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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당신을 깨닫는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본문 속으로)
吾日 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오일 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주자는 세 가지를 반성했던 증자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로 반성하는 것은 성인이 할 일은 아니다. 증자가 만년에 덕으로 나아가는 공부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 것을 다 제거하지 못했다.”
증자가 부족하기에 그랬다는 것인데, 다산은 이렇게 반론을 펼친다. “탕임금이 여섯 가지 폐습으로써 스스로 책망했지만 어찌 흠이 되는 찌꺼기를 다 제거하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성인조차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해왔다.”
어른은 흠 없이 살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경계하며 부족함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다산은 증자 역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성찰했던 것이지, 결코 만년에 흠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_〈위대함은 조금씩 쌓여 더디게 이뤄진다〉 중에서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다산은 쉰에 이르러 깨달은 경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덕에 통달한 경지이고, 이순은 또 그 위의 단계에 있는데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모두 성인을 추앙하기만 하고 그의 성취에 대해서는 멀게만 여기며 다가가지 못한다. 성인은 본래부터 높은 존재라서 나는 도무지 그렇게 될 수 없다며서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인이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은 그가 도달했다면 나 역시 할 수 있다는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스스로를 높일 줄도 모르면서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길이란 없다.
_〈어른스러움이란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 중에서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문효 자왈 부모유기질지우
다산은 효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과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두 아들을 가르친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네 어머니를 섬길 때 세세한 것부터 유의해야 효도하는 첩경을 얻을 수 있다. 《예기》 〈내칙〉 편에는 음식에 관한 소소한 절목이 많다. 옛 성인들은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가르침을 시작하지 않았다. 새벽에 문안드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필 때 하인에게 시키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나무를 가져다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여라. 잠시 연기를 쐬는 수고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의 기쁜 마음은 맛있는 술을 드신 것과 같을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감정은 사랑이다. 효란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닿고자 하는 정성이다.
_〈효란 태어나 처음 받은 마음을 닮으려는 노력이다〉 중에서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사람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선함과 악함 사이를 오간다. 이처럼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한, 평범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함께하는 당신이 아닌 바로 나의 마음이 선과 악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위는 온통 배울 만한 것으로 가득하다. 공부는 평생을 두고 하는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한 공부는 바로 일상에서 시작된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접하는 일, 접하는 사람이 모두 배움의 대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셋이서 길을 간다. 그 셋 중의 하나는 바로 ‘나’다. 내가 함께하는 이에게 물들 듯 나 또한 함께하는 이를 물들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스승이 된다.
_〈일상의 모든 것이 나의 스승이다〉 중에서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 여불가구 종오소호
다산은 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상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니 바삐 움직이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누에가 알에서 깰 즈음엔 뽕잎이 먼저 움트고, 제비가 알에서 나오면 날벌레가 들에 가득한 것이 하늘의 이치다. 그런데 굳이 깊은 근심과 지나친 염려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혹시나 남들 다 잡는 기회를 놓칠까봐 두려워하는가?
그러니 말지어다. 벌써부터 내년을 꾀하지만 어찌 그때까지 내가 살지를 알 수 있겠는가. 어린 자식을 어루만지며 증손 대의 미래까지 설계하지만 앞으로를 살아낼 그들이 어디 생각 없는 바보들이겠는가?”
_〈돈은 쓰는 것이지 돈에 쓰여서는 안 된다〉 중에서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 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번지문인 자왈 애인 문지 자왈 지인 번지미달 자왈 거직조저왕 능사왕자직 번지퇴 견자하왈 향야오견어부자이문지 자왈 거직조저왕 능사왕자직 하위야 자하왈 부재 언호 순유천하 선어중 거고요 불인자원의 탕유천하 선어중 거이윤 불인자원의
다산은 《회남자》 를 인용해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知란 사람을 아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 두 가지가 성립되어 있지 않으면 비록 밝은 지혜와 민첩한 기교를 갖추고, 근면과 노력을 다하더라도 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하고, 나아가 사귄다는 것은 내 삶의 품격을 지키는 것이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삶,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사람의 학문인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란 결국 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다.
_〈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에서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자로왈 환공살공자규 소홀사지 관중불사 왈 미인호 자왈 환공구합제후 불이병거 관중지력야 여기인 여기인
관중은 명예롭게 죽는 대신 태산과 같이 무거운 삶을 살아내며 제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다산 역시 고난의 극한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까닭은 이루고 싶던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그 공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다산은 제자 정수칠에게 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종신토록 근심 없이 지내다가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어버리고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삶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삶을 일컬어 삶이라고 한다면, 그 삶이란 금수와 다를 바 없다.”
모든 죽음에는 무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죽음도 살아내는 것보다 무겁지는 않다.
_〈태산보다 무거운 삶을 살아내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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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다산에 오십에 이르러 새로 쓴 오래된 지혜.
나를 이해하고, 타인에게 경청하기 위한 깊은 질문, 《논어》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_ 《논어》 〈술이〉
ㆍ주자는 이렇게 《논어》를 해석했다
“세 사람이 함께하면 반드시 그중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 선한 사람을 본받고 악한 사람은 살펴보며 나를 고쳐나간다면 함께 길을 가는 두 사람은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ㆍ다산은 이렇게 《논어》를 다시 해석했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니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지 않다. 삼인행이란 함께하는 자가 적음을, ‘스승이 있다’는 말은 모두에게는 배울 만한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함께하는 모두가 나의 스승이 되듯 나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물들 것만 우려할 뿐, 자신 또한 타인을 물들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 《논어》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을 엮은 경전으로, 연속된 흐름으로 전개되지 않기에 맥락을 살피기가 쉽지 않아 글 자체만 봐서는 온전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서삼경 가운데 특히 읽기 까다로우며, 가장 많은 해석이 붙고 가장 많은 이견이 갈리는 경전이다. 동시에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공자의 명언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일상의 대화로 구성되었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온고지신溫故知新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구절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논어》가 동양 고전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까닭은 이처럼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특성에서 비롯된다. 경전을 안내하는 이가 맥락을 잡아주면서 행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주석서라도 남송의 주자와 에도 막부의 오규 소라이, 조선 후기의 정약용이 정리한 논어 해설서들은 각각 전혀 다른 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논어》는 막 성인이 된 청년부터 인생을 정리하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변곡점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이 곁에 두고 참고하는 책이 되었다. 동양 고전에 익숙한 독자들이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그리고 오십대에 이르기까지 삶이 전환될 때마다 반복해서 《논어》를 읽고 또 그때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까닭이다.
+다산은 이렇게 《논어》를 다르게 읽었다
“《논어》를 하나의 책으로 엮다 보니 기력이 점점 쇠약해져 몇 달 사이에 빠진 이가 셋입니다. 그만 붓을 꺾고 세월이나 보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제게 세월을 허락해 글을 마칠 수 있게 해준다면 제법 볼 만한 책이 나올 것입니다.” _다산이 둘째형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많은 《논어》 해설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주자가 정리한 《논어집주》다. 《논어집주》는 오늘까지도 《논어》를 읽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며, 현재 서점가에서 유통되는 《논어》 관련 도서의 상당수 또한 주자의 해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오십에 이르러 이러한 《논어집주》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논어》를 다시 읽으며 훈고학적 주해인 고주와 성리학적 주해인 신주는 물론 이토 진사이와 같은 일본 유학자들의 주장까지 아우르는 등 당대 모든 학설을 망라했다. 그리고 《논어고금주》를 집필하면서 과감하게 주자의 심성론적 인설과는 다른 의견을 냈다.
이를테면 《논어》 〈공야장〉에 실린 고사를 두고 공안국이나 정현과 같은 유학자들 대부분은 자로의 우둔함을 공자가 타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다산은 이와 같은 통설에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공자는 자로를 가리켜 천승의 나라에서 조세와 부역을 다스릴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찌 공자가 자신을 따르는 제자를 함부로 희롱했겠는가. 공자는 자로에게 도를 구하고자 하는 열성과 목숨을 버려서까지 스승을 좇으려는 마음을 봤다. 다만 그 의리에 현실이 따르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9rJ04bOtCc
《논어》에서 가장 유명한 ‘삼우행’ 고사에서도 다산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주자는 이를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한 사람에게서는 선함을 배우고, 한 사람에게서는 악함을 보며 스스로를 살피니 모두가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풀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해설이다.
그러나 다산은 “사람들은 자신이 물들 것만 우려할 뿐 자신 또한 타인을 물들일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함께하는 이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듯 나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고 주장하며,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주자의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다.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이러한 다산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친절하게 정리한 결과다. 《심경》(다산의 마지막 공부)과 《소학》(다산의 마지막 습관)에 이어 다산이 새롭게 해석한 고전을 소개해온 베스트셀러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동양 텍스트인 《논어》를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중심으로 재배열해 그 가운데에서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65구절을 선정, 소개했다.
+다산이 오십에 이르러 마주한 질문, “어떻게 나를 사랑할 것인가?”
“당연히 육경六經이나 여러 성현의 글이야 모두 읽어야 하겠지만, 특히 《논어》만은 네가 평생을 두고 거듭 읽기를 바란다.” _다산이 제자 윤혜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논어고금주》를 집필하기 전 다산은 삶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귀양살이는 끝을 기약할 수 없었고 뼈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산은 자신의 생이 혹시 헛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싸우며 《논어》를 다시 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에 이르러 번민한 세월과 끝내 절망을 딛고 일어선 깨달음을 《논어고금주》로 정리했다.
다산이 자신의 둘째형 정약전에게 밝혔다시피 이가 셋이나 빠지고 뼈에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논어》를 새삼 재해석한 까닭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논어고금주》는 일찍이 정점에 올랐다가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해 골방에 갇힌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자 자신의 삶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며, 그럼에도 모든 것을 감내하고 끝내 살아남아 내일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책에서는 《논어고금주》를 바탕으로 삼아 그가 남긴 다양한 글들을 교차해가며 다산이 오십에 이르러 평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더듬어간다. 그렇게 복원한 다산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바로 실천에 대한 강조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랑(서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산의 마지막 질문》에서 정리한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나를 사랑할 것인가?” 하늘의 말을 알고 싶다면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어》처럼 산다는 것
《논어》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에서 시작해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로 끝난다. 다시 말해 《논어》의 맥락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소소한 일상의 지점에서 출발해 높은 이치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소소한 일상이란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가까운 사람을 아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루하루다. 도덕 교과서에서도 따분하다고 타박할 만한 가르침이지만, 평생을 바치고도 따라잡기 힘든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일상에 담긴 위대함을 강조했던 다산은 《논어》를 평생 곁에 두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가 《목민심서》나 《마괴회통》과 같은 책을 집필하며 이웃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 이유도, 말년에 《소학》이라는 유학의 첫 경전과 《심경》이라는 마지막 경전을 나란히 읽으며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부터 사랑하라고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남은 나와 다르지 않다’는 《논어》의 서恕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코로나19 이후 초개인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고립과 갈등이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저마다 하나쯤 운영하고 있는 SNS를 들여다보면 소통이라는 복잡다단한 과정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그저 공감을 구걸하는 독백이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시절에서 인지상정이 구태로 취급받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비극을 목도하며 그 고통을 그저 하나의 이슈로 소비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다.
‘인간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바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때다. 이렇게 무례한 세상에 다산이 마지막까지 붙잡은 ‘마지막 질문’,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고, 남을 포기하지 않는 만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논어고금주》의 가르침은 큰 울림이 될 수 있을 것이다.