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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소통에 이르는 길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일어난다. 가족이나 부부간의 불화도 소통의 부재 때문이요. 사회 속에서 갈등도 소통의 부재 때문이요. 친구나 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잡음들이 소통의 막힘으로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정치, 종교, 집단,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충돌, 사상충돌, 이념충돌 등이 대부분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로 해석된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교통의 흐름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교통이 막히는 이유라도 알면 덜 갑갑할 것인데 영문도 모르고 차가 멈취서 있을 때는 속에서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중에 알고 보면 앞에 가던 차가 사고를 냈든지 도로 보수를 한다든지 등등의 이유로 한쪽 차선이 통제되어 발생한 사실을 나중에야 확인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소통 차단의 이유도 대부분 커다란 문제로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주 소소한 이해타산 자존심, 이해부족, 무배려 등의 이기주의나 배타주의 성격에 의해 마음 문이 닫히고 상대와의 소통이 차단된다. 소통이 차단되고 마음 문이 닫힐 때부터 삶이 힘들어진다. 인생사는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어려운 문제도 풀어가고 힘든 상황들을 슬기롭게 넘기는 지혜를 나누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사이끼리 소통의 벽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지옥 아닌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친한 사이끼리 싸우고 나서 서로 자존심 때문에 먼저 화해하지 않는다. 반드시 상대가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기를 기다린다. 서로가 똑같은 마음일 때 결국은 원수처럼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살다가 큰 상처를 입을 때는 배신과 이별이다. 배신과 이별의 상처는 생면부지의 남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친하고 가까이 지내던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픔이 배신이며 이별의 슬픔이다. 그래서 그 아픔은 더욱 크다. 어떤 마음의 상처보다 배신과 이별의 아픔이 크다. 이런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고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속앓이이며 한이 된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만 힘들어진다. 소통은 상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먼저 열어 놓고 상대를 수용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소통력이 떨어져 있다. 그 말은 개인주의가 팽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같으면 방안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할머니 옛날 얘기에 심취한다든지 또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깔깔 거린다든지 겨울에는 화롯가에 모여 앉아 군밤을 구워 먹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부침개라든가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먹기도 하는 등 참으로 가족적이고, 이웃 간에 풍성한 정을 나누며 살아갔다. 요즘은 이디서나 흔한 풍경으로 청소년이나 젊은 층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TV 시청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가족 간에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집안의 노인들은 아예 발언권조차 없고 자식이든 부모든 각자 세대차 속에서 자기 위주로 생활한다. 이웃 간에는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고 혼자 살다 죽더라도 백골이 된 뒤에야 발견되기도 한다.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도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서 자기 길만 가고 누군가 힘든 상황에 놓여 있어도 각자의 갈 길만 재촉한다. 반면에 통신 매체를 통한 SNS 소통은 원활하다. SNS 소통은 사람을 상대로 한 것 같지만 기계와의 소통이다. 이제 사람의 마음을 사람들이 지배하지 않고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 한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점점 진화된 기능들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 시대는 인간과 인간의 시대라기보다 사람과 기계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지금의 기계들은 점점 인공지능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어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공지능 기계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람보다 기계를 더 친구로 생각하고 사람과 상대하더라도 기계의 통신 수단을 이용해서 소통함을 선호한다. 진정한 소통이란 눈과 눈의 마주침이요 표정과 표정의 거래이다. 소통이라 해서 단순히 언어의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 보며 속마음을 전달하기도 하고 상냥한 미소 다정한 표정을 지어서 진심을 전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서 깊은 믿음과 우정과 사랑과 친밀감을 쌓아간다. 믿음과 우정과 사랑과 친밀감이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다. 친밀감을 높여주는 묘약이 스킨십이다. 인간은 서로 몸을 부대끼고 살아갈 때 더욱 강렬한 친밀감과 소통을 일궈낸다. 요즘은 특히 몸 부대낌의 스킨십이 부족하여 소통의 단절이 심화된다. 소통의 본질을 잃게 되면 세상이 삭막해진다. 풋풋한 정감으로 적셔진 세상이 아니라 삭막하고 건조한 기계적 의식으로 채워진 세상은 생각만 해도 유령 세상 같은 느낌이 앞설 것이다.
현대인들은 소통의 부재로 인해서 마음이 병들어 간다. 마음이 병들어 우울감이 생기고 삶의 의욕이 저하되며 매사가 귀찮고 꿈의 열정이 시들어간다. 마음이 병들면 몸의 활력부터 떨어지고 매사에 적극적인 열의가 시들어간다. 마음이 병들면 성격이 예민해지고 까칠해지며 자기밖에 모르는 독선적인 인간으로 변해간다. 남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입장밖에 모르는 삶이 소통의 부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소통은 만통萬通이라 할 만큼 모든 진실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다. 진정한 천국과 낙원이 있다면 그곳은 서로 몸 부대낌과 스킨십을 나누며 소통하는 세상일 것이다. 따뜻한 소통이 오고 가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정감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며 감사와 배려의 분위기가 넘치고 있을 것이다. 소통은 서로 받아들임이다. 타인에 대해 자기와 다름을 인정해 주고 남이 나와 다름을 자기의 기준으로 맞추려 말고 스스로 타인의 눈높이로 다가가며 타인의 개성이 나와 다르다 하여 그 다름을 배척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습관이 소통의 길이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부모가 갓난아이에게 부모의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늘 갓난아기의 눈높이로 다가가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서 눕혀 주는 것이 모든 부모 된 마음일 것이다. 갓난아기에 대한 부모의 마음으로 소통하면 이루지 못할 소통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늘 이런저런 분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서로가 자기의 기준으로 상대를 대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상대를 나무라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상대의 답이 틀리다 하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상대의 결정을 되돌리려 할 때 서로 각자 자기주장만 내세우다가 소통의 문은 굳게 닫힌다. 사람마다 자라 온 환경이 다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며 각자 깨닫고 판단하는 기준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는 습관이 생기게 된다. 세상이 자기 기준과 다르다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세상이 자기 기준과 다르다고 세상을 향해 자기 방식대로 고치라고 강요할 때 곧바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보면 다른 점이 너무 많다 개는 개의 특성이 있고 고양이는 고양이의 특성이 있다. 개를 고양이처럼 키우고 싶다고 개가 고양이는 되지 못한다. 고양이를 개처럼 키우고 싶다고 고양이가 개가 되지는 못한다. 사람도 개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 있고 또 고양이를 닮은 사람이 있고, 소를 닮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처럼 날렵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말처럼 날렵하다고 하여 소처럼 우직하게 일만 하는 사람에게 말처럼 날렵하게 살라고 강요한다면 그 강요가 전달되지 못할 뿐 아니라 심한 저항에도 부딪힌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식물이든 세상의 존재들은 타고난 기질과 특성대로 살아간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팔이 난다. 서로가 서로 다른 기질과 특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올바른 소통과 조화가 이뤄진다. 중이 절이 싫다고 해서 절이 떠나게는 못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이치가 맞고 그 절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절의 법도에 맞춰 살면 된다.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조직의 생리가 자기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조직을 비난함은 어리석다. 조직에 머물고 싶으면 조직의 생리에 적응하고 그것도 싫으면 조용히 떠나는 게 옳다. 자기는 언제나 옳지만 조직원들은 모두 틀리다고 비난함도 어리석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중의 의사가 정답이며 아무리 옳은 정답이라도 대중이 따르지 않으면 오답이다. 상대의 답이 틀리더라도 일단은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래야 상대의 마음이 열리고 소통이 이뤄진다. 상대의 틀린 답을 무조건 비난하면 마음부터 닫힌다. 마음이 닫히면 틀린 답을 수정할 기회가 사라진다. 대중의 의사가 정답이라 할지라도 그 정답이 항상 옳은 방법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과 보수적 의식들로 인하여 유전자처럼 굳어버린 고정화된 습관으로 인해 더 이상의 발전과 진화가 막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정화된 보수적 성향을 비속어로 꼰대 징신이라 한다. 꼰대 정신을 무조건 꼰대 정신이라고 비하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저항부터 다가온다. 아무리 틀린 답이라도, 일단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세부터 먼저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서서히 설득하고 타일러서 나쁜 습관을 수정함으로 인해 각자에게 돌아오는 새로운 변화를 체험시켜 주는 사려가 중요하다. 항상 변화는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겸손하고 배려 깊은 마음으로 다가가서 상대를 존중하며 변화의 혜택을 조직 구성원들에게 돌려주는 기득권 인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시당할 때 마음 문이 닫히고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때 마음 문이 열린다. 소통은 마음 문을 열리게 하는 지혜이며 소통을 통해 전체는 하나가 되고, 주어진 목적과 꿈을 이루어 구성원 모두의 마음에 만족을 안겨 줄 수 있다. 지도자는 언제나 조직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진심을 전달하고 믿음을 심어주는 처방이 필요하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하고 볼일 없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하게 되면 그 조직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홀륭한 지도자는 항상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며 누구도 소외되거나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소통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치를 느낀다. 소통에서 멀어지면 스스로 외톨이가 되고 주변에 대해 마음 문을 먼저 닫아버린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고 귀한 대접을 받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을 잘 대접하라고 가르쳤다. 남을 대접할 줄 모르면서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어리석을 수 없다. 사람은 무시를 당하면 더욱 남을 무시하고 존중을 받으면 더욱 존중을 베푼다. 바보에게도 유능한 대접을 해주면 유능하게 행동하고 원수에게도 친구 대접을 해주면 친구처럼 행동한다. 상대에게 어떤 대접을 하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대접이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먼저 마음 문을 열고 다가가 상대를 존중하라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면 먼저 세상을 다가가 마음을 낮추어라. 세상은 내가 잘난 체할 때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아버린다. 내 맘을 닫아 놓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서 상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목마른 사람이 먼저 샘을 판다고 하였으니 세상을 얻고자 하거든 항상 먼저 소통의 주체가 되어라.
마음의 향기香氣를 찾아서 2권 중
도선당 저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