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다굼♡ y_hk1221@hanmail.net
《종이피아노》
형우는 초조한 눈빛으로 비상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응애 응애'하는 애기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던 시간인가.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서 나의 소중한 꿈을
이뤄줄 순간을 자신은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이 아이는 3살이 되면 피아노 앞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4살이
되면 어느 정도 유명한 곡들을 칠 수 있는 실력이 될 것이다. 5살 때는 어쩌면 작곡을 할 수도 있다. 6살 때
는 천재로 각광을 받을 것이며, 7살 때는 해외로 나가 세상에 있는 상이란 상은 모두 독차지할 것이다.
8살 때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세계적인 독주회를 열 것이다. 기대에 부풀어 오르는 심장을 주체하
지 못하고 형우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꼭, 꼭 저를 닮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제 꿈을, 그 아이의 꿈을
이뤄낼 수 있도록 그 아이를 도와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하시옵…….'
"응애 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형우의 눈이 반짝 떠졌다. 해냈다. 아내가 해냈다.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세요. 두 분 모두 건강하시답니다."
무사히 끝난 출산 소식을 말해주러 밖으로 나온 초록색 가운복의 간호사가 하늘에서 자신에게 아기를 주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온 천사 같아 보였다. 형우는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이 아이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
어린 시절, 형우는 동네에서 피아노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돈이 없이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못했는데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애들보다 피아노를 더 잘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사람들은 형우가 배우지도 않은 피
아노를 저절로 치는 천재인 줄 알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피아노 학원 밖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을 창문을 통해 열심히 곁눈질한 노력 끝에 3년 만에 만들어 낸 실력이
다. 연습은 교회에서 했다. 물론 그 정도 노력에 형우 정도 실력이면 천재는 천재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만큼의 천재는 아니었다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형우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온세상을 누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내 손가락이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별이 희꾸무리한 새벽에 나가 별이 총총 뜨는 밤이 되면 들어
오시는 생선 비린내 자욱한 어머니도 드라마에 나오는 명품으로 휘감은 사모님으로 변신시켜 드릴 수 있다고,
그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해낼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동네에서 천재소리를 듣기 시작한 12살 때부터
이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자신은 꼭 피아노를 해야겠다고 그의 어머니를 참 많이 들들 볶았다. 당장은 불효 자식으로
보여도 나중에는 큰 효도를 할 놈이니까 조금 참으시라며, 그리고 자신을 믿고 도와달라며 어머니를 설득시켰다.
아니, 말이 좋아 설득이지 반 강제 반 협박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촌동네를 떠나 도시로 나갔을 때도 천재라는 수식어는 다행스럽게, 늘 형우를 뒤따랐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
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동반한 피나는 노력은 형우를 충분히 스포트라이트 받게 했다. 하지만, 형우가 연주하는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형우의 실력을 능가하는 피아니스트 꿈나무들이 늘어났다.
형우가 18살 때의 일이다. 그는 거의 반미친듯 연습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뒤처지는 기분
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 형우의 홀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으셨다. 아직도 형우는 자신이 중도에 피아노를 포
기하게 된 원인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그 때 어머니를 위해 자신이 피아노를 포기하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이
렇게는 살지 않았을거라고 이따끔 절규한다.
그래, 형우는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셔야 자기가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다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
을 다했다. 여기 저기 친척집에 가서 구걸을 하는 방법으로. 그 도움으로 어머니는 위암 수술에 성공하셨고 여
태까지 살아계신다. 하지만, 약 6개월을 연습하지 않자 형우는 자연스럽게 기존에 연습했던 아이들 사이에서
뒤처졌고 그 열등감을 견딜 수 없던 형우는 급기야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한다.
지금도 형우는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수시로, 자기가 조금 기분 나쁘기라도 하면, 우연히 옛날에
같이 피아노를 쳤던 친구가 유명해진 모습을 보고 오기라도 하면 배알이 꼴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의 모
습을 숨김 없이 드러내며 그의 어머니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하지만, 형우의 포기는 형우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며 그 누구의 간섭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다. 6개월을 피아노를 안 친다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과 동등했던 실력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고 형우는 피아노를 처음 시작했던 그 때처럼 다시 마음 잡고 피아노를 쳤어야 했다. 이제껏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자신이 했던 모든 노력을 잊고 6개월을 쉬어도 나는 천재다하고 오만한 생각으로 임했던 형우의 그런
마음가짐이 형우를 패배자가 되게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사실 형우는 패배자도 아니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형우는 늘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했으며 급기야 이상한 마음을 먹기에 이른다. 자신의 자
식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줘야 한다는 새로운 꿈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똑같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사람과 중매 결혼하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척, 그녀를 배려하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그는 2년을 살아왔다. 오직 자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꿈은 오늘 실현 되었다.
*
"여보, 정말 수고했어."
아내는 힘이 든 지 수고했다며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형우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형우는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멍하게 풀린 눈으로 아내의 손을 더욱 꼭 잡는다. 그것은 이 행복한 순간을 결코 놓치
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늉 같았다.
"딸애 이름은 수이야. 수이. 영어 이름을 생각해서 지었어. 앞으로 세계적인 애가 될 테니까."
아내의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겨주던 형우는 앞머리의 축축함을 느끼고 풀려있던 눈의 초점을 아내에게
고정시켰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지 이제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여보, 왜 그래. 너무 행복해서 그래?"
형우는 다정하게 아내를 안았다. 이 사람한테 더욱 잘해줘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확인한 결과 외모 또한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낳아 준 이 고마운 사람한테 더욱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겼다.
"여보, 여보! 우리 딸이, 우리 딸이……."
아내는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말을 했다 못 했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길 꺼내며 통곡했다.
*
'세상은 그 때 무너졌다. 아내가 흐느끼면서 딸애에 대해서 말할 때, 그 때 솟아날 구멍 한 개 없이 무너졌다.'
수이는 선천적 귀머거리로 태어났다. 원인은 모르겠다. 아니, 알 것도 같다. 그 원인은 수이 아빠의 과욕으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수이가 태어난 이후로 수이 가정은 거의 파탄이 났다. 형우는 이제 아내에게 잘해줄 구실을 잃었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까지 잃어서 피아노 학원을 문 닫고 낮과 밤을 술로 지샜다. 형우의 아내는 큰 충
격에 휩싸였다. 남편이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으나 이제까지의 착실한 모습으로 유추했을 때 능히
견뎌내고 자신과 수이와 더불어 더욱더 열심히 살 남편의 모습을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만의 너무나 순진한 착각이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수이가 태어난 지 2달도 안 되서 형우는 말했다.
"여보, 장애인을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당신도 알고 있지?"
술에 취해 혀가 배배 꼬인 목소리였다. 형우 아내 눈빛이 흔들린다.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나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무래도 고아원에……. 현실을 직시해!"
그 말 이후로 형우와 아내는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집에 살지만, 더이상 부부로서 서
로를 의지하고 배려하는 '행위' 따윈 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수이가 있었다.
수이는 아주 아기 때부터 잘 울지 않았다. 배가 고프거나 하면 다른 아기들은 울어서 신호를 보내는데 수이는 자
신의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남들에게도 그것이 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웬만하면
울지 않았고, 형우의 아내는 그것을 더욱 마음 아파했다. 형우는 그 반대였다.
수이가 남들과 다르면 다를수록 더욱 징그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형우는 완벽한 폐인이 되었지만, 수이가 태어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피아노를 치는 일이
다. 이제 피아노를 치는 일은 형우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10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14살 때 처음으로 이 곡을 작곡하고 나서부터 18살 때 6개월을
제외하고 한 번도 이 곡을 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형우는 자신이 처음 작곡한 이 곡을 정말 아꼈다.
치기 어려운 곡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쉽지만은 않은 곡. 이 곡을 딸은 4살만 되면 형우 못지 않게 잘 치게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이제 다 ㅡ 부질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수이가 걷기 시작하면서 집 안에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관심은 오래전부터였지만
아무 내색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 걷기 시작하며 자신이 직접 찾아 움직이자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형우는 수이가 자신의 피아노실에 오는 것 자체를 질색했다.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아빠가 그 방에서 피아노를 치니까
어느샌가 들어와 연주하는 아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는 맞먹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왜 애한테 소리를 지르냐고 하면, 저 애는 소릴 질러도 울지도 않는다며
정말 징그럽다면서 또 나가서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오곤 했다.
그렇다. 수이는 아빠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울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냥 아빠의 표정이 무서웠고,
한편으론 뭔가 불쌍하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 안 가!"
그래도 수이는 아빠가 피아노를 칠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와 눈치를 보며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가까이 와서 건반을 두드리는 아빠의 모습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아빠가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지어
도 소용 없었다.
"너 또?! 이 방 문을 잠궈놓던지 해야지."
"애 좀 데려가란 말이야!"
"꺼져!"
매일 형우가 소리를 지르고, 수이가 그 방에서 내쫓기고, 아내와 형우가 싸우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수이는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근 3년이 지났다. 이제 수이가 5살, 한창 귀여울 꼬마 아이. 수이의 생일날 형우의 아내는 8절 켄트지를 3개
붙여서 피아노 건반을 그려 수이에게 선물했다. 그 맘 때 쯤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작은 피아노 하나 사줄 형편이
되질 못했다. 형우는 거의 폐인에 가까웠고, 자신도 장애아 딸을 키우다 보니 맘편히 온전한 직업 생활을 하기가 무
척 어려웠던 탓이다.
그리고 수이의 생일 후 몇 일 뒤 형우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
형우가 그 피아노마저 찢어버려 잘 울지도 않는 수이가 울어버린 그 다음 날이었다.
"잘 된 일이야. 잘 된 일이라고……."
거실 여기저기에 과자 봉지와 소주병,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다. 엉망진창이 된 소파 위에 앉아서 잔에 소
주를 기울이는 형우의 모습이 연민을 넘어서 무섭게 느껴졌다. 형우는 겨우 자신만 들릴 목소리로 계속해
서 중얼거렸다.
"나한테 협조 한 번 못해주는 더러운 놈의 세상. 안 살아. 안 살아."
꺄르르륵.
어디서 애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구만."
한참 소리가 안 들리자 형우는 더욱 환청이라고 확신했다. 차라리 다리가 없는 아이였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피아노는 손으로 치니까. 장님이어도 어쩌면, 어쩌면 괜찮았다. 피아노 건반이 익숙해지면 눈을 감고도
충분히 칠 수 있었을꺼야.
하필 왜 귀머거리인 걸까. 마지막 한 방울마저도 아까워서 탈탈 잔에 털어넣는 형우가 자조 섞인 웃음을 띄며
피식 피식거렸다.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꺄르르륵. 짝짝.
아기 웃음소리와 희미한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이도 5살인데 아직도 웃음소리가 갓난 애기 때랑 변한 게
하나 없다. 다시 소주병을 기울이던 형우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벌떡 소파에서 일어섰다.
아내가 데려간 게 아닌가? 아니, 이 여자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방을 조금 열었다. 아이는 손가락을 벽에 대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쉴 틈 없이 계속
해서 꼼지락꼼지락거리더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박수를 치며 꺄르륵 거렸다. 뭔가 싶어서 형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꼼지락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손은 검은 싸인펜으로 낙서가 되어 엉망이었다. 벽에 무언가를 그렸다. 피아노다.
엄마가 그려준 피아노랑 비스무리하게 벽에 피아노를 그렸다.
"허, 참. 기가 막혀서."
형우가 어이없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엉성한 피아노에 두 손을 올려놓고 꼼지락거리는 딸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 더 미웠다. 아무리 그래도 넌 피아노를 칠 수 없어. 피아노 뿐만이 아니야, 넌 어떤 악기와도 어
울리지...
딸을 혼낼 생각을 하고 있던 형우가 딸의 손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움직임보다 익숙한 손 움직
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아마도…….
"꺄!!!"
딸이 소리를 지르며 박수쳤다. 또 한 번 연주가 끝났다. 연주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고, 연주가 끝나고, 다시
시작 될 때마다 딸의 손 움직임은 자연스러워졌고 그만큼 빨라졌다. 저게 무슨 소린지나 알고 치는 걸까. 저
연주의 제목이 뭔지나 알고 치는 걸까.
형우는 갑자기 못 견디게 서러워졌다. 병신 딸이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딸이 피아노를 잘 쳐서도
아니었다. 자신의 인기척을 이제서야 느끼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딸의 얼굴이 싸인펜으로 엉망이 되어 있어서
도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의 제목을 안다는 듯한 슬픈 표정으로, 연민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형우만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형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제목은 '피아니스
트'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한창 기고만장 해 있었던 14살 때 형우가 작곡해 이제껏 한
번도 빠짐없이(그 6개월을 제외하고) 쳐왔던 그 곡을 딸애가 치고 있다.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만큼 딸애가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이제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해왔던건지 비로소야 자각할 수 있었다. 딸애는 무섭기만 한 아빠를 물끄러미 바
라보다 다시 뒤를 돌아 벽에다가 손을 댄다. 자신이 싸인펜으로 그린 피아노에 손을 대고 손가락을 꼼지락거
렸다.
아직 연주가 덜 끝났는데 누군가 자신을 공중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힘에 놀라 수이는 소리를 질렀다.
"꺅!!"
형우는 수이를 들고 빠르게 피아노실로 갔다. 수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이 순간은 수이에게
뭔가 실낱같은 희망이 있어서 수이를 실험해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진짜 피아노를 수이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 순간만큼은 순수했다.
자신이 먼저 앉고, 그 무릎 위에 수이를 앉혔다. 피아노 뚜껑을 들어올리는 그의 손에도 검은 것이 얼룩덜룩
했다. 수이 몸에 있던 싸인펜이 번져서 그런가보다.
형우는 수이의 손을 잡고 피아노에 올렸다. 아직도 울고 있었다. 하도 울어서 얼굴이 다 젖어 있는 형우에게
수이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눈 앞에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져 있다. 늘 꿈 속에 비슷한 무언가가 나
타나면 그것을 형우가 다시 빼앗아가곤 했는데 오늘, 실제로 그 물건을 보게 되었다.
엄마가 만들어 준 종이피아노보다는 한참 못한 것이었다.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인다. 건반을 누르는 힘이 약해서 어떤 것은 눌러도 소리도 나지 않았고, 너무 느렸
지만 확실히 형우가 작곡한 곡이었다.
"도대체 네가, 네가 이 곡을 언제……."
형우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딸을 세게 껴안아 통곡했다. 곧이어 수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의 울음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아직도 피아노 위에서 꼼지락꼼지락거리는 수이의 연주소리에 맞춰서…….
*
"우리 수이를 위한 일이야. 우리 수이를……."
엘리베이터 안. 형우 아내의 얼굴은 초조해보였다. 그 지옥 같은 집구석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수이를 위해서, 아니, 수이 없인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오늘따라 6층까지 올라가는 이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도 난 듯 왜 이렇게 느리게만 느껴지는지.
어젯밤 꿈자리가 안 좋아서 오늘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던 형우의 아내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수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띵동하는 소리가 무섭게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복도로 들어섰다. 집은 복도 맨 끝이었다. 초조하게
발걸음하는데 웬 남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연달아 아이 울음소리도 들린다. 불안하다, 불안해. 대체 어느 집이
이 대낮에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거야.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설마 했던 예상이 적중하는 듯 했다. 그녀는 힐을
신어 엉성한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짐가방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면서 들고 있던 짐들이 복도 여기저
기에 떨어졌다.
"수이야! 수이야!"
띵동 띵동 띵동.
초인종을 누르며, 그녀는 문을 쳤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남편의 울음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녀는 주머니에 있는 집 열쇠는 까마득히 잊어버리
고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걱정이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들이 기어코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게 한다.
탕 탕 탕.
"문 열어요, 수이 아빠!"
첫댓글 ㅠ-ㅠ 그래서 결말은? 결국엔 가족이 행복해지는건가요?? 궁금해요~
가족이 행복해질지, 행복해지지 않을지는 읽는 분들께 맡기고 싶어요. 거기까진 염두해두지 않았고 오로지 종이로 만든 피아노를 생각해서 글을 쓰게 됐거든요~!! 암튼 읽어주셔서 넘 감사해요!♡
저도 피아노를 좋아하는데 ㅠㅠ 너무 슬픈얘기예요~ 진짜 결말은 어떻게 된건가요? 설마...;;;;
설마~의 뒷말이 너무 궁금해요. 무슨 상상을 하셨을지!ㅎㅎ 부족한 소설 읽어주셔서 넘 감사해요.♡
오와아. 오랫만에 괜찮은작품하나 건진느낌이네요. 다른연재도 하시는지요- 아이디보면 반갑게 찾아뵐게요 화이팅
부족한 소설에 칭찬까지... 정말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우와왕~~~ 재밌어여요~~~번외 적어주세요~>ㅡ<
처음부터 번외를 쓸 계획이 없었던 소설이라 번외는 없답니다.ㅠ.ㅠ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