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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10월 31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4)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10월 31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607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607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네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3명이 참석했습니다. 보리연꽃 법우는 감기가 심해서 불참했습니다. 빨리 쾌차해서 다음 주에는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One The Four Noble Truths: Chapter Seven과 Chapter Eight을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37페이지 12째 줄부터 46페이지 마지막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SEVEN Touching Our Suffering
7장 고통을 어루만져 주자
When we practice the first turning of the First Noble Truth,we recognize suffering as suffering. If we are in a difficult relationship, we recognize, "This is a difficult relationship." Our practice is to be with our suffering and take good care of it. When we practice the first turning of the Second Noble Truth, we look deeply into the nature of our suffering to see what kinds of nutriments we have been feeding it. How have we lived in the last few years, in the last few months, that has contributed to our suffering? We need to recognize and identify the nutriments we ingest and observe, "When I think like this, speak like that, listen like this, or act like that, my suffering increases." Until we begin to practice the Second Noble Truth, we tend to blame others for our unhappiness.
괴로움의 첫 번째 진리 법륜을 1회전시키는 수행을 할 때 우리는 고통을 고통으로 인지한다. 만일 우리가 어려운 인간관계에 놓여있다면, ‘이것은 어려운 인간관계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의 수행은 고통과 함께 하며 그것을 보살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괴로움의 두 번째 진리 법륜을 1회전시키는 수행을 할 때 우리는 고통의 본성을 깊숙이 살펴봐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자양분을 섭취한 것인지 알아본다. 지난 몇 년,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 동안 고통의 원인을 심어 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섭취한 자양분을 인지하고 확인하고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듣고 저렇게 행동할 때면 고통이 늘어나더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괴로움의 첫 번째 진리를 수행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Looking deeply requires courage. You can use a pencil and paper if you like. During sitting meditation, if you see clearly a symptom of your suffering, write it down. Then ask yourself, "What kinds of nutriments have I been ingesting that have fed and sustained this suffering?" When you begin to realize the kinds of nutriments you have been ingesting, you may cry. Use the energy of mindfulness all day long to be truly present, to embrace your suffering like a mother holding her baby. As long as mindfulness is there, you can stay with the difficulty. Practice does not mean using only your own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wisdom. You also have to benefit from the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wisdom of friends on the path and your teacher. There are things that even a child can see but we ourselves cannot see because we are imprisoned by our notions. Bring what you have written to a friend and ask for his or her observations and insights.
고통을 깊숙이 잘 살펴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연필과 종이를 사용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좌선을 하는 도중에 고통의 증상을 분명히 보게 되면 종이에 적어둔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자문해 본다. ‘어떤 종류의 자양분을 섭취하고 있기에 이런 고통이 생겨서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섭취해온 자양분의 종류를 깨닫기 시작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수도 있다. 온종일 알아차림의 힘을 통해 진실한 태도로 현재의 삶에 임하고, 아이를 안아주는 어머니처럼 고통을 감싸 안아야 한다. 알아차림 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한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자기만의 알아차림, 집중과 지혜를 이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반과 스승의 알아차림, 집중과 지혜의 덕도 보아야 한다. 심지어 삼척동자도 알지만 정작 어른인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기 견해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종이에 적어 둔 것을 도반에게 보여주고 그의 소견과 지혜를 구해보는 것도 좋다.
If you sit with a friend and speak openly, determined to discover the roots of your suffering, eventually you will see them clearly. But if you keep your suffering to yourself, it might grow bigger every day. Just seeing the causes of your suffering lessens your burden. Shariputra, one of the Buddha's great disciples, said, "When something takes place, if we look at it deeply in the heart of reality, seeing its source and the food that nourishes it, we are already on the path of liberation." When we are able to identify our suffering and see its causes, we will have more peace and joy, and we are already on the path to liberation.
고통의 근원을 알아내고자 결심을 하고는 도반과 함께 앉아 속내를 털어놓으면, 마침내 그 근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고통을 숨긴다면, 그것은 날이 갈수록 커질지도 모른다. 그저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도 걱정을 덜 수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하나인 사리불(舍利弗, Sharitutra)은 이렇게 말했다.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깊숙이 들여다보고는 그것을 일어나게 한 근원과 자양분을 알게 되면, 이미 해탈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고통의 실체를 확인해서 그 원인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많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미 해탈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In the second stage of the Second Noble Truth, "Encouragement," we see clearly that real happiness is possible if we can stop ingesting the nutriments that cause us to suffer. If we know that our body is suffering because of the way we eat, sleep, or work, we vow to eat, sleep, or work in ways that are healthier. We encourage ourselves to put an end to the causes of our suffering. Only by a strong intention not to do things in the same way can we keep the wheel in motion.
괴로움의 두 번째 진리의 두 번째 단계, 즉 ‘격려’를 통해 우리는 고통을 일으키는 자양분을 섭취하기를 멈춘다면 진정한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먹고 자고 일하는 방식 때문에 몸이 고통을 받고 잇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먹고 자고 일하겠다고 서원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해서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 예전처럼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법륜을 끊임없이 돌릴 수 있다.
Mindfulness is the energy that can help us stop. We investigate the kinds of nutriments we now ingest and decide which ones to continue to eat and which to resist. We sit and look together with our friends, with our family, and as a community. Mindfulness of ingestion, protecting our body and mind, protecting our families, society, and the environment are important topics for us to discuss. When we direct our attention toward our suffering, we see our potential for happiness. We see the nature of suffering and the way out. That is why the Buddha called suffering a holy truth. When we use the word "suffering" in Buddhism, we mean the kind of suffering that can show us the way out.
알아차림은 우리가 해로운 일을 멈추도록 도와주는 에너지이다. 우리는 지금 섭취하고 있는 자양분의 종류를 살펴보고 계속해서 먹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한다. 도반이나 가족을 하나의 골동체로 여기고 함께 이마를 맞대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알아차림을 통한 섭취, 심신의 보호, 가족, 사회와 환경보호 같은 문제는 우리가 함께 논의해 볼 만한 중요한 주제들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일 때 행복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고통의 본질과 해결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고통을 거룩한 진리하고 부르셨던 이유이다. 불교에서 ‘고통’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해결법을 보여주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There are many practices that can help us face our suffering, including mindful walking, mindful breathing, mindful sitting, mindful eating, mindful looking, and mindful listening. One mindful step can take us deep into the realization of beauty and joy in us and around us. Tran Thai Tong, a great meditation master of thirteenth-century Vietnam, said, "With every step, you touch the ground of reality." If you practice mindful walking and deep listening all day long, that is the Four Noble Truths in action. When the cause of suffering has been seen, healing is possible. We vow to refrain from ingesting foods that make us suffer, and we also vow to ingest foods that are healthy and wholesome.
고통을 직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행법은 마음을 집중해서 걷고, 숨쉬고, 앉고, 먹고, 듣는 것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가 있다. 마음을 집중해서 단 한 발자국만 걸어 봐도 마음속과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깨닫게 된다. 13세기 베트남의 선사였던 찬 타이 통은 “내딛는 걸음마다 진여(眞如)의 땅을 밟는다.”고 말했다. 온종일 마음을 집중해서 걷고 귀 기울여 듣는다면, 그것은 곧 살아 움직이는 사성제가 된다. 고통의 원인을 알 때 치유가 가능하다. 우리는 고통을 일으키는 자양분을 섭취하기를 삼가고, 건강에 도움을 주고 유익한 자양분을 섭취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In the third turning of the wheel of the Second Noble Truth, "Realization," we not only vow but we actually stop ingesting the nutriments that create our suffering. Some people think that to end suffering, you have to stop everything —body, feelings,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but that is not correct. The third stage of the Second Noble Truth can be described as, "When hungry, I eat. When tired, I sleep." When someone has realized this stage, she has a certain lightness and freedom. What she wants to do is fully in accord with the mindfulness trainings, and she does nothing to cause herself or others harm.
괴로움의 두 번째 진리 법륜의 3회전, 즉 ‘성취’의 단계가 되면 그저 서원을 세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일으키는 자양분을 섭취하는 일을 실제로 그만두게 된다. 고통을 멈추려면 모든 것, 몸, 느낌, 지각, 정신적 형성력, 의식, 즉 5온을 죄다 멎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괴로움의 두 번째 진리의 3단계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성취한 사람은 자유분방하게 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알아차림 훈련에 위배되는 일은 조금도 없고, 자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전혀 없다.
Confucius said, "At thirty, I was able to stand on my own feet. At forty, I had no more doubts. At fifty, I knew the mandate of Earth and Sky. At sixty, I could do what I wanted without going against the path." The last of the ten ox herding pictures in the Zen tradition is called "Entering the Marketplace with Open Hands." You are free to come and go as you please. This is the action of non-action. Suffering no longer arises. This stage is not something you can imitate. You have to reach this stage of realization within yourself.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서른에 홀로 서게 되었고, 마흔에 불혹(不惑)했고, 쉰에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게 되었다.”
선종의 십우도(十牛圖) 중 마지막 그림에는 ‘빈손으로 시장에 들어가다.’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오간다. 이것이 바로 행동 아닌 행동, 즉 무위지위(無爲之爲)이다. 더 이상 고통은 없다. 이 단계는 감히 흉내 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단계의 성취는 마음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in Vietnam, Master Nhat Dinh asked the king for permission to retire from being abbot of a national temple so he could live in a mountain hut and take care of his aging mother. Many officials made offerings to the master and begged him to found another temple, but he preferred to live simply, in great peace and joy. One day his mother fell ill and needed fish to eat. He went down to the marketplace, asked some vendors for a fish, and carried it back up the mountain. Onlookers asked, "What is a Buddhist monk doing with a fish?" But someone of Master Nhat Dinh's realization could do as he pleased without going against the precepts. At the third stage of the Second Noble Truth, you only have to be yourself. The form is not important. But be careful! First there has to be genuine insight, genuine freedom.
19세기 말 베트남의 낫 진 선사는 왕의 허락을 구해서 국찰(國刹)의 주지자리에서 물러나서는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노모를 모셨다. 이에 여러 관리들이 선사에게 공양물을 올리며 다른 절을 세우기를 간청했지만, 선사는 더할 나위 없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소박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하루는 병이 난 노모가 생선을 먹고 싶어 했다. 선사는 시장으로 가서 상인에게 생선 한 마리를 사 가지고는 산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서로 쑥덕거렸다. “아니, 스님이 생선을 사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낫 진 선사가 성취한 단계에 이른 사람은 계율을 어기는 일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리라.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참된 지혜, 참된 자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CHAPTER EIGHT Realizing Well-Being
8장 행복의 실현
When we have a toothache, we know that not having a toothache is happiness. But later, when we don't have a toothache, we don't treasure our non-toothache. Practicing mindfulness helps us learn to appreciate the well-being that is already there. With mindfulness, we treasure our happiness and can make it last longer. I always ask psychotherapists, "Why do you only talk to your clients about suffering? Why not help them touch the seeds of happiness that are also there?" Psychotherapists need to help their patients be in touch with the Third Noble Truth, the cessation of suffering. I encourage them to practice walking meditation and tea meditation with their patients in order to water the seeds of joy in them.
치통을 앓을 때, 치통이 없어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중에 치통이 낫고 나면, 치통이 없는 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알아차림 수행을 하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행복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알아차림을 하면,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행복을 좀 더 오래 지속되게 할 수 있다. 나는 심리 치료사들을 만나면 늘 이렇게 묻곤 한다. “왜 내담자(來談者)들에게 고통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들이 고통과 동시에 존재하는 행복의 씨앗을 어루만져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어떨까요?” 심리치료사들은 환자들이 세 번째 거룩한 진리, 즉 멸성제(滅聖諦)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심리치료사들에게 환자와 함께 행선(行禪)과 다도(茶道)를 해보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면 환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의 씨앗에 물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Please ask yourself, "What nourishes joy in me? What nourishes joy in others? Do I nourish joy in myself and others enough?" These are questions about the Third Noble Truth. The cessation of suffering — well-being — is available if you know how to enjoy the precious jewels you already have. You have eyes that can see, lungs that can breathe, legs that can walk, and lips that can smile. When you are suffering, look deeply at your situation and find the conditions for happiness that are already there, already available.
그대 자신에게 한 번 이렇게 물어 보라. ‘내 마음속에 있는 기쁨을 증진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을 증진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나와 남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을 충분하게 증진시키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멸성제와 연관되어 있다. 고통의 멈춤, 즉 행복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귀중한 보배를 즐기는 법을 알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그대는 볼 수 있는 눈과, 숨 쉴 수 있는 폐와, 걸을 수 있는 다리와, 미소 지을 수 있는 입술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깊숙이 살펴보고, 이미 그대 안에 있고 이미 누리고 있는 행복에 적합한 조건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When we begin the first stage of the Third Noble Truth, we already have some happiness, but we are not exactly aware of it. We are free, but we don't know that we are free. When we are young, we are strong and healthy, but we don't appreciate it. Even if someone tries to tell us, we cannot realize what we have. Only when we have difficulty walking do we realize how wonderful it was to have two healthy legs. The first turning of the Third Noble Truth is the "Recognition" of the possibility of the absence of suffering and the presence of peace. If we do not have peace and joy at this moment, we can at least remember some peace and joy we experienced in the past or observe the peace and joy of others. We see that well-being is possible.
세 번째 거룩한 진리의 1단계를 시작할 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행복을 좀 누리고 있지만, 분명하게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젊을 때 우리는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그 고마움을 모른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애써 말해준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걷는 일에 어려움을 겪어봐야만, 그때서야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세 번째 거룩한 진리의 1회전은 고통이 없고 평화가 있을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평화와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가 옛날에 누렸던 평화와 기쁨을 기억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기쁨을 지켜볼 수는 있다. 우리는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second turning is to "Encourage" ourselves to find peace and joy. If you want to garden, you have to bend down and touch the soil. Gardening is a practice, not an idea. To practice the Four Noble Truths, you yourself have to touch deeply the things that bring you peace and joy. When you do, you realize that walking on the Earth is a miracle, washing the dishes is a miracle, and practicing with a community of friends is a miracle. The greatest miracle is to be alive. We can put an end to our suffering just by realizing that our suffering is not worth suffering for! How many people kill themselves because of rage or despair? In that moment, they do not see the vast happiness that is available. Mindfulness puts an end to such a limited perspective. The Buddha faced his own suffering directly and discovered the path of liberation. Don't run away from things that are unpleasant in order to embrace things that are pleasant. Put your hands in the earth. Face the difficulties and grow new happiness.
세 번째 거룩한 진리의 2회전은 평화와 기쁨을 찾도록 우리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다. 정원을 돌보려면, 허리를 굽히고 흙을 만져야 한다. 정원 가꾸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성제를 수행하려면 자기에게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직접 철저하게 접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보면, 땅위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도반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와 함께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큰 기적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없앨 수 있다. 분노와 절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않은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누릴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아차림은 제한된 시야를 없애준다. 부처님은 자신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서 해탈의 길을 찾아내셨다. 유쾌한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불쾌한 것들로부터 도망치려 해서는 안 된다. 손을 땅바닥에 내려놓아라. 그리고 곤경에 맞서서 새로운 행복을 증진시켜라.
One student told me, "When I go to parties, people seem to be enjoying themselves. But when I look beneath the surface, I see so much anxiety and suffering there." At first, your joy is limited, especially the kind of joy that is just covering up suffering. Embrace your suffering, smile to it, and discover the source of happiness that is right there within it. Buddhas and bodhisattvas suffer, too. The difference between them and us is that they know how to transform their suffering into joy and compassion. Like good organic gardeners, they do not discriminate in favor of the flowers or against the garbage. They know how to transform garbage into flowers. Don't throw away your suffering. Touch your suffering. Face it directly, and your joy will become deeper. You know that suffering and joy are both impermanent. Learn the art of cultivating joy.
한 학생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파티에 가보면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엄청나게 많은 걱정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파티에 가서 사람들이 맨 처음 느끼는 기쁨은 제한된 것이다. 그 기쁨이라는 것이 그저 고통을 감추고 있는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대의 고통을 감싸 안고, 미소를 지어보아라. 그리고 바로 고통 안에 있는 행복의 원천을 찾아보아라. 부처님들과 보살들도 고통을 겪는다. 그분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그분들은 당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기쁨과 자비로 바꾸는 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유기농법을 쓰는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분들은 꽃과 쓰레기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쓰레기를 꽃으로 바꾸는 법을 알고 있다. 고통을 내치려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고통과 직접 대면해 보면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기쁨은 둘 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기쁨을 가꾸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Practice like this, and you come to the third turning of the Third Noble Truth, the "Realization" that suffering and happiness are not two. When you reach this stage, your joy is no longer fragile. It is true joy.
이와 같이 수행하면, 세 번째 거룩한 진리의 3회전, 즉 고통과 행복이 둘이 아닌 ‘성취’의 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기쁨이 사라지는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쁨이다.
The Fourth Noble Truth is the way out of suffering. First the doctor looks deeply into the nature of our suffering. Then she confirms that the removal of our pain is possible, and she prescribes a way out. Practicing the first turning of the wheel of the Fourth Noble Truth, we "Recognize" that the Eightfold Path — Right View, Right Thinking,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Diligence,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 can lead us out of suffering, but we do not yet know how to practice it.
네 번째 거룩한 진리, 즉 도성제(道聖諦)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의사는 먼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성질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고통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면, 처방을 내린다. 도성제의 법륜을 1회전시킴으로써 우리는 팔정도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 를 통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나 아직 팔정도를 수행하는 법을 알지는 못한다.
In the second turning, we "Encourage" ourselves to practice this path. This is realized by learning, reflecting, and practicing. As we learn, whether by reading, listening, or discussing, we need to be open so we can see ways to put what we learn into practice. If learning is not followed by reflecting and practicing, it is not true learning.
2회전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해서 팔정도 수행에 들어간다. 팔정도는 배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을 통해서 체득된다. 읽든지 듣든지 토론하든지 간에 그 형식에 관계없이 배움에 임할 때는 마음을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깊은 사색과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배움은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In this stage, we see that the path has everything to do with our real difficulties in life. A practice that does not concern our real suffering is not a path we need. Many people are awakened during a difficult period in their lives, when they see that living irresponsibly has been the cause of their suffering, and that by transforming their lifestyle they can bring an end to their suffering. Transformation is gradual, but once we see clearly the causes of our suffering, we can make the effort to change our behavior and bring our suffering to an end. If we are aware that our heart is not working well and that alcohol, cigarettes, and cholesterol are causes of this, we try to stop ingesting these things. In the second stage of the path, there is an increase in freedom every day. The path becomes real as we put into practice what we have learned.
이 단계에서 우리는 팔정도가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적인 고통과 상관없는 수행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길이 아니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제서야 그들은 무책임하게 살아왔던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삶의 태도를 바꾸면 고통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일단 고통의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되면 태도를 바꿔서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그것은 알코올, 담배, 콜레스테롤 때문에 심장이 나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들을 더 이상 섭취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도 같다. 도성제(道聖諦)의 2단계에서는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날로 늘어간다. 도성제는 우리가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 현실적인 것이 된다.
The Buddha advised us to identify the kinds of nutriments that have been feeding our pain and then simply to stop ingesting them. We do our best, and we ask our brothers and sisters to help us. We can't expect our difficulties to go away by themselves. We have to do certain things and not do other things. The moment we resolve to stop feeding our suffering, a path appears in front of us, which is the Noble Eightfold Path to well-being. The Buddha is a physician. That is why he invited us to bring our suffering to him. We are also physicians. We must be determined to transform our difficulties, to confirm that well-being is possible. The Buddha identified the Noble Eightfold Path to well-being and urged us to follow it. The third turning of the wheel of the Fourth Noble Truth is the "Realization" that we are practicing this path.
부처님은 고통을 일으키는 자양분의 종류를 확인하고 나면 당장 그것을 섭취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필요하다면 형제자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어려움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그 결과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만 해야 하지, 그렇지 못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조장하는 짓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눈앞에 어떤 길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인데, 그 길이 바로 행복으로 통하는 팔정도이다. 부처님은 의사와도 같은 분이시다. 그래서 고통을 가지고 당신께 와보라고 하신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보겠다고, 다시 말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 보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부처님은 행복에 이르는 팔정도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는 그것을 따르라고 극구 권하셨다. 네 번째 거룩한 진리 법륜의 3회전은 팔정도 수행의 ‘성취’이다.
When you are assigned a kung-an (koan) by your meditation instructor, such as, "What is the sound of one hand clapping?" or "Why did Bodhidharma come from the West?" you have to ask yourself, What does this have to do with my real suffering — my depression, my fear, or my anger? If it doesn't have anything to do with these real problems, it may not be a path you need. It may be just an escape. Practice your kung-an in a way that your suffering is transformed.
선사(禪師)에게서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어떤 소리가 나는가?” 또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등의 공안(公案)을 받았다면, 그것이 우울증, 두려움이나 화와 같은 자신의 현실적인 고통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공안이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라면, 지금 자기가 필요로 하는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 도피나 다름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고통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세로 공안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This is suffering. This suffering needs to be seen clearly. The roots of this suffering need to be clearly understood. I have seen this suffering. I have seen how it manifests. I have seen its content and its roots." These are practices, not mere proclamations. "Understanding things as they are" (yatha bhuta jñana) emerges from our life and our practice.
“이것은 고통이다. 이 고통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고통의 근원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고통을 파악했다. 나는 그것이 일어나는 경로를 알았다. 나는 그것의 내용과 근원을 알았다.” 이 말은 그저 선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 그 자체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如實智(여실지)]하는 능력은 우리의 삶과 수행에서 비롯된다.’
When the monk Gavampati heard his fellow monks say, "Whoever sees suffering sees the making of suffering, the ending of suffering, and the path," he added, "With my own ears I have heard the Buddha say, 'Bhikkhus, whoever sees suffering sees the making of suffering, the ending of suffering, and the path that leads to the end of suffering. Whoever sees the making of suffering sees suffering, the end of suffering, and the path. Whoever sees the ending of suffering sees suffering, the making of suffering, and the path. Whoever sees the path that leads to the end of suffering sees suffering, the making of suffering, and the ending of suffering.'"1 Interbeing is an important characteristic of all the Buddha's teachings. When you touch one, you touch all.
비구 가밤파티는 동료 비구가 “고통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의 형성과 고통의 소멸 그리고 길을 본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듣기로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비구들이여, 고통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의 형성과 고통의 소멸 그리고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본다. 고통의 형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고통의 소멸과 길을 본다. 고통의 소멸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고통의 형성과 길을 본다.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고통의 형성과 고통의 소멸을 본다.”
상즉(相卽, Interbeing)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색이다. 하나를 접하면, 모두를 접하게 되는 셈이다.
1 Gavampati Sutta, Samyutta Nikaya V, 436.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interbeing nature of the Four Noble Truths. When we look deeply into any one of the Four Truths, we see the other three. When we look deeply into the truth of suffering, we see how that suffering came to be. When we look deeply into the truth of suffering, we see how to end that suffering and touch well-being. When we look deeply into the truth of suffering, we see the efficacy of the path. Looking into the First Holy Truth, we see in it the Second, Third, and Fourth Truths. The Four Noble Truths are one.
사성제의 상즉성(相卽性)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성제의 어느 하나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나머지 세 가지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성제(苦聖諦)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고성제(苦聖諦)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고통을 소멸시키고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고성제(苦聖諦)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도(道)의 효능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거룩한 진리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두 번째,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거룩한 진리가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사성제는 하나인 셈이다.
We need suffering in order to see the path. The origin of suffering, the cessation of suffering, and the path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are all found in the heart of suffering. If we are afraid to touch our suffering, we will not be able to realize the path of peace, joy, and liberation. Don't run away. Touch your suffering and embrace it. Make peace with it. The Buddha said, "The moment you know how your suffering came to be, you are already on the path of release from it."2 If you know what has come to be and how it has come to be, you are already on the way to emancipation.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의 기원과 고통의 멈춤 그리고 고통의 멈춤으로 통하는 길, 이 모두는 고통 안에 들어있다. 고통을 접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평화, 기쁨, 해탈의 길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도망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감싸 안아라. 고통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통이 나타나는 과정을 아는 순간, 이미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면, 이미 자유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는 뜻이다.
2 Samyutta Nikayn II, 47.
Let us reframe the Four Noble Truths. "Cessation," the Third Noble Truth, means the absence of suffering, which is the presence of well-being. Instead of saying "cessation," we can simply say "well-being." If we do that, we can call the Fourth Noble Truth "the Noble Eightfold Path That Leads to Well-Being." Then, instead of just calling the Second Noble Truth "the origin of suffering," we can say that there is an ignoble eightfold path that leads to suffering, a "path of eight wrong practices" — wrong view, wrong thinking, wrong speech, wrong action, wrong livelihood, wrong diligence, wrong mindfulness, and wrong concentration. We might like to renumber the Four Noble Truths, as follows, for the benefit of the people of our time:
사성제를 한번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세 번째 거룩한 진리[滅聖諦(멸성제)]는 고통의 부재(不在)를 뜻하는데, 그것은 바로 행복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멸(滅)’이라고 하는 대신 쉽게 ‘행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게 해보면 네 번째 거룩한 진리, 즉 도성제(道聖諦)를 ‘행복으로 통하는 팔정도’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으로 두 번째 거룩한 진리를 그저 ‘고통의 기원’이라고 부르는 대신, 고통으로 통하는 팔부정도(八不正道), 즉 여덟 가지 잘못된 수행의 길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부정견(不正見), 부정사(不正思), 부정어(不正語), 부정업(不正業), 부정명(不正命), 부정진(不精進), 부정념(不正念), 부정정(不正定)이 될 것이다. 현대인을 위해 사성제를 다음과 같이 순서를 바꾸어 볼 수도 있으리라.
(1) Weil-Being (traditionally number three, "cessation of suffering");
(1) 행복 (전통적인 순서로는 3번, ‘고통의 멈춤’)
(2) Noble Eightfold Path That Leads to Well-Being (traditionally number four);
(2) 행복으로 통하는 팔정도 (전통적인 순서로는 4번)
(3) Suffering (traditionally number one); and
(3) 고통 (전통적인 순서로는 1번)
(4) Ignoble Eightfold Path That Leads to Suffering (traditionally number two, "arising of suffering").
(4) 고통으로 통하는 팔부정도 (전통적인 순서로는 2번, ‘고통의 발생’)
If we live according to the Noble Eightfold Path, we cultivate well-being and our life will be filled with joy, ease, and wonder. But if our path is not noble, if there is craving, hatred, ignorance, and fear in the way we live our daily life, if we practice the ignoble eightfold path, suffering will naturally be the outcome. The practice is to face our suffering and transform it in order to bring about well-being. We need to study the Noble Eightfold Path and learn ways to put it into practice in our daily lives.
팔정도에 따라 살아가면, 행복이 충만하고 삶은 기쁨과 여유 그리고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택한 길이 바르지 못하고, 일상의 삶이 탐욕, 증오, 무지와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면서 팔부정도를 행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고통이 될 것이다. 수행은 행복을 얻기 위해 고통을 대면해서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러자면 팔정도를 공부해서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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