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나병원 뒤 방어집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차를 가져왔다.
차 가져오지 않은 나를 종필이가 칭찬한다.
수염을 기른 날 보더니 어울린다 하다가 모자를 벗으니 배래부렀단다.
영대가 머리를 다 밀어버려보라 하고 충호형은 가발을 써라 한다.
종필이는 다 밀지는 말고 2미리쯤 남기고 밀면 좋겠다고 한다.
난 그냥 웃는다.
방어회와 머리찜, 가리비탕 귀오징어까지 먹으며 나만 술을 마신다.
먹을 거 많은 데 그까짓 술하나 참지 못하냐던 의사의 말이 떠 오른다.
충호형도 순천으로 가신다해 자릴 정리하고 난 택시를 타고 돌아온다.
아침에 일어나니 광주에 눈이 왔댄다.
창문도 열어보지 않고 늑장을 부린다.
동화사터 아래나 목교에서 서석대 가는 길에 눈꽃이 좋고 서석대 바위도 하얗게 덮였을지 모른다.
증심사 상가의 목련나무 꼬투리도 목화꽃처럼 눈이 쌓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빈둥거린다.
조금 남은 밥풀데기에 라면을 끓여 이른 점심을 먹는다.
소주를 넣고 혹 저녁에 얼지도 몰라 아이젠도 챙긴다.
45번을 탔는데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좋아 꾸벅꾸벅 존다.
내릴 곳을 챙기며 정신을 차리는데 어느 순간 졸다 깨어보니 동구문화센터란다.
후다닥 내려 다시 증심사학동 정류장으로 돌아온다.
2시가 살짝 넘었다.
빨간 애기동백꽃잎에 눈이 쌓였다.
키큰 목련나무엔 굵은 가지사이에만 눈이 남아 있다.
증심사 오르는 길은 미끄럽다.
일주문 주변은 염화칼슘 덩어리가 보여 눈이 없다.
당산나무 오르는 계단에 힘이 떨어진다.
한나절 정도 산을 걷는 일에 피로가 쌓였나? 약하다.
당산나무에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매고 스틱도 편다.
눈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들의 얼굴이 밝다.
중머리재가지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다행이 정상쪽이 하얗다.
바로 장불재로 오른다. 장불재 아래 나무 위쪽이 파란 하늘 아래 하얗다.
장불재는 춥다. 4시가 넘었다. 두 남자가 아이젠을 차며 해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며 서두른다.
소주를 마시고 옷을 다시 꺼내 입고 모자도 두꺼운 걸로 바꾼다.
내려오는 이는 있지만 올라가는 놈은 나 뿐이다.
입석대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바로 서석대로 간다.
동쪽의 산하가 열리며 비낀 햇살에 산능선들이 굵게 드러난다.
제암산은 보이지만 월출산은 보이지 않는다.
서석대는 손이 시리다. 귀는 견딜만한데 사진 찍는 손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옛길로 올라온 젊은이들이 내려가자 나 혼자 놀다 전망대로 내려간다.
거기서도 그들을 기다렸다가 떠나자 머물다 내려간다.
아이젠을 차야 하나?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아 흔적이 보이니 참아본다.
몸이 몇 번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는 않은다.
중봉복원지를 지나는 바람도 견딜만하다.
더 차가워야 설악산ㄴ도 한라산도 잘 이겨낼텐데. 나의 내한훈련은 형편없다.
중봉에 이르자 햇살은 붉어졌다.
짙은 구름띠 가까이 해가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이다.
사진을 찍으며서서히 내려온다.
용추봉 위에 이르자 해가 진다.
만연산쪽 산줄기와 새인봉 자주등 탑봉 능선들이 눈을 이고 나무들을 수묵화처럼 올려놓고 있다.
내게 준 영대의 그림도 아마 이런 풍경일거다.
동지가 가깝다. 해는 금방 진다. 그래도 눈이 있어서인지 길이 보인다.
중머리제 지나 당산나무 내려가는 골길도 눈이 넘치지만 아직 얼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걸음이 느리다.
아무도 없는 집에 조금 늦으면 어떠랴.
6시 40분이 넘어 불이 환한 정류장에 도착한다.
배가 고프다. 참고 45번을 타고 풍암저수지에 내려 김치찌개집에 간다.
문이 닫혀 있다. 지친 발을 끌고 금호순대에 가 잎새두 하난와 모둠국밥을 주문한다.
국밥이 나오기 전에 깍두기에 소주 세잔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