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redame-St.Michel-Sorbonne-Musee Cluny:나혜석 <정원> Montparnasse역-Musee Bourdelle:부르델미술관 Vavin역(몽파르나스에서 1정거장)-La Rotonde레스토랑:피카소 Concorde역-루브르/오르세/오랑주리/그랑팔레(기획전)/쁘티팔레(상설전)[파리]화가들이 남긴 도시, 파리에서의 하루 -나혜석과 부르델을 찾아서-차문성 사무장(sochang@chol.com) 파리의 1번지, 노틀담에서의 자유로움 파리의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다. 파리를 추억할 때는 파리지앵의 변덕을 닮은 파리의 하늘을 그리워해야 한다고 했던가. 아침에 한 두 방울 내리던 비가 노틀담성당에 도착하니 세찬 바람도 잠잠해졌다.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낯선 사람들이 누르는 셔터소리만큼이나 이곳의 아침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잠시 일행들의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마티스와 피카소 그리고 여류화가 나혜석이 그랬던 것처럼 생미셜 다리에서 멀리 노틀담을 바라보았다. 1944년 이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파리의 마지막 모습을 피카소는 바로 이곳에서「노틀담의 조망」이란 제목으로 화폭에 담았다. 화면 속 하단에는 노랑, 빨강, 주황색의 배 3척, 중단에는 생미셜 다리, 상단에는 노틀담 성당이 입체적 조망으로 놓여있지만 인파로 북적되던 번잡함도 자유로움도 시간이 멈춘 것 처럼 주변에 둘러싸인 도로로 차단되어 있다.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해,「파비안느」란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당시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의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차대전이 발발되기 직전,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 가득 찬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이 각 자의 나라로 돌아가 서로 적이 되는 멜로풍의 영화였다. 사실 이 영화 덕분에 대학시절부터 파리는 꼭 한번 오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문화재와 미술에 관심을 둔 후, 피카소의 「노틀담의 조망」 역시 나에게 다시 노틀담을 찾게 하는 이유 아닌 이유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다시 찾은 노틀담과 나혜석의 흔적을 찾아서 이번에 파리 노틀담을 찾은 이유는 나혜석이란 화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아니 거창하게 화가의 일생을 운운하기 보다는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한 <정원>이란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조선미전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나혜석이란 여류화가는 시대를 앞선 탁월한 여성이며 정신적 봉건제가 지속된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기간 몸부림치던 여성 중 한명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한 시대를 앞선 것이 죄라면 죄일 테지만 말이다.그녀는 애인 최승구가 결핵에서 죽은 뒤, 일종의 계약결혼같은 타협점을 찾아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이들의 신혼여행지는 애인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전남 고흥으로 떠난다. 그녀는 첫 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것이다.느닷없이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당당한 신고식인 것이다. 요즘 변변찮은 남성에 비교해 얼마나 당찬 출발인가. 이러한 그녀가 1927년 일본외무성의 초청으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그녀가 본 파리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었을 게다. 이곳에서 최린(삼일독립선언 대표 중 한명이지만 이 여행 후 변절함)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짧은 로맨스는 이혼에 이르게 되고 종국에는 인생의 파국을 맞이한다.사실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한 최초의 여성이지만 화가로서 성공한 사람은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전성기 작품은 도록에 남아있을 뿐이고 현존하는 작품 30여 점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찾고 있는 <정원>(1931)이란 작품의 배경은 그녀가 이혼 (1930년) 후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된 셈이다. 뜻하지 않게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그녀는 이혼의 아픔과 좌절은 뒤로한 채 화가로서의 성공된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 시기였다. 생미셀에서 클뤼니미술관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혜석이 그린 <정원>의 배경이 클뤼니미술관(Musee Cluny) 근처라는 사실 뿐이었고 그녀의 그림을 조그맣게 복사한 것이 자료의 전부였다. 일단 클뤼니미술관을 목적지로 삼아 지도를 펼쳐 들었다. 노틀담이 있는 생미셀에서 클뤼니미술관까지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생미셀로를 따라 직진하면 생제르망 거리가 나오고 이 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소르본느대학이 보이는 데 그 바로 앞 정원너머 있는 건물이 클뤼니미술관이다. <정원>그림이 복사된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 마침내 클뤼니미술관 뒤 공원에 감춰진 <정원>에 등장하는 문을 찾았다. 현재 그곳은 미술관의 뒤뜰로 어린이들 놀이터로 이용되어 가족단위로 삼삼오오 모이는 동네공원이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나무 뒤로 감춰진 듯한 그 문은 첫 눈에 범상치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나혜석이 그린 그림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마 그것은 파리시절 데생으로 남겨둔 작품을 몇 해 후 다시 그리면서 어느 정도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부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의 문 또한 당시와는 차이가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시 문으로 이용되었을 列柱가 있는 개방적인 문은 현재 붉은 색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되어 보인다.우리는 이곳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으며 생제르망 길을 내려오면서도 왜 하필이면 그림같은 파리의 수많은 명소를 두고 작은 미술관의 뒤뜰에 있는 오래된 문 하나를 그렸을까라는 의문을 쉽게 풀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소르본느 대학과 미술학교의 젊은이들이 붐비는 이 근처가 그녀에게는 머나먼 봉건적 나라 조선에서 벗어난 페미니즘의 상징이었고 때로는 그녀만의 비밀이 간직된 장소였음을 짐작하면서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몽파르나스에 있는 현대조각의 거장 , 부르델 몽파르나스 역에서 올라오니 바로 라파예트갤러리가 보인다. 길을 건너 ‘Musee Bourdelle'이란 표지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골목 안 붉은 벽돌집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오전이라 미술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미술공부를 하면서 로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그의 제자인 부르델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작품이라고는 오르세미술관에서 본 ‘활쏘는 헤라클레스’와 베토벤 연작 그리고 청동으로 된 ‘빈사의 켄타우로스’가 내 기억의 전부다. 한 때 “거목 아래에는 거목이 자랄 수 없다”는 부르델의 자신감은 로댕의 문하에 들어간 15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와 상반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 그의 열망 때문이었지만 그 역시 1908년에 로댕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그의 작품과 닮아 있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일행에게 전하면서 그의 정원에 첫발을 내딛었다. 데생에 기초한 정밀한 작업을 염두에 둔 나의 생각은 정원에 놓인 거대한 브론즈를 보는 순간 그의 작품에서 뭔가 색다른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무리가 아닌 것은 그의 해외전시는 거친 대리석보다는 잘 파손되지 않는 브론즈와 소품을 위주로 전시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시실의 문을 여는 순간,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들이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각을 건축화 시킨 ‘알베르장군의 기념비’, ‘활쏘는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적 조각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유명한 ‘빈사의 켄타우로스’였다. 1908년 로댕의 문하에서 벗어나게 한 작품은 ‘아폴론의 두상’이지만, 독립을 선언한 부르델의 이름을 일층 세상에 떨치게 한 것은 ‘활쏘는 헤라클레스’이다. 대리석으로 된 ‘활 쏘는 헤라클레스’에 보이는 거친 조각칼의 긴장감과 풍부한 양감은 돌덩이 그대로를 다듬어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1910년 미술국제연맹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활을 쏘는 순간 근육이 팽배되고 바위 위에 올린 왼발과 구부러진 오른발의 힘의 균형과 뒤로 젖혀진 그의 자태는 문자 그대로 돌에 새긴 역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그의 조각은 새기고 파고 자르는 그러한 수동적 조각이 아니라 공간속에서 새로운 창조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소위 미술에 비해 덜 독립적이고 오히려 건축에 종속화된 시대에 하나의 쟝르로써 독립시킨 것은 물론 그의 미술을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상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과일이 나무에 그 자신을 접목시키는 것과 같이 건축에 조각 자체를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실 계단 위 가장 은밀한 곳에 육중한 크기의 ‘빈사의 켄타우로스’가 전시되어 있다. 몇 명의 미술학도들이 데셍 작업을 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앞뒤를 살펴보았다.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는 수평과 수직으로 이뤄져 있고 그 사이로 난 2개의 빈 공간은 공허감을 느끼게 한다. 죽어가는 순간을 표현한 반신반인(반인반수)인 켄타우로스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반납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한다. 그의 목뼈는 부러지고 뒷다리는 제쳐져 팔과 몸의 균형은 뒤로 넘어진다. 가슴의 근육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처리되어 그의 죽음의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공간속의 조각이란 개념을 넘어 오히려 공간을 지배하는 건축적 조각양식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 네 사람은 다물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휴~굉장하네.” 다음 전시실에는 부르델의 대표적인 시리즈물인 ‘베토벤 상’이 전시되어 있다. 부르델은 얼마 전 전 국민을 열광시킨 <베토벤 바이러스>에 최초로 걸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생전에 무려 베토벤 연작을 21점이나 제작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베토벤에 빠져있었는지 를 알 수 있다. ‘한 손을 뺨에 댄 베토벤’, ‘장발의 베토벤’,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댄 베토벤‘ 등 정감에 넘치는 약동적인 형체와 잠재적 품격을 형상화한다. 이는 아마 베토벤에 대한 음악적 존경심에서 두상 제작이 발로된 것 일 테지만, 스승 로댕이 발자크상 습작을 제작하는 과정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01년작 ’베토벤 거대한 비극적 얼굴‘은 연작 중에서도 조형이상의 미를 실존하게 했다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가의 생활공간과 그의 아틀리에에는 박제된 동물과 제작기구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그의 창조적 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작지만 결코 작지않은 부르델미술관에는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그의 작품의 그의 전부가 진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체파와 야수파가 미술계의 주도적 위치에 있을 때 과감하게 그리스적 조각의 형태에 탐미했던 그의 회귀성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며 출구를 빠져 나왔다. 피카소와 함께 점심을, 에밀놀테와 함께 저녁을 이왕 점심을 먹을라치면 피카소와 함께 먹을 요량으로 몽파르나스 역에서 1정거장 거리에 있는 Vavin역에서 내려 피카소가 평소 즐겨찾던 La Rotonde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25-30유로...김수진 AP 말대로 피카소와 함께 하기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너무 가난한 것 같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 길 건너 Leon으로 갔다. 우리는 Concorde광장에서 처음 온 2명이 루브르와 오르세의 외관에 대해 구경하는 동안 수진AP에게는 오랑주리미술관(Concorde 광장 바로 옆)에서 모네의 거작 수련을 관람하도록 2조로 나누자 한달음에 달려간다. 파리는 만국박람회를 몇 차례 치르면서 파리라는 구도시를 근대적 건축물로 개조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화광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사이요 궁,, 에펠탑, 그랑팔레, 쁘티팔레, 러시아 황제가 지원한 알렉산더 3세 다리, 오르세 역,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과 도로가 만국박람회의 시설물로 건립되었다. 우리는 거대한 철 구조물과 유리 돔으로 덮힌 근대시설물의 상징 중 하나인 그랑팔레로 갔다. 끝없이 늘어선 줄을 에밀놀테의 전시인줄 알고 독일표현주의작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려 1시간 이상 기다린 끝에 들어간 그랑팔레에는 미술전시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과학과 기술에 관한 전시물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랑팔레의 우측에 미술관이 따로 있었다. 어렵사리 에밀놀테의 전시회에 입장했지만 역시 에밀놀테의 작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작가라고 해야할 터, 작품의 구성과 채색, 소묘의 기법이 시대별로 너무 상이해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오인하기에 충분했다. 약 200점 이상의 에밀놀테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다른 표현주의 작가와는 달리 20c초 종교화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최후의 만찬><뉴기니 원주민>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놀테의 경우 그의 초반 화풍은 다른 표현주의 작가처럼 음울하고 비관주의적인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현실사회보다 종교적 감정표현이 두드러졌음을 전시된 그림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전시된 그의 바다 연작에서, “천둥을 동반한 먹구름은 마음 약한 사람에게는 공포를 주지만 심장이 강한 사람에게는 항상 새로운 드라마의 전달이며 자연의 웅장함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원색과 보색을 통해 철학적 사상에 기초를 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에밀놀테의 전시를 본 후 바깥 세상으로 나오니 잠시 세상의 시름(세계 금융위기)을 잊고 세느 강의 정취에 깊게 취한 하루해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해는 시나브로 세느강 너머 져버리고 그랑팔레 앞에는 한 때 위대한 프랑스를 외친 드골대통령의 동상이 어둠 속에 초롱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문화를 융합하는 용광로같은 파리에서의 하루는 사람을 아마추어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직업을 잊게하고 인간을 구속만으로 몰아 넣지 않는, 철저하게 문화와 예술의 환경 속에서 즐거움으로 엉키는 그러한 아마추어를 말함이다. 아마 지금부터 80년 전 나혜석의 파리도 나와같은 아마추어적 즐거움이었지 않을까. 파리에서의 자유 ... 때로 우리 마음이 빈한해질때 파리에로의 낯선여행을 절실히 갈구해 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허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기윰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 * 2008년 11월 15일 , 파리에서의 나혜석과 부르델을 찾는 여행을 함께 한 김수진AP/최승리/수추안 승무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나혜석 화가는 1948년 요양원에서 행방을 감췄다가 1949년 어느 날 돌보는 사람 한명 없이 길거리에서 발견되어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나도 앞선 그의 생애에 경의를 표합니다.* 삽입음악: [히라이켄-눈을감고]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ost 곡
Notredame-St.Michel-Sorbonne-Musee Cluny:나혜석 <정원> Montparnasse역-Musee Bourdelle:부르델미술관 Vavin역(몽파르나스에서 1정거장)-La Rotonde레스토랑:피카소 Concorde역-루브르/오르세/오랑주리/그랑팔레(기획전)/쁘티팔레(상설전)[파리]화가들이 남긴 도시, 파리에서의 하루 -나혜석과 부르델을 찾아서-차문성 사무장(sochang@chol.com)
파리의 1번지, 노틀담에서의 자유로움 파리의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다. 파리를 추억할 때는 파리지앵의 변덕을 닮은 파리의 하늘을 그리워해야 한다고 했던가. 아침에 한 두 방울 내리던 비가 노틀담성당에 도착하니 세찬 바람도 잠잠해졌다.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낯선 사람들이 누르는 셔터소리만큼이나 이곳의 아침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잠시 일행들의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마티스와 피카소 그리고 여류화가 나혜석이 그랬던 것처럼 생미셜 다리에서 멀리 노틀담을 바라보았다. 1944년 이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파리의 마지막 모습을 피카소는 바로 이곳에서「노틀담의 조망」이란 제목으로 화폭에 담았다. 화면 속 하단에는 노랑, 빨강, 주황색의 배 3척, 중단에는 생미셜 다리, 상단에는 노틀담 성당이 입체적 조망으로 놓여있지만 인파로 북적되던 번잡함도 자유로움도 시간이 멈춘 것 처럼 주변에 둘러싸인 도로로 차단되어 있다.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해,「파비안느」란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당시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의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차대전이 발발되기 직전,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 가득 찬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이 각 자의 나라로 돌아가 서로 적이 되는 멜로풍의 영화였다. 사실 이 영화 덕분에 대학시절부터 파리는 꼭 한번 오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문화재와 미술에 관심을 둔 후, 피카소의 「노틀담의 조망」 역시 나에게 다시 노틀담을 찾게 하는 이유 아닌 이유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다시 찾은 노틀담과 나혜석의 흔적을 찾아서 이번에 파리 노틀담을 찾은 이유는 나혜석이란 화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아니 거창하게 화가의 일생을 운운하기 보다는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한 <정원>이란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조선미전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나혜석이란 여류화가는 시대를 앞선 탁월한 여성이며 정신적 봉건제가 지속된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기간 몸부림치던 여성 중 한명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한 시대를 앞선 것이 죄라면 죄일 테지만 말이다.그녀는 애인 최승구가 결핵에서 죽은 뒤, 일종의 계약결혼같은 타협점을 찾아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이들의 신혼여행지는 애인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전남 고흥으로 떠난다. 그녀는 첫 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것이다.느닷없이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당당한 신고식인 것이다. 요즘 변변찮은 남성에 비교해 얼마나 당찬 출발인가. 이러한 그녀가 1927년 일본외무성의 초청으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그녀가 본 파리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었을 게다. 이곳에서 최린(삼일독립선언 대표 중 한명이지만 이 여행 후 변절함)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짧은 로맨스는 이혼에 이르게 되고 종국에는 인생의 파국을 맞이한다.사실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한 최초의 여성이지만 화가로서 성공한 사람은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전성기 작품은 도록에 남아있을 뿐이고 현존하는 작품 30여 점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찾고 있는 <정원>(1931)이란 작품의 배경은 그녀가 이혼 (1930년) 후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된 셈이다. 뜻하지 않게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그녀는 이혼의 아픔과 좌절은 뒤로한 채 화가로서의 성공된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 시기였다.
생미셀에서 클뤼니미술관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혜석이 그린 <정원>의 배경이 클뤼니미술관(Musee Cluny) 근처라는 사실 뿐이었고 그녀의 그림을 조그맣게 복사한 것이 자료의 전부였다. 일단 클뤼니미술관을 목적지로 삼아 지도를 펼쳐 들었다. 노틀담이 있는 생미셀에서 클뤼니미술관까지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생미셀로를 따라 직진하면 생제르망 거리가 나오고 이 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소르본느대학이 보이는 데 그 바로 앞 정원너머 있는 건물이 클뤼니미술관이다.
<정원>그림이 복사된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 마침내 클뤼니미술관 뒤 공원에 감춰진 <정원>에 등장하는 문을 찾았다. 현재 그곳은 미술관의 뒤뜰로 어린이들 놀이터로 이용되어 가족단위로 삼삼오오 모이는 동네공원이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나무 뒤로 감춰진 듯한 그 문은 첫 눈에 범상치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나혜석이 그린 그림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마 그것은 파리시절 데생으로 남겨둔 작품을 몇 해 후 다시 그리면서 어느 정도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부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의 문 또한 당시와는 차이가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시 문으로 이용되었을 列柱가 있는 개방적인 문은 현재 붉은 색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되어 보인다.우리는 이곳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으며 생제르망 길을 내려오면서도 왜 하필이면 그림같은 파리의 수많은 명소를 두고 작은 미술관의 뒤뜰에 있는 오래된 문 하나를 그렸을까라는 의문을 쉽게 풀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소르본느 대학과 미술학교의 젊은이들이 붐비는 이 근처가 그녀에게는 머나먼 봉건적 나라 조선에서 벗어난 페미니즘의 상징이었고 때로는 그녀만의 비밀이 간직된 장소였음을 짐작하면서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몽파르나스에 있는 현대조각의 거장 , 부르델
몽파르나스 역에서 올라오니 바로 라파예트갤러리가 보인다. 길을 건너 ‘Musee Bourdelle'이란 표지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골목 안 붉은 벽돌집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오전이라 미술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미술공부를 하면서 로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그의 제자인 부르델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작품이라고는 오르세미술관에서 본 ‘활쏘는 헤라클레스’와 베토벤 연작 그리고 청동으로 된 ‘빈사의 켄타우로스’가 내 기억의 전부다. 한 때 “거목 아래에는 거목이 자랄 수 없다”는 부르델의 자신감은 로댕의 문하에 들어간 15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와 상반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 그의 열망 때문이었지만 그 역시 1908년에 로댕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그의 작품과 닮아 있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일행에게 전하면서 그의 정원에 첫발을 내딛었다. 데생에 기초한 정밀한 작업을 염두에 둔 나의 생각은 정원에 놓인 거대한 브론즈를 보는 순간 그의 작품에서 뭔가 색다른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무리가 아닌 것은 그의 해외전시는 거친 대리석보다는 잘 파손되지 않는 브론즈와 소품을 위주로 전시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시실의 문을 여는 순간,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들이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각을 건축화 시킨 ‘알베르장군의 기념비’, ‘활쏘는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적 조각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유명한 ‘빈사의 켄타우로스’였다. 1908년 로댕의 문하에서 벗어나게 한 작품은 ‘아폴론의 두상’이지만, 독립을 선언한 부르델의 이름을 일층 세상에 떨치게 한 것은 ‘활쏘는 헤라클레스’이다. 대리석으로 된 ‘활 쏘는 헤라클레스’에 보이는 거친 조각칼의 긴장감과 풍부한 양감은 돌덩이 그대로를 다듬어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1910년 미술국제연맹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활을 쏘는 순간 근육이 팽배되고 바위 위에 올린 왼발과 구부러진 오른발의 힘의 균형과 뒤로 젖혀진 그의 자태는 문자 그대로 돌에 새긴 역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그의 조각은 새기고 파고 자르는 그러한 수동적 조각이 아니라 공간속에서 새로운 창조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소위 미술에 비해 덜 독립적이고 오히려 건축에 종속화된 시대에 하나의 쟝르로써 독립시킨 것은 물론 그의 미술을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상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과일이 나무에 그 자신을 접목시키는 것과 같이 건축에 조각 자체를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실 계단 위 가장 은밀한 곳에 육중한 크기의 ‘빈사의 켄타우로스’가 전시되어 있다. 몇 명의 미술학도들이 데셍 작업을 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앞뒤를 살펴보았다.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는 수평과 수직으로 이뤄져 있고 그 사이로 난 2개의 빈 공간은 공허감을 느끼게 한다. 죽어가는 순간을 표현한 반신반인(반인반수)인 켄타우로스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반납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한다. 그의 목뼈는 부러지고 뒷다리는 제쳐져 팔과 몸의 균형은 뒤로 넘어진다. 가슴의 근육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처리되어 그의 죽음의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공간속의 조각이란 개념을 넘어 오히려 공간을 지배하는 건축적 조각양식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 네 사람은 다물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휴~굉장하네.”
다음 전시실에는 부르델의 대표적인 시리즈물인 ‘베토벤 상’이 전시되어 있다. 부르델은 얼마 전 전 국민을 열광시킨 <베토벤 바이러스>에 최초로 걸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생전에 무려 베토벤 연작을 21점이나 제작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베토벤에 빠져있었는지 를 알 수 있다. ‘한 손을 뺨에 댄 베토벤’, ‘장발의 베토벤’,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댄 베토벤‘ 등 정감에 넘치는 약동적인 형체와 잠재적 품격을 형상화한다. 이는 아마 베토벤에 대한 음악적 존경심에서 두상 제작이 발로된 것 일 테지만, 스승 로댕이 발자크상 습작을 제작하는 과정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01년작 ’베토벤 거대한 비극적 얼굴‘은 연작 중에서도 조형이상의 미를 실존하게 했다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가의 생활공간과 그의 아틀리에에는 박제된 동물과 제작기구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그의 창조적 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작지만 결코 작지않은 부르델미술관에는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그의 작품의 그의 전부가 진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체파와 야수파가 미술계의 주도적 위치에 있을 때 과감하게 그리스적 조각의 형태에 탐미했던 그의 회귀성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며 출구를 빠져 나왔다.
피카소와 함께 점심을, 에밀놀테와 함께 저녁을
이왕 점심을 먹을라치면 피카소와 함께 먹을 요량으로 몽파르나스 역에서 1정거장 거리에 있는 Vavin역에서 내려 피카소가 평소 즐겨찾던 La Rotonde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25-30유로...김수진 AP 말대로 피카소와 함께 하기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너무 가난한 것 같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 길 건너 Leon으로 갔다. 우리는 Concorde광장에서 처음 온 2명이 루브르와 오르세의 외관에 대해 구경하는 동안 수진AP에게는 오랑주리미술관(Concorde 광장 바로 옆)에서 모네의 거작 수련을 관람하도록 2조로 나누자 한달음에 달려간다.
파리는 만국박람회를 몇 차례 치르면서 파리라는 구도시를 근대적 건축물로 개조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화광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사이요 궁,, 에펠탑, 그랑팔레, 쁘티팔레, 러시아 황제가 지원한 알렉산더 3세 다리, 오르세 역,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과 도로가 만국박람회의 시설물로 건립되었다. 우리는 거대한 철 구조물과 유리 돔으로 덮힌 근대시설물의 상징 중 하나인 그랑팔레로 갔다. 끝없이 늘어선 줄을 에밀놀테의 전시인줄 알고 독일표현주의작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려 1시간 이상 기다린 끝에 들어간 그랑팔레에는 미술전시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과학과 기술에 관한 전시물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랑팔레의 우측에 미술관이 따로 있었다. 어렵사리 에밀놀테의 전시회에 입장했지만 역시 에밀놀테의 작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작가라고 해야할 터, 작품의 구성과 채색, 소묘의 기법이 시대별로 너무 상이해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오인하기에 충분했다. 약 200점 이상의 에밀놀테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다른 표현주의 작가와는 달리 20c초 종교화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최후의 만찬><뉴기니 원주민>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놀테의 경우 그의 초반 화풍은 다른 표현주의 작가처럼 음울하고 비관주의적인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현실사회보다 종교적 감정표현이 두드러졌음을 전시된 그림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전시된 그의 바다 연작에서, “천둥을 동반한 먹구름은 마음 약한 사람에게는 공포를 주지만 심장이 강한 사람에게는 항상 새로운 드라마의 전달이며 자연의 웅장함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원색과 보색을 통해 철학적 사상에 기초를 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에밀놀테의 전시를 본 후 바깥 세상으로 나오니 잠시 세상의 시름(세계 금융위기)을 잊고 세느 강의 정취에 깊게 취한 하루해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해는 시나브로 세느강 너머 져버리고 그랑팔레 앞에는 한 때 위대한 프랑스를 외친 드골대통령의 동상이 어둠 속에 초롱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문화를 융합하는 용광로같은 파리에서의 하루는 사람을 아마추어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직업을 잊게하고 인간을 구속만으로 몰아 넣지 않는, 철저하게 문화와 예술의 환경 속에서 즐거움으로 엉키는 그러한 아마추어를 말함이다. 아마 지금부터 80년 전 나혜석의 파리도 나와같은 아마추어적 즐거움이었지 않을까. 파리에서의 자유 ... 때로 우리 마음이 빈한해질때 파리에로의 낯선여행을 절실히 갈구해 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허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기윰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
* 2008년 11월 15일 , 파리에서의 나혜석과 부르델을 찾는 여행을 함께 한 김수진AP/최승리/수추안 승무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나혜석 화가는 1948년 요양원에서 행방을 감췄다가 1949년 어느 날 돌보는 사람 한명 없이 길거리에서 발견되어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나도 앞선 그의 생애에 경의를 표합니다.* 삽입음악: [히라이켄-눈을감고]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ost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