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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 1 / 제사장의 성결법
레 8:1-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4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매 회중이 회막 문에 모인지라
5 모세가 회중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이러하니라 하고
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
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8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9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 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10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1 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13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레 8:1-13 /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나 여호와의 거룩한 장막 문간으로 데려오너라. 그리고 그들이 입을 옷과, 제사장으로 세울 때 머리 위에 부을 기름과, 속죄제물로 바칠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 한 바구니를 함께 가져오너라. 너희 온 공동체도 거룩한 장막 문간으로 모여라.' 4)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 식구들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장막문 앞에 모여들었다. 5) 그러자 모세는 온 공동체 식구들에게 `지금부터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이오'하고 말하였다. 6)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물로 몸을 씻기고 7) 아론에게 속옷과 겉옷을 입힌 다음 허리에 띠를 띠어 주었다. 그리고 에봇을 입히고 나서 에봇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손으로 정교하게 짠 띠를 또 허리에 띠어 주었다. 8) 또한 가슴받이를 그 위에 달아 주고 그 가슴받이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데 사용하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주었다. 9) 그런 다음 머리에는 머리를 둥그렇게 감싸는 관을 씌워 주고 이 관 앞면에 `여호와께 몸바친 자'라는 문구가 새겨진 금패를 붙여 주었다. 모세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하였다. 10) 모세는 또 제사장 임직식 때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계시는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발랐다. 곧 이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11) 즉 모세는 거룩한 기름 얼마를 가져다가 분향제단 위에 일곱 번 뿌리고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대에도 거룩한 기름을 뿌려 하나님께 바쳤다. 12) 또한 모세는 거룩한 기름 얼마를 가져다가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 아론이 제사장 일을 볼 수 있도록 거룩히 구별하였다. 13)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히고 허리띠를 띠우고 머리에는 두건을 매어 주었다. 모세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하였다.
제사장 위임식은 8일 동안 진행됩니다. 그 중 7일 동안의 위임식 과정을 소개하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백성을 회막 문에 모으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물로 씻기고 복장을 입혀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1-5) 하나님께서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지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제사장을 세우시면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의복, 관유, 속죄제의 수소, 숫양 두 마리, 무교병 한 광주리를 취하고, 온 회중을 회막 문으로 모이게 하라고 명하십니다(2-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행하고, 회중은 회막 문에 모입니다(4). 모세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의 첫 제사장 위임식이 명령대로 잘 치러졌다는 것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참고 히 5:4)
아론의 착복식(6-9)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 전부를 물로 씻기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로 씻긴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깨끗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나머지 내용은 대제사장인 아론에게만 집중하며, 아론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의복을 입히는 일이 나옵니다(13).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씻긴 후에 아론에게 속옷, 허리띠, 겉옷, 에봇, 흉패, 우림과 둠밈, 관을 착용하게 합니다. 제사장 의복은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있기에 모든 수치를 가리고 공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릴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지 개인의 자격은 아닙니다. 제사장의 옷만 입으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관유를 붓는 의식(10-13) 성막과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제사장에게 관유를 붓는 의식을 통하여 성막의 외형적 완성이 진정한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내적인 완성을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은 성막의 각종 기구들에 관유를 붓는 절차를 마련하셨습니다. 성전의 내외적으로 완성되었다 해도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 위임식은 진정한 성막의 완성이 됩니다. 기름 부음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여호와께 성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수 14:19-21).
적용: 당신은 이 땅에 살면서 무슨 옷을 입어야 거룩하게 될까요?(롬 13:14; 갈 3:27) 그리스도의 옷 입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레위기 8장 묵상, p45 참고)
< 설 교 >
제사장 위임식의 절차와 의미
레위기 8:1-9 / 피영민 목사
서 론
많은 사람들이 레위기를 수면제와 같은 책이라고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고 유익한 책입니다. 레위기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의 전반적인 내용과 레위기 앞부분에 기록된 5대제사에 관한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은 레위기의 첫 번째 부분으로 5대제사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8~10장까지는 두 번째 부분으로 제사장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8장은 제사장의 안수식, 9장은 제사장의 첫 번째 직무수행, 10장에서는 제사장의 범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막에서 직무 수행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막의 구조, 제사장의 의복, 5대제사와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계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제사장의 안수식과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8장에 기록된 제사장의 안수식은 출애굽기 29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가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대해 설교할 때는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신약시대의 제사장인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연관되는지 그 적용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안수식 자체에 관해서 그 절차와 의미를 생각해 보고, 제사장이라는 제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제사장 제도의 역사와 기능
일반적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세워지기 전에는 제사장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반열이 레위지파의 후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 이외의 반열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역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18~20절에 보면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 연합군을 쫓아가서 빼앗긴 재물과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데려오며 그를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라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본문에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라 살렘 왕인데,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편 110편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지파가 아닌데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열을 좇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레위지파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멜기세덱을 보면 모세 이전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제사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22절에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24절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 올라올 때 너만 올라오고 제사장들은 올라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제사장에 관한 율법이 기록된 20장 이전의 19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말씀을 받기 이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제사장에 관한 계시는 오직 아론과 그의 후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아무나 제사장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만 참된 제사장이 되게 하라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아닌 다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제사장이 되도록 하셨다면 이미 제사장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실직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론과 모세의 리더십을 잘 따르는 자들이 되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야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랐겠지만 후일에 언제든지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고라 자손이 반역할 때 앞장섰던 사람들은 이때 제사장 노릇을 하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직분을 잃게 된 사람들도 틀림없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볼 때 무작정 읽지 말고 “이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었다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 제도는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요셉의 장인이 이방인 제사장이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5절에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아내 이름은 아스낫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의 온이라는 동네에서 제사장을 하고 있던 보디베라의 딸이었습니다.
또 출애굽기 3장 1절에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모세의 장인도 이방인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아내는 십보라였는데, 그녀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시내산 위에서 주신 모세 언약은 제사장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제도에 대해 그 대상을 국한하시고 활동에 대해 정확한 계시를 주셔서 그것을 따라 활동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 제도를 정형화하고 규격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모세는 언약의 말씀을 받는 율법의 중보자였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의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으로 안수하였습니다. 모세 언약에 따르면 제사장은 스스로 자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그의 이름을 불러 지명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형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모세의 아들들조차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 아들이라고 해서 저절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세워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임명하시는 임명제입니다. 자원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열왕국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는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도록 조장하였고, 아론의 후손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드리면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런 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아닙니다. 아무나 될 수 있는 제사장은 ‘짝퉁 제사장’입니다. 여로보암은 가짜 신에 가짜 제사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참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 언약을 따르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주로 네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성막 안에서 성막의 모든 기능을 율법대로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의 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떡상, 정면에 분향단, 왼쪽에 순금등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마다 떡상의 떡을 갈아 넣고 묵은 떡은 먹었습니다. 그리고 분향단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워 하나님께 분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금등대로 가서 저녁에 불을 켜고 아침에는 불을 껐습니다. 또 아침저녁으로 순금등대에 기름을 넣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성막 뜰로 나가 번제단에 재가 있으면 진 밖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다 치우고 번제단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이 명하시는 정기적인 번제인 ‘상번제’(Regular burnt offering)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동물을 가져오면 제사를 드려주고,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를 준수하여 절기 행사를 주관해서 시행하였습니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성막 안의 모든 기구들의 기능을 율법대로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 사역하였습니다. 율법과 성경을 교육하는 율법교사로서 활동했고, 백성들 가운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백부장이나 족장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 대제사장은 대법원 판사와 같은 재판장으로서 소송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군인과 참전한 백성들을 격려하는 군목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셋째, 백성들이 서원해서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경우 제사장은 사람 대신 돈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값을 환산해 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일종의 환전업무까지 본 것입니다. 가령 백성 중 한 사람이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송아지 대신 돈으로 드리고자 하는 경우 제사장은 송아지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성물의 값을 정하는 것 역시 제사장의 일이었습니다.
넷째, 한센씨병에 걸린 사람을 진단하는 의학적인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병이 나았는지, 아직 낫지 않았는지 정결에 대한 판정을 하는 것도 제사장의 사명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업무는 구약시대 내내 변함이 없었고, 이런 제사장의 기능을 변개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 임의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안수식이라는 행사를 공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일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Ⅱ. 제사장 안수식의 일곱 가지 절차
제사장이 안수를 받는 과정은 레위기 8장에 일곱 가지 절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매 단계마다 기록되어 있는데, 총 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안수식 준비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수식 준비를 위해서는 총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안수 받을 대상자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는 준비물입니다. 제사장에게 입힐 의복, 제사장에게 부을 관유라는 기름, 속죄제를 드릴 수송아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숫양 두 마리, 그리고 제사장이 먹고 하나님께 일부는 태워 드릴 무교병 떡 한 광주리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불러 회막 문 안에 모이게 하는 일입니다.
8장 3절에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인구가 300만명이 넘는데 어떻게 다 모일 수 있겠습니까? 회중 가운데 지도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안수식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씻음과 입힘의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5~9절에 따르면 모세는 물두멍의 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씻깁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힌 후 겉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물로 씻길 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벌거벗긴 채로 씻겼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가운데는 속옷 안에 입는 ‘고의’(속바지)가 있는데, 이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씻긴 후 입힌 속옷은 흰색 원피스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이 흰색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직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흰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청색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걸치고, 열 두 개의 보석이 박힌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입니다. 이 흉패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우림과 둠밈을 보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쓰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띠가 둘려 있습니다.
대제사장 의복의 특징은 ‘영광스럽고 아름답다’(Glory and Beauty)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중보자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아무 것이나 입고 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관유라는 기름을 붓는 단계입니다. 모세는 관유를 취해 성막에 바르고, 번제단 뿔에 일곱 번 뿌리고, 번제단, 물두멍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도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성막의 모든 기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름 바른 기명들을 사용해서 술을 마시다 그 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이 시편 133편 2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관유를 부으면 수염을 적시고, 옷을 적시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관유는 향내가 매우 깊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레위기 8장 14~17절까지로,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속죄제는 여호와의 금령을 모르고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흠 없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번제단 밑에 쏟고 내장 기름은 다 태운 후 나머지는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죄들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제사장의 속죄제인 경우, 분향단의 뿔에도 피를 바르고 분향단 밑에도 일곱 번 뿌리는 절차가 필요한데, 제사장 안수식에서의 속죄제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번제단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온 회중이 밖에서 다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숫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번제는 알고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속죄제, 알고 지은 죄는 번제를 통해 용서받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나머지 숫양 한 마리로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22~2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화목제의 특징은 고기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화목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안수식의 화목제는 ‘위임제’(Offering of Consecration)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위임’을 의미하는 단어(Dedication이나 Delegation)를 사용하지 않고, ‘성별’이라는 의미의 단어(Consecration)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자기 권한을 아론에게 분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Consecr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숫양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잡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피를 세 군데 바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바른 말을 듣고, 옳은 일을 행하고, 좋은 곳에만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바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몇 번만 듣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말을 들으면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귓부리에 피를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도적질과 같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또 발로 좋은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피는 모두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 가지를 태웁니다. 내장 기름과 광주리의 무교병 떡 세 개와 우편 뒷다리를 태웁니다. 원래 일반적인 화목제에서 제사장은 두 가지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슴 고기와 우편 뒷다리 고기입니다. 그런데 위임제에서는 가슴 고기만 먹고 우편 뒷다리는 하나님께 태워드립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먹는 몫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벌었지!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 아파서 입원하면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레위기 8장 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슴 고기를 먹고 광주리에 남은 무교병을 먹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관유와 피를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린 후 먹게 합니다. 온전한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7일 동안 회막 문 안에 거하며 위임식의 절차를 반복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졸속으로나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또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Ⅲ. 제사장 안수식의 세 가지 영적 의미
제사장의 안수식 일곱 가지 절차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제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막말을 하고 건방진 자세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기름을 바르고 피를 바르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접견할 때도 무턱대고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인간인 대통령에게도 예절을 갖춰야 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막말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아론의 두 아들이 현장에서 즉사한 이유는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현장 즉사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별된 대제사장의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 론
구약 시대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를 하는 사람이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중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종교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과 교제하며 살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삶에 중심으로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면 당신은 그분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걱정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서 옆으로 밀려나셨다는 경고의 신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헌신하면 그분은 당신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을 다시 중심에 모시는 순간 당신은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리더에게 필요한 것
레위기 8장 1-36절 / 이한규 목사
어느 날 빌리 그래함이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청년 전도자로 사역할 때 그가 다니던 플로리다 성경 대학 학장인 C&MA 목사 토머스 왓슨에게 말했다. “학장님! 저는 제 전도 집회의 참석자 숫자를 과장했습니다.” 그때 왓슨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많은 전도자가 그렇게 숫자를 과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빌리가 심각하게 말하자 왓슨이 기도했다. “하나님! 이 청년 전도자가 진실한 예배자의 마음을 늘 가지게 하소서.”
한번은 빌리가 전도 집회에서 처음 사례비를 받고 그것을 받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그의 또 다른 멘토였던 C&MA 목사 존 마인더가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며 사례비를 받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빌리 그래함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된 이유는 편법 목회를 삼가고 늘 진실한 예배자와 설교자로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바른 영적 리더를 절실히 요구한다. 영적 리더와 관련된 추문들이 전도와 교회사랑을 막고 있다. 결국 높은 자리에 있는 리더보다 바른 자리에 있는 리더가 중요하다. 영적인 리더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1. 하나님 말씀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 모세는 제사장 임직식을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거행했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을 무엇보다 중시하라. 가장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헌법과도 같다. 최종 권위는 성경에 있고 성경에 꼭 붙어있으면 리더에게도 권위가 생긴다. 다른 성공은 못해도 말씀중심적인 삶에서는 최고로 성공하라. 그 성공이 다른 성공도 따라오게 한다.
미국 C&MA 창시자인 심슨 목사는 1882년에 뉴욕 나약에 성경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선교사 훈련 대학(Nyack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을 세웠다. 1922년에 그 대학을 졸업한 토머스 왓슨이 플로리다에서 4천 석 규모의 텐트를 치고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모리슨(Morrison), 토레이(Torrey)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들을 초청해 전도 집회를 하면서 탬파에 플로리다 성경대학(Florida Bible Institute)을 세웠다.
1937년 그 학교에 입학한 빌리 그래함은 플로리다 성경대학에서 무엇보다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성경 사랑은 왓슨 목사의 제일 비전이었다. 그는 많은 학생들이 신대원에 가서 성경 외의 학문에 너무 시간을 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기 학생들은 성경을 깊이 알기를 원해서 많은 과목을 성경 중심적으로 편성했다.
빌리도 성경중심적인 삶의 틀로 인해 그가 설교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성경은 말씀합니다(The Bible says).”란 표현이었다. 그가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꼭 붙어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쓴 위대한 지혜자와 출애굽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말씀중심적인 리더십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꼭 붙어있어야 바른 영적인 리더가 되고 그때 복된 길도 펼쳐진다.
2. 공적인 권위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 규례가 정비된 후 모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종교 권력을 제사장에게 넘기는 위임식을 거행했다. 누가 제사장으로 위임 받았는가? 아론과 그의 네 아들이었다.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 아론의 직계 자손만 될 수 있었다. 위임식 준비물은 제사장 의복과 성별의식에 쓰일 거룩한 기름인 관유와 제사장의 속죄에 쓰일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각각 쓰일 숫양 두 마리와 소제물로 쓰일 무교병 한 광주리였다(2절).
그때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 회중이 회막 문에 모였다(3-4절). 당시 출애굽한 20세 이상의 남자만 약 60만 명이었기에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 회막 문 앞에 모이기는 불가능하다. 아마 전체 회중을 대표해 각 지파 핵심 리더들이 모였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제사장 위임식에 전 회중을 모았는가? 제사장의 권위를 온 회중 앞에서 공적으로 인증해 그들이 기쁘게 제사장을 존중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리더로 세워진 사람을 존중하는 삶은 리더의 축복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삶이다.
요즘 존경할만한 리더가 없다는 말이 많지만 그 말은 교만하게 들리기 쉽다. 또한 존경할만한 리더가 없다는 사실이 예의 없음과 버릇없음의 핑계는 될 수 없다. 바른 말을 바르게 하는데도 예의 없다거나 버릇없다는 말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리더는 팔로워에게 존경받을만한 행동을 하고 팔로워는 리더를 힘써 존중해주어야 한다. 순서를 존중하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다. 권위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권위 존중은 필요하다. 위계질서의 강요는 없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은 가져야 한다.
3. 반듯한 외양
위임식 준비를 마친 후 가장 먼저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겼다(6절).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 물두멍의 물로 그들의 손과 발은 물론 몸 전체를 씻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였다(7-9절).
속옷은 하안 베옷이고 그 위에 입는 겉옷은 청색 세마포 옷이다. 그 위에 걸친 에봇은 조끼나 앞치마처럼 생겼다. 에봇의 장식 띠는 옷을 단정히 묶는 띠다. 흉패는 5가지 가는 색실로 두 겹으로 짠 한 뼘 크기의 정사각형 천으로 천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 이름이 각각 새겨진 12개의 보석이 박혀있고 천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제비뽑기 도구인 우림과 둠밈이 보관되어 있었다. 머리에 씌운 관 위 전면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금패를 붙였다.
당시 대제사장 의관이 매우 화려했다. 그에 대해 “광야에서 너무 사치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영적인 리더는 사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첫 제사장 위임식 때 화려한 의관을 갖추게 하신 것은 대제사장으로서 외양으로도 존중심이 들게 하려는 특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치를 부리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단정하게 외양도 관리해서 그로 인해 존중심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한때 ‘열린 예배, 열린 교회’란 표현이 한국 교회를 휩쓸었었다. 당시 한 열린 목회자는 목회자가 목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닫힌 모습이라면서 주일예배 때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설교했다. 너무 닫혀도 안 되지만 너무 열려도 안 된다. 좋은 목적이 이끄는 삶 자체는 좋지만 좋은 목적을 이루겠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내적인 목적이 좋으면 외양과 수단방법도 최대한 좋도록 해야 열매도 좋아진다.
4. 성령 충만
아론이 대제사장 의관을 갖추자 모세는 관유를 성막과 성막 모든 기구에 발라 거룩하게 했고 또한 번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그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도 발라 거룩하게 했고 또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했다(10-12절). 사람의 머리에 관유를 붓는 것은 임직자로 성별되었다는 공적인 표시다.
아론의 기름 부음을 마친 후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다(13절).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속옷, 겉옷, 에봇, 띠, 흉패, 관, 금패의 7가지 의관을 하고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의 네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속옷, 띠, 관의 3가지 의관만 하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제사장 임직 때 대제사장인 아론에게는 관유를 머리를 적시고 수염을 타고 의복까지 흘러내리도록 흠뻑 부었고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들에게는 손가락으로 찍어 이마에 발랐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이 구약시대에는 ‘관유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란 뜻이다. 영적인 리더에게는 “나는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다.”라는 의식과 성령 충만한 삶이 있어야 한다는 암시다.
5. 희생하는 삶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속죄제 희생 제물로는 수송아지가 사용되었다(14절). 본문 18-21절에는 숫양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보통 번제는 생활 형편에 따라 수소, 숫염소, 숫양, 비둘기 등을 제물로 드렸지만 제사장 위임식 번제에는 준비된 숫양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사용되었다. 왜 제사장 위임식에 번제용 수양을 드리게 했는가? 번제는 자기를 온전히 드리고 희생하는 제사를 뜻한다. 결국 제사장 위임식 때 숫양 하나를 번제물로 드린 것은 영적인 리더는 희생하는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다.
왜 현대 교회가 힘을 잃었는가? 희생정신의 결여 때문이다. 교인이 줄면 마음이 너무 슬프다. 사기도 저하되고 재정도 줄어든다. 그래도 그것이 두려워 바른 길로 이끌지 않으면 그 교회는 외적으로는 혹시 성장해도 내적인 힘과 영향력을 잃는다. 목회자가 성도의 숫자와 호주머니에 연연하지 않고 재정적인 마이너스와 헐벗음을 각오해서라도 영혼을 바르게 인도하려고 해야 그 영혼도 살고 교회도 건강해진다. 참된 사랑이란 영혼을 내 곁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영혼을 바르게 만들고 주님 곁에 두려는 것이다.
요새 이단들로 인해 한국 교회는 2가지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단이 구원받은 영혼을 미혹해 빼앗아가는 것도 피해지만 교회 이미지를 망가뜨려 영혼 구원이 힘들어지게 만드는 것도 피해다. 파렴치한 막된 언행으로 방송을 타서 불신자의 지탄을 받는 교회는 대부분 이단 교회다. 그처럼 한국 교회가 많이 힘들어진 상태이기에 바른 영적인 리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늘 영혼 구원과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영적인 리더의 요건들을 잘 구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영적인 리더가 되라.
대제사장 그리스도
레 8:1-21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대제사장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레위기 본문에 대제사장 아론의 위임식이 나옵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묵상할 때 깨달을 것은 이 구약 레위기가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가리키고 있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을 부었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마쉬아가 기름을 부었다는 뜻입니다. 메시야가 헬라어로 그리스도, 그러니까 기름부어 세웠다, 이게 그리스도라는 뜻이예요. 오늘 대제사장 위임식 장면은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맞습니다. 모세가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의 머리에 기름붓고, 이것은 거룩하게 구별, 성별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사장의 위임식을 보면서 사실 한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이스라엘 나라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하고 시내산에서 언약맺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그러셨나요? 너희는 이제 온 열방에 제사장 나라다! 이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까 오늘 제사장 위임식은 곧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기름부어 세우신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을 온 열방의 한 가운데 제사장나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문제가 뭐냐면, 이스라엘이 제사장나라의 사명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한 제사입니다. 이 말씀을 지난 주일에 했죠. 예수님은 그 몸이 완전한 제물이자, 그분 자신이 완전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대제사장 위임식에서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한걸음만 깊이 들어가 봅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신약성도들에게 너희가 곧 제사장이다 이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 예수를 믿는 성도이면 그리스도인인데, 그 뜻이 뭐예요? 성도 한 사람이 자기 주변과 세상에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정체성입니다. 오늘 대제사장 위임식을 보면서, 우리 주님이 대제사장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도 세상에서 제사장으로서 두가지 정체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존귀함, 둘째는 책임감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온 백성앞에 위임식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을 온 백성 앞에 지극히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백성에게 보여줄 책임을 알려주십니다.
첫째, 존귀함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존귀하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힙니다.
2절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시는데 2절부터 9절까지 제사장에게 존귀한 옷 에봇을 입힙니다. 2절 제사장 위임식을 하는 데 네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제사장에게 입힐 옷, 거룩한 기름, 속죄제물 수소 한마리, 숫양 두마리. 누룩을 넣지 않은 빵입니다. 왜 이 네가지가 필요한가! 이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특히 제사장이 입은 옷 에봇을 집중 살펴봅니다. 3절, 하나님은 온 회중을 회막으로 불러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온 백성의 한가운데 있는 중심축입니다. 모두의 한가운데 있어요. 6절부터 9절까지 제사장 위임식 예복입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에봇이 어느 정도 값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살펴봅니다. 에봇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입은 어떤 옷보다 존귀하고 아름답고 멋있고 화려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6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이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은 후에 모세가 아론에게 속옷과 겉옷을 입히고 에봇을 걸쳐 입혀줍니다. 에봇은 엄청나게 화려하고 온갖 보석이 박혀서 값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 다음 모세가 아론의 허리에 에봇띠를 달아줍니다. 그리고 가슴받이, 이것을 흉패라고 합니다. 흉패를 가슴에 붙이고 거기에 우림과 둠밈, 두 보석을 넣어요. 9절 아론의 머리에 관을 씌워주고 성직패를 달아줍니다.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 Holiness to the Lord!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은 이 대제사장의 에봇제작 얘기를 출애굽기 28장 39장에 자세하게 하십니다. 에봇은 금색 자색 홍색실로 만듭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예술감독이 수공으로 제작하고 엄청난 보석들이 박힙니다. 가슴받이 흉패에다 이스라엘 열두 아들 이름을 각각 보석으로 새겨서 박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왜 제사장이 입는 옷에 이렇게 아름답게 하서요? 거기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존귀하게 높이리라. 아름답게 하리라. 내가 너를 높여주리라. 결국 제사장을 안수하는 위임식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나요? 하나님의 독생자를 메시야로 위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들 독생자를 너희를 위한 제사장으로 보낸다. 이 독생자는 존귀하다. 내 아들 독생자가 이렇게 고귀하고 존귀하고 아름답다. 그 존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내 독생자를 너를 위해 아낌없이 보낸다, 내가 너희를 이만큼 아끼고 사랑한다 이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만큼이나 아름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만큼 나에게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이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합니다. 아론과 예수, 두분의 차이는 뭘까요?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지극히 존귀한 옷을 입어요. 그러나 아론은 본래 존귀하고 아름답고 흠없는 존재인가? 아닙니다. 허물많은 죄인입니다. 아론도 역시 속죄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수송아지와 수양이 필요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하나님앞에 결단코 의인이어서가 아닙니다. 이들도 역시 죄인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죄인이 맞지만 하나님이 존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앞에 이래요. 우리는 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입니다. 아름답고 흠이 없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서 아름답고 존귀한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이렇게 존귀하고 아름답게 높여주신 것입니다. 너희 이스라엘은 열방의 중심축이며 너희는 제사장 나라다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메시지가 듬뿍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을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입히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구약의 제사장이 이렇게 존귀한 옷을 입었다면, 독생자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입으신 옷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화려할까요? 오늘 설교후에 우리가 찬송가 87장을 다같이 부르겠습니다. 내 주님이 입으신 옷을 봅니다. 그분은 하늘영광을 버리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십자가,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우리 주님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마태복음 28장 주님의 옷은 빛같이 희고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주님의 얼굴과 그 옷은 어땠나요? 해같이 빛나고 빛처럼 희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이 어땠나요?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어요. 여기서 공통적인 것이 뭡니까? 해같이 밝고 빛나고 흰 옷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가 입으신 옷 에봇의 모습니다.
오늘 아론 대제사장 위임식보다 더 감격스럽고 눈물나는 위임식이 또 나옵니다. 스가랴 3장에 이스라엘이 제사장나라 사명을 완전상실하고 가나안땅에서 쫒겨나바벨론에 70년 포로생활하고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때 포로 이스라엘 대제사장이 여호수아예요. 그가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고 서있어요. 스가랴가 이 장면을 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대제사장을 고발합니다. 저 여호수아는 제사장 사명도 다 잃어버리고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고 있네요. 하나님 앞에, ‘저건 대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여봐라. 저 여호수아의 더럽고 누추한 옷을 벗기라! 오늘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에봇을 입혀주셔요. 존귀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다시 입혀주십니다. 그리고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워주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얼룩진 옷을 입어요. 허물많고 누추한 옛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요. 그러다가 오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탄이 우리를 얼마나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에이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도 못하고 온 거 아냐? 너 한주간 세상에서 더럽게 누추하게 살지 않았느냐? 무슨 낯으로 여기 왔느냐? 조롱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에게 뭐라 하신다구요? 저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여기 존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 높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하면서 얼룩진 옛사람의 옷을 벗고, 새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 해같이 빛나듯이, 하나님은 허물많고 누추한 옷입고 서있는 나를 또한번 너는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 불러주시는 겁니다. 매번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존귀한 제사장의 옷으로 갈아 입혀주십니다.
둘째, 책임감입니다. 제사장에게는 거룩한 기름을 붓습니다.
10절 읽어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 이것을 개역성경은 관유라고 합니다. 어노인팅 오일, 어노인팅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자면 메시야, 헬라어로 하면 그리스도예요. 왜 기름을 부어요? 거룩하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로 인정해주시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모세가 거룩한 기름을 갖다 먼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기구에 바릅니다. 모든 그릇에 발라요. 그러니까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바른다, 이것은 다 같은 뜻입니다. 기름을 바르면 그것을 성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바른다, 피를 부은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를 덮으면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그러니까 구별된 기름,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제단을 성결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제단을 기름으로 거룩하게 하고, 모세가 기름을 제단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런 다음 12절봅니다.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거룩한 기름을 부어요.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발라요. 아론을 거룩히 구별하여 대제사장으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노인팅, 히브리어로 마쉬아흐, 메시야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켜 메시야! 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그리스도거든요. 그러니까 대제사장 아론은 누구를 가리켜요?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직분은 세가지입니다. 어떤 직분을 기름부어 세워요? 첫째, 제사장을 기름부어 세웁니다. 둘째, 선지자를 기름부어 세웁니다. 셋째, 왕을 기름부어 세웁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입니다. 구약시대 기름부은 직분이 세가지 형태로 분산되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조명하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였나요? 바로 독생자 예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메시야, 이런 것입니다. 예수는 기름부은 대제사장이시다!
왜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다 거룩한 기름을 부었을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대제사장이 가지는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론이 오늘 이후에 할 일이 뭐냐? 대제사장은 온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할까요? 지난 주일 번제와 십자가, 제사장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제사로 백성을 다시 거룩하게 합니다. 여러분 제사의 기능이 뭡니까? 거룩함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게 해줍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직무를 보세요. 죄인이 자신의 죄를 속하려고 하면 뭘 합니까? 소나 양이나 염소를 끌고 와, 죄인 당사자가 짐승 머리에 손을 얹어요. 뭡니까? 죄의 전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것입니다. 네가 믿음으로, 네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너의 죄가 너의 대속물 그 짐승에게로 전가된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그렇게 죄인이 그 약속을 믿고 짐승을 끌고와서 안수하고 죽여 피를 흘립니다. 죄인이 짐승을 죽여놓으면 제사장은 그 짐승을 제단에 올려놓고 번제를 드려요. 그 고기타는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그 향기를 맡으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죄인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러면 그 죄인이 어떻게 됩니까?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가집니다. 이것이 언약이예요. 이게 바로 대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식 안수식을 하는 장면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어 거룩한 기름을 부어 하늘 대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대제사장 아론의 위임식에서,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 모습을 봅니다. 아론이 입은 에봇, 화려함과 존귀함과 값진 보석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봅니다. 거기서 하늘성소의 대제사장으로 내려오신 주님의 빛나고 환한 모습을 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빛난 모습을 무덤앞에서 마리아가 보고 엎드립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밝은 주님의 얼굴과 옷을 보고 변화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변화산 위에서 영광의 옷을 입으신 주님을 베드로가 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존귀한 그 옷을 보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대제사장 빛나는 옷을 바라보면서 바벨론포로, 실패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짓고, 남의 나라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 대제사장이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고 섰는데 하나님이 뭐라 하셔요? 저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십니다. 그리고 빛나고 존귀한 대제사장의 옷을 입히라 하십니다. 아 이게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구나! 저는 오늘 이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허물많은 옛사람 옷을 입고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자격이 없어요. 사탄이 우리 허물을 공격합니다. 그렇게 죄만 짓고 세상에서 살다가 여기 왔네! 너희가 예배드릴 자격이 있느냐? 거룩한 백성답지 않게 한주간 살다가 무슨 낯으로 왔느냐? 맞습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지요. 더럽고 누추한 옷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신다구요? 저 더러운 옷을 벗기라. 여기 거룩하고 존귀한 옷을 입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대제사장 아론의 위임식에서 우리는 두가지 하나님의 귀한 뜻을 봤습니다. 너희는 존귀하다! 이것이 존귀한 옷 에봇을 입혀주시는 뜻입니다. 자존감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기름부어 책임감을 주십니다. 너는 열방에 대하여 제사장이다. 거룩한 책임감을 가지라. 이것이 아론에게 가장 멋진 에봇을 입히신 뜻입니다. 이것이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신 뜻입니다. 대제사장 그리스도! 머리에 기름붓는다, 그게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대제사장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늘성소에서 영원한 제사, 십자가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 그리스도가 자기 몸으로 드린 십자가 제사로 인하여 오늘 우리가 구원받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름부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열방의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겁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겁니다.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열방에서 왕같은 제사장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책임감입니다. 오늘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앞에서는 지극히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책임있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임직식에 준비할 것들
레 8:1-13 / 김경호 목사
오늘은 교사, 성가대원을 비롯해서 올 한해 교회 살림을 맡은 제직과 각 부서 임원들이 임명 받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8장에 제사장 임직식에 관한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임직식에 준비할 물건으로는 임직식에 쓸 제사장 옷, 기름, 제물로 바칠 소, 양, 누룩을 넣지 않은 빵, 에봇, 우림, 둠빔, 머리에 관, 성직패 등의 물건들이 나옵니다.
첫째 옷에 관한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제사장은 옷 입기 전에 물로 깨끗이 씻고 속옷을 입혀주고, 띠를 띠워주고, 겉옷을 입힙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 신약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 21,24-25)
이 말씀은 바로 이 제사장 임직식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띠를 띠워 준다는 것은 “이젠 네 맘대로 못한다. 지금 까지는 네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너를 사로잡아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 알고보니 무섭지요? “이제 너는 내 손에 달렸다”하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어디까지 끌고 가셨습니까?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십자가까지 끌고 가신 것이예요. 요즈음 조폭 영화가 한참 유행인데 신앙은 사실 조폭 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조폭의 의리와 신념이 신앙인을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
30절에 보면,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과 제단에 있는 피를 가져다가, 아론,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아론과 그의 예복을 입은 아들들에게 뿌립니다. 여기 임직식을 하는 것은 제사장 뿐만 아니고 그 아들들도 예복을 입고 임직을 합니다. 머리에 관도 쓰고 패도 달고요. 물론 제사장직 자체가 레위족에게 세습되는 시대이긴 합니다만 그 아들들도 영광이 똑 같다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아빠가 성가대원이라 그 연습 끝나길 기다리는 아들, 딸에게도 하나님께서 똑 같은 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립싱크 대원이지만 아버지 때문에 강제로 남아 몸을 꼬던 딸은 나중에 소프라노 가수가 되는 것이지요.
임직하는 제사장은 흰옷을 구별하여 입습니다. 그러나 흰옷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임직식이 끝나갈 때 그 흰옷에 대고 짐승의 피를 뿌립니다. 그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희생을 상징합니다. 거룩한 희생 그것 없이는 임직식에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흰옷을 차려입는 것은 그 희생의 피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무릇 하나님께서 임명하시는 모든 직책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희생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그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 꼭 내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기희생의 정신이 있는 사람들만이 교회의 직책을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붓는 의식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메시아라고 하는데, 제사장 뿐 아니라 왕과 예언자도 그렇게 합니다. 10절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데 쓰는 기름을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발라서 그것을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도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제사장도 아닌 것들에게 기름을 바르다니요? 그리고 그것이 거룩하게 한다니요? 일반적으로 이런 기구들에 기름을 바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바로.... 녹슬지 말라고 바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구에 기름을 바른 후에는 그 다음 아론의 머리에, 그 아들들의 머리에 바릅니다. 바로 그것도 “너 처음 마음을 그대로 가져라. 결코 녹슬지 마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왕, 제사장, 예언자와 같이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임직 받는 사람들은 첫 마음 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한결같이 녹슬지 말고 그 뜻을 세워가야 합니다.
임직 받고 일하다 보면 별 도전을 다 받습니다. “야 성가대는 무슨 성가대야, 집사는 무슨 집사야, 너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뭘 봉사해? 제직은 무슨 제직? 중도 하차해! 자기 코가 석자인데, 집사가 밥 먹여주나? 게다가 넌 자격도 안되고 네가 그것을 계속해야 의미도 없다....” 별 마음의 소리가 다 들릴 수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가 너를 별로 안 좋아한다. 야, 목사님도 너를 안 좋아해.”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을 흔드는 잡소리를 이겨야합니다. 녹슬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갑자기 혜성과 같이 나타나 열심을 다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만 그렇게 반짝하고 곧 사그러지는 것 보다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번에 큰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여러분의 맡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림, 둠빔에 대한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조끼이고 바로 이 우림과 둠빔을 넣은 주머니가 달린 조끼입니다. 우림, 둠빔은 일종의 주사위인데 하나님의 뜻을 가늠하는 도구입니다. 어찌보면 미신적인 것이라 멸시하기 쉽지만 그 정신은 매우 중요하고, 과학적인 것입니다. 의견이 둘로 갈려 팽팽할 때 물론 제사장이 법대로 판단하겠지만 법을 적용하기가 곤란할 때, 이것도 합리성이 있고 저것도 합리성이 있을 때, 계속 그것을 가지고 싸우게 되면 공동체의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 공동체를 하나의 결정으로 끌고 가야할 때, 제사장은 우림, 둠빔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모두가 순종하여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화합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이것도 가능하고 저런 방법도 가능할 때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기 쉽습니다. 그럴 때, 제사장의 의지로 선택하면 한 쪽의 원망을 살 수 있으니 던져서 나오는 것으로 어느 쪽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빔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는 미덕이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바로 유대 공동체의 결속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밥 먹는 논쟁이 한창입니다. 오늘도 회의를 합니다.
공동식사를 하고 안 하는 단순한 문제인데 상당히 강경파들이 있습니다. 극좌파도 있고, 극우파도 있어 쫘악 나누어집니다(웃음). 밥을 먹어야 된다는 쪽은 성만찬의 정신을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함께하는 식사가 성찬이고 예배의 완성이기에 식탁의 친교가 없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반면 반대의 극은 “우리가 때로는 주를 위해 금식도 하는데.... 주일날 하루 점심 정도 금식하는 마음으로 안 먹을 수 있어야지 않겠는가?”라고 합니다. 양쪽이 다 팽팽합니다. 우리 교우들은 논쟁을 해도 이렇게 다 성경적이고 신앙적입니다(일동 웃음).
또 한극은 지난번 봉사부에서 식사를 안하겠다고 한 후에 “그럼 내가 일년동안 식사 준비를 하겠다,” “나는 일년동안 설거지 봉사를 하겠다”는 분들이 나왔습니다. 이제 두분이 나왔으니 모든 일이 충분하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분들의 충정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우리 교우들 누구든 이 두 분이 밥하고 설거지 일년 동안 하라고 하고 편하게 앉아서 그 밥을 받아먹을 수 있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분들도 일년 내내 방글방글 웃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기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극은 다과로 하자는 의견이 나오니 컵 씻고, 접시 씻는 것도 마찬가지 일이니, 아예 하지 말자는 분도 계셨다고 합니다.
처음에 제가 몹시 속상했습니다. 도대체 매년 밥 먹는 문제로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논쟁해야 하는가? 참 민주적인 교회를 한다는 것은 힘들구나! 그저 목사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라거나 등등 밀어붙이는 교회에 대한 동경을 잠시나마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여신도의 항의성 메일을 받고 아주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부를 표기할 때, 여성 먼저 알렉산더와 쓰고 남성을 쓰길래 처음 교회에 와서 감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매일 밥해대는 여신도들이 주일날도 교회와서 예배도 제대로 못드리고 밥해 올리고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회의도하고 담소도하고, 큰일은 남성들이 다 하는 같이 하니, 과연 성차별이 없는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년 이런 시덥지 않은 밥 먹는 일로 해마다 한 차례씩 논쟁해야 하는 것이 몹시 속상했는데.... 이런 시덥지 않은 일을 평생 해야 하는 여성들은 어떠한가?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어떤 여성 노동자가 쓴 글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파업투쟁을 하는데, 다 밖에 나가서 함께 투쟁 집회를 하고 들어와서는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폼잡고 쉬고, 여전히 여성들은 또 밥해 먹이고, 청소하고... 쉴 여유 없이 그런 일까지 맡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계급보다도, 진보, 보수 이런 것 보다 더 지독한 것이 남성, 여성의 차별이다”
밥먹는 것이 시덥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일, 낮 나는 일은 다 남성들의 몫이고, 사실 그 뒤에는 밥해 먹이고 청소하고 해온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존재해왔습니다. 이 시덥지 않은 일들을 우리는 재평가 해야하고 이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여신도들을 보면 대부분이 맞벌이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주방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해온 것을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앞으로는 주방일을 하더라도 남성들이 할 각오 없이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활 전반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제발, 여성들은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십시오. 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제가 시카고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남성이 자랑스럽게 제게 책 하나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책은 그 교회 남신도들이 모여 요리를 해먹고 수다 떨면서 만들어낸 요리책이었습니다. 참으로 묘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모임이 만들어져 남성들이 요리도 하고 가족도 초청해서 대접도 할 수 있는 모임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모든 것을 민주적으로 토의해서 결정합니다. 따분하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힘있고 좋은 합의를 만들어 내는 성숙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오늘 좋은 합의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성서에 보면 뜻밖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습니다. 유월절 순례 길에 올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구경 삼아 보다가 마침 예수님께서 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우연히 지게 된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때 시몬은 “참, 재수 되게 없다!”며 투덜대거나 예수님을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구경하다가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진 사람이 바로 이 시몬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가복음에는 이 시몬을 소개 할 때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15,21)....”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가의 독자들은 이미 그의 아들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우연히 지게 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인 로마서 16,13에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멋모르고 원망하며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인연을 그렇게 흘려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의 아들들이 초대 교회에 중요한 인물이 되게 하셨으며, 바로 그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중요한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뜻하지 않은 십자가가 그의 가족을 구하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지게된 십자가가 초대교회를 구하는 십자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그만 인연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물며 여러분의 의지로 오늘 자진해서 임직 받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성별된 사람들
레 8:1-13 / 박봉수 목사
차별과 구별은 다른 것입니다.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어떤 인위적인 기준으로 나누어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구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그 고유한 특성에 따라 갈라놓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콩쥐팥쥐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아이에게는 좋은 옷을 입히고 다른 아이에게는 나쁜 옷을 입힌다든지, 어떤 아이는 놀게 하고 다른 아이는 힘든 일만 시키는 것은 차별입니다. 둘 다 좋은 옷이 필요하고 둘 다 적당한 일이 필요합니다. 이런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 채 계모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나누어 대하는 것 이것이 차별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키 큰 아이에게 큰 옷을 주고 키 작은 아이에게 작은 옷을 준다든지, 덩치가 큰 아이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고 덩치가 작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적게 주는 것은 구별입니다. 키가 크고 작음과 덩치가 크고 작음은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 특성에 따라 갈라놓은 것 이것이 구별입니다.
마 25장 달란트 비유를 보면 14-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른 양의 금을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순서대로 금의 양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든다는 인위적인 기준을 따라 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세 사람의 재능대로 금의 양을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고유한 특성을 따라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타난 차이는 구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남여 성에 따라, 어떤 인종이냐에 따라, 가진 것에 따라, 배운 것에 따라,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똑 같이 대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재능과 은사, 그리고 직분과 직위와 같은 그 고유한 특성에 따라 다르게 보십니다. 다른 일을 맡기시고 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르게 평가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차별과 구별을 혼동한다는데 있습니다. 많은 경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남들보다 많이 받았다는 것을 차별로 혼동합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남보다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에 교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차별이 아니고 구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가 왜 다섯 달란트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다른 재능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그 재능을 잘 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보다 많이 받은 그 금 다섯 달란트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차별과 구별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차별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별해서 세우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개적으로 사람을 구별해서 세우신다고 해서 우리는 이것을 “성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별
오늘 본문 레위기 8장은 소위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성별하시고 공개적으로 의식을 갖추어 저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들은 남다른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렇게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길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 제도를 아주 철저하고 세밀하게 세워놓으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제사드릴 성별된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7장에 이 성막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낼 것인가 구체적인 제사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 드리는 성별된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성막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를 집례 할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우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위해 섬길 성별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세워진 성별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 한 마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은혜를 받고 나서 곰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셨을까?” 기도하는 도중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차를 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예수 믿게 하셨구나!” 그리고 마부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산 분입니다.
이 마부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믿고 복을 받게 하시려고 믿게 하셨구나! 이 지긋지긋한 마부 노릇 면케 해 주시겠구나!” 그래서 계속해서 마부 생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자신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내 필요보다 하나님의 필요를 앞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별된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4절, 5절, 9절, 13절, 17절, 29절, 36절, 그리고 9장을 봐도 5절, 7절, 10절, 21절 정말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모세가 제사장을 위임해서 세울 때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대로 지켜 행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출애굽한 사람입니다. 바로 앞에서 그 처절한 영적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선도했던 사람입니다. 광야의 그 모진 고난을 앞 장 서서 헤쳐 온 사람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을 때도 됐을 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고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준행했습니다.
모세는 제사장이 세워지고 나면 적어도 제사 드리는 일에서 만큼은 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영적 지도력 일부를 떼 내주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제사장으로 세우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앞 세워야 합니다. 내 뜻, 내 감정, 내 기대, 내 생각을 앞 세워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별된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성별된 사람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성별하시면서 모세를 통해 구체적으로 시행케 하신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물로 씻으셨습니다.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이 될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물로 씻게 하셨을까요? 물론 몸을 깨끗케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몸이 더럽거나 때가 묻어있으면 제사장 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씻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과거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다 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롭게 살고자 다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별되기 전의 삶과 성별되고 난 다음의 삶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세계에 몸을 담았다가 빠져나온 사람들이 흔히 “손을 씻었다”라는 말을 씁니다. 손을 씻었다는 표현을 통해 마음을 씻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려고 작심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별된 사람들은 늘 결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롬 6:10-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동화 한 토막이 생각이 납니다. 산 중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나무 위로 도망을 쳤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도망칠 기회를 놓치자 그 자리에 엎드려 죽은 척했습니다. 곰이 죽은 척하는 사람 곁으로 와서 한참 살펴보더니 그냥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별된 사람은 죄가 가까이 와서 유혹할 때 죽은 척 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활기차게 맞이하고 그분을 따라 나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 대해 죽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그런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복을 입히셨습니다.
7-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예복을 입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 28장과 39장을 보면 이 제사장의 옷에 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단히 화려합니다.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을 짓고, 호마노 보석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고 금테에 물리도록 했습니다. 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아 테에 달도록 하는 등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흉배는 아예 열두 보석을 전부 금테에 물린 것으로 장식토록 했습니다.
왜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게 했을까요? 물론 이런 옷을 입어야만 제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옷을 입게 한 것은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품위를 지켜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서양의 신사들의 예장차림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번거롭습니다. 우선 모닝코트와 연미복 같은 정예장(most formal wear)이 있어서 최상의 격식을 차릴 때 입었습니다. 다음으로 턱시도와 같은 준예장(semi formal wear)이 있어서 품위 있는 모임에서 입었습니다. 그리고 블랙다크수트와 같은 약예장(informal wear)이 있어서 편안하지만 신사로서의 기본적인 품위를 지킬 때 입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입어야 할 장소와 때에 따라 엄격하게 격식을 따라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복을 입으면서 신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품위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으로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입어야 할 예복이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살전 5:8을 보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6:14을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3:12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예복을 입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별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맞는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별된 사람으로서 마음의 예복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벌거벗어 수치를 당치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아론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고 몸에 기름을 바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사람에게 기름을 붓고 바르게 하셨을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가 기름을 부었다고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출 40장을 보면 모세가 장막과 그 안에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다른 모든 장막들과 구별되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막이 되고 그것이 성물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눅 4: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한 사건을 기름을 부은 사건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별된 사람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행 1:8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힘만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쩔쩔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지금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성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라고 우리를 성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마음의 예복을 입고 하나님 백성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합니다.
띠를 띠우자
레위기 8:6-9, 요한복음 21:5-7 / 이성희 목사
서 론
수도사의 옷은 단순하면서도 의미는 다양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수도원에 갔을 때에 수도사들의 옷에 대하여 꼼꼼히 물어보았습니다. 수도사들의 옷은 통옷입니다. 모자부터 아래까지 하나로 되어 있는 옷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통으로 짠 옷이듯이 그들의 옷도 통입니다. 하나로 되어 있어 이은 데가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수도사들은 모자를 씁니다. “왜 모자를 씁니까?”라고 물었더니 “어린 아이같이 귀여워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옷은 모자부터 허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허리춤에 와서 옷 안쪽에 띠로 십자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죽에는 허리띠를 띠고 있습니다. 가죽은 예수님께서 가죽 채찍으로 맞으신 것을 상징하며, 허리에 띠를 한 것은 허리에 두르신 수건을 상징합니다.
가죽 허리띠란 예수님의 채찍을 상징하는 것도 중요하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 몸 매무새를 든든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리띠란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옷을 입은 채로 잘 것이며, 띠나 끈도 맨 채로 잘 것이나 잠결에 혹시라도 상처 입지 않도록 칼을 허리에 차고 자지는 말 것이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항상 준비된 상태에 있다가 신호가 나면 지체 없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에 서로 빨리 오도록 노력할 것이나 온갖 신중함과 단정함으로 할 것이다.” 수도사들의 옷에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옷을 어떻게 입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도사들의 옷이란 시장바닥에 버려 삼일 동안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는 옷이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의 옷의 띠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몸을 든든하게 하는 것과 더불어 예수님의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옷의 띠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띠 하나에도 정성이 있어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키파’라고 불리는 모자입니다. 모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내 머리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테필린’라는 가죽 띠입니다. 머리에 말씀을 담는 작은 상자와 팔에 칭칭 감는 가죽 띠입니다. 셋째는 ‘탈릿’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기도 보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이 세 가지를 꼭 가지고 기도합니다.
신명기 6:8에는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실행하려고 손목에 가죽 띠를 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띠를 띠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을 지어 입히라고 하십니다. 대제사장의 권위와 직무수행에 맞게 정교하고 우아하게 설계된 예복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흰 세마포 속옷입니다. 둘째는 청색 겉옷입니다. 셋째는 띠입니다. 넷째는 에봇입니다. 다섯째는 흉배입니다. 여섯째는 관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금패입니다. 반면에 일반 제사장의 옷은 속옷과 띠와 관, 세 복장으로 나누어집니다.
레위기 6장은 ‘제사장의 위임식’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입니다. 첫째는 제사장의 몸을 물로 씻고, 둘째는 일곱 가지 복장을 입고, 셋째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복장을 갖출 때에 띠는 보이지 않지만 든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의 옷, 믿음의 옷을 입을 때 든든한 결심, 든든한 의지로 무장해야 합니다. 겉옷 안에 매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든든하게 하는 띠를 띠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사장들이 띠를 띠는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도 든든한 띠를 띠고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속옷을 든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레위기 8:7 상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이 가리키는 첫 번째 띠는 속옷을 든든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은 엄격하였습니다. 심지어 속옷까지 지어 입히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는 속옷까지 경건하고 든든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8:40에는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라고 하신 속옷은 가늘고 하얀 베 실로 짜서 만든 옷입니다. 출애굽기 29:39에는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입은 다음, 겉옷 안쪽에 띠로 묶어 입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편안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이 든든해야 옷을 제대로 입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은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속에 있는 것이라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속에 넣어 감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3:25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은 아름답지만 안은 썩은 시체와 같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책망입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중적 인격을 의미하며,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포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내용은 알찬 선물이라는 뜻이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표리부동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속을 훤히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옷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마음이나, 삶이나, 모든 것이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는 언제나 정갈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경건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2:11에는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고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든 모습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닌 여행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긴 여정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긴 여정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유월절 정신을 기억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35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합니다. 항상 허리에 띠를 하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단단히 입고 띠를 띠라는 것은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긴장감이 흐트러지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활기가 있어야 삶이 아름답습니다.
홍사중의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는 늙을수록 옷을 세련되게 입으라고 권합니다. 여성이 보는 멋쟁이 남성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첫째는 때와 장소를 가려서 옷을 입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장의 변화를 줄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옷을 세련되게 입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 옷을 잡 입어야 합니다. 비싼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적절하게 입어야 하며, 단단히 입고 언제나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마귀와 전쟁하기 좋게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싸울 준비를 하고 전투복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전신갑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14에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합니다. 바지가 흘러내리면 전쟁을 못합니다. 속옷을 든든하게 하는 띠를 띠고 견고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레위기 7:7 하반절에는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두 번째 띠는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띠입니다. 제사장은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영적 권위는 있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반대하지만 권위는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식 띠는 장식만 아니라 겉옷과 에봇이 내려오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띠를 허리에 두서너 번 두른 후에 묶고 나머지는 무릎까지 늘어뜨렸습니다.
흉패는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보석이 박혀 있어 12지파의 영적 삶을 책임지라는 의미를 새겼습니다. 이 천 안쪽에는 ‘우림’과 ‘둠밈’을 보관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뜻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빛’과 ‘완전’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제사장은 빛으로, 완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봇은 대단히 화려한 일종의 예복입니다. 겉옷 위를 덮는 것으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조끼와 같은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옷입니다. 양 허리에 띠가 있어 앞뒤 부분을 연결하고 몸에 밀착시키는 것이 에봇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권위와 맵시를 동시에 표현하는 옷입니다. 제사장의 옷은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인위적인 위엄이나 권위가 아니라 신적 위엄과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9:5에는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정교하게 짠 띠를 띠게 하고”라고 합니다. 겉옷과 에봇을 입은 다음에 띠를 띠라고 하십니다.
“장식 띠”란 에봇의 전후 양쪽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장식 때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각 색체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금실은 주님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청색은 하늘색으로 하늘나라를 의미하며, 주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주님의 위엄과 존귀를 상징합니다. 홍색은 주님의 피를 의미하는 색이며, 구원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가는 베실은 주님의 성결과 영광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갈라디아서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금실,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지은 옷을 입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옷은 우리의 성품을 말하고, 권위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옷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권위가 나타나야 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관생도의 복장을 보세요. 그 제복 자체가 권위를 드러내고, 맵시를 뽐냅니다. 제복을 벗겨놓으면 못 생긴 이들도 있지만 입혀 놓으면 하나같이 멋쟁이입니다. 흰색바지에 어깨에 노란 술이 달린 견장, 깃털 달린 모자를 쓰면 모두가 미남이고 준수합니다. 이것이 사관생도의 예절이며, 권위이며, 리더십이며, 사병을 이끌어갈 힘입니다.
개신교 성직자의 옷은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와 더불어 오랜 전통을 탈피하였습니다. 이런 성직자들의 복식의 붕괴는 성직자의 권위 붕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가운을 벗는 게 아닌데 요즘은 벗는 성직자가 더 많습니다. 가운을 벗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 말씀의 권위, 영적 권위를 감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가운을 벗으므로 영적 권위도 스스로 벗어버린 것입니다.
‘고대미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고대와 미래는 그 패러다임이 일치한다는 개념입니다. 미래사회는 고대사회의 패러다임을 회복하므로 고대사회를 잘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고대를 회복하는 미래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입니다. 미래교회는 신비감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데 개신교 성직자들은 신비감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최근에는 불교와 천주교에 비하여 개신교는 성직자의 신비감에서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성직자의 복장이 우선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반면에 개신교의 성직자는 평신도와 전혀 복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배시간의 복장도 가운을 벗어버리므로 그렇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만일 영생이 없다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옷 입기 위해 노력할 필요조차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면 예배할 때 옷을 어떻게 입을까 하는 고민이나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편 132:9에는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라고 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주의 제사장인 성도들, 우리 모두도 의를 옷 입고 띠를 단단히 매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 론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대하는 것이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이란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정교회 신학자인 폴 에브도키모브는 ‘그리스도처럼 되어감(Christificatio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영성은 양성되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영성양성이란 그리스도처럼 되어감(christening)과 그리스도로 옷 입음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되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입을 옷은 염려거리가 아닙니다. 입을 옷을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옷을 어떻게 입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는 그 옛날 제사장이 입었던 옷처럼 입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하게 입어야 하며, 정갈하고 든든하게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하게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 권위를 나타냈듯이 우리의 옷도 권위 있는 옷이 되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권위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의 기본 사역
레위기 8:1-13 / 허호익 교수
"누구에게나 필수 사역이 있고 선택 사역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 따라 전문 지식이 있고, 전문 기술이 있고, 전문 사역이 있습니다. 그 누구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특별하면 특별한 만큼 우대를 받게 마련입니다. 사회의 기관이나 기구에도 전문 분야가 있고, 회사에서도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구조조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문적이고 기본적인 사역에 따라 그 역할과 기능을 극대화하여 경쟁력을 높이고 상품의 가치를 높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국력이 튼튼해지고 세계적 입지가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도 기본 사역이 있고, 전문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I. 교회의 기본사역은 예배입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기본 사역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예배요, 둘째는 교육을 통한 양육, 그 다음은 친교, 봉사 그리고 전도입니다. 하지만 이 다섯가지 기본 사역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사역은 예배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 첫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온갖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심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근본 사역입니다. 예수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없을 때 선교, 봉사, 교육, 양육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고 난 후에야 선교와 봉사와 능력과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 섬김은 바로 예배에, 즉 제사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택한 레위기는 하나님 신앙의 본질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법,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를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1장에서 7장까지는 주로 제사의 종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8장부터 10장까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 관해서, 즉 제사장 위임식이라고도 합니다만, 제사를 드리고 인도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가짐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11장부터 22장까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의 정결함에 대해서, 22장부터 26장까지는 절기의 종류와 각각의 제사에 대해서, 27장에는 서원법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제사 즉 예배하는 일입니다. 전도나 봉사, 선교, 교육, 성도의 교제에 앞서 제사(예배)하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사(예배)에 소홀하면 그외의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없이 다른 모든 것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반면 다른 것은 부족해도 예배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바르게 하면 그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발전시켜 주셨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하나님 제사(예배)는 그 준비부터가 철저하고 세밀합니다. 먼저 목욕한 후, 속옷과 겉옷, 에봇과 띠, 흉패와 모자 등 모두 예배복으로 갈아 입어 스스로를 정결하게 합니다. 장막과 기구 등에 기름을 바른 후 제물을 잡아 피를 뿌리고, 단 위에 제물을 드리고, 가죽과 똥과 고기는 진밖에 나가 불사르고, 제단에서 태울 것은 내장에 덮인 기름, 간 꺼풀, 두 콩팥과 그 기름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힘과 삶 전체, 악과 선을 구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 불태워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피는 인간의 생명과 지성을 의미합니다. 이토록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이고, 예배 속에 모든 것, 즉 신앙인의 모습이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성별되고, 새 힘을 얻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제사요, 신약 시대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의 모든 사역 중 우선이며, 모든 사역의 종합이며, 모든 사역의 기본입니다. 우리 동신교회가 이같이 바르게 예배가 수행되는 하나님의 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교회가 기본 사역에 충실하면 성장합니다
교회가 그 기본 사역에 꾸준히 노력하고 열중하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성령께서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치리하시고, 목자장되신 예수님 자신이 목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사역에 충실하면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 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이나 가정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생활에 성실과 성의를 다하면 그 개인과 가정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친히 담당하십니다. 구약 시대의 예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예배에 성실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인간의 수단으로 나라를 꾸려 나가려고 할 때 그 나라는 앗수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웰치(R. Welch) 감독의 목회 간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갓 시작하면서 교회의 각 위원회와 조직이 잘 움직이고 진행되면 교회가 부흥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새 교인 위원회와 기타 조직을 잘 만들고 새 교인들을 각 위원회에 입회시켰는데 얼마 후에는 흥미가 없다고 떠납니다. 그래서 부흥하는 교회에 가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잘 살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가 감동있고 기쁨있는 예배,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에 힘쓰고, 부목사님들이 기도를 담당하여 능력있는 기도생활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25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10년만에 2천명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새들백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매주 예배에 출석하는 교인이 만명이 넘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시카고에는 윌로우 크릭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 1만5천명 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 교회는 전 교인이 성가대원이고 전 교인이 예배 위원이고, 교회 프로그램 전체가 바로 예배입니다.
교회 부흥은 회의나 조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 속에 역사하시고, 힘있는 기도 속에 역사하십니다. 웰치 감독은 말하기를 ""교회에 회의가 많으면 믿음에 회의가 생기기 쉽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회의가 생기면 능력을 상실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쉽습니다. 교회가 본래 사역에 충실하면 교회는 부흥합니다.
III. 교회의 근본 메시지는 불변하나 예배의 형태는 변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예배에는 찬양과 기도, 죄의 고백과 말씀의 낭독, 그리고 설교 말씀과 헌금의 봉헌, 세례, 성만찬, 축도의 순서가 필수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예배는 인본주의적으로 흘러 하나님보다는 참여자를 즐겁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입니다. 에배의 근본 메시지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믿음을 갖고,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사도 시대의 고백대로 지금도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믿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 형태와 외형적인 모양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스위스에서 만든 시계는 세계 제일이었습니다. 견고성이나 정확성은 물론 질적으로 스위스 시계하면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당시 스위스는 세계 시계 시장의 80%를 점유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에 디지털(digital) 시계 제조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스위스 시계 제조회사에 제안되었습니다. 스위스 시계 회사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지금처럼 인기가 좋고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판에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냐면서 거부했던 것입니다. 결국 디지털 시계 제조에 관한 아이디어는 일본의 세이코 회사에 팔렸습니다. 1940년대 스위스 시계 제조회사의 회사원은 8만명이었으나 지금은 1만8천명, 시장 점유율 역시 80%에서 이제는 겨우 10%로 떨어지고, 오히려 디지털 시계가 80%를 점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예배에도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80년대의 전통적 예배 형태가 새로운 예배 형태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전후세대들이 거침없이 흡수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도 쇠퇴의 조짐이 보이자, 이러한 새 형태를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예배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형태와 용어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대신 경배와 찬양으로 노래합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 대신 키보드, 기타, 드럼 등 밴드 악기로 연주합니다. 교인들이 찬송가책을 찾아 가사를 보면서 찬송하는 대신 모니터나 스크린에 나타나는 가사를 보면서 부릅니다.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찬송하던 것이 이제는 서서 양손과 팔, 그리고 몸까지 흔들면서 찬양합니다. 느린 속도로 찬송을 불렀는데 이제는 빠른 속도로, 조명도 은은하게 하던 것이 이제는 밝거나 아니면 아주 어둡게, 조용하던 분위기에서 약간 들뜬 분위기로, 설교가 아니라 메시지로, 묵상의 분위기가 축제의 분위기로, 성가대가 찬양팀으로 변합니다. 제단이라고 하던 것을 무대로, 청각 중심에서 시각 중심으로 바꿔지고 있습니다. 예배에도 틀에 박힌 듯 관습적으로 드리던 것이 이제는 세밀히 준비되어 연습하고, 심지어 예배를 위한 연출자를 두어서 예배의 형태를 다양하게 구상합니다.
우리 교회도 3월부터 4부 예배가 시작됩니다. 1부부터 4부까지 전통적인 예배 형태를 지키면서 점차적으로 어떤 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바탕과 새로운 방법이 함께 수용되는 예배로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다양한 예배 형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같은 과도기에 지나치게 옛날 방식에 안주하고 있으면 스위스 시계 회사들처럼 쇠퇴하게 될 것이고, 지나치게 앞서 가는 것도 위험이 따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지혜와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기본 사역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동시에 예배의 형태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우리 교회 창립 43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