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어라, 동경아"
신간센 열차가 동경역을 출발해 시나가와를 지나 요꼬하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나는 나지막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살짝 내 눈가가 촉촉해지는 거였다. 차창으로는 높은 마천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옆 자리의 아내에게 눈물을 들킬 것 같아 살짝 창피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아니, 다시 돌아올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2년전, 그토록 자신이 태어난 동경에 가 보고 싶어하기에 어학연수를 보내주었다가, 지진과 방사능에 기겁을 하고 도망쳐 온 딸 아이가 다시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다시는 동경에 가지 않겠다는 의미는 딸 아이와 달랐다.
부산항에서 오사까까지 팬스타로 밤새 건너가서 오사카의 심장 도톤보리 일대를 구경하고 다음 날 교또로 향했다. 그리고 완행기차를 타고 동경으로 향했던 것이다.
아내와 내가 동경으로 향했던 것은, 순전히 우리의 신혼에 대한 추억 하나 뿐이었다.
진정 우리가 일본여행을 계획했다면 대도시보다도 오히려 한적한 시골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일본여행은 순전히 과거에 대한 추억 여행이었다. 그래서, 엄청난 교통비를 지출하고도 동경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홀로 동경으로 유학을 와서 2년을 지내다가 방학 때 고향으로 가서 맞선을 보고 급하게 한 결혼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던 아내로서는, 무툭툭한 남편과 낯선 이곳에서의 신혼생활은 정말로 고욕이었다. 학교 앞, 좁은 다다미방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의 배게 밑은 항상 촉촉히 젖어 있었다.
소극적인 아내의 성격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겨우 눈물로 해결했으리라. 아침에 자전거로 아내를 유학생 가족을 위한 일본어 교실에 태워주고 내 연구실로 향하다 보면 아내는, 야스당 강당 앞의 작은 연못가에 한없이 앉아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의 일본여행은 차라리 나를 위해서였기 보다 아내를 위한 것이었다.
아내의 우울증의 시초는 아마 그때 부터이리라. 가을이 막 접어들어 찬바람이 불어오면 아내의 표정은 자주 굳어지곤 했다. 아내가 일본에 온 것이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그 가을 날, 아내와 나는 밤이면 학교 안의 은행나무 밑을 참으로 많이도 걸었다. 수북히 쌓였던 은행나무 잎 사이로 드믄드믄 은행알도 보였고 가끔은 작은 은행알을 주워다가 껍질을 벗겨 후라이팬에 구워 먹기도 했다.
아내의 가을에 대한 우울증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아내와의 신혼이 더없이 좋았다. 2년 동안의 향수병을 고향 아가씨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고, 그 보다도 참기 힘든 한창 나이의 성욕을 해소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보다 아내와의 신혼시기에 내가 아내를 외롭게 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바로 아내를 외롭게 한 그 이유 때문에 다시는 동경에 오지 않기로 작정 한 것이다.
나는, 농업 경제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유학을 갔다.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던 내 주임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유학생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학교의 배려로 일본인 학생 한 사람이 투터로서 나에게 배당이 되었다.
서서히 일본에 적응이 되어가면서, 그리고 일본인들로부터 경제학을 배워나가면서, 나는 내가 접해보지 못한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온몸이 전율을 일으킬 정도였다.
나를 그토록 몸소리치게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급속도로 거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 시작한 거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메이지 유신 시절 제국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었던 학교였다. 그런데, 그곳에 좌파들이 득실거렸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다녔던 학과는 좌파의 요람이었다. 그들이 나의 가슴과 머릿속에 주입시켰던 단어 하나 하나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단풍 처럼 내 몸을 빨갛게 물들여갔다. 나의 심장은 떨렸고 머리는 한 없이 맑아졌다.
그들은 진정 나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나는 학자의 길을 갈 수 없었다. 내가 배웠던 것은 그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내가 다녔던 모교에는 그런 강좌는 도저히 개설 할 수도 없었다. 한국의 경제학 원론은 내 머리속에서 전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지방의 작은 대학 출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시간강사로 연명을 하다가 때려치웠다.
나를 그토록 흥분시켰던 그 많은 지식을 내 고국에서는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나는 죽고싶을 정도였다. 수 많은 방황 끝에 다시는 먹물들 곁에 얼씬 거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장삿꾼이 되기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나와의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노무현 때문에 나도 모르게 뛰어든 정당원 생활이 과거 내가 배웠던 그 날카로운 언어가 비수처럼 내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전율이 다시금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으로부터 실망하고 민노당 그리고 지금의 정당을 거치면서 그 전율은 실망감으로 점점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묵호항에서 대게와 생선을 파는 상인으로서 와 있는 것이다. 한국 좌파 정치에 대한 실망감은 나로 하여금 상인으로서 더욱 철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의 일본여행이었던 것이다.
신간센을 타면서 결심한 것은 바로, 동경에서의 전율은 다시는 없을 거라는 거였다. 아내와 다시 동경에 돌아와 학교의 은행나무 길을 다시 걸으면서, 나는 몸소리치던 과거의 떨림이 다시 돌아올까봐 몹시도 불안했다. 나는, 그것이 찾아올까 내 몸과 마음을 애써 꼭 꼭 눌러야 했다.
그리고, 동경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이제 진정한 생선장수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내 젊음의 모든 것이었던 그 떨림을 이제 다시는 내 몸과 마음 어디에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마 그렇게 말해놓고 내 눈가를 살짝 적셨을 것이다.
내 아내를 아프게 했던 그 열정을 아내의 앞에서 삭히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는 들키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아내가 알아차릴까봐 내 눈은 창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런 내 손을 살짝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내는 과거의 순진한 시골 아가씨가 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