이 '태백산'이 된거다.
형주,의창,양번,양양,한중 제법 들어본 지명들일게다. 삼국지에 보면 한중
을 지나 성도로 간다. 장비가 지키던 그곳이다. 한수의 발원지가 바로
태백산太白山이라 했다. 강원도 태백이 아니라 섬서성陝西省의 태백산이다.
태백하太白河라는 하천도있다. 여기가 여기 단군이 태어난 太白山이다.
<첨부 지도참조>
서안이 왜 고구려의 장안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서야 조금알
거다. 그리고 한수漢水,아리수阿利水에 목을 매는지 이해할거다. 온달이
아차성阿且城에서 전사할때 아리수가 라했다. 고구려지 신라지를 거치며
흥망을 거듭했던 장소다. 한수는 곧 나라의 흥망을 짊어지는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부강국가로 가는 경제력이 집중된 곳이었다.
국사시간에 삼국이 당시 한수漢水를 점령하면 바로 중국과 교역하면서 선진
중국의 정치,문화,경제를 먼저 접하여 삼국중 먼저 패권장악을 한다했다.
그래서 치열하게 싸웠단다. 지럴~ 백제가 중국 가고 싶으면 남지나로 가면
되고 신라도 굳이가고 싶으면 남지나로 돌아가면 될것아닌가?
백제, 신라, 가야가 고구려가 막아서 중국을 못간다는 말도 될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서울의 한강漢江를 두고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었을까?
한반도에 바다가 있는한 한수는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위치는 아니다.
이건 강단사학이라 하는 식민사학자들의 걸작이라 할수있다. 큰 삼국을
한반도에 구겨놓을려니 얼마나 찌그려 졌겠는가? 물론 조선때 사학자들도
한반도에 삼국이있었다고 믿었었다. 정보의 부재였다.
각설하고, 예나 지금이나 국가간의 충돌의 대부분은 이권에서 발생하게된다.
삼국이 한수漢水를 두고 서로 박터지게 싸웠던 이유는 경제력인 상권商權을
차지하고자 치열하게 싸웠던거다. 삼국이 한수漢水를 두고 왜 그랬을까?
그렇다. 한수를 점령하면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으로 진격이 용이했던거다.
즉 현재 서안으로 진출하여 실크로드의 상권을 장악하는거다. 장안이
실크로드의 시점인건 다들 아실거다. 실크로드만 손에넣으면 그야말로
떼돈버는거다. 어떤 나라든 재정이 약하면 망쪼 드는것은 불변의 진리다.
현재의 중국서안西安, 당시 고구려의수도 장안성에 삼국의 모든 물품이
모여서 거래되던 국제시장 이었던거다. 이 정도면 '장안에 화제'라 함은
바로 세계 토픽감 이었고 장안의 화제라는 말을 만든 주체가 바로
高句麗人 이었던 거다.
즉, 당시 高句麗가 중국이라는 거다. 말만 들어도 통쾌하지 않은가?
'고리짝' 얘기말라는 말 자주 쓸거다. 아님 어른들게 여쭤봐라. 이말뜻은
옛날얘기 말라는 말이다. 고리짝은 뭘까? 전에 밝혔듯이 고구려를
고리高麗라 그랬었다. '리麗'자는 아름다울려,나라이름'리' 자라 그랬다.
'고리짝'은 '고리적' 즉 '고구려적' 얘기 말라는 거다. 옛날 얘기 말라는거다.
말하자면 잘나가고 좋았던 아득한 옛날 즉, 헛생각 말고 열심히 살라는
깊은뜻이 있었던거다.
옛사람들 기억에도 고구려의 영광은 잊기 힘들었나보다. 하기사 전혀
모르는 나같은 놈도 떠드는것 보면 좋았기는 좋았나보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있는 고구려는 멸망시까지 최고의 강자였고 지금도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서 지금도 꿈틀거리는 거다. 첨부한 잡다한 중국왕조를 보면, 삼국시대
당시 장안은 고구려 수도 '장안성'일수밖에 없다
삼국 존재시 한족 국가는 대수를 10대 넘긴왕조가 드물다. 아니 5대 이하가
많다고 해야할것 같다. 그리고 왕의 재위기간도 10년남짓하고 뚜렷한
이유없이 10년 이하가 많다. 정권이 불안하고 내치를 못했다는 반증이다.
1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대륙을 통일하고 정치,경제,문화를 확립한다는
것은 허풍에 불과한 것이다.
더군다나, 리麗,제濟,라羅를 속국으로 뒀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비교해 보면 정말 당나라 군대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고대에 삼국은
최강의 국가였다. 삼국을 통일한 고구려 광개토렬제는 천하통일
즉, 세계통일을 한것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이 일제에 조선침탈의명분을 주기위해 조작을 한다.
그 유명한 '임나 일본부'설이다. 일본이 고대 가야를 지배했다는 그걸
우리의 석학, 설대교수, 국사학의 거두, 교과서 편찬자였던 이병도가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상아탑의 이정표다.
이완용의 친척이라서 그렇기 보다는 그야말로 친일반민족자의 표상인
것이다. 그의 제자들 강단사학 즉 식민사학이 지금도 강단에서 힘차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21세기 우리의 실상이다.
그리고 자포자기하는 것을 일제와 친일반민족자들이 확대 재생산 한거다.
"니들은 해도 그것밖이 안돼! 그러니까 시키는대로 하면 밥은 먹여주께"
이런 식이다. 좁고 무기력 하다고 세뇌 되어온 백성이 대륙을 아니 동양
문화를 이끌어 온 과거가 있다면 이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붉은 악마의
치우기蚩尤旗를 우리는 봤다. 그래서 역사는 지금 이시간에 더 필요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