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전에 별세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박여해 선조 생애 복원을 향한
힘찬 도전이 어느 새 2개월이 넘었다.
목표를 향하여 갈길이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희망을 가지고 힘찬
도약의 날개를 활짝 펴련다.
이 과제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문암이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 결단을 내린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해결할 것이다.
2개월동안 연구한 것 중에서 핵심 포인트로 생각하는 3대 과제를 공개한다.
첫째. 감찰 제수에 관한 문제이다.
감찰은 정6품의 요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역할은 오늘날 검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직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한 경력이 없는 박여해 선조가 과연 어떤 경위로 이러한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그 스토리가 궁금하나 확실히 규명된 것은 없고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여해 선조의 사촌형으로서 대사헌을 두차례나 역임한 평도공
박은 선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결정적인 기록이 도출된 것은 아니나
그 시기는 언제인지 명확치 않으나 평도공의 천거에 의해 당시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정랑에 의해 등용된 것으로 추정하나 아직은 팩트가 아니다.
둘째. 강릉김문의 사위라는 점이다.
본가의 족보에 감찰이라는 벼슬명만 나와 있는 상황에서 박여해 선조의 배위가
강릉김문의 딸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장인이 고려말에 충신이었던 운암 김윤남 선생이시고 그 친동생 일노정
김양남 선생 역시 충신이신데 당시 부친이 귀양을 가신 어려운 환경속에서
박여해 선조가 정확히 언제 어떤 경위로 이러한 충신 가문의 첫째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내력이 대단히 궁금하다.
덧붙이면 며칠전에 강릉김씨대종회에 직접 전화를 걸어 김윤남 선생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관련 칼럼을 전송한 이후 현재 회신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강릉김씨대종회에서 박여해 선조가 사위가 된 내력의 진실을 밝혀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셋째. 박여해 선조의 묘소에 관한 사항이다.
박여해 선조가 정확히 언제 별세하였는지 그 연도는 모르나 일단 조선초기에
별세한 것으로 본다.
필자는 박여해 선조가 탄생지인 개성에서 거주하시다가 감찰의 직분을 수행하신
이후 어느 시기에 황해도 지역으로 은거한 것으로 추정한다.
족보에 박여해 선조의 아들과 손자의 성명만 나와 있고 아무런 기록이 없다.
비로소 증손대에 이르러 실직이 아닌 명예직인 양온령동정 벼슬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주목할 점은 묘소가 평산 월고리로 나와 있는데 평산이라 함은 황해도
평산군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와 관련해 필자는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매장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은데 사촌형인 평도공이 1422년 별세한 이후 매장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상과 같이 박여해 선조의 생애 복원에 있어서 앞으로 규명해야 할 3대 연구과제를
소개하였다.
2024년 7월 11일(목)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