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는 뭐래 외 2편
정끝별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저주받은 걸작
하나의 심장과
하나의 시선과
하나의 목소리만으로
평생 한 음을 켜는 연주자와
평생 한 색을 칠하는 화가와
평생 한 글자를 쓰는 시인이 있었다
한 음의 박동과
한 색의 눈빛과
한 글자의 비명에는
삼키고 삼킨 한 숨의 곡조와
지우고 지운 한폭의 그림과
줄이고 줄인 한편의 시가 있었다
지도에도 없는 허공 길을 가는
외줄 사랑
모든 게 담긴
단 하나의 형태에는
내용이 없다
두부 이야기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밤새 이야기는 그렇게 쏟아지고 불려져
아침의 너는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 (창비 / 2023)
정끝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 외 여섯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