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세태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도다 !
[ 전도서 1. 9 ]
진실은 항상 승리하여야만 하고 역사는 바르게 쓰여져야 한다.
이 명제(命題)를 누가 거역하고 부정하겠는가?
다만 요사이의 정리정돈과 진상규명의 목표가 대의(大義)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사실의 적라라(赤裸裸)함이나 특정인의 흠집 찾는 황색저널리즘에 빠지게 되어 또 다른 이전투구(泥田鬪狗)속에 빠지게 될 낌세가 엿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역사를 더듬어 진상(眞相)을 어둠속에 묻혀 둔 편이 오히려 값을 높였고, 반대로 망각의 너머로 사라질 흔적을 다시 단청(丹靑)하여 재현하는 것이 옳았던 고사(古事)를 밝혀 보고자 한다.
▸절영지회(絶纓之會)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초(楚)의 장왕(莊王)이 문무백관과 어울려 성대한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무희(舞姬)들의 교성(嬌聲)이 난자하고 주흥(酒興)이 한껏 무르익을 즈음에 갑자기 부는 바람에 등불이 꺼졌다. 미쳐 불을 밝히지 못하여 캄캄한 중에 여인의 비명이 들리더니 총비(寵妃) 하나이 장왕(莊王)의 면전에 이르러 나지막히 속삭이는 것이였다.
" 어둠속에서 어느 장수가 제 가슴을 더듬음에 황겁중에 그자의 갓끈을 끊었은 즉 어서 불을 밝혀 그 발칙한 자를 엄벌 하소서 "
하소연을 듣던 장왕이 큰소리로 명령하는데
"모든 장수들은 갓끈을 끊어라."
다시 불은 밝혔을 때는 모든 장수의 갓끈을 끊겨 있었고 자기의 애원을 무시당하여 뾰로퉁 한 총비를 빼고는 모두 영문을 모른 체 연회를 즐겼다.
뒷날 진(秦)과의 전쟁 중에 패전한 장왕이 적의 추격(追擊)을 받아 심히 위급에 처해 있을 때 사력(死力)을 다해 분전(奮戰)한 막하 장수가 있어 장왕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적군을 물리친 다음에 장왕은 그 장수를 불러 호상을 내리며 그 공을 기리었다. 장웅(蔣雄)이라는 그 장수 왈
" 3년 전 궁중 연회 때 전하의 애희(愛姬)를 희롱한 것이 소장이온데 전하께서 절영(絶纓)의 명령을 내리시어 소장의 목숨을 살려주셨나이다. 어찌 소장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전하의 하해같은 성덕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은치 않으오리까. "
《說苑(설원)》에 나오는 위 절영(絶纓)의 고사(故事)를 볼 때 「괘씸죄」로 그 장수를 벌(罰)했더라면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 대인의 풍도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후에 원소의 진영(陣營)을 수색하던 중에 한묶음의 서신 뭉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조조의 수하 중에 있는 사람 중에서 몰래 원소와 밀통(密通)한 문서였다. 이를 보고 좌우는 말하였다.
“일일이 성명을 밝혀서 잡아 죽이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조조는 「원소의 형세가 원체 커서 나도 이길 것을 기약 못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랴 !」 더 살펴보려 않고 불에 태워 일체로 불문(不問)에 붙여버리고 말았다. 역시 대인(大人)의 풍도(風度)는 이럴 것이다.
▸박문수와 열녀비
어사(御使) 박문수 (朴文秀, 1691~1756)의 기이한 행적중에서 익히 알고 있는 「가짜 열녀비(烈女碑)」를 들춰 보자.
박공이 등용되기 전에 경상도 어느 시골의 고래등 대갓집의 사랑채에 하룻밤 과객으로 묵게 되었다. 밤이 이슥하여 뜰에 나섰던 박공은 심야의 적막을 뚫고 여인의 교성과 사내의 거친 숨결이 엮어가는 도원경(桃源境)에 끌리어 후정(後庭) 별당으로 향했다. 청상과부인 며느리가 거처하는 별당을 엿본즉 왠 장대한 중놈과 과부가 어울려 색정(色情)을 나누는데
「 하나는 귀에다 대고 운의운정(雲意雲情)을 호소하면, 하나는 베게 위에서 산맹해서(山盟海誓)를 조잘거린다 」 너무다 황당한 광경에 격분한 박공은 휴대했던 전동(箭筒)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를 한껏 당겨 넝쿨처럼 엉켜있던 년놈을 곶감 꼬챙이 꿰듯 한 번에 저승에 보냈다. 살변(殺變)을 일으켰기에 야반(夜半) 도주할 수 밖에.
몇 해가 훌러 36세 되던 해에 영남어사를 제수받고 그 고장을 들러본즉 대갓집 후원에 전에 없던 정려각(旌閭閣) 이 들어서 있었다. 고이하게 여겨 주인장을 찾으니 젊은이 나오는데 박어사가 정려각의 내력을 물으니 청상의 형수(兄嫂)가 고인(故人)을 그리다가 자진(自盡)함에 조정에 상신하였더니 그 절개를 높이 사서 표창하였다는 전말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음부(淫婦) 탕녀(蕩女)가 열녀로 오르다니. 박어사가 옛 이야기를 거론하려 하자 자리를 떳던 주인은 갑자기 환도(還刀)를 휘둘으며 「내 너를 기다린지 오래다. 내 오늘 너를 멸구(滅口)시켜 우리 형수님의 영명(英名)을 보존하련다.」. 기절초풍한 박어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동구를 벗어나 목숨을 살리고는 다시는 그 일을 거론치 않았다.
◉순교자의 비밀
재미(在美) 작가인 김은국(金恩國 Richard E. Kim)님이 1964년에 발표한 순교자(殉敎者) [원명 The Martyred]를 들춰보자.
북한 정치보위부에서 한국동란 발발 몇 시간 전인 6월 25일 0시 30분에 열두 명의 기독교 목사들을 학살하였다.
평양이 수복되고 진주(進駐)한 아군은 공산주의의 만행(蠻行)을 고발하고 자유와 신앙의 증거를 표방하기 위하여 12명의 순교자에 대한 성대한 추앙(推仰) 집회를 연다.
그런데 12명의 순교자와 같이 포박(捕縛)되었던 신(申)목사와 한(韓)목사가 학살 현장에서 방면되어 생존한 것에 의혹이 모아지고 미처버린 한(韓) 목사는 치지도외하더라도 신 목사는 무엇인가 공산당과 연계되었거나 암묵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속에 유다로 매도(罵倒)되고 왕따를 당한다.
그러나 학살을 지휘하였던 소좌의 증언으로 밝혀진 진상은
- 흥 그 위대한 영웅들이, 순교자들이 개처럼 죽었다고 말씀 드리게 되어서 무한한 끼쁨으로 생각하오. 흐느껴 울고 킹킹거리고 통곡을 하면서 개처럼 죽었소. 그들이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그들의 신(神)과 서로 서로를 비난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즐거웠소. 개처럼 죽었단 말이오-
-하나가 미쳤기 때문이오. 미친개처럼 미쳤단 말이오. 미친개를 죽일 필요는 없었소
그 사람만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만한 용기가 있었소 나는 내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존경했오. 그 때문에 그를 총살시키지 않았던 것이오-
다만 김은국님이 밝히려 하였던 것은 - 신(神)은 없지만 순교자(殉敎者)는 있어야 하는 현실 ! 「인간의 비극과 학살, 기아와 공포, 주검을 외면하는 신(神) -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 - 이지만 절망의 형제들에게 피안(彼岸)의 환상이라도 갖을 수 있도록 신념과 영광스러운 환상을 간직한 채 평화로이 죽어가게끔」
- 의젓하게 목사(牧師) 노릇을 이어가는 신(申)목사의 희생과 구도(求道)를 그린 것이다.
지운 / 김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