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자의 시 외 2편
신이인
동식물도감을 하나하나 넘겨 보던 어린 내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나방 때문이지요
황토색 날개 위에 눈알이 가득했습니다
나방은 눈들을 펼쳐 내려놓고 페이지에 가득 앉아 있었습니다
봐
이것이 나의 무기다
어른인 내가 달려와 도감을 빼앗습니다
이런 거 보는 거 아니야
나방이 있는 페이지를 모아 호치키스로 집어버립니다
이제는 간단하게 나방을 가둘 줄 압니다
방학을 맞아 캠프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산속에는 갇히지 않고
갇힐 리 없는 나방이 무수합니다
수련원의 공동 샤워실로 가는 복도에
나방 나방
나방
나방이 붙어 있습니다
나방은 자유로운데
왜 날지 않을까 의아합니다
날아 달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만
나방
나라면 그런 자유를
나방
앉고 싶은 곳에 아무렇게나 날개를 벌리고 앉는 일에 쓰지는 나방
앉아만 있지는
악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날았어 날았어 나방이
아닐걸
어른인 내가 픽 웃네요
멈추지 않는 눈알이 고요한 밤
그러니까 쟤네들은 안다는 거지
기도할 때 누가 눈을 뜨는지
이 산에서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본 게 누구인지
나방은 알고
앎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나방의 품위라니까
자유로운
성경책이 날아오릅니다
페이지를 펼쳐 흔들며
중간에 호치키스로 찍힌 자국도 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날개에 못을 박았나
누가 주님을 외면하였나
눈알에서 땀과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수련원이 젖어 갑니다
누가누가 많이 우느냐는 누가 성경을 아느냐와 관계 없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애가 제일 목 놓아 울 수 있었고
나는 의미도 없이 물에 떠내려갑니다
따뜻하네
좋다
이것이 나의 무기일까
그러다가 한두 번은 주워졌던 것 같기도 한데
바늘에 꽂혀 어디 표본으로 박제되어 있을 텐데
그게 어디서였더라
송파초등학교 운동장
일신여자중학교 교무실
자성학원 이은재어학원 장학학원 오름국어학원
나는 괜찮은 교재였습니다
어른들이 나눠 주고 아이들이 낙서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내 방의 천장 가까운 곳에 나방이 있습니다
보입니다
거기에도 있습니다
얌전합니다
나는 한 번도 등에 진 고난을 책처럼 활짝 펼쳐 보인 일이 없습니다만
비밀은 오로지 비밀끼리만
사이좋게 한 짝씩 나눠 가진 눈을 마주합니다
추하기 짝이 없는 무늬를
접어 놓고
데칼코마니라며 좋아합니다
기도하는 손을 따라 날개를 모으로 고백합니다
나방
이건 비밀인데 가끔 나는
납니다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투성이
여기 뭐 묻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제 팔을 낚아채고 가리키면서
일러 주었습니다
팔이……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멍이야? 타투야?
무슨 뜻이야?
외국인 친구는 팔을 스스럼없이 만지며 물어봅니다
한국인 친구가 당황해서 말을 돌립니다
사려 깊은 당신들이 티 나지 않게
투명 수건을 돌려 가며 가려 주는 행위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목욕 후 거실을 지날 땐 바다 바퀴벌레처럼 사라져야 합니다
수건 한 장만 앞면에 달고
아빠: 애써 TV로 시선을 고정함
엄마: 안 본다 안 본다 손사래 침
소리 내며 저절로 열리는 서랍 앞에
안 봤어
다정하게 말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다행인
저는 더욱
혼자서만 고장입니다
수건을 스스로 내릴 즈음엔 술 끊기 일찍 자기 점잖게 말하기 어른스러운 연애 다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저
아직도 저에게 뭐가 붙어 있는지
몰라요
볼 수 없어요
환해질수록 눈치 빠른 그늘들은 뒤로 사사삭
얼룩의 머리채를 잡고 숨어 버리고
팔짱 낄래요?
저는 약간 바보처럼 잇몸 안쪽을 열어 두었어요
상가 건물 공공 화장실 같은 거니까
와서 숨어도 되고
저처럼 웃어도 돼요
깨끗해요
씻겨도 무늬가 어지러운 들고양이를 편애할 수밖에요
이 서랍에 제가 개켜 모아 둔 사랑이
엉망진창 앞에서 팔을 자꾸 벌려요
엉망진창 앞에서 유독 깨끗합니다
선천적으로 이랬습니다
멀미와 소원
화분을 끌어안고 비행기에 탔어 어디론가 실려 갈 때면 심장은 꼭 한 걸음이 늦었지 몸 안의 몸이 주춤하는 기분을 뭐랄까 불안이라고 처음 불러 준 사람이 있었는데
공중 어디쯤에서 잠이 깨졌어 맞지 않는 그릇에 쑤셔 박힌 몸이 꿈틀했거든 깨지기 쉬운 안을 데리고 날아가다 보면 좋아하는 식물을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는 거야 너는 꽃집에서 씨앗을 사 볼까 하다가도 곧잘 그만두었잖아
떨어지면 무조건 깨지는 거라고
화분은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잘못 없이 넘어진 흙을 알고 있으니까
흙은 깨진 적 없지만 처음부터 터진 모양이었으니 소리 낸 적도 없을 것이지만 오래 갈리고 젖어 고와진 흙 진흙으로 검어진 발가락 아슬아슬하게 쫓아오는 나를 미워하면 목구멍까지 흙이 차오르게 돼 심장이 또 뿌리를 흔들어 입 밖으로, 무엇이 뱉어질 것 같은
식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 버거웠고
나에게 없는 식물이 너무 버거워서
알지 못하겠어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갈지 가지 않을지 알지 못하겠어 추락할지 도착하기는 하는지 잠을 자면 꿈이 계속되었어 잠 안의 꿈 꿈 안의 나 나는 계속해서 잠을 시도했어 그런 식으로 화분이 흙과 동일해 왔어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서 까맣게 젖은 나의 일부에서 무엇이 시작되리라고 여기지 않아 아직도 이 진흙의 이름을 모르고 있어
― 신이인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민음사 / 2023)
신이인
서울 출생.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