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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 2 / 수송아지와 숫양
레 8:14-29
14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15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16 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17 그 수송아지 곧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18 또 번제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19 모세가 잡아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20 그 숫양의 각을 뜨고 모세가 그 머리와 각 뜬 것과 기름을 불사르고
21 물로 내장과 정강이들을 씻고 모세가 그 숫양의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22 또 다른 숫양 곧 위임식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모세가 그 오른쪽 귓부리와 그들의 손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들의 발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모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25 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26 여호와 앞 무교병 광주리에서 무교병 한 개와 기름 섞은 떡 한 개와 전병 한 개를 가져다가 그 기름 위에와 오른쪽 뒷다리 위에 놓아
27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고
28 모세가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가져다가 제단 위에 있는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29 이에 모세가 그 가슴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으니 이는 위임식에서 잡은 숫양 중 모세의 몫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레 8:15-29 모세는 그 수송아지를 잡은 다음 피 얼마를 가져다가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솟아 있는 뿔에 골고루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 부었다. 모세는 이렇게 번제단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16) 또 모세는 제물의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허리 양쪽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 17) 그리고 가죽과 살코기와 똥 등 그 수송아지의 나머지 부분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다. 모세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18) [번제물을 드리다] 그런 다음 모세는 번제물로 드릴 숫양을 끌어 오게 하였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19) 모세는 그것을 잡은 다음 그 피를 번제단 사방에 뿌렸다. 20) 또한 모세는 그 숫양의 살코기를 저민 뒤 그 머리와 저민 살코기와 여러 부위에서 떼어 낸 기름 덩어리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 21) 그리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어 함께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 이렇게 불살라 바친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22) [임직식 제물을 드리다] 모세는 또 다른 숫양을 끌어 오게 하였다. 제사장 임직식 제물로 쓰기 위해서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23) 모세는 그 숫양을 잡아 그 피 가운데에서 얼마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24) 또한 아론의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나머지 피는 번제단 사방에 뿌렸다. 25) 그리고 꼬리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양쪽 허리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 등 여러 부위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 내었다. 26) 그리고 여호와께 바치는 떡바구니에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 한개와 기름으로 반죽하여 만든 속이 빈 과자 한개와 얇은 과자 한개를 꺼내어 기름 덩어리와 오른쪽 뒷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27) 모세는 이 모든 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여호와께 특별히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치게 하였다. 28) 그런 뒤 모세는 다시 아론과 그 아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던 제물을 가져다가 번제물과 함께 번제단 위에 불살라 바쳤다. 이렇게 제물을 불살라 바친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제사장 일을 보게 하려고 임직식을 거행할 때 불살라 바치는 제사는 이와 같았다. 29) 모세는 숫양의 가슴을 집어 들고 여호와께 특별히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쳤다. 제사장 임직식 때 바치는 숫양의 가슴이 모세에게 돌아간 몫이 되었다. 모세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모세는 그의 아들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립니다. 제사장은 자기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수송아지로 드리는 속죄제(14-17)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립니다. 대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이므로 수송아지가 제물이었고, 그 기름과 콩팥을 떼어 제단에서 불사르고 남은 고기 전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죽였습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제단 뿔에 발라 제단을 정결하게 하며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숫양을 드리는 번제(18-21)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드린 두 번째 제사는 번제입니다. 이 번제는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이고, 이제부터는 하루에 두 차례씩 영원히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번제의 특징은 제물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태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 번제를 통해 완전히 태워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숫양을 드린 위임식(22-29)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세 번째로 드린 제사는 위임식 제사입니다. 위임식 제사는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것을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위임식 제사로 제물은 숫양이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안수한 후 죽이고, 그 피는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몸의 끝 부분으로 오른쪽 지체(귓부리,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에 발라서 온 몸을 정결하게 합니다. 귓부리와 손가락과 발가락은 듣고 행하고 걸어가는 기관으로 올바르게 듣고, 들은 바대로 행하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속죄제의 피는 항상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데 사용되지만, 위임식 제사와 속건제의 피는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데 쓰였습니다. 위임식 제물은 화목제와 비슷한데, 자신을 위한 제사는 요제로 드린 오른쪽 뒷다리와 다리를 번제로 태웠습니다. 보통 화목제를 드리면, 오른쪽 뒷다리와 가슴을 제사장이 받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위임식 화목제에서는 우편 뒷다리가 요제로 드려진 뒤 화제로 번제단 위에 불살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제사는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슴 부위만 제사를 담당한 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적용: 오늘 듣고 행하는 모든 것에 거룩함을 위하여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까? 당신은 어느 분야에서 쓰임을 받으시는지요?(마 6:21; 막 16:15)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고전 1:27) 하나님은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약점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 강점을 약점으로 바꾸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솔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은 또한 우리가 거만해지지 않게 막아주며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합니다.
< 설 교 >
자유와 안식의 계절
레 8:12 / 박혜성 목사
멀리서 은은하게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루종일 땀흘려 일한 부부는 허리를 펴며 일어납니다.
괭이와 삽을 내려놓고 그들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이제 하던 일을 멈추고 땅으로부터 놓여 자유하라고
수고로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안식하라고 하나님께서 황혼을 준비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이 자유와 안식의 시간, 주께서 만들어 주시는 황혼저녁과 같은 평안함이 이시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가운데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점점더 자유와 안식의 시간이 마련되기 어려운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개인들은 경쟁하며 바쁘다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직장은 노사문제로, 학원은 분규 문제로, 정치적으로는 당리당략의 문제로 세계는 사상대립과 갈등으로 불안한 소리, 평화를 깨는 소리들도 자주 들려옵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는 36년 간의 나라 잃은 아픔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고 6.25 비극의 전쟁과 아직도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고통은 우리 민족을 끊임없이 슬프게 합니다. 개인과 공동체, 이 민족에 진정한 자유과 안식이 꼭 필요하고 또 찾아야 하는 세대를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자유와 안식을 찾아 휴가를 내어 산과 바다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 술과 담배 등으로 평생친구를 삼기도 하고 / 레져와 쾌락의 장소들을 찾아 가기도 합니다. 또한 주술가를 찾아가서 평화를 찾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하고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책이나 영화나 음악속으로 들어가 현실의 불안을 회피하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 압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지고 있는 불안에 대해 얘기합니다.
먼저 존재의 불안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거대한 세상 앞에 혼자 놓여져 미지의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존재적인 불안. 요즘들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여기고 스스로 생명을 잃고 자녀와 가정마저 파괴하는 일들 속에서 더욱 생각하게 하는 불안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의 불안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 완전범죄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도망할 수 도 없고 은폐할 수도 없는 죄로부터 오는 깊은 불안입니다. 마지막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살고 있다는 불안입니다. 이러한 불안은 평생 사람을 따라다니며 자유로부터, 안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만드시고 마지막 작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처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았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심히 좋았더라 하시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했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죄인 된 인간은 불안한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창1:17 - 18 “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전도서 2장은 “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죄인은 더 이상 하나님과 땅과 더불어 하나일 수 없게 되었고 자유와 안식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끝까지 포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참된 자유와 안식이 마련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의 사랑을 어떻게 베푸셨는가 알려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레위기 25장 말씀 속에서 사람과 땅에게 자유와 안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들을 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옥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업과 목축을 할 때에 메마른 광야에서만 살았던 그들이 분명 욕심이 생겨서 쉬임 없이 자신들의 몸과 땅을 혹사시킬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기본으로 매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욕심내어 쉼없이 일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하신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매 7년째 되는 해에 지키는 안식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안식년은 6년동안 계속 경작했던 밭을 1년간 쉬게 하라. 자연히 나오는 곡식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와 들의 짐승들이 취하도록 하고 혹시 동족이 노예로 팔려왔으면 안식년에는 자유의 몸으로 돌려보내고 혹시 빚을 진 것이 있으면 탕감하게 하는 힘들고 어려웠던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는 제도 혹시 이스라엘백성이 7년째 농사하지 않아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떡하나 염려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제 6년째에는 복을 내려 3년을 풍성히 먹을 수 있는 수확물을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가운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 자유와 안식의 계절을 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7년의 안식년을 7번 지난 후에 거국적인 자유의 해를 지키라 말씀 하십니다. 레위기 25장 10절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그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해방을 선포하라는 희년에 대한 선포입니다. 희년은 1년에 한번 있는 회개의 날인 대속죄일에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이 수양의 뿔 나팔을 불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곧 이어서 예루살렘 성 안의 모든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나팔을 붑니다. 이 나팔 소리가 점점 이웃으로 이어져 온 유대 땅에 나팔 소리가 가득해 지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생일대의 자유와 안식의 계절이 돌아온 것을 알려줍니다. 종들은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가난 때문에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았던 사람들도 땅을 되돌려 받습니다. 농사하지 않아 땅과 짐승들도 오랜만에 충분한 쉼을 가집니다. 온 나라 온 백성이 죄에서 벗어나고 속박에서 벗어나고 마귀에게서 벗어나고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자유와 안식을 회복하는 일생일대의 축제가 벌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희년의 잔치인 것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고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나그네 된 약한 자들은 보호되어야 하며
*동족을 영원히 노예로 삼지 않는 사람 사랑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이 절기는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기로 알고 기쁨과 감사로 지키야 할 것을 알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땅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이 자유와 안식을 회복하는 구약의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제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몸으로 보여주신 사랑,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눅 4의 말씀 속에 예수님은 나사렛에 이르시고 안식일에 규례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펴서 읽으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메어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영의 눈이 어두워진 자들에게 주의 밝은 빛을 보게 하시려고, 악의 권세에 눌린 자에게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진정한 사람과 세상사랑, 죄로부터의 자유와 안식의 희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자유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데로르”입니다. 창공을 평화로이 가르며 빠르게 비행하는 제비들의 모습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다” 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자유는 육체적으로는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고 영적으로는 모든 죄와 사슬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의 품안’이라는 창공에서 마치 제비가 날아 다니는 것과 같은 통쾌한 비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속에 이 자유가 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참 쉼의 세계, 자유와 안식의 세계로 초대하시는 말씀 이 있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참 쉼을 얻기 원한다면 참 자유와 안식을 원한다면 그 첫 걸음은 예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수고하고 짐 진 자들입니다. 수고하는 자 그 의미는내가 직접하는 수고 개인적이고 능동적인 수고입니다. 이세상 살아가면서 아내요 남편의 이름으로 /아버지요 어머니요/ 딸이요 아들이요 /일하는 사람으로 직접 수고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진 자는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지어지는 짐을 진 자를 말합니다. 식구들로부터 자녀로부터 일터로부터 우리가 평생 지고 가야만 하는 짐을 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스스로 지는 짐과 외부로부터 지워지는 짐을 지고 평생을 통해 계속 수고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심적으로 영적으로는 존재의 불안/양심의 불안/죽음의 불안을 함께가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수고와 짐은 사람에게 자유와 안식을 마련해 주지 못합니다.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예수께서 다 부르시고 나아오기만 하면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께로 나아 오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나 방법을 알려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 나아 오는 그 자체가 자유와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스스로에게 편한 자유와 안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초청 앞에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나아가 그 분 앞에 짐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 까지는 우리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쉴 수 없는 것은 그 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 짐을 내려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짐에 대한 한탄도 많이 하고 짐을 평생 지겨워하면서도 아직도 끌어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오기 위해, 짐을 내려놓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예수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내게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내게 어떤 일을 하셧습니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분명히 소유하셨습니까? 마11장 요한이 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듣고 예수가 누구신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 앉은뱅이가 걸으며 /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 죽은자가 살아나며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죄와 죽음과 질병과 포로됨과 눌림에서 자유와 안식을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그분을 만나야, 우리가 그 분을 만져야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 앞에 나아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시간 예배하는 모든 예배자들을 통하여 이 믿음이 소유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나아 왔느냐 이제 “내 멍에를 메고 / 내게 배우라 /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 내 짐은 가벼움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고 하시고는 그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겠다 하시지 않고 오히려 멍에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 하시는 멍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인간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는 세상멍에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멍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에는 이제 고통과 죽음과 근심과 질병이 없는 가볍교 편한 멍에입니다.
유대인들은 흔히 두 마리의 소에 멍에를 메우고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때로 농부는 어린 송아지를 어미 소와 함께 멍에를 메고 일을 배우게 합니다. 그때 어린 송아지는 전적으로 어미소에 순종하며 따라 다닙니다. 실상은 어미소가 밭고랑을 다 갈지만 송아지도 멍에를 함께 지므로 멍에를 끄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미소를 그냥 즐겁게 따라갈 뿐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던 성도가 이 짐을 지고가기가 너무 힘들어 인생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할 때에 마음속에 “ 나는 부활했는데 왜 너는 빈무덤 가에서만 울고 있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 제가 이 태산같은 문제를 언제 다 치울 수 있나요? 이 태산을 치우는 것이 아니라 너를 태산 너머로 옮길 수 있나니 나를 신뢰하라. 너의 짐을 내게 맡기라“ 기적은 일어났고 그 성도는 가벼운 멍에를 메고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의미를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모든 짐을 맡기고 주님의 멍에 아래 들어오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멍에, 구원의 멍에, 생명의 멍에, 가벼운 멍에로 바꾸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쉬운 멍에는 유쾌하게 되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에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는 주의 말씀에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워하는 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자유와 안식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도저히 혼자 감당 할 수 없는 멍에라고 절망하십니까?
주님을 신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져가면 주님이 함께 지심으로 가벼운 멍에로 감당할 수 있는 멍에로 바뀌게 될 것을 믿습니다. 2003년 더운 여름. 더욱 사람들의 삶이 곤고하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멤으로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소유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직도 참된 자유와 안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기심과 죄악으로 말라가고 있는 세상에서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초대에 온전히 응답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참 자유와 안식의 계절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주 앞에 나오는 일에 주저주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초대의 말씀은 계속 들려지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희생의 소명
레 8:14-15 / 이익환 목사
희생의 소명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8:14-15)
犧牲. ‘희생’이란 한자어다. 희생의 희(犧) 자는 소 우(⽜)와 양 양(⽺)과 빼어 날 수(秀), 그리고 창 과(⼽)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소(⽜)나 양(⽺) 중에서도 빼어난(秀) 놈을 창(⼽)으로 잡아 제단에 바친다는 뜻이다. 희생의 생(牲) 자는 희생 제물의 대표격인 소 우(⽜)와 날 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이 복이 있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글자가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희생이라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경쟁과 성공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희생이라는 가치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가치인 듯하다. 요즘 MZ세대는 장기적인 전망을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들어간 회사에서 정년을 맞이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더 나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희생이란 가치가 많이 사라졌다. 결혼하는 청년들이 줄고, 결혼한 커플의 절반 가량이 이혼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한 남자가 그의 첫번째 아내와 이혼할 때 제단이 눈물을 흘린다.” “When a man divorces his first wife, the altar sheds tears.” 여기서 제단과 결혼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제단과 결혼은 둘 다 희생에 관한 것이다. 결혼 생활도 꾸준한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배우자가 서로를 위해 희생을 원하지 않을 때 결혼 생활은 힘들어지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지난 주에 이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그리고 희생 제사를 관장할 제사장을 위임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희생 제사일까? 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희생 제물을 요구하셨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희생 제물은 히브리어로 ‘제바흐(זבח)’다. 이것은 ‘가축을 죽여서 드리는 제물’을 뜻한다. 이 희생 제물의 특징은 자신의 소유 중 가장 가치 있고 흠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유는 주로 가축이나 곡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 중에 가장 흠 없는 것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희생 제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피로 상징되는 가축의 생명이 피를 쏟으며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의 생명 대신 죽음에 내어줄 생명을 통해 죄인의 죄를 사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과 관련된 모든 것에 피가 뿌려져야 했음을 강조한다. 히 9:18-21,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오늘 본문에도 제사장 위임식을 하면서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속죄의 모든 은혜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은 가축의 희생이 결국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피의 효력을 이렇게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에, 피를 흘려 죽을 생명을 구원한다는 원칙을 하나님 스스로 지키신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희생 제물은 사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제물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희생 제물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희생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희생의 은혜를 얻는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희생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희생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늘의 별도 따다가 주고 싶은 열정이 있다. 행복한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부모들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한다. 우리는 또한 사명이 있을 때 희생할 수 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성공해서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경력을 희생한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거나 약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다. 희생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깊은 결속이다. 먼저 우리가 아낌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소유와 시간을 드릴 때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서로에게 희생할 때 부부 안에, 가족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깊은 결속이 일어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희생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깊은 결속을 위해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인간이 생명의 능력을 얻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레위기에서 소개 하는 다섯 가지 희생 제물인 코르바놋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레하크리브) 도구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내 소유, 내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대가없이 내어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상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남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내가 살려고 오히려 희생 제물을 찾는다.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 보는 삶으로 여겨진다.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동의하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편안한 삶’이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가치다. 편안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희생하는 것이 정말 손해보는 삶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권면한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희생제물은 헬라어로 ‘뒤시안(θυσιαν)’이다. 히브리어로 ‘제바흐’와 같은 표현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산 제물’ 역시 헬라어 ‘뒤시안’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물은 죽임 당해 피 흘리는 것인데,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희생하는 삶을 감당하라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 희생은 결속을 위한 것이다. 희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결속을 이룬다.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 속에서도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깊은 결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우셨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낼 제사장들을 세우기 원하신다. 그것은 희생이 하나님과의 결속을 이루고, 사람들 사이의 깊은 결속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에 이어 또 이렇게 권면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우리는 시대의 조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야 하는 시간을 앞두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다. 죄인의 대표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처형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기도를 통해 분별하시고, 기꺼이 희생의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원수까지도 용서함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희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정작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 사람들과의 깊은 결속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속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희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헌신한 사람은 행복하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희생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가장 높은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여호수아서를 배우는데 교수님의 강의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여호수아서 1장 1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소개된다. 여호수아는 오랜 시간 동안 모세의 수종자로 자신의 삶을 드렸다. 모세가 회막을 떠나 진으로 돌아왔어도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모세를 수종드는 희생적인 삶을 습관처럼 감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라고 표현한다. 교수님은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노예’라는 호칭이 하나님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존귀한 호칭이라고 말하셨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희생하는 존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라는 희생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사명이자 부르심인 것이다. 바라기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의 노예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희생의 소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