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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
▲1944년 6월 6일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연합군 병사들.
2차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19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한다. 상륙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상륙 저지 역할을 맡은 롬멜은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월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년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6월 6일, 마침내 ‘D-데이’가 결정됐다.
작전명 ‘오벌 로드 작전’.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몽고메리가
상륙을 지휘했다. 상륙지점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6월 5일 늦은 밤, 40개
사단의 연합군 16만명과 2000척의
함정이 영국을 출발했다. 상륙용 주정(舟
艇)도 4000척이나 됐고, 전투기 만도
1만1000대나 돼 7초 간격으로
이륙했다.
6월 6일 새벽 0시15분, 낙하산 부대가
해안 뒤편에 떨어진 데 이어 새벽부터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상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히틀러는
이때까지도 진짜 공격이 따로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보강을 주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피차간의 피해가 너무 컸다.
▶2012년 금성 일식
금성 일식 궤적 합성사진 - 지구에서 찍으면 포물선, 우주에서는 일직선
한겨레 1면, 경향과 동아가 쓴 1면은 모두 나사가 제공한 사진이다.
6월 6일은 현충일이었다. 이날 오전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21세기 마지막 ‘금성일식’ 우주쇼가 목격되었다. 올해는 2012년이라 아직 21세기는 많이 남아있는데도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금성, 지구의 공전주기와 궤도 등의 조건 때문에 주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계산에 따르면 앞으로 105년 뒤인 2117년 12월 11일에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 금성일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이렇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등이 행성이다. 태양에서 가까운 순서로 보자면 수성, 금성이 지구보다 더 안쪽의 공전궤도를 돌고 있다. 그러므로 태양과 지구 사이에 금성이 일직선상으로 놓이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그때 태양에 먼지 묻은 것처럼 ‘금성일식’이 발생한다.
나사 홈페이지. 금성일식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에서 사진이 쏟아졌는데 유난히 한국에서 더 뉴스가 많이 쏟아진 이유는 모든 과정을 관측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에 한국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날 오전 7시9분부터 오후 1시49분까지 6시간 40분 동안 관측됐다. 진기한 천체, 우주사진은 뉴스가치가 높다. 105년 뒤에야 볼 수 있다니 대단한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거기에 덧붙여 그림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6월7일치 조간신문들은 대부분 1면 사진으로 ‘금성일식(Transit of Venus)사진을 다뤘다. 경향, 동아, 한겨레의 1면은 거의 유사하다. 나사(NASA)가 제공한 사진과 더불어 과천 국립과학관의 관찰행사장의 색안경 쓴 아이들 사진을 같이 썼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특이한 사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크게 태양 표면에 금성의 궤적을 담은 사진과 더불어 과천, 호주 시드니, 미국 미시간의 시민들 표정을 함께 실어 이 우주쇼가 전 세계적 관심거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좋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금성의 궤적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넉 장의 사진에 대한 전체설명이 기사형식으로 실렸는데 과학적 현상은 다를 바가 없으므로 중간 부분부터 인용한다.
“사진은 7시 22분부터 30분 간격으로 태양을 찍어 합성한 것으로 검은점 형태의 금성이 태양의 왼쪽 측면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성 궤적이 포물선을 그리는 것은 지구 자전 영향이다. 태양에서 볼 때는 금성은 직선 궤적을 그리지만 지구 지평선을 기준으로 촬영한 사진에서는 태양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포물선으로 보인다”
합성을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금성이 아닌 월식 사진을 찍을 때에도 시간대별로 한 시간에 한 컷씩 찍어 원래 궤적에 따라 합성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니 합성했다고 밝히면 정확한 보도다. 사실상 이런 합성은 합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연속 촬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사진의 연속은 동영상이 된다. 만약 저 사진을 30분 간격이 아니라 3초 간격으로 찍는다면 그것은 연속촬영이다. 다만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지를 중복시켰을 뿐이다.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은 직접 찍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니 이 정도는 찍어보기도 전에 예상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이런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어서 과연 포물선을 미리 예상했을는지 아니면 찍어서 모아보니 이런 포물선이 나온 것을 확인했을는지는 알 수 없다. 한겨레 사진부의 이종근기자도 6일 금성일식을 찍었다. 그가 찍은 두 장의 사진을 보면 조선일보의 사진이 정확함을 보여준다.
조선일보 1면. 금성이 태양 표면에서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왼쪽이 시작. 오른쪽 아래가 끝.
중앙일보 2면. 지구에서 찍었다면 저런 궤적이 눈에 보일 수가 없다.
한겨레 이종근기자가 찍은 금성일식 왼쪽이 초기사진. 오른쪽은 거의 마지막 사진.
시작과 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사진을 이어붙이면 지구(한국)에서 본 사진이 된다.
중앙일보의 사진은 전혀 다른 궤적을 보인다. 1면에 싣지도 않았다. 과학적인 묘사를 제외한 뒷부분의 사진설명이다.
“지구상에서 본 금성의 궤적은 관측자의 방향에 따라 기준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약간의 곡선형태로 보이지만, 태양면을 기준으로 한 금성의 좌표는 직선으로 나타난다. 사진은 금성을 20분 간격으로 촬영해 합성한 것이다.”
역시 합성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간격이 20분이니 금성의 개수가 많아졌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뭔가 많이 이상하다. 공부를 좀 해야겠기에 나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 금성일식의 사진과 동영상이 아주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었다. 누구든지 쉽게 클릭하여 찾을 수 있다.
경향, 동아, 한겨레가 쓴 사진은 나사가 제공한 것이었는데 이는 지구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크게 두 가지 위성-하나는 태양활동관측위성(SDO:2010년 2월 NASA가 우주로 발사한 태양관측위성으로,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2.2m×2.2m×4.5m이며 태양전지판을 펼쳤을 때의 길이가 6.5m, 무게는 270kg이다.)이며 또 하나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들이었다.
위성은 지구가 하는 자전운동으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즉, 우주에서 태양을 보고 찍은 사진에선 중앙일보의 사진처럼 직선 궤적을 보이는 것이 정확했다. 그 외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서 찍은 모든 사진은 자전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앙일보의 사진은 잘못됐다. 중앙일보가 위성을 띄워서 사진을 금성일식을 관찰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중앙일보의 기자가 위성을 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아직 한국 기자 중에서 우주로 나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사 혹은 외신의 사진을 받아서 중앙일보의 기자가 과학적인 설명을 추가로 붙일 수는 있다. 그런데 사진에선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고 “20분 간격으로 촬영해 합성했다”라고 되어있다. 지구상에선 저런 궤적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없다. 게다가 직접 찍었다면 약간의 곡선이 아니라 아주 큰 포물선이 그려진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다. 만약 직접 찍어서 합성한다면 지구에서 본 지구인들의 입장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상상도가 아니라 카메라를 거쳐서 나오는 기록이다. 나사가 제공한 사진을 썼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나사의 사진이미지는 우주에서 위성이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관측을 위해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면 포물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역시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금성의 일식 궤적이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주장인 모양이다. 보도자료의 이미지를 보면 일직선이다. 그 보도자료는 언론사에 배포된 것이고 언론사는 독자를 위해 기사를 쓴다. 한국에서 직선의 궤적으로 금성일식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국제 우주정거장 개발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소연씨가 딱 한번 우주에 갔다가 온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보도자료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한국의 언론과 독자를 위해 제공한 개념도. 역시 우주에서 본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이런 궤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경향신문 9면 사진. 지구촌 곳곳에서 시간대를 달리해서 찍은 사진이다. 구름, 탑, 건물을 같이 걸치고 찍는 이유가 분명하다. 지구에서 직접 찍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은 기록이다. 저 까마귀가 날아들기까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신문에 상상도가 아닌 사진을 쓰는 이유는 뭘까? 지구촌의 독자들을 위한 사진이 아닌가?
사이언스 온의 기사에 한국천문연구원의 보도자료가 상세히 들어있다. 사이언스 온 바로가기
나사에서 제공한 우주에서 본 금성일식 바로가기
나사 공개 초고화질 동영상 http://scienceon.hani.co.kr/archives/30097
6월 15일 추가- http://www.seoulkaas.net/xe/index.php?mid=NSSA&document_srl=65750
위에 링크를 걸어둔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 회원이신 김진아 님의 사진입니다. 이렇게 찍으셨습니다. 이걸 흑점의 위치에 따라 합성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면 일직선 운동이 됩니다. 그 일직선 운동은 태양을 기준으로 했을 때입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합성하면 그렇게 됩니다.
자,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지구에서 보면 위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이며 태양을 기준으로 하면 바뀐다는 뜻이지 지구에서 볼 때 (적도의 없이 찍으면) 포물선으로 태양 표면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깁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지구를 벗어나서 찍을 때 그렇게 된다는 뜻이므로 개념도가 되는 것입니다.
* 적도의[ 赤道儀 , equatorial telescope ] : 천체망원경 가대의 하나. 지구 자전축에 평행한 축과 여기에 직교한 축을 장착한 망원경.
이메일로 여러분들께서 의견 보내오셨습니다.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에 소속된 회원인 분도 의견 보내셨습니다. 그 쪽 홈페이지에 올라온 여러 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추적장치로 찍었던지 아니면 그냥 찍어서 흑점 기준으로 합성하여 직선운동을 보여주는 영상물들입니다. 제가 처음에 기사 올릴때 보여드린 나사의 사진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나사는 위성에서 찍은 것이고 천문학회 회원들의 사진은 지구에서 찍은 것이란 점입니다. 천문인들께서 어떤 장비를 이용하고, 또 합성할 때 원칙이 있다고 하는 것은 존중합니다. 우주적 활동이니 고정되어있는 태양을 기준으로 관측하고 합성해야겠죠.
제가 쓴 기사의 핵심은 천문인들의 관측활동과는 다른 이야깁니다. 지구에서 자전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금성일식을 보면 조선일보의 사진처럼, 그리고 한겨레 이종근기자의 사진처럼, 그리고 요기 바로 위에 링크한 천문학회 소속 회원님의 연속사진처럼 보입니다. 회원님께서 그날 그렇게 찍은 이유는 (추적장치가 없어서, 나중에 합성하려고) 였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나왔는지도 아실 것입니다. 자전운동을 하는 지구에서 찍었으니까입니다. 저 분께서는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꽂꽂하게 허리를 세우고 지평선을 기준으로 수직을 잡아서 태양을 찍었습니다. 천문인 여러분들이 관측과 동영상 합성의 기준을 갖고 있듯이 포토저널리즘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지평선을 기준으로 수직, 수평을 바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헷갈리지 않습니다. 일출사진을 누워서 찍는 사람 없습니다. 달력에서 동해의 일출사진을 볼때 바다가 전봇대 마냥 서있는 사진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우주에서 찍은 사진은 가끔 그렇게 합니다. 지구 표면이 수직으로 서있고 해가 뜨는 사진.
천문인 여러분들은 그런 일출 찍으십니까? 또 하나 밤에 별의 일주운동을 찍을 때도 적도의 쓰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쓰는 사람들 많다는 것 압니다. 그 경우 지구는 제 자리에 멈춘 것 처럼 별의 일주운동이 멈춰버립니다. 이게 더 과학적이고 천문인들의 관례일까요?
▶2009년 범민련 전 의장 강희남 목사 자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초대 의장(남측본부)을 지낸 강희남(89) 목사가 2009년 6월 6일 오후 전북 전주시에 있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강 목사는 이날 오후 7시 30분쯤 자택 내 보일러실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외출에서 돌아온 부인이 이를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강 목사는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라는 붓글씨 1장과 “지금은 민중주체의 시대다.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 잡을 주체가 없다” 는 내용으로 ‘남기는 글’ 1장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강 목사의 유서에는 이명박 정권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강 목사는 1990년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 친북성향의 재야운동가로 1990년대에 범민련 남측본부 초대의장을 맡아 활동해왔다. 하지만 이 단체는 연방제 통일 지지,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내세우고 있어, 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지난 1994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기도해 구속되기도 했었다. 강 목사는 통일운동과 함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강 목사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와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에서도 활동했다.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이후에는 정부가 대북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05년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출범식
▶2005년 남미 볼리비아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 전격 사임
▶2004년 슈뢰더 독일 총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행사 참석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전후 독일 지도자로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슈뢰더 총리는 6일 오후 3시30분(현지시각) 노르망디의 아로망쉬에서 열린 공식 기념식에 참석한 데 이어, 오후 6시30분에는 캉 전쟁기념관에서 프랑스·독일 기념식을 가졌다.
슈뢰더 총리의 참석은 유럽의 화해를 상징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체로 많다.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부쩍 가까워졌다.
독일 내에서도 뉴스 전문 채널 N24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7%가 슈뢰더 총리가 기념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60세 이상의 고령층에서는 참가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20%에 달했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엇갈리는 반응이 있다. 슈뢰더 총리가 연합군 묘지에만 헌화하고 노르망디에 있는 독일군 묘지에는 들르지 않는다는 우파 언론들의 보도로 논란이 거세지자, 벨라 안다 정부 대변인은 슈뢰더 총리가 영국 및 영연방군 전사자들과 독일군 전사자가 같이 묻힌 묘역을 방문해 헌화하고 독일군 무명 용사 묘에도 헌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슈뢰더 총리는 “나는 독일군 300여명을 포함해 8개국 전사자가 묻힌 묘역을 갈 것이며, 그곳에선 모두가 추모심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슈뢰더 총리의 부친도 2차대전에서 전사했다.
노르망디 상륙 60주년 기념일을 맞아 프랑스를 방문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2004년 6월 6일 랑빌마을의 전사자 묘역을 거닐고 있다. 이 곳에는 2차대전 중 발생한 독일군 전사자 322명의 유해를 비릇, 8개룰 전사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슈뢰더 총리는 독일군 묘역에 헌화했다.
▶2003년 일본 자위대 유사(有事)법제 통과
2003년 6월 6일 노무현 대통령 일본 국빈방문 1시간 전 유사(有事)법제가 일본 국회에서 통과됐다. 일본 참의원은 이날 오전 10시쯤 본회의를 개회, 토론과정을 거쳐 자민당 등 연립 3당과 야당까지 가세한 90% 가량의 압도적인 다수로 이를 가결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정부가 참의원에서의 유사법제 통과에 앞서 외교경로를 통해 유사법제 처리를 연기해달라는 우리측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한 것으로 인식,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국내 출동과 작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행정적 지휘·협조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골자로, 일본으로서는 안보상 필요한 국내법 정비에 해당한다. 일본의 경우 헌법에서 무력의 보유·행사를 포기하고 미국에 안보를 일임해 왔기 때문에 ‘법의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다. 유사법제는 ‘공격’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률 자체만으로는 외부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런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사일이라도 쏴서 실질적인 전쟁상태가 되면 ‘초법적’인 명령이 난무할 것이고, 그게 더 위험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전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태세가 정비되지 않았던 일본이 앞으로 최소한의 방어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과 관련해 우려를 표시해 왔다. 특히 미·일 협력을 통한 일본 안보가 강화되면 될수록 동맹국과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금지한 평화헌법과의 괴리는 점점 커져 결국 개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도 주변국의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1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수석 부회장 선임
▶1999년 세계 최소형 2백56메가D램 개발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 독일 지멘스가 대량생산이 가능한 세계 최소의 256메가D램을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1995년 6월 6일 발표했다. 256메가D램은 삼성전자도 개발에 성공했으나 양산체제용으로 공동개발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사가 개발한 256메가D램의 면적은 2백85.5㎟로 신문 1천 쪽 이상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으며, 미국의 공동전자기기기술위원회(IEDEC)가 1995년 여름 정한 표준규격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D램은 퍼스널컴퓨터나 게임기에 쓰이는 반도체 기억장치로 현재는 4메가비트와 16메가비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번 개발로 2백56메가D램 시대가 열렸다.
▶1995년 남아공 흑인노동자 5만명,
노동법개정 요구 시위
▶1994년 중국 여객기 추락 160명 사망
1994년 6월 6일 오전 8시12분쯤 승무원 14명과 승객 1백46명이 탑승한 중국 국내선 서북항공 2303편이 이륙 직후 8분 만에 공중폭발해 서안 남쪽의 장안현 농촌지역에 추락,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에는 중국인 150명 외에 미국인 2명, 이탈리아인 6명, 스위스인과 홍콩인이 각각 1명씩 탑승하고 있었다.
사고는 온전한 시체가 60구에 불과할 정도의 대형 참사였다. 추락한 여객기는 러시아제 투폴레프154 서북항공 2303편 항공기로 산서성 서안공항을 이륙, 남부 광동성 광주시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이날 사고는 중국 역대 항공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사고는 연 20% 씩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중국 항공산업에 경종을 울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안전점검과 정기정비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었다.
▶1993년 카르피오, 과테말라 의회에서
새 대통령에 선출
▶1991년 소련 KGB, 히틀러 참모
헤스관련 1941년 비밀문서 공개
▶1983년 중국. 제6기 전인대 개막
▶1982년 이스라엘, 레바논 전면침공
▶1981년 인도 열차 추락 사고
5천여명 사망
▶1976년 카터 미국 대통령 후보.
주한미군 철수계획 발표
▶1967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봉쇄
▶1966년 미국 우주비행사. 2시간
5분동안 우주유영
▶1962년 요르단 아랍권 5개국 아랍
경제통합협정 조인
▶1961년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 사망
▶1961년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공포
▶1956년 제1회 현충일
▶1949년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948년 9월 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일제 때 중추원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들이 반민특위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되고 말았다.
▶1944년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 발생
▶1933년 최초의 드라이브인 영화 미국
뉴저지 윌슨가에서 상영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북벌군),
북경 입성 시작(19일 완료)
▶1926년 6.10만세운동 계획
탄로(천도교인사 다수 체포)
▶1916년 청나라 원세개(위안스카이) 사망
손문의 입, 황흥의 두다리도 원세개(위안스카이)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 (20세기 초 중국 민간에 유행한 노래가사). 이렇듯 거대한 땅 중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그가 1916년 6월 6일, 제제(帝制)의 부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중국 허난 성 샹청[項城] 지방의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기는 했으나 젊었을 때는 학문보다 운동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쾌락을 탐닉했다. 이런 그가 이홍장이 지휘하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8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고 이에 군사·경제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1885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됐다. 청일전쟁의 패배후 새로운 군대의 육성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고 이 일이 원세개에게 맡겨지자 그의 정치적 위치가 크게 높아졌다. 1901년 직례성 총독에 임명, 후에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중국 근대화와 국방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신해혁명의 물결이 만주족을 위협하자 청조는 원세개를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 결국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뒤 원세개는 중국 내의 모든 세력을 단결시키고 중앙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제제(帝制)를 부활시켜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런 그의 야욕에 반대파는 물론이고 지지세력인 보수파 관료와 군부 내에서까지도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총통직에서조차 물러나야했다.
▶1901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1949-66) 수카르노 출생
▶1891년 캐나다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사망
▶1884년 기독교청년회(YMCA) 창설
▶1884년 안남,`후에`조약으로
프랑스 보호령
▶1882년 인도 봄베이.
태풍과 해일 10만여명 사망
▶1882년 한국-영국 수호통상조약 조인
▶1875년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출생 - 1929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1850년 무선통신 개발로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 출생
▶1832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 사망
▶1799년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 출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러시아의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1837.2.10 사랑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 끝에 세상을 떠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작가 푸슈킨. 그는 38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희곡, 시, 소설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걸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학 세계를 펼쳐 보였다. 러시아의 국민적 작가에서 더 나아가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사랑과 영광과 비극은 어떠했는가?
아내를 탐하는 남자로부터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고 결투를 벌이다
‘장사꾼은 일어나고 행상인은 거리를 지나가고, 마부는 대기소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오흐따에 사는 처녀는 물동이 이고 총총, 발 밑에선 밤새 내린 눈이 뽀드득. …… 정확함을 자랑하는 독일인 빵집 주인, 종이로 만든 고깔모자 쓰고서, 벌써 몇 차례나 쪽문를 열어젖힌다.’ ([예브게니 오네긴] 중에서)
그 날도 페테르부르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오후 4시가 넘어 교외 공터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주변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두껍게 눈이 쌓인 러시아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총을 든 두 남자의 눈가에 분노와 긴장이 갈마들어 감돈다. 정적을 깨뜨리며 발사된 총탄. 한 남자가 배를 움켜쥐며 눈밭에 쓰러진다. 눈밭을 적시는 낭자한 선혈. 온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채 겨우 일어난 남자가 소리친다. “브라보!”
남자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12번지에 있는 집으로 급히 옮겨진다. 때는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경. 남자는 이후 이틀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 아내는 남편의 비명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자기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방에 들어왔다. “얼음을 달라!”
아내가 갖다 준 얼음을 이마에 올려 굴리다가 얼음을 먹는 남자. 그가 입을 연다. “잘 있어! 친구들!”
곁을 지키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 느닷없이 친구라니. 그가 부른 친구란 서재에 있는 책들이었다. 남자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에서 책 더미 위로 올라갔어요. 책 더미가 너무 높아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지요.”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모이카 12번지 주변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놀라 명령을 내렸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결국 남자는 2월 10일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 구력(舊曆) 1월 29일. 신력으로 2월 10일 오후 2시 45분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슈킨(푸쉬킨, 푸시킨)이 38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법으로 금지돼 있던 결투를 벌인 푸슈킨의 상대는 조르주 단테스.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군 장교로 네덜란드 공사 헤케른의 양자였다. 푸슈킨이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단테스는 푸슈킨에게 결투를 신청한 터였다.
그들이 결투한 곳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결투를 위해 두 사람이 각각 자리 잡았던 곳이다. 푸슈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는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렌스키의 운명이 곧 푸슈킨의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소설이 하나의 예언이었던가. 꽃다운 16살 소녀 곤차로바를 처음 만나 ‘아!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여인이야!’라며 정열을 불태웠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매혹적인 자태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1831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들을 남겨두고 푸슈킨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곤차로바는 1844년 재혼).
모스크바에 있는 푸슈킨 동상을 그린 19세기 그림 엽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슈킨과 결혼하기 전부터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던 곤차로바는, 결혼 후 조르주 단테스와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단테스는 끈질기게 푸슈킨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했고 이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푸슈킨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푸슈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결투 신청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단테스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더구나 푸슈킨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식의 악의에 찬 조롱이었다. 푸슈킨은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위와 같은 비극으로 끝났다(그러나 이 결투가 러시아 궁정 내부 세력이 푸슈킨을 제거하기 위해 꾀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푸슈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평소 시(詩)나 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푸슈킨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유명한 시를 접해 본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한다. 서럽고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한 우리의 비루한 삶. 푸슈킨은 그런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라 하면서도 미래의 기쁜 날을 향한 소망을 간직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푸슈킨 자신의 최후는 사랑이 푸슈킨을 속인 끝에 슬프고 노하여 맞이하게 된 셈이라 하겠으니, 이 또한 삶의 아이러니라 할까.
푸슈킨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생기다
화가 일리아 레핀이 그린 '차르스코예 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 푸슈킨. 러시아 황실 여름 궁전이 있는 이 도시의 본래 이름은 차르스코예 셀로, 즉 ‘황제의 마을’이었다. 18세기 초 표트르 1세가 건설한 도시로,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운 별궁(이후 황실 여름 궁전으로 이용됐다)이 있었던 곳. 1937년에(푸슈킨 서거 100주년) 오늘날과 같은 푸슈킨 시로 명명된 것은 알렉산드르 1세가 그곳에 세운 학교 리체이에서 푸슈킨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푸슈킨은 1815년 리체이의 상급반 시험장에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하여 시인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화가 일리야 레핀은 ‘차르스코예 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이라는 그림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리체이 시절(1811-1817) 푸슈킨은 자유주의적 기풍에 물들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참여했다. 학업을 마치고 외무성에 근무했지만 혁명적 사상가 및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농노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굳혀나갔다.
‘네가 주인이다 / 홀로 살아가라 /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하고 노래했던 푸슈킨은 바로 그렇게 자유를 찬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러시아의 낙후된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꾼 데카브리스트 구성원들과 교류하며 그들에 공감했고, 1824년에는 국외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집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에 유폐되어 계속 창작에 몰두했고, 유폐라는 고독하고 불우한 상황이 푸슈킨을 예술적, 사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가 괴멸당한 뒤 유폐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러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성찰과 민중에 대한 관심은 푸슈킨에게 호흡과도 같았다.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 러시아어의 발전에도 기여
푸슈킨의 시적(詩的) 단편 드라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피터 셰이퍼의 [아마데우스]에 영감을 제공했고, 푸슈킨 자신이 큰 애착을 갖고 있던 시적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역(英譯)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국민 음악파의 창시자로도 평가 받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는 푸슈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바탕을 두어 동명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글린카는 ‘국민이 음악을 창조하며 음악가는 그것을 편곡한다’는 생각으로 민중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푸슈킨의 문학 세계야말로 음악적 영감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었다. 비단 글린카뿐만이 아니었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마제파] 등도 푸슈킨의 작품이 원작이며,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라흐마니노프의 [알레코](푸슈킨의 작품 ‘집시들’에 바탕을 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술탄 황제 이야기] 등도 마찬가지다.
푸슈킨의 시 [예언자]의 내용을 그려낸 작품(1905년,알렉산드르 푸슈킨 뮤지엄 소장)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낭만주의라는 말만으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규정하기는 힘들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 리얼리즘으로 가는 길을 반영한다고 본다. ‘낭만주의적이었으되 낭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발전뿐 아니라 러시아어 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어 표현에서 부족함을 느낄 때 푸슈킨은 과감하게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내기도 했고, 풍부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문장 표현은 러시아 문학을 푸슈킨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할 정도였다. 서유럽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던 19세기 러시아에 푸슈킨은 유럽의 모든 문학 장르를 도입시켰다. 서정시, 서사시, 소설, 단편, 에세이, 희곡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창작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푸슈킨이 아니었다면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톨스토이 등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내 그대를 사랑했노라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내 영혼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나니
그러나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도 방해하지도 않나니
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니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이야기도 희망도 없이
때로 나의 소심함과 때로 나의 질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조심스레
신의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대를 사랑한 것만큼
곤차로프와 결혼하기 전 안나 올레니나라는 여인을 열렬히 사랑했던 푸슈킨이 당시의 심정을 담은 시다. 이룰 길 없어 보이는 사랑에 대한 푸슈킨의 애절한 마음. 그 마음은 문학을 향한 열정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지.
https://youtu.be/RuDPCtOCCP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